(11)
한 공기의 사랑이다. 그의 고통을 완화시켜주는 ‘한 공기’의 사랑을 할 수 있느냐가 문제다. 한 공기를 넘어서는 모든 사랑은 “정말 사랑했다!”라는 나의 정신 승리는 가능하게 하지만,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그에게
온갖 고통을 가하는 끔찍한 일이다. 심지어 나를 사랑하면 세 공기든 네 공기든 한 가마든 먹어야 한다고
그를 압박한다. 세 공기, 네 공기의 밥을 지은 자신의 수고를
내세우면서 말이다. “당신을 위한 나의 수고를 헛되게 하지 말아줘. 그러면
나는 정말 슬플 거야.” 어느새 그의 배고픔과 포만감보다 나의 수고가 핵심이 되고 만다. 한 공기를 넘어서는 사랑은 이제 사랑의 궤도를 이탈해 공회전한다. 사랑하는
사람을 더 이상 애지중지(愛之重之)하지 않게 되니까. 애지중지하는 마음은 그를 아끼고 소중히 여기는 것, 한마디로 그를
내 뜻대로 부리지 않겠다는 마음이다.
(28)
과거 독재 시절, 시대에 걸맞게 학교에는 ‘사랑의 매’라는 것이 있었다. 학생들을
미워해서 때리는 것이 아니라 사랑해서 때린다는 체벌의 논리다. 그러나 생각해보자. 선생님이 학생들의 종아리에 매를 대는 순간 아이들의 고통이 느껴진다면, 과연
선생님은 계속 매를 댈 수 있을까. 한 대 두 대 때리면 때릴수록 아이들의 아픔이 느껴진다면, 어떻게 아이들을 계속 때릴 수 있을까? 아내에 대한 사랑, 남편에 대한 사랑, 아이에 대한 사랑, 후배에 대한 사랑 등 타인에 대한 사랑은 고통에 대한 감수성이 없다면 아무것도 아니다. 사랑은 타인의 고통을 완화시키려는, 다시 말해 타인의 행복을 증진시키려는
의지이자 감정이기 때문이다.
(31)
사실 모든 생명체의 고통을 느끼고 그것들을 사랑한다면 아무것도 먹어서는 안 된다. 정확히 말하면 먹기가 힘들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될까? 자기 자신을 죽이게 된다. 아무것도 먹지 않으면 우리는 배고픔의
고통을 견디다 굶어 죽을 테니 말이다. 식물도, 토끼도, 사슴도, 독수리도, 늑대도, 그리도 인간도 생명체다. 식물을 살리려고 토끼를 죽여서도 안 된다. 토끼를 살리려고 늑대나 인간을 죽여서도 안 된다. 엄청난 딜레마가
아닐 수 없다. 사슴과 늑대가 동시에 배고픔의 고통을 토로한다면 싯다르타는 어떻게 해야 할까? 난감한 일이다. 어쩌면 이 딜레마,
이 난감함, 이 애절함, 그리고 이 간절함 속에서
산다는 것, 바로 이것이 ‘일체개고’의 진정한 의미, 혹은 ‘고통’의 기원이 아닐까.
(34-35)
내가 옆 사람에게 해줄 수 있는 최선은 최소한 그 사람이 나 때문에 더 힘들지 않게 하는 일이다. 존재한다는 이유로 누군가에게 고통을 가중시킬 수밖에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고통을 최소화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다. 메를로-퐁티의 ‘최소 폭력’의 논리가 고통에 대한 감수성에 기초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가
아닐까. 세계가 모두 고통 속에 있기 때문에 우리는 고통을 완전히 제거할 수는 없지만, 고통을 완화시킬 수는 있다. 결국 죽을 때까지 우리는 걷지 힘든
길을 걸어가야만 한다. 나의 고통과 타자의 고통을 동시에 최소화할 수 있는 어떤 균형을 매번 찾아내야만
하는 길, 균형을 찾는다 해도 그것이 진정한 균형인지 여전히 의문이 남는 그런 개운치 않은 길 말이다.
(41)
진짜 사랑이 열정적인, 그리고 자발적인 노동을 낳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그렇기에 사랑하는 사람이 배부르면, 사랑하는 사람이 지인과 행복한
담소를 나누면, 사랑하는 사람이 건강하면, 사랑하는 사람이
힘차게 잘 걸으면, 사랑하는 사람이 명랑하면, 우리는 고맙기만
하다. 진짜 사랑할 때에는 질투라는 감정이 상대적으로 약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내가 아니더라도 다른 누군가가 내가 사랑하는 사람의 고통을 완화시켜주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중요한 것은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의 고통이 완화되었는지 여부뿐이기 때문이다.
잊지 말자. 질투심이 강해질수록 우리의 사랑은 진짜가 아니라 가짜가 되어간다는 사실을.
(66-67)
놀이의 삶에는 근사한 표어가 주어진다.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라는 표어이다. 반면 노동의 삶에도 그에 어울리는 표어가 있다. ‘우리에게 내일은 있다’라는 표어다. 이는 연애 시절과 결혼 생활을 구분하는 기준이 될 수 있다. 연애
시절에 우리는 마치 내일이 없는 것처럼 상대방에게 몰입한다. 가장 좋은 음식을 사주고 값비싼 선물도
아끼지 않는다. 오늘 그 사람을 기쁘게 해주지 않으면 내일은 다시 만날 수 없을지 모른다는 조바심 때문이다. 그런데 결혼을 하면 오늘의 행복을 내일로 하염없이 미루기 쉽다. 대출을
갚아야 하고 아이들 양육비도 생각해야 하니, 맛있는 스파게티나 여행 등 오늘의 행복을 속절없이 미루게
된다. 오늘이 수단이 되고 내일이 목적이 되는 순간, 오늘은
수단이기 때문에 중요하지 않다고 여기는 것이다.
(83-84)
이렇게 현재의 삶을 수단으로 만들고 내일의 삶을 목적으로 만들면, 오늘의
행복은 계속 내일로 미루어지고 만다. 이런 식으로 반복하다 삶의 끝자락에 이르게 되면 지금까지 한 번도
제대로 행복한 적이 없다는 후회가 밀려올 것이다. 물론 이런 후회는 금방 사라질 수도 있다. 죽음 이후의 피안이나 이데아 세계, 혹은 기독교의 천국이 바로 눈앞에
있다고 마지막 기대를 걸 수도 있으니 말이다. 이처럼 미래의 행복을 위해 지금은 행복하지 않아도 된다는
잘못된 생각, “오늘보다 내일이 더 중요하다”는 기만적인
생각은 충만하고 아름다운 현재의 삶을 좀먹는 독약과도 같아. 니체가 “신은
죽었다”고 말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신은 영원을 꿈꾸면서
무상을 직면하지 못하게 만드는 헛된 사유의 상징이기 때문이다.
(114-115)
모든 존재는 영원하거나 불멸하지도 않고 동시에 순간적이거나 찰나적인 것도 아니다. 바로 이것이 ‘제법’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 즉 ‘실상(實相)’이다. 결국 나
자신을 포함한 모든 존재는 ‘영원과 불멸이라는 한 극단과 ‘순간과
찰나라는 또 다른 극단’ 사이 어딘가에 존재한다. 바로 이것이
싯다르타가 말한 중도(中道)의 의미다. <가전연경>에서 싯다르타는 산스크리트어로는 카차야나, 한문으로는 가전연(迦旃延)이라는
이름의 제자에게 말한다.
“’모든 것은 존재한다.’ 카차야나야! 이것은 하나의 극단이다. ‘모든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카차야나야! 이것도 또한 하나의 극단이다. 카차야나야! 두 극단에 치우치지 않고 여래는 중도로써 하나의 가르침을
설한다!” 모든 것은 존재한다’는 극단은 모든 존재에는 변화에도
불구하고 변하지 않는 영원한 자성이 있다는 입장이다. 불교에서는 이런 입장을 ‘상견(常見)’이라고 부른다. ‘모든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또 다른 극단은 모든 존재가 어떤
연속성도 없이 끝없이 변화한다는 입장이다. ‘단견(斷見)’이라고 불리는 입장이다.
(130)
먼저 영원할 듯한 것에서 작은 변화를 찾으려고 노력해야 한다. 영원하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 별로 달라질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 그
대상이 무엇이든 우리가 그 대상에 관심과 애정을 기울일 가능성은 줄어드는 말이다. 아내와의 관계나 남편과의
관계, 혹은 친구와의 관계가 예전 같다고 생각하지 말고, 그
미세한 변화를 포착하려고 노력하라. 돈독하던 관계에서도 조금씩 균열이 생기는 것이 보일 수도 있다. 어제와 다름없이 보이는 부모님, 아내, 남편, 아이의 얼굴에서 변화를 읽으려고 노력하라. 작은 주름 하나, 깊은 한숨 하나,
작은 새치 하나, 작은 어둠 하나를 찾아낼 수도 있으니 말이다.
(151-152)
카페에서 스마트폰을 잃어버린 남자의 사례를 통해 ‘번뇌’와 ‘망집’이 그 정체를
드러낸다. 카페에서 스마트폰을 발견하지 못하자 그의 마음은 복잡하기만 하다. ‘스마트폰을 카페 의자에 둔 것이 맞을까?’ ‘스마트폰을 카페 점원이나
손님들 중 누군가 가져간 것은 아닐까?’ 등등, 번뇌란 이런
것이다. 스마트폰의 없음을 경험하자, 그의 뇌리에는 사라진
스마트폰이 떠나지를 않는다. 그는 허탈해하며 카페에서 나와 생각할지도 모른다. ‘이미 없어진 스마트폰이야. 없는 건 없는 거지. 잊자!’ 하지만 스마트폰의 없음을 받아들이려 할수록 없어진 스마트폰에
대한 기억은 더 강해질 뿐이다. ‘잊자, 잊아’라는 생각이 오히려 사라진 스마트폰을 떠오르게 하니 말이다. 바로
‘망집’이다.
(176)
성숙을 확인할 수 있는 시금석은 단순하다. 성숙하면 자신이 강해지고
자신이 많은 것을 가지게 되는 게 아니라 사람들을 아끼게 되고 사랑하게 되고 아파하게 된다. 간혹 아이들은
엄마가 아파서 밥을 못 해주면 짜증을 내는 경우가 있다. 그런데 어느 날 아이는 엄마가 아플 때 혼자
라면을 끓여 먹는다. 바로 이때 아이는 나이와 상관없이 성숙했다고 할 수 있다. 아이의 마음이 타인의 아픔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고요한 물처럼 작동한 것이다.
비록 아이지만, 이 순간 아이는 부처다. 자신의
배고픔이 아니라 엄마의 아픔에 사무쳐 있기 때문이다.
(197)
조금 도식적일 수 있지만 편의상 정리해보자면, 생성을 설명하는 데
세 가지 방법이 있다. 첫째로 다양한 연들이 존재를 만든다는 ‘연기의
논리’, 둘째로 하나의 원인과 많은 조건들이라는 ‘인연의
논리’, 그리고 셋째로 하나의 원인과 하나의 결과라는 ‘인과의
논리’가 그것이다. 이렇게 놓고 보면 인과의 논리는 인연의
논리로부터, 혹은 저 멀리 연기의 논리로부터 단순화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세 가지 논리는 지적으로만 이해해서는 안 된다. 어느 논리에 따라
살아가느냐에 의해 우리의 삶은, 우리의 미래는, 그리고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의 운명은 완전히 달라진다. 육아나 교육의 사례로 세 가지 논리의 상이한 효과를 생각해보자.
(216)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하거나 혹은 사랑하는 사람이 죽으면, 우리는 세상이
끝난 것처럼 생각하기 쉽다. 그래서 너무나 쉽게 만성화된 슬픔, 고질적인
우울 속에 갇히게 된다. 행복과 기쁨이 더 이상 없을 것만 같다. 그러나
“앞으로 앞으로” 삶을 밀어붙이면 알게 된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사람이 부재하기에 다른 사람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을. 하나의
인연이 끝나야 다른 사람과 새로운 인연을 만들 수 있지 않은가? 처음에는 이별이 절벽으로 떨어지는 수평선처럼
보인다. 그렇지만 “앞으로 앞으로” 걸어나가면, “앞으로 앞으로” 배를
수평선 쪽으로 밀어붙이면, “온 세상 어린이를 다 만나” 새로운
인연을 맺을 수 있다.
(227-228)
‘매달린 절벽’은 사실
놓아도 아무런 문제가 없는데도 놓으면 죽을 것 같다고 믿는 집착의 대상일 뿐이다. ‘매달린 절벽’은 사람마다 다르다. 젊음일 수도 있고, 건강일 수도 있고, 가족일 수도 있고, 돈일 수도 있고, 집일 수도 있고,
아이일 수도 있다. 아니면 사랑일 수도 있고, 우정일
수도 있고, 타인의 인정일 수도 있다. 아이를 잡지 않으면
천 길 낭떠러지로 떨어질 것 같은 사람에게 아이에게 그렇게 집착하지 말라고 쉽게 말할 수는 없다. 그렇게
권고하는 사람도 돌아보면 돈이나 건강을 매달린 절벽처럼 붙잡고 집착할 수도 있다. 또한 ‘매달린 절벽’에서 손을 떼지 못하는 사람의 손을 억지로 떼어내려 해서도
안 된다. 그럴수록 그 사람은 더 억세게, 저 집요하게 매달린
절벽을 잡으려 할 테니 말이다.
(241)
독일 철학자 슬로터다이크(1947~)는 <냉소적 이성 비판>이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한다. “’노’라고 말할 수 있는 성숙한 능력은 ‘예스’의 유일하게 타당한 배경이 되며, 이 둘을 통해 진정한 자유의 윤관이 비로소 뚜렷해진다.” “예스”가 힘이 있으려면 “노”라고
외쳤던 경험들이 있어야 한다. 그래서 “예스”는 굴종의 표현이 아니라 자유의 표현일 수 있다. 한마디로 말해 “노”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만이 진정으로 “예스”라고 말할 수 있다는 이야기다.
(244)
멈출 수 있어야, 혹은 그만둘 수 있어야 자유다. 멈출 수 있는 사람만이 자기 뜻대로 움직일 수 있고, 관계를 단절할
수 있는 사람만이 자기 뜻대로 관계를 만들 수 있다. “노!”라고
할 수 있어야 하고, 멈출 수 있어야 하고, 그만둘 수 있어야
한다. 바로 이럴 때 우리의 일거수일투족이 당당해지고, 그만큼
우리는 주인으로서 삶을 영위하게 된다. 멈출 수 있는 자유를 가슴에 품을 때, 그가 누구이든 상대방은 우리를 사랑하지는 않더라도 함부로 대하지 않는다. 가슴에
사표를 품고 있는 직원에게 사장이 어떻게 갑질을 할 수 있을까? 캐리어를 들고 집을 떠날 수 있는 아내에게
남편이 어떻게 폭력을 행사할 수 있을까? 학위쯤이야 우습게 여기는 학생에게 교수가 어떻게 사역을 시킬
수 있을까?
(249)
몸과 마음 사이의 거리가 점점 줄어들면 우리는 주인으로서 삶을 영위하게 되는 것이고, 반대로 몸과 마음 사이의 거리가 점점 벌어지면 주인이 아니라 노예의 삶으로 떨어지고 있는 것이다.
(301)
무엇이든 애지중지하는 대상이 있다는 것은 정말 행복한 일이다. 어쨌든
애지중지하는 대상은 그 존재만으로 우리 삶을 기쁨으로 물들이고, 우리 삶에 의미를 제공하며, 우리 삶을 활기차게 한다. 어떤 것도 아끼는 것이 없다고 생각해봐라. 삶은 짙은 잿빛으로 우울하게 변할 것이고, 그러한 삶을 사는 우리는
심각한 우울과 무기력에 빠지고 말 것이다. 문제는 애지중지하는 대상이 인간일 때 발생한다. 타인을 아낀다는 것은 그를 대신해 그의 수고를, 그의 고통을, 그리고 그의 노동을 감내하며 기뻐하고 행복해하는 일이다. 누군가의
짐을 짊어지고 심지어 그 사람을 업으면서도 미소가 얼굴에서 떠나지 않는다면, 우리는 아끼는 사람을 최소한
한 명 가진 셈이다.
(303)
아끼는 사람은 그 존재만으로 나를 행복하게 만들었던 소중한 사람이다. 아끼는
사람이 무언가 해주기를 원하는 순간, 아낌의 관계는 무너지고 그 자리에 너저분한 거래 관계가 들어선다. “내가 이만큼 했으면 너도 이만큼 해야 하는 것 아니야?” 이제
상대방이 나의 애지중지하는 모든 행동을 일종의 부채감으로 받아들이게 되면서, 아낌의 관계는 막장을 향해
치닫고 만다. 이런 비극을 비하는 방법은 간단하다. 아끼는
사람을 반려견이나 반려묘처럼 보는 연습을 지속적으로 하는 것이다. 물을 가져다 달라고, 밥을 해달라고, 쓰레기 봉투를 버려달라고, 청소를 해달라고 할 수도 없다. 말귀를 알아듣지 못할 뿐만 아니라, 알아듣는다 해도 쫑긋한 귀와 해맑은 눈, 그리고 네 다리를 가지고
무엇을 하겠는가?
(327)
우리 각자에게 아끼는 대상이 어머니일 수도, 아버지일 수도, 아내일 수도, 남편일 수도, 아일
수도, 친구일 수도, 반려견일 수도, 반려묘일 수도, 아니면 화초일 수도 있다. 아끼는 대상이 무엇이든 우리는 그것의 행복에 있어 ‘한 공기의 연’일 뿐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자. 농부의 물꼬 트기처럼 이 ‘한 공기의 연’을 우리가 채우지 못하면, 아끼는 사람의 삶은 불행에 빠진다. 그러니 좋은 공기, 맛있는 음식, 쾌적한 잠자리, 따뜻한
태양, 싱그러운 바람, 아름다운 음악, 근사한 영화, 멋진 식당, 의사와
간호사, 친구들 등등이 아끼는 사람에게 건강한 연이 되어줄 때, 우리는
충분히 쉬어야 한다. 잘 쉬고 맛있는 것을 먹고 잠도 잘 자야 한다.
우리게는 ‘한 공기의 연’을 채워야 할 때가
찾아오기 때문이다..
(333)
아이를 키우는 부모는 아이를 아끼기 때문에 노심초사하며 아이가 잘되기를 바란다.
그러나 영어 학원에 보내고 태권도를 가르치고 수영 강습도 받게 하고 피아노도 가르치고 방학마다 여행을 가고 캠핑도 간다. 문제는 엄마가 ‘아이가 원하는 것’을
하는 것이 아니라 ‘아이가 원해야만 한다고 자신이 생각하는 것’, 혹은
‘언젠가 아이가 원할 수도 있다고 자신이 믿는 것’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대부분의 경우 아이는 엄청난 스트레스에 시달리게 되고,
웃음과 미소를 점점 잃어가게 될 것이다. 반대로 간혹 “우리는
아이를 방임해서 키워요”라고 당당하게 말하는 엄마도 있다. 김을
매지 않아 잡초들에 둘러싸인 벼처럼, 아이는 경쟁적 교육 환경, 왕따를
시키는 차별적 문화, 자본주의적 소비문화에 둘러싸여 시름시름 앓게 될 것이다. 결국 엄마는 아이가 잘되기를 바라되 지나치게 관여해서는 안 되고, 관여하지
않되 완전히 잊어서는 안 된다. 아이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완전히 알 때까지, 혹은 엄마가 아이가 원하는 것을 알 때까지, ‘망’과 ‘조장’ 사이 혹은
‘물망’과 ‘물조장’ 사이 그 어딘가를 지키며 균형을 잡아야 한다. 아끼는 일은 정말 힘든 일이다.
(342-343)
사랑도 삶도 행복도 그리고 자유도 ‘이만하면’이라는 말로 가늠할 수 있는 양적인 문제가 아니라 질적인 문제다. 사랑했거나
사랑하지 않았거나, 제대로 살았거나 그러지 못했거나, 행복했거나
행복하지 않았거나, 자유롭거나 자유롭지 않았거나, 이제 ‘이만하면’이라는 말을 우리 삶의 사전에서 지우도록 하자. 사랑도 삶도 행복도 그리고 자유도 남들의 시선이나 평가, 재산이나
소비수준과는 무관하게 전적으로 질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잘 사랑하려면,
제래도 살려면, 정말 행복하려면, 그리고 자유로우려면, 우리는 ‘이만하면’이라는
전체를 붙인 너저분한 자기만족과 정신 승리에 함몰되어서는 안 된다. 차라리 사랑도 삶도 행복도 그리고
자유도 아직까지 제대로 영위하지 못했다고, 아직도 부족하다고 이야기하자. 그래야 우리에게는 제대로 사랑하고, 제대로 살아가고, 제대로 행복하고, 제대로 자유로울 수 있는 희망이 생길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