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어떤 이들은 고전이 진부할 것이라 지레짐작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오래 살아남은 고전은 처음부터 나름의 방식으로 새로웠는데 지금 읽어도 새롭게 다가옵니다. 다시 말해 지금 읽어도 새로운 것은 쓰인 당시에도 새로웠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고전이라고 해서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들 역시 당대의 진부함과 싸워야만 했습니다. 고전은 당대의 뭇 책들과 놀랍도록 달랐기 때문에 살아남았고 그렇기에 진부함과는 정반대에 서 있습니다. 오랜 시간이 지나도 낡거나 진부해지지 않았기 때문에 그 책들은 살아남았고 여러 언어로 번역되었고 후대로 전승되었을
겁니다.
(21)
<오디세이아>를
쓴 호메로스처럼 소포클레스 역시 이미 널리 알려져 있는 이 이야기를 새롭게 구성할 필요를 느꼈을 겁니다. 그래서
그는 연대기적 서술을 포기합니다. 게다가 그가 쓰려고 했던 것은 몇 시간 안에 끝을 내야 하는 연극의
대본이었으니 과감한 압축이 필요했을 겁니다. 그래서 연극이 시작되면 우리는 이미 왕좌에 오른 오이디푸스를
보게 됩니다. 이런 서사기법을 ‘결정적 순간의 바로 직전에서
시작한다’고 말합니다.
(57)
책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무서운 사물일지도 모릅니다. 그것은
인간을 감염시키고, 행동을 변화시키며, 이성을 파괴할 수
있습니다. 책은 서점에서 값싸게 팔리고, 도서관에서 공짜로
빌릴 수 있기 때문에 대수롭지 않은 물건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어떤 책에는 주술적인 힘이 서려
있다고 믿습니다. 그래서 책은 곳곳에서 금지당하고, 불태워지고, 비난당했습니다.
어떤 책은 분명 위를 살짝 미치게 만듭니다. 중독성 있는 마약처럼
작용합니다. 고등학생 시절에 저는 에마 보바리처럼 소설책에 탐닉했습니다. 무더운 여름, 대학 입시가 불과 반 년밖에 남지 않았는데도 무릎
위에 놀려놓은 소설책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습니다. 대여점에서 빌려온 책들이어서 표지는 너덜너덜했고
종이는 누렇게 변색돼 있었지만 그런 것은 아무 상관도 없었습니다.
(67)
<돈키호테>와 <마담 보바리>는 우리에게 어떤 교훈을 주기 때문에 가치가
있는 작품이 아닙니다. 어리석은 미치광이 돈키호테와 광기 어린 사랑으로 자신을 망쳐버린 에마 보바리는
세르반테스가 플로베르가 창조한 인물이지만, 그들에게서 우리는 우리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야기 속의 세계가 계속되기를 바라고, 그 안에 머물기를 원하는
우리가 거기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인물들에 매료되고 자기도 모르게 책장을 넘기며 그들의 뒤를
따라갑니다. 그러는 사이 그들이 우리의 의식에 침투해 우리의 일부를 돈키호테와 에마 보바리로 바꾸어놓습니다. 다시 말해 우리가 읽은 소설은 우리가 읽음으로써 비로소 우리의 일부가 됩니다.
한번 읽어버린 소설은 더 이상 우리 자신과 분리할 수 없습니다. <위대한 개츠비>를 세 번 읽은 사람이라면 나와 친구가 될 수 있다는 나가사와의 말은 그런 면에서 일리가 있습니다. 같은 책을 읽었다는 것은 두 사람의 자아 안에 공유할 부분이 분명히 존재한다는 뜻이니까요.
(69)
소설을 읽는다는 것, 그것은 인간이라는 어떤 우월한 존재가 책이라는
대량생산품을 소비하는 과정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이라는 이야기가 책이라는 작은 틈을 통해 아주
잠깐 자신을 둘러싼 거대한 세계와 영겁의 시간에 접속하는 행위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바로 이야기이고, 이야기가 바로 우주입니다. 이야기의 세계는 끝이 없이 무한하니까요.
(81)
“소설이든 영화든 끝까지 봐야 온전한 반응이 나올 수 있는데, 소설은 영화와 달리 끝까지 보는 경우가 드물고, 일단 끝까지 보았다면
그것은 그 작품의 어떤 면을 좋아했기 때문입니다. 독자는 등장인물을 이해하고 그 인물에 감정이입이 되지
않으면 소설을 끝까지 읽어내기 어렵습니다. 그러니 어떤 소설을 끝까지 읽었다면 거기엔 무엇이든 독자의
마음을 사로잡는 최소한의 것이 있었음을 의미합니다. 만약 어떤 소설이 실망스러웠다면 바로 던져버리고
그 작품에 대해서는 잊어버리거나 입을 다물었을 겁니다.
(102)
소설은 세심하게 설계된 정신의 미로입니다. 그것은 성으로 향하는 K의 여정과 닮았습니다. 저멀리 어슴푸레 보이는 성을 향해 길을 다라
걸어가지만 우리는 쉽게 그 성에 도달하지 못합니다. 대신 낯선 인물들을 만나고 어이없는 일을 겪습니다. 일상에서는 느낄 수 없는 감정들을 경험하기도 하고,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는 문제를 곰곰이 짚어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서점 서가에 꽂힌 그 수많은 책들 중에서 우리가
굳이 소설을 집어드는 이유는, 고속도로로 달리는 것에 싫증이 난 운전자가 일부러 작은 지방도로로 접어드는
이유와 비슷합니다. 소설을 읽으면서 우리의 이성은 줄거리를 예측하고,
작가의 의도를 가능하고, 인물의 성격을 우리가 알고 있는 현실의 누군가와 비교하기도 합니다. 반면 우리의 감성은 작가가 써놓은 적확하고 아름다운 문장에 탄복하기도 하고,
예리한 인물 묘사에 공감하기도 하고, 주인공이 처한 고난에 가슴 아파하기도 합니다. 이성과 감성이 적절히 균형을 이룰 때, 우리의 독서는 만족스러운
경험이 됩니다. 때로 이성에 이끌렸다가 때로 감성에 이끌렸다가 하면서 우리의 정신은 책 속에 구현된
그 이상한 세계를 점차 이해해가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 세계의 일원이 됩니다.
(182)
누구나 알다시피 도서관은 책을 모아놓은 곳입니다. 누구라도 그곳에
들어가면 어떤 신성함을 느끼게 됩니다. 많은 저자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책등은 묘비처럼
느껴집니다. 그곳은 죽은 이와 산 자가 가장 평화롭게 공존하는 공간이고 엄밀한 의미에서 저자가 죽어
있는지 살아 있는지 신경쓰는 사람도 거의 없습니다. ‘작가는 자기가 쓴 책에 묻힌다’는 말의 의미를 가장 실감할 수 있는 곳도 바로 도서관일 겁니다. 움베르토
에코와 대담을 하던 장클로드 카리에르가 “내가 책이 많이 있는 어떤 방으로 가서 그중 한 권도 손을
대지 않고 그저 바라보기만 한답니다. 그러면 무어라고 설명하기 힘든 무언가를 받게 돼요. 그것은 어떤 강한 흥미라고도 할 수 있고, 어떤 안도감이라고도 할
수 있지요” 라고 말할 대, 책을 사랑하는 우리는 그게 어떤
느낌인지 단박에 짐작할 수 있습니다.
(209)
사실 독자로 산다는 것에 현실적 보상 같은 것은 없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의 짧은 생물학적 생애를 넘어 영원히 존재하는 우주에 접속할 수 있다는 것, 잠시나마 그 세계의
일원으로 살아갈 수 있다는 것, 어쩌면 그것이야말로 독서의 가장 큰 보상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별들이 수백 수천 년 전에 보내온 빛이 이제야 우리 망막에 와닿듯이 책 역시 시공을 초월해 우리에게 도달하고
영향을 미칩니다. 밀란 쿤데라의 통찰처럼, 비록 우리 현대인의
시야가 마치 요제프 K의 그것처럼 좁아져 있고 모두가 세속적 이해와 단기적 전망으로 아웅다웅하며 살아가고, 세계가 돈키호테와 같은 모험을 더 이상 허용하지 않는다 해도, 우리에게는
이 좁은 전망을 극적으로 확장해줄 마법의 문이 있습니다. 바로 ‘이야기의
바다’로 뛰어들어 ‘책의 우주’와 접속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