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하기는 절대다수의 시민이 일방적인 선전과 프로파간다에 오랫동안 노출돼온 사회에서 핵에 대한 시민적 상식이 선진적
탈핵국가들의 그것과 같을 수는 없다 더욱이 척박한 여건에서 자기희생적으로 활동해온 소수의 탈핵운동가들의 노력만으로 사회 전체의 해묵은 사고습관을
깨트리는 것은 애당초 그 한계가 명백했다. 또 생각해보면, 지금
우리사회의 핵에 관한 상식이 아직도 낮은 수준에 머물러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단지 왜곡된 교육과 사이비
언론 때문만이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즉, 끊임없이 인간의
이기심과 물질적 욕망을 자극하는 경제성장 이데올로기의 압력 밑에서 우리 자신이 보다 지혜로운 인간으로 성장할 수 있는 기회가 계속 박탈당해왔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26)
한미동맹과 관련해서 트럼프의 등장 이후, 미국은 한국에 삼중의 도전을
제기하고 있다. 첫 번째는 북한에 대한 미국 단독의 예방전쟁 위협에서 한미FTA 재협상 요구까지, 기존의 동맹의 규범을 완전히 해체, 파괴하는 트럼프의 미국 우선주의이다. 두 번째는 기존의 한미동맹을
관리해온 워싱턴의 관료적, 패권적 요구로, 그 내용은 차기
주한 미국대사로 내정되어 있다는 빅터 차의 4월 상원 군사위원회 증언에서 잘 나타난다. 그는 진보적인 문재인 정부의 출현이 미국에 도전이기는 하지만 (1) 문재인
정부 취임 이후 북한이 도발할 것이 확실하고, 그에 따른 한미동맹의 강화 필요 때문에 문재인 정부가
독자적으로 남북 관계를 진전시킬 가능성은 적고, (2)중국이 사드보복을 지속할 것이기 때문에, 사드배치를 강행하면 이를 계기를 아예 한국의 대중국 경제의존이 줄어 한중 간에 경제적 이격이 발행할 긍정적인
전망도 가능하다고 증언했다. 즉, 북한의 도발을 배경으로
한국을 묶어두겠다는 것이다. 세 번째는, 키신저 등이 미국
패권의 거시적이고 장기적인 보존을 위해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빅딜을 추진하는 것으로, 이 경우에는 주한미군
철수 등 현재 한미동맹의 근간이 전면적으로 해체될 수도 있다.
(53)
여기에는 의도적으로 아시아의 위기와 긴장을 조성하려는 의사가 국제관계 속에 존재했다고 생각하는 것 말고는 설명할
도리가 없다. 그동안 많은 나라들의 관련 분야 기업들은 합법/불법적으로
무기시스템, 부품, 관련 기기, 소재-말하자면 창을 수출해서 거대한 이익을 얻어왔던 것이다. 그리고 이번에는 이지스 시스템, 사드 등, 차례차례로 거액의 요격 미사일들과 여러 종류의 통상무기-방패를 이
지역 국가들의 정부에 떠넘기고 팔아넘기려 하고 있다. 이러한 움직임의 배후에 미국, 영국, 프랑스, 러시아, 중국 등 국가를 초월한 국제 군산정복합체라고 해야 할 세력이 대두하고 있음을 느끼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 아닐까.
(64)
피어슨과 튜더는 이 같은 변화가 북한사회 내부의 불평등을 심화하고 있는 현상들도 포착한다. “도시 외곽에서는 농부들이 여전히 소를 끌고 밭을 간다. 병사들은
묽은 죽으로 연명한다. 심지어 평양시내의 보다 일반적인 주거지역에서도 수십만 시민이 빈곤 속에서 살아간다. 평균적인 북한의 생활수준은 어림잡아 1970년대보다 더 나빠진 상태다.” 그러나 사적 거래가 광범위하게 이뤄지고, 신흥 상업 계급이 떠오르는
것 등은 분명히 이전에 없었던 변화다. 출신성분에 따라 사회적인 지위가 결정되는 등의 전통은 여전하긴
하지만, 과거에 견줘 그 힘을 크게 잃었다. 이제 북한을
움직이는 주 원동력 가운데 하나는 ‘돈’이다. “북한의 새로운 시스템은 불공정하며, 다윈의 적자생존 방식이다. 하지만 적어도 평균적인 시민에게 삶의 주체라는 느낌과, 미미하기는
하나 스스로 생계를 이어갈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과연 이것을 자본주의가 아니면 무엇이라 불러야
할까.
(153)
작가 ‘반디’는 1900년대 초 북한의 경제난과 1990년대 중반 ‘고난의 행군’을 겪으면서 민중의 노력이 배반당하는 현실을 목도했다. 1900년대 초는 구소련의 해체로 인한 사회주의체제의 위기, 연이은
자연재해, 미국이 주도한 경제봉쇄로 북한이 극심한 체제위기를 맞이했던 때였다. ‘반디’는 내부자의 시선으로 북한이 직면했던 경제위기가 권위주의적
정치체제, 민중을 배제하는 억압적 신분질서, 민중생활을 억압하는
과도한 통제에 있었음을 증언하고 있다. ‘반디’는 내부자의
시선으로 1990년대 초, 중분 북한의 상황을 그려냈다. 그는 민중의 성실한 노력이 배반당하는 북한의 현실에 절망했고, 아래로부터의
세계관으로 북한 체제의 변화와 민주주의를 열망했다. <고발>은
북한에서 보내온 문학적 탄원서이다. 북한 민중의 고통에 대한 증언이며,
그 고통의 발화점이 민중을 배반하는 정치체제에 있음을 보여준다.
(204)
물론 어느 나라 어느 민족이든 체계적인 신화 서술의 욕망을 숨기지 않아. 특히
여러 부족을 통일했을 때라든가 나라가 외침을 받아 존망이 위태로울 때, 이런 체계화의 욕망은 자연스레
더 커지기 마련이다. 이때 문자와 기록이 구전을 압도하는 현상도 나타나지. 한번 문자로 기록된 것은 신화든 역사든 이제 물리기도 쉽지 않아. 그
경우, 구체적인 역사 현실과 충돌을 빚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도 인정해야 해. 가령 <고사기>의
경우 새로 정권을 잡은 야마토의 신화는 ‘정사’로 우뚝 서지만, 그렇지 못한 씨족은 자신들의 신화마저 포기할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이지. 문제는
신화가 체계적이면 체계적일수록 무언가 더 어두운 그늘을 감추고 있기 십상이라는 거야. ‘국사의 기원’으로서 건국신화는 가령 동아시아의 경우에도 일반적이지만, 거칠게 말하자면
일본만큼은 신화가 신화로 머물지 않고 아예 역사 시기 전체를 관통하려는 욕망을 지닌 게 아닌가 싶기도 해. 이게
무슨 뜻일지 생각해봐. ‘신화=역사’가 되고, 그것도 ‘만세일계의
신화=역사’가 된다면?
(207)
일본의 힘은 바로 이렇게 모든 것을 ‘바꾸는 힘’에 있다는 거야. 이 점은 어쩌면 네가 이미 일본에서 생활하면서 나보다
더 많이 실감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문자도, 철학도, 종교도 마찬가지야. 예컨대 일본의 도시에서는 시내 어디서나 ‘절’을 볼 수 있지. 처음에는
그래서 어, 이상하다, 일본은 불교 대신 신도의 나라라지
않았나, 고개를 갸우뚱하게 되지. 나 또한 그랬고, 일본의 불교를 말할 때에는 반드시 신불습합이라는 관점을 전제하지 않으면 안 돼. 어떤 학자는 두 개의 이질적인 종교가 천여 년간이나 공존하면서 새로운 신 관념을 만들어낸 건 세계 종교사에
유례를 찾지 어려운 현상이라고도 하지. 그걸 일본인의 관용성 때문이라고 보는 데에는 조금 주저하게 되지만, 아무튼 우리가 돌아다닐 때 교토에서도 절 같은 신사, 신사 같은
절은 얼마든지 볼 수 있었잖아. 거기서 ‘본지’와 ‘수적’을 굳이 구분하는
건 의미도 없고 가능하지도 않은 일일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