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66)

그런 날 말구 내 말을 듣소. 물론 상대적이긴 하지만 그건 자본론도, 과학적공산주의 건설 이론도 아닌 바로 프롤레타리아독재 이론이오. 왜냐하면 자본주의의 무기가 자본이라면 우리가 사는 사회주의의 무기는 프롤레타리아독재이기 때문이오. 프롤레타리아독재! 그게 어떤 것인지를 알기에 이 도시 사람들은 누구나가 토영삼굴을 따르며 살고 있는 거요. 그런데 당신은 피살자 유가족이라는 그 밑자리 하나만을 믿구 너무도 천진스레 살고 있소. 일단 그 독재에 걸리는 날엔 피살자 유가족이 다 뭐겠소. 당신은 전설 속의 어비는 알아도 현실 속의 어비는 너무도 모르며 살고 있단 말이오.”

 

(76)

면상이 온통 털 속에 묻힌 마르크스와 매섭게 입을 다문 김일성의 초상화였다. 그 두 붉은 유령은 지금 한경희에게 분명 이렇게 호령하고 있었다.

나가라믄 찍소리 말구 나갈 거지 무슨 허튼 생각이야. 이게 내 도시지 네 도신 줄 아니?”

 

(76~77)

한경희는 돌연 우들우들 온몸이 떨려왔다. 9월의 밤 냉기 때문만이 아니었다. 이 땅에서 삶을 부지하자면 벌써부터 알고 있어야 했을 무섭고도 무서운 그것이 불시에 가슴에 콱 실려와서였다. 도시에 널려 있던 100만의 인원을 사십오 분 안에 광장으로 끌어들였던 그것이 무엇이었던지도 이제야 깨달을 수가 있었다. 만약 남편이 지금 또 당신은 저기 저 마르크스의 모든 이론 중에서 가장 위대한 이론이 뭔지 아오?”하고 물어준다면 한경희는 보다 학술적으로, 그리고 보다 진지하고도 뼈저리게 그에 대한 대답을 해줄 것이었다.

 

(108)

전영일의 새끼손가락에 제 손가락을 걸며 ---!” 외쳐댔던 그 신념, 그 기대가 한갓 신기루에 불과한 것이었음을 깨닫게 되었을 때, 그 실망과 회오의 괴로움을 이 세상 무엇에 비길 수 있었으랴! 하여 누구를 탓할 수도 원망할 수도 없는 뼈저린 상실의 아픔을 안고 벙어리 냉가슴 앓듯 혼자 부대껴야 했을 설용수가 아닌가! 그러고 보면 결국 도끼산장이라는 말은 안전부 선로공들이나 느티나무에 가해진 폭언인 것이 아니라 자가당착에 빠진 설용수라는 인간의 자기규탄의 부르짖음이었던 것이다.

 

(144)

당신이 놔주고 간 이튿날 아침에 보니 저것들이 다시 날아오지 않았겠어요. 그래 조롱을 다시 달아주었더니 저렇게…”

길들었구나!... 불쌍한 것들!”

명철은 한마디 한마디 씹어 뱉듯 중얼거렸다.

삐쫑삐쫑 삐쪼르릉…” 종달새가 다시 우짖었다. 마치 명철에게 당신도 길들었기에 그렇게 그냥 돌아왔죠하고 반박이라도 하듯이

그래, 나 역시 지척도 천리 밖으로 살아야 하는 조롱 속의 짐승인가보다! 조롱 속의 짐승!’

 

(178)

옛날 어느 곳에 열 길 울타리를 빽빽이 둘러친 한 동산이 있었다우. 거기선 늙은 마귀가 수천의 종들을 거느리구 있었구요. 한데 놀라운 건 그 동산의 열 길 울타리 안에선 언제나 웃음소리밖에 들려나오는 것이 없었다는 거였어요. 사시절 하하호호 하고 말이지요. 그건 바로 늙은 마귀가 자기의 종들한테 다 온통 웃는 마술을 걸어놓았기 때문이었다나요. 왜 그런 마술을 걸어놓았냐구요? 그야 물론 종들을 학대하는 자기 죄행을 가리우구 우리 동산 사람들은 이렇게 행복합니다 하는 속임수를 쓰기 위해서였지요. 그러자고 다른 동산 사람들이 넘볼 수도, 드나들 수도 없게 열 길 울타리두 쳤던 거구요. 그러니 글쎄 생각 좀 해보시우. 그 동산 사람들의 입에서는 어디가 아프거나 슬퍼서 엉엉 울어도 그것이 하하호호 하는 웃음소리만 되어 나왔으니 세상에 그처럼 악한 마술이 어디 있고 그처럼 무시무시한 동산이 또 어디 있겠수.”

 

(197-198)

조희 첫 시기는 몰랐으나 하루이틀 지나면서부터 사람들은 자기들의 조문회가 은밀히 기록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자 하루에 한 번 조문은 누구나 지키는 철칙으로 되었을뿐더러 아침 점심 저녁 삼시 조문하는 사람들까지 생겨나기 시작했다. 시내 인구 50여만 명이 시당으로부터 인민학교에 이르기까지 단위별로 꾸려진 수백 개의 조의장들에게 그렇게 꽃을 꺾어 들이다 보니 꽃밭의 꽃이 남아날 리 만무했다. 학교와 직장들에서는 인원을 뽑아 야생화 채취를 내보내는 수밖에 없었다. 자기 단위에 하루 동안 필요한 만큼의 꽃을 따들여야 하는 것이 꽃 채취에 동원된 사람들의 하루 책임량이었다. 아이 어른들이 산과 들판을 헤매고 다녔다. 그런데 계절이 계절이다 보니 여기저기서 사고가 빈번했다. 아내의 근심이 공연한 것은 아니었다. 그래도 홍영표의 입에서는 그냥 모진 말만 튀어나왔다.

 

(207)

글쎄 제가 부모님 앞에서 다짐했으니 그와 결혼할 생각까지는 안 합니다. 그러나 이성 간이 아닌 인간적인 사랑만은 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난 솔직히 말해 모든 면에서 뛰어난 처녀인 그가 기를 못 펴고 사는 데 대한 동정심을 금할 수가 없어요. 그의 아버지의 죄라는 게 뭡니까. 김정일이 후처를 한 사실을 말했다는 그 하나뿐이 아닙니까.”

 

(209)
이런 쓰레기나 가지고 물어들이고 받아들이며 사람들을 억압, 통제하려 드는 자들이 말입니다. 진실한 생활이란 자유로운 곳에만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억압, 통제하는 곳일수록 연극이 많아지기 마련이구요. 얼마나 처참해요. 지금 저 조의장에선 벌써 석 달째나 배급을 못 타고 굶주리는 사람들이 애도의 눈물을 흘리고 있어요. 꽃을 꺾으려고 헤매다 독사에게 물려 죽은 어린아이의 어머니가 애도의 눈물을 흘리고 있단 말입니다. 그래 그들의 눈물이 진실이란 말입니까. ? 백성들을 이렇게 지어낸 눈물까지 흘릴 줄 아는 명배우들로 만들어버린 이 현실이 무섭지도 않은가 말입니다.”

 

(201)

그게 아버지의 정 소원이라면! 하지만 백 번을 쏘아도 죽이지 못할 겁니다. 인간다운 세상에서 살아보고 싶은 저의 욕망만은!”

 

(261)

왜 자진해서 벽돌집 시녀가 됐던가 말야!”

간판에 속아서였지, 나처럼. 속엔 독재의 칼을 품고도 겉으로만 평등이요, 민주주의요, 역사의 주인이요, 지상낙원 건설이요 하는 허울 좋은 그 간판에 속아서 말야.”

 

(270)

북한식 사회주의 경제제도의 문제점, 출신 성분으로 구분되는 인류 최악의 연좌제로 신음하는 북한 주민의 대변자로 자신의 역할을 설정한 반디는, 북한 주민들이 실제 겪고 있는 고통이지만 어느 누구에게도 하소연할 수 없는 아픈 사연들을 하나하나 수집하여 자신의 작품 속에 녹여두었습니다. 각종 사연들이 담긴 소문들과 실제 벌어졌던 사실들을 기초하여 모든 것을 자신의 작품들에 담기 시작하였습니다. - <출간의 부처>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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