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많은 사람들이 이런 식으로 기후 변화를 부정한다. 기후 변화의 현실을 보고도, 금세 관심을 딴 데로 돌려 외면해 버리는 것이다. 혹은 농담으로 넘겨 버리기도 한다. <세계 종말의 조짐이 계속 늘고 있군!>이 역시 외면의 한 방법이다.

기후 변화의 현실을 보고도, 인간은 영리한 동물이니 대기 중의 탄소를 안전하게 흡수하는 기적의 기술이나 태양열을 차단하는 마법과 같은 방법을 발명해 낼 거라고 스스로를 다독이기도 한다. 내가 취재 과정에서 확인했던 이 같은 행동 역시 외면의 한 방법이다.

 

(33)

물론 우리는 섭씨 4도나 뜨거워진 세계의 모습을 정확히 예측할 수 없다. 하지만 아무리 낙관적인 시나리오를 따르더라도 그 모습은 처참할 것이다. 기온이 섭씨 4도나 상승하면 2100년에는 해수면이 1미터, 어쩌면 2미터까지 상승할 것이고 그다음 세기에도 추가적인 해수면 상승이 일어날 것이다. 몰디브와 투발루 같은 몇몇 섬나라들이 물에 잠기고 에콰도르와 브라질, 그리고 미국 북동부와 캘리포니아, 남아시아와 동남아시아의 해안 지역 상당 부분이 침수될 것이다. 보스턴, 뉴욕, 로스앤젤레스 광역권, 밴쿠버, 런던, 뭄바이, 홍콩, 상하이 등의 대도시들이 역시 침수 위기에 놓이게 된다.

 

(56)

자연이 말을 하는데 인간이 귀를 기울이지 않고 있다는 걸 생각하면 애석할 따름이다.

-       빅토르 위고

 

(75)

바로 여기에 내가 생각하는 불편한 진실이 있다. 나는 이 강경한 이데올로그들이 정치 분야에서 행동하는 <온난화주의자들>보다 기후 변화의 중요성을 훨씬 정확하게 꿰뚫고 있다고 생각한다. 온난화주의자들은 여전히 기후 변화 대응이 점진적이며 고통을 초래하지 않을 것이라고, 따라서 화석 연료 기업은 물론이고 어느 누구와도 전쟁을 치를 필요는 없다는 생각을 고수한다. 다음 논의로 넘어가기 전에 내 입장을 분명히 밝혀 두겠다. 세계의 기후 과학자들 중 97퍼센트의 의견에 따르면, 기후 과학과 관련한 허틀랜드의 판단은 완전히 엉터리다. 하지만 과학적으로 입증된 사실들이 정치와 경제에 엄청난 파급력을 미친다는 대목, 그리고 인간의 에너지 소비 형태는 물론 이윤 추구를 목적으로 하는 자유주의 경제의 근본 논리에도 급진적인 변화를 요구한다는 대목에서는 이들의 판단이 정확하다 .부정론자들은 여러 가지 세부적인 내용을 왜곡하고 있지만(기후 변화론은 공산주의의 음모가 아니다. 곧 다루겠지만, 권위적인 국가 사회주의 체제는 끔찍한 환경 파괴를 자행하며 극단적인 자원 채취 활동을 강행했다.), 재앙을 피하기 위해 요구되는 변화의 범위와 강도를 돈 문제와 관련시켜 따지는 한, 이들의 판단은 정확하다.

 

(78)

과학자들 사이에서도 비슷한 편향이 확인된다. 적극적인 기후 과학자들의 경우 인간이 기후 변화의 주원이라고 보는 비율이 97퍼센트인 반면에, 경제 지질학자들(화석 연료 채취 산업의 상업적 이용을 옹호하는 지질 연구에 종사하는 과학자들) 사이에서는 47퍼센트에 불과하다. 한마디로, 진실이 지나치게 높은 정서적, 지적, 금전적 대가를 요구할 때 사람들은 부정론으로 기울기 쉽다. <어떤 사실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사실 덕분에 봉급을 받고 있는 사람에게 그 사실을 이해시키기란 어렵다> 업튼 싱클레어의 유명한 말이다.

 

(86)

환경주의자들은 오래전부터 기후 변화가 빈부를 가리지 않고 모두에게 영향을 미치는 거대한 평형 장치로 기능하면서 모든 사람을 단합시키는 계기가 될 거라고 주장해 왔다. 그러나 작금의 상황을 종합해 보면, 기후 변화는 정반대의 기능을 하고 있다. 시간이 갈수록 우리 사회는 가진 자와 못 가진 자로 양분된다. 결국 부자들은 풍족한 돈을 이용해서 횡포한 날씨로부터 자신을 보호할 소소한 대비책을 마련해 가겠지만, 가난한 사람들은 갈수록 재해 대비 능력을 잃어 가는 국가의 처분만 기다려야 할 것이다.

 

(119)

이처럼 급속한 변화가 진행되는 동안, 기후 협상과 무역 협상은 마치 평행선을 그리듯 비슷한 속도로 진행되어 2~3년 사이에 각 분야에서 중요한 협의에 도달했단. 1992년 각국 정부는 리우에서 열린 제1 UN 지구 정상 회의에 참석하여 향후 기후 협상의 토대가 될 <UN 기후 변화 협약 UNFCCC>에 서명했다. 같은 해 북미 자유 무역 협정이 체결되어 2년 뒤부터 효력이 발생했다. 1994년에는 세계 무역을 관장하게 될 기구 설립에 대한 협상이 타결되었고, 그 이듬해 세계 무역 기구가 탄생했다. 1997, 최초로 온실가스 감축 목표를 설정한 <교토 의정서>가 채택되었다. 2001년에는 중국이 세계 무역 기구의 정회원으로 가입하면서 1980년대에 시작된 무역 자유화의 흐름은 최고조를 맞았다.

 

(161)

1970년대 초부터 말까지, 세계 전역에서 가뭄과 홍수, 극단적인 기온 변화, 산불, 폭풍 등 656건의 자연재해가 발생했다. 반면에 2000년에서 2010년까지 10년 사이에 자연재해 건수를 무려 다섯 배나 많은 3,654 건으로 급증했다. 30년 사이에 이 정도면 그야말로 폭발적인 증가다. 단언컨대, 이 모든 재해를 <초래한 원인>은 지구 온난화다. 기후 과학자 마이클 만은 어느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기후 변화 때문에 특정한 형태의 극단적인 자연재해의 발생 빈도가 높아질 것이라는 사실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과학계는 가뭄, 강력한 허리케인, 초강력 태풍, 심각한 고온 현상의 빈번한 발생을 비롯해 여러 종류의 극단적인 기상 현상이 닥치리라 예측하고 있다.>

 

(195)

독일 정부는 전국적 규모의 장기 계획을 시행하면서 에너지 시장에서 수익을 올리는 업체들을 의도적으로 배제하고 (재생 에너지 발전을 우선시하고 원자력 발전소를 단계적으로 폐쇄하는 방식으로), 가격 통제를 실시하며(명백한 시장 개입이다), 잠재적인 재생 에너지 생산자들이 규모에 상관없이 시장에 진입할 수 있도록 공정한 환경을 조성하고 있다. 이런 이데올로기적인 이탈에도 불구하고(혹은 그 덕분에) 독일은 세계에서 가장 빠른 전환을 진행하고 있다. 독일 좌파당의 경제 정책 전문가로 에너지 전환에 열정적으로 몰두하고 있는 한스 티에 따르면, <거의 모든 예상치를 뛰어넘는 급격한 전환이 이루어지고 있다. 전환 속도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빠르다>.

 

(203)

원자력 발전소 시설은 오히려 재생 에너지로의 전환 과정을 지연시킬 수 있다. 사안의 긴박함을 고려하면 원자력 에너지보다 재생 에너지를 늘리는 것이 훨씬 빠르고 경제적이다. 제이콥슨은 이렇게 말한다. <원자력은 결코 탄소 배출로부터 자유로운 에너지가 아니다. 원자력 지지자들이 무슨 말로 현혹하더라도 이는 틀림없는 사실이다. 우라늄을 채굴하고 운송하고 정련하는 과정, 게다가 원자력 발전소를 건설하는 과정에는 엄청난 양의 화석 연료가 투입된다. 원자력 발전소 한 기를 설계하고 건설하는 데 소요되는 10~19년 동안에는 줄곧 더러운 화석 연료를 생산한 전력이 소모될 것이다. (이에 비해 풍력 발전소 건설에는 일반적으로 2~5년이 소요된다.> 그는 이렇게 결론짓는다. <진정한 재생 에너지 시대를 준비한다는 명목으로 원자력 시대의 도래를 기다리고 또 기다리는 사이 빙하와 극지의 만년설은 계속 녹아내릴 것이다. 게다가 지구의 모든 사람 앞에는 더 위험한 미래가 펼쳐질 것이다.>

 

(255)

선조들이 그랬던 것처럼, 우리는 지구와 우리 신체를 구성하는 요소들 앞에서 스스로 무력한 존재임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세계의 주인 혹은 운전자가 아니라 이 세계를 구성하는 취약한 일부임을 인정해야 한다. 인간과 자연이 긴밀히 연결되어 있음을 인정하면 상당한 행복과 기쁨을 누릴 수 있다. 그러나 이 문명적 도전의 깊이를 과소평가해서는 안 된다. 호주 정치학자 클리브 해밀턴이 말했듯이, 기후 변화와 관련한 이런 진실에 대면하게 되면 <인간과 지구 사이에 권력 관계가 우리가 지난 3백 년 동안 생각해 온 것과는 정반대라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269)

환경 운동이 이처럼 정치적 소심함을 보이는 이유는 앞서 논의한 주제와 깊이 연관되어 있다. 1980년대 말부터 1990년대까지, 강력하고 매력적인 자유 시장 논리가 환경 보호 운동의 거의 모든 영역에서 그 지적인 생명력을 깔아뭉갰기 때문이다. 한편으로 과학계가 도출해 낸 결론을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완강한 고집 역시, 인간이 지구의 손아귀에 있는 게 아니라 지구가 인간의 손아귀에 있다는 문화적 담론의 위력을 키워 준다. 바로 이 담론 때문에 우리는 상황이 아무리 악화된다 해도 최후의 순간 우리를 구해 줄 동아줄(시장과 억만장자 사업자와 천재적인 과학자가 동시에 활약하는 최고의 조합)이 나타나리라 확신하고, 그걸 기대하면서 화석 연료를 찾아 점점 더 깊은 곳까지 지구를 파헤치는 것이다.

 

(367)

햇빛을 차단하기 위해 성층권에 에어로졸을 주입하는 방안을 일단 시작하면, 중단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 만에 하나 중단했다가는 일종의 차양막을 쳐서 인위적으로 억제해 놓았던 온도 상승 효과가 한꺼번에 걷잡을 수 없이 터져 나와, 인간이 점진적으로 적응할 시간적 여유도 없이 강렬한 햇빛이 지표면을 습격할 것이다. 동화에 나오는 마녀 이야기를 떠올려 보라. 부당한 방법으로 얻은 마법의 묘약을 마시면서 젊음을 유지하던 마녀가 묘약의 공급이 끊기는 순간 젊을 잃고 쭈그렁 할머니로 변하는 꼴이다.

 

(407)

환경주의 저술가 케네스 브라우어는 이렇게 말한다. <과학이 우리를 구할 거라는 생각은 터무니없는 망상이다. 지금의 세대는 이 망상에 의지해 다음 세대는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모든 자원을 제멋대로 탕진하고 있다. 이런 생각은 문명 세계로 하여금 환경 재앙을 향한 확고부동한 행진을 계속하도록 만드는 안정제다. 이것이 현실적인 해결책을 가로막는다. 현실적인 해결책은 인간 행동은 변화시키는 힘겨운 활동 속에 있다.> 게다가 그러한 망상은 한술 더 떠서 <만에 하나 지구 공학이 실패하더라도 옮겨 갈 곳이 있다>며 우리를 안심시킨다.

 

(492)

공기가 건강에 미치는 영향을 따져 보자. 세계 보건 기구 WHO는 위험한 대기 오염 물질 초미세 미립자의 안전 기준을 평방미터당 25마이크로그램 이하로 정하고, 3백 마이크로그램을 초과하면 위험 수준이라고 경고한다. 2014 1월 베이징의 발암 물질 농도가 671 마이크로그램을 기록했다. 흔히 구할 수 있는 마스크로는 호흡기 질환이나 8세 미만 아이들의 폐암 발생을 예방할 수 없다. 한편 상하이는 대기 중 미립자 농도가 평방미터당 450 마이크로그램을 넘어서는 경우 자동적으로 유치원과 초등학교가 휴업에 들어가고 연주회와 축구 경기 등 대규모 옥외 집회가 취소되도록 비상조치를 도입했다. (베이징에는 이런 제한 조치가 마련되지 않았다.) 공산당 고위 공무원이었다가 지금은 은퇴한 첸 지핑은 2013 3월 대기 오염이 중국의 사회 불안을 조성한다는 점을 시인했다.

 

(540)

하지만 지구 상에서 손꼽힐 만큼 가난하고 각종 권리를 체계적으로 박탈당해 온 사람들에게 기후 변화로부터 인류를 지키는 구원자가 되어 달라고 요구하는 우리는, 정작 그들을 위해서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원주민들이 힘들게 따낸 권리를 이용하기만 하고 그들에게 아무런 보답을 하지 않는다면, 이러한 관계 역시 또 다른 착취가 아닐까? 탄소 상쇄 제도와 관련한 경험에서 알 수 있듯이, <환경>을 명목으로 내세운 새로운 관계가 결국은 예전의 패턴을 고스란히 답습하는 결과로 이어지는 사례는 대단히 많다.

 

(614)

인간이 개입하지 않으면 다양한 식물이 다양한 방식으로 서로 뒤섞여 자라나며, 다년생 식물이 생명을 이어 가듯 해마다 자신이 종자를 퍼뜨리고 뿌리를 더욱 깊게 뻗는다. 다양한 식물들이 뒤섞인 채 원래의 자리를 지킴으로써 토양은 건강과 안전성, 비옥함을 유지한다. 식물의 뿌리가 토양을 굳건하게 잡아 주기 때문에 식물이 뿌리내린 토양은 그렇지 않은 토양보다 빗물을 훨씬 더딘 속도로 안전하게 흡수하고, 섞여 자라는 서로 다른 식물들이 서로 다른 기능을 통해 토양의 산출력을 강화할 뿐 아니라(콩과 식물과 토끼풀 같은 일부 식물들은 생장에 필수적인 질소 유지 기능이 탁월하다), 해충과 침입성 잡초를 억제하는 기능을 한다.

 

(619)

실로 인간은 놀라운 회복력을 가진 존재, 어떤 역경도 딛고 일어날 수 있는 존재다. 우리는 역경을 헤치고 살아갈 능력과 아드레날린이라는 소중한 선물, 그리고 두 번째, 세 번째, 네 번째 기회라는 호사를 허용하는 수많은 생물학적 중복성을 타고났다. 지구의 바다나 대기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생존과 번성이 동의어가 아니듯, 생존과 행복 역시 동의어가 아니다. 앞서 보았듯이, 수많은 종들에게 생존한다는 것은 단순히 자양분을 공급받고 새로운 생명을 만들어 낼 수 있다는 의미가 아니다. 생태계에 관용의 사례가 많은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그 관용이 무한하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적절히 주의하고 관리하면 우리는 놀라울 만큼 유연하게 구부러지고 펴진다. 그러나 고장이 나기도 한다. 그것은 우리의 육체도, 우리를 지탱하는 사회와 생태계도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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