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고대 그리스에서 추첨을 민주주의의 핵심 제도로 인정한 이유는 민주주의(democracy)를
어원이 말하는 그대로 ‘데모스(demos, 전체 인민)가 자기 스스로 통치(kratos)하는 체제’라고 봤기 때문이다. 이것은 곧 민주주의를 특별한 엘리트의 지배가
아니라 보통 사람의 지배로, 그리고 누구나 지배자의 지위에 오를 수 있는 동일한 가능성을 부여하는 것을
지향하는 정치 체제로 이해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말한다. 추첨은 데모스의 모든 시민들에게 관리가 될 수
있는 동일한 확률을 제공할 수 있기 때문에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것처럼 ‘내일 내가 앉아 있을 수도
있는 자리에 오늘 앉아 있는 이의 지배를 수용하는’ 민주주의의 공평한 원칙으로 수용될 수 있었다.
(11~12)
누가 선발될지 사전에 알 수 없고, 재선의 동기가 없으며, 자신의 이익 표출이 곧 전체 국민의 이익을 표출하게 된다는 추첨 민주주의의 특징 때문에 강력한 이익집단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활동해줄 의원들을 찾아내기 어렵게 된다. 제선의 동기가 없는 의원들은 선거로 선출되는 지금의
의원들처럼 국회 업무를 팽개치고 지역구에서 재선 활동에 전념하지도 않을 것이고, 서민들이 하루빨리 처리되기를
바라는 민생 법안을 계속 미루지도 않을 것이다. 보통 사람들이 볼 때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법률 조항이나
지나치게 복잡한 세제 관련 법안들은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내용으로 개정될 것이며, 연말에 도매금으로
수백 건씩 처리되는 법안들은 진지한 심의를 위해 처리 건수가 크게 줄어들 것이다. 의회는 전문가 집단의
특권적 공간이 아니라, 전체 국민의 목소리를 반영하는 진정한 민주적 권력체가 되는 것이다.
(23)
지금의 입법 기관은 국민을 전혀 대표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전체 사회를 그대로 옮겨놓았다고 볼 수 없다. 우선 심각한 불균형이 존재한다. 성인 인구의 51퍼센트인 여성은 하원의 4.8퍼센트만을 차지한다. 인구의 12퍼센트인 아프리카계 미국인은 하원의 4.5퍼센트만을 구성한다. 인구의
6퍼센트를 차지하는 히스패닉도 하원의 2.5퍼센트만을 차지해 저대표되고 있다 .투표를 하지 않는 유권자의 절반 정도는 전혀 대표되지 않으며, 이
중에는 (전체 인구의 6분의 1 정도를 차지하는) 가난과 실업 등 열악한 상황에 놓인 사람들도
포함돼 있다.
대신 하원은 거의 모두 백인과 부유한 남성들이 차지하고 있다. 이런
불균형을 가장 잘 보여주는 계층이 바로 변호사다. 변호사는 1983년
현재 전체 인구의 아주 적은 부분을 차지하는데도 하원의 46퍼센트를 차지하고 잇다. 따라서 우리는 ‘대의 없는 과제’
상황에 놓여 있다고 할 수 있다. 복지뿐만 아니라 엄청난 전쟁 무기와 대규모의 국내외 경찰과
정보기관을 지탱하는 데 충분할 정도로 많은 세금은, 형식적인 의미에서만 국민을 대표하는 의회가 승인한다.
(29)
이스터브룩은 매우 신중한 비평가지만, 의회의 현실을 이렇게 간단히
정리했다.
“정치에 입문한 후보자는 이제 체계적으로 이익집단을 찾아 헤매야 한다. 이익집단이 찾는 입법 목표에 맞는 매우 특별한 조건에 자신이 부합한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인정받고 돈을 얻는다. 그래서 의회에 입성하기도 전에 이익 집단에 구속돼버린다. 언젠가
그 의원은 계속 그 이익 집단을 지원할 것인지, 아니면 다른 후원자를 찾을 것인지, 그것도 아니라면 이익 집단의 금전적 보복을 당할 수 있는 법안에 투표할 것인지 고민해야 한다. 어떤 결정을 하더라도 반드시 자신에게 닥칠 재정적 결과를 계산해봐야 한다. 이런
모습과 부패의 차이는 분명하지 않다.”
(43)
간단히 말해 추첨을 통한 의회 구성의 방식은 미국 건국자들이 꿈꾸던 국민의 정확한 축소판을 제공해주는 것이다. 여기에서 의원들이 자신이 표현할 수 있는 것을 뛰어넘어 고민할 필요가 없다.
의원들이 선택되는 통계적인 선거구민, 즉 표본이 추출되는 단위는 자신들과 같은 국민으로
구성돼 있다. 의원들의 대표성은 자동적이며 피할 수 없다. 따라서
논쟁과 의사 결정은 민주적 대의 방식을 연구하는 사람들이 늘 찾고 있던 것을 제공해줄 수 있다. 전체
국민이 모두 모이기에는 너무 많다면, 추천으로 선택된 전체 국민의 복제품이 참여하면 되는 것이다.
(65)
시민들이 부패를 싫어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민주적인 것으로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부패는 특정한 이익집단이 자신들이 이 사회에서 차지하는 몫을 넘어서서 권력을 행사하게 만든다. 쉽게
말해서 이런 상황은 미국 자동차 회사의 몇 백 명 정도 밖에 되지 않는 경영자들이 안전하지 못한 자동차를 만들어 수만 명을 불필요한 죽음으로 몰아넣고
도시의 공기를 오염시킬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다시 2억
명이 넘는 미국인들에게 죽음, 질병, 장애, 재산 손실을 안겨주는 원인이 된다. 부패는 권력을 가진 소수가 다수의
희생으로 자신들의 이익을 보호할 수 있게 만든다.
(103)
그런데도 우리는 추첨 민주주의가 비현실적인 공상이 아니라고 믿는다. 일단
추첨 민주주의가 널리 이해되고 나면, 선거권 확대를 자극한 공정성과 정의에 똑같이 압도적 호소력을 발휘하게
될 것이다. 선거 운동을 좌지우지하는 돈의 영향력에 재갈을 물리려는 모든 시도가 실패하면 추첨이라는
방식은 좀 덜 이상한 것으로, 그리고 조금은 더 매력적인 것으로 여겨지게 될 것이다. 국민들이나 최소한 지독히도 민주적인 식민 개척자들의 후손들 중에 현행 제도 아래에서 우리를 괴롭히는 가짜 대의제(pseudo-representation) 같은 형태가 지속적인 열정을 보여주리라고 기대하는 사람들은 아무도 없다. 따라서 때가 되면 추첨 민주주의는 공화국의 의회에서 국민의 목소리를 부활시킬 수 있는 유일하게 믿을 만한 방법으로
여겨지게 될 것이다.
(117)
이렇듯 선출된 대표는 선출하는 사람하고는 사회적으로 다른 탁월한 시민이어야 한다는 ‘탁월성의 원칙(principle of distinction)’이 대의제
정부에서 제도화됐다. 선거는 유권자보다 뛰어나다고 간주되는 후보들의 자기 선택(출마)과, 유권자들의 후보
선택(선거)이다. ‘선거(election)’과 ‘엘리트(elite)’가
같은 어원을 갖고 있으며, 몇몇 언어에서 똑 같은 형용사가 탁월한 사람과 선택된 사람을 뜻하는 것은
‘선거’가 평범한 국민의 모습을 갖춘 사람이 아니라 뭔가
특별하고 탁월한 사람을 뽑는 제도라는 의미가 반영된 것이다.
그러나 후보자의 탁월함은 유권자들이 놓인 선택 상황에서 만들어진다. 후보자들은
유권자가 선거 시점에 가지고 있는 가치를 파악하고, 이것을 바꾸려고 하기보다는 여기에 끼워 맞춰 출마자를
결정하고 선거 운동을 펼친다. 후보의 탁월함은 강령이나 정책, 곧
공약으로 평가받을 수 있다고 주장할 수도 있지만, 이것은 단지 사람들의 선택에 영향을 미칠 뿐 당선
이후 정치 활동을 제약하는 법적 구속력이 없다.
(150)
한국 민주주의가 민주화를 성취했다고는 하지만 하위 계층을 포함한 다양한 계층들이 여전히 정치적으로 대변되지 못하는
‘대표’의 문제는 그대로 남아 있다. 이런 계층들이 투표 ‘참여’에
무관심해지고, 정치적 의사가 의회에 제대로 반영되지 못하기 때문에 ‘책임’ 문제가 발생한다는 점에서 결국 위기의 본질은 ‘대표’의 문제로 정리된다. 대표의 문제가 발생하는 이유는, ‘피선거권의 평등’이 보장돼 있다고 하지만 정치적 영역으로 진입하는
과정은 조직화된 정당을 매개로 하는 거의 배타적인 과정일 뿐 아니라 공천을 포함한 선거 과정에서 여전히 막대한 돈과 시간을 투입해야 하기 때문이다. 선거 과정에서도 인기와 인지도 등에 따라 결과가 크게 달라지는 현실을 고려하면, 일반 시민에게 출마할 기회의 평등은 허구에 불과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