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

, 조금 이상하긴 해. , 어쩌겠는가, 내가 자꾸 말하는 걸 또 반복하자면 이렇다. “그래도 괜찮다. 이미 정해져 버린 진리를 알려주려고 내가 수업을 하고 있는 게 아니고, 내가 해야 할 건 아이들에게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니까.”

 

(76)

중요한 것은 바로 이것이다. 배움의 동기로 가장 중요한 것은 상도 아니고, 학습 뒤에 주는 눈깔사탕도 아닌 것이다. 배움 그 자체이고, 새로운 것을 알게 된다는 기회 그 자체다. 새로운 앎을 향한 이 마음을 우리가 짓밟거나 억누르지만 않으면 된다. 또한 아이들이 우리를 둘러싼 세계에 대해 흥미를 잃어가지 않도록 다양한 환경을 충분히 만들어주는 것이 꼭 필요하다.

 

(78)

그 어떤 수학 동아리도, 그 어떤 퍼즐도, 그 어떤 지능 개발 게임도 없었다. 아이를 안고, 뽀뽀하고, 포대기로 싸주면서, 항상 돌보았을 뿐이고 그게 그들이 할 수 있었던 전부였다. 결국은, 적어도 어느 특정한 연령대에서는 부모의 따뜻한 손길과 정서적인 유대가 아이의 발달에서, 특이 아이의 지능 발달에서 다른 어떤 형태의 활동이나 교육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부모, 여러분, 이 사실을 절대 잊지 마시라!

 

(101)

나는 ?”라고 물었는데 아이들은 그건 왜 그렇게 되었지?”를 설명하라는 뜻으로 받아들인 듯싶다. 소나무가 자작나무보다 크다는 것은 논리적 결과인데, 논리는 무시하고 왜 큰지를 설명하려고 한 것이다.

 

(107)

내 단점은, 이런 행동을 보고 어린아이니까 그러려니 하지 못하고 어른이 그러기라도 한 것처럼 반응한다는 점이다. ‘아이가 아니라, 아이의 행동을 야단쳐라라는 원칙을 머리로는 이해하지만 실제로는 행동이 따라주지 못한다. 더욱 심각한 건, 스스로 기분이 상해버린다는 것과, 전체 분위기가 아이들의 유치한 투정보다는 나의 이런 단점에 훨씬 더 많은 영향을 받는다는 것이다.

 

(174)

그렇다, 증명. 수학 전체를 통틀어 핵심적인 개념. 나는 이렇게까지 말하고 싶다. 증명은 다른 모든 학문과 수학을 구별하는 개념이라고. 무엇이 증명이고, 무엇이 증명이 아닌가에 대한 이해는 수백 년에 걸쳐 진화했다. 증명의 현대적인 형태는 고작해야 19세기에서 20세기로 넘어오는 길목에서 모습을 갖추었다. 지금은 수학 교사라면 누가라도 받아들이지 않을 명제들을 지난 시대 수학자들은 충분히 받아들일 만하다고 여겼다. 위대했던 수학자들조차 말이다. 여기서 우리는 매우 이상한 현상에 직면하게 된다. 완전히 딴 세상말 같은 추상적인 논의들로 어떻게 명제를 증명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일까?

 

(182)

나의 기본 원칙 중 한 가지를 독자들은 이미 알고 있을 것이다. ‘어떤 경우라도 아이들에게 내 관점을 강요해서는 안 된다는 원칙 말이다. 그러나 그 원칙에는 더 중요한 원칙이 포함되어 있다. ‘나의 원칙만을 맹목적으로 따르지 말자는 원칙. 아마도 지금이 유연성을 보일 적당한 때일지 모른다.

 

(283)

(역주)러시아식 이름 부르기. 러시아 문학책을 읽을 때 껄끄럽게 하는 요소 중 하나다. 러시아 사람 이름은 셋으로 구성되어 있다. ‘자기 이름-아버지 이름(부칭)-이라는 구조다. 부칭에는 아들일 경우, 아버지 이름 다음에 주로 비치로 끝나게 해서 붙이고, 딸일 경우 브나로 해서 붙인다. 우리말로 바꾸면, ‘~비치‘~의 아들’ ‘~브나‘~의 딸로 해석할 수 있다.

 

(286)

그러나 누가 옳았는지 말하지 않을 거야. 왜냐하면 나한테 중요한 건 너희들이 정답을 알고 있다는 게 아니라 너희 스스로 생각하기를 익혔으면 하는 거니까. 오늘도 그래. 너희들 가운데 한 명은 첫째 질문에 정답을 말했고 또 한 사람은 둘째 질문에 올바로 답했어. 그러나 누가 어땠다는 건 말 안 할 거야.

 

(383)

우리가 뫼비우스의 띠에 이르렀을 때 줴냐가 나를 깜짝 놀라게 했다. 우리가 언젠가 수업에서 그걸 함께 붙여보았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그건 2년도 넘은 일이다.  1981 2월 아니었던가! 줴냐 다음으로 뻬짜와 지마도 기억해냈다. 여기서 다음과 같은 결론을 얻었다. 우리의 수업에서 한 어떤 것도 헛되이 사라지지 않는다. 설령 이해가 안 되었던 것이라도 필요하면 언젠가 떠오를 수 있다.

 

(398)

- 그런데 여기서 명심할 게 하나 있어. 만약 어떤 사람이 항상 모든 걸 옳게 말한다고 해서 이게 가장 똑똑하다는 것까지 의미하지는 않아.

- ?

- 왜냐하면 똑똑한 사람은 옳은 것만 말하는 게 아니라 뻔하지 않은것들, 그러니까 그 자체로 자명하지 않은 것을 말하는 사람이니까. 그 사람이 그러면서 가끔 실수도 한다면 그는 어쨌든 똑똑한 사람인 거야. 현명하지 않은 사람은, 말하지 않아도 다 아는 것, 꼭 말하지 않아도 되는 걸 말하지. 또 그 사람이 항상 모든 걸 옳게 말한다 해도 그러기 위해 머리를 많이 써야 하는 건 아니니까.

이에 대해 지마가 질문했다.

- 아빠, 왜 아빠는 뭐든 교훈을 항상 말해?

 

(403)

그러나 훨씬 중요한 건 다른 것이다. 지마가 문제를 기억했고 그걸 오래도록 생각했고 마침내 풀이까지 이르렀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지마가 천재적이고 눈에 띌 만큼 놀라운 재능으로 반짝거리는 아이라는 인상을 준 게 아니다. 그게 아니라 지마에게는 의심할 바 없이 값진 소질이 있다. 그것은 이해되지 않은 것들에 대해 심각하게 오랫동안 생각해보고 완강하게 밀어붙여 체계를 잡는다는 것이다.

 

(515)

그림을 잘 그렸는지에 대해서 여기서 따로 말은 않겠다. 어쨌든 표현력은 하루하루 늘어갔다. 목도리를 펄럭펄럭 날리며 말을 타고 달리는 사람이건, 피아노를 치는 연주자건, 풀밭에 있는 소들이건, 표현하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는 듯했다. 우리 부부 또는 우리가 아는 사람 누구건 그림 속 이야기 주인공이 되면 비슷한 얼굴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516)

그러나 핵심은 역시 계속되는 에너지, 쉼 없이 그리고 나중에 또 그리려는 요구였다. 내버려두었는데도 줴냐 자신에게서 비롯된 그런 기적을 우리는 보았고, 그래서 방해하지 않으려고 발끝으로 살금살금 걸어 다녔다. 앞으로 어떻게 될지 우리는 몰랐다. 그림을 향한 갈증이 평생 계속될 것인 것 아니면 시작했을 때처럼 어느 날 갑자기 아름다웠던한순간으로 사라져버릴 것인지. 그때 우리는 무엇을 해야 했을까? 아이에게 하루에 최소한 반 시간씩 그림을 그리도록 해야했을까? 자연이 내린 경이로운 현상 앞에서 우리가 얼마나 무력할 수 있는지 그저 놀랍기만 했다 .그 경이로운 현상이 의심할 바 없이 우리 앞에 있었던 것이다.

 

(520)

그래서 나는 또다시 독자들에게 말씀드린다. “제발 부탁이오니 잊지 말아주십시오. 아이들에겐 수많은 면이 있습니다. 나는 여기 그중 아주 작은 한 면에 대해서만 쓴다는 것을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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