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4)
815 해방 당시 조선에 관한 한 루즈벨트는 스탈린보다 무지했고, 미국 정부는 아시아보다 유럽에 관심 있었고, 태평양 사령관 맥아더는
조선보다는 일본에 몰두했으며, 군정책임자인 하지 중장은 한국엔 처음이었다. 하지는 어느 정파가 자신의 우군인지, 이 난제를 푸는 데 도움이
될 정치지도자가 누구인지 헷갈렸다. 미군정이 남로당을 불법화시키는 한편 이승만, 김구 같은 극우로도 복잡한 한국 문제를 풀기 어렵다는 판단에 도달한 끝에 그 중간 지대의 여운형과 김규식을
자신의 파트너로 찍었을 때 여운형이 암살돼버렸다.
분할점령이 영구 분단으로 흘러가는 와중에 분단을 피할 수 있는 선택의 기회들이 주어졌지만 불발의 역사에 그치고 만 것은
남북을 통틀어 그것을 현실화시킬 능력을 가진 정치지도자가 없었다는 얘기이기도 했다. 다만 가장 근접한
인물이라면 그건 여운형이었을 것이다.
(265)
“이광수 선생의 뒤는 홍명희 부수상께서 수습하셨다 합니다.”
두 사람의 우정은 시작과 끝이 수미일관(首尾一貫)했다. 한일합방 날 자결한 금산 군수의 아들로 유서 깊은 양반 가문 출신인 홍명희가 지지리도 가난한 집 아들로 양친
모두 콜레라로 잃고 열한 살에 고아가 된 이광수. 일본 유학 시절 이래 이광수는 홍명희에게 친구이자
친형처럼 의지했고 번갈아가며 동아일보 편집국장을 했고 이광수가 어마어마한 작품을 양산하는 동안 홍명희는 <임꺽정> 하나를 썼고 이광수가 친일노선에 발가벗고 나선 일제 말기를 홍명희는 은둔과 침묵으로 보냈고 서로 인생관과
정치관이 엇갈려 꽤 긴 시간을 멀찍이 바라보는 사이였지만 결국 이광수의 최후를 홍명희가 거두었다. 이광수는
잘나갈 때도 노심초사 불행해 보였고 홍명희는 풍족할 때나 궁핍할 때나 느긋한 한량이었다. 정숙은 춘원에
대해 늘 안간힘 쓰며 최선을 다하는 천재로 기억했다. 소설 쓸 때도,
친일할 때도, 그랬다.
(282)
세죽에겐 함흥에서 어린 시절부터 늘 그랬다. 사는 건 고달프고 힘든 일이었다. 겨울이면 춥고 배고프고 여름이면 덥고 배고팠다. 게다가 고향도 조국도
잃고 남편을 두 번 잃고 아들도 잃고 낯선 나라에서 유형수로 홀로 늙어가다니, 상상도 못 한 불운이
끝없이 밀려왔다. 남편이 감옥에서 고문당해 미치면서 마음자리가 한 번 깨지고 난 이후론 밑 빠진 독처럼
행복이 고이질 않았다. 사랑이 두려웠고 희망은 슬펐다. 단야와의
결혼생활도 언제 깨질지 몰라 늘 불안했고 결과는 걱정한 대로였다. 어쩌면 그녀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건 신혼의 훈정동 시절인지 모른다. 좁은 방에서 버글버글한 객식구들에 시달리며 끼니 걱정하고 밥해대느라
손이 마를 날 없었던 시절을 생각하자 세죽은 슬며시 웃음이 나면서 마음이 따스해졌다.
(294)
불굴의 박헌영은 평양에 온 이래 김일성의 오른편에 앉아 점점 순한 양이 되어갔다. 남자는
김일성 하나로 족했고 그 주위에서 모든 왕년의 혁혁한 혁명가들이 조금씩 거세되었다. 박헌영 역시 현실정치의
매너를 배우던 끝에 굴종에 이르는가 싶었다. 하지만 지금 한때 불굴의 청년혁명가였던 자의 자존심이 다시
일어서고 있었다. 헌영의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귓전을 때리는 동안 정숙은 상해에서 경성, 평양에 이르는 지난 세월이 한꺼번에 되살아오고 박헌영과 김일성 두 남자에 대한 애증이 뒤엉키면서 두통이 밀려왔다. 헌영이 칼을 뽑아들었는데 그것이 역사 논문 쓰는 것으로 그치지는 않을 것이다.
정숙은 그다음에 기다리는 것이 무엇일지 궁금했다. 모종의 군사행동을 예비해둔 것일까. 아니, 작전이 이미 시작된 건지도 몰랐다.
(297-298)
그녀는 적이 당황스러웠다. 내 나이 오십, 귀찮은
것이 많아지는 나이로구나. 아니, 사람에 대한, 사람들 집단에 대한 기대가 사라져버린 것 아닌가. 누가 잡든 권력의
속성은 똑같다는 생각, 어느 개인이 더 현명하든 덜 현명하든 집단이 되면 어리석을 수밖에 없다는 생각, 그렇다면 권력을 포식한 집단이 권력에 굶주린 집단보다 낫지 않을까. 굶주린
이리떼보다 배부른 사자 떼가 낫지 않을까. 이건 가장 저급하고 비겁한 보수주의자의 사고방식인데 자신의
어느 결에 이토록 회의주의자가 되었던가, 하고 정숙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사람에 대한 믿음, 역사에 대한 믿음, 한때 태산도 옮길 것 같았던 그 믿음이 어디로 가버린 것인가.
(347)
수상에게 버림받았다고 생각하는 순간, 모든 욕망과 집착이 믿을 수 없을 만치
순식간에 사라졌다. 대신 그동안 참고 참았던 분노와 환멸이 치밀어 올랐다. 지하감옥의 시멘트 바닥에 내동댕이쳐진 뒤에야 정숙은 자신이 그동안 얼마나 막대한 분노를 참고 견뎠는지를 깨달았다. 평양은 참을 수 없는 것투성이였다. 김일성은 점점 몹쓸 인간이 돼가고
있고 근사하고 점잖은 사람은 씨가 말라가는 대신 아첨꾼과 모사꾼들만 살아남았다. 마르크스는 혁명가들이야말로
고귀하고 선량한 인간의 전형이라 했지만 진짜 그런가. 만경대 조성사업 따위는 다 뭐며 역사를 멋대로
뜯어고친다는 게 가당키나 한 일인가. 불행한 조국에 생명의 불을 가져다줄 프로메테우스들이 동족의 손에
총살당하거나 시골에서 돼지나 치고 있구나. 실컷 분노하고 화를 내자 묵은 체증이 가시는 느낌이었다.
(349-350)
다시 이틀 동안 정숙은 혼자였다. 생각을 좀 더 깊이 할 수밖에 없는 시간이었다. 고독은 추억을 낳고 추억은 그리움을 낳고 그리움은 증오를 낳고 증오는 인간이며 이념이며 혁명이며 정치며 그
모든 것에 회의를 낳았다. 회의가 휘젓고 지나가자 모든 투명하던 것들이 탁해졌다. 하지만 회색의 거품 아래 침몰해가는 것들 속에서 그녀는 마르크스 엥겔스와 레닌을 건져냈다. 그것이 인류의 절반을 노예 상태에서 구해낸 거 아닌가. 중국, 소련은 50년 전만 해도 황제와 차르의 사회였고 모두 마르크스를
지렛대로 봉건군주제를 뛰어넘었다. 북조선도 출발은 나쁘지 않았다. 토지개혁도
근사했지. 마르크스레닌주의자로서 그 사상 위에 정부를 세우는 일을 해보았으니 행운이었다. 권력이라는 것도 누려보았다. 그녀는 남자들이 그것에 목을 매는 이유를
알 것 같다.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들 팔자를 고쳐줄 수 있는 힘, 싫어하는
사람을 나락에 떨어뜨릴 수 있는 힘이 권력이다. 권력은 권력자로 하여금 그것이 그대로 자신의 인격이라
믿게 만든다. 또 주위에 모여드는 사람들이 자신을 진심으로 좋아하고 있다고 믿게 만든다. 권력은 자아도취에 빠지게 만들고 그 마력이란 때로 목숨과 바꿀 만큼 강력하다.
그녀도 권력의 맛을 보았다. 하지만 이상한 게 묻으면 언제든 버릴 수 있다. 그녀는 땅에 떨어져서 흙이 묻어 있는 것도, 똥이 묻어 있는 것도, 그게 권력이라면 털지도 않고 주워 먹는 남자들을 많이 보았다.
(371-372)
1848년 팸플릿에서 시작된 19세기의
이론은 20세기에 세계적 규모의 이데올로기투쟁으로 전개됐지만 세기가 바뀌기 전에 종료되었다. 한반도 북쪽의 소비에트 실험은 일찍이 공산주의 트랙에서 튕겨나와 해괴한 파시즘으로 가버렸다. 21세기로 넘어와서 마르크스주의는 체제나 혁명이나 이념의 문제가 아니라 철학과 태도와 정책의 문제로 남았다.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대경합의 시대에 자본주의는 공산주의에서 많은 것을 배웠다. 마르크스
이론과 레닌의 혁명은 그들을 추종한 공산주의 세계를 행복하게 만드는 대신 반대편의 자본주의의 세계를 더 인간답게 만드는 데 결정적인 도움을 주었다. 그것은 하나의 역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