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법부 - 법을 지배한 자들의 역사
한홍구 지음 / 돌베개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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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기억력에 의한 내용상 오류 있을 수 있음.

 

 


[우리나라 사법부]

몇 주 전 우리집 아이들과 함께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서점에 갔다가 구입한 책이다. 아이들을 서점에 데려간 이유는 그렇게 큰 서점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도 있었지만, 나도 가 본 지가 오래되어 한번 가보고 싶었다. 여유롭게 관심 있는 책들도 보고, 대폭 바뀌었다는 그곳을 구경하고도 싶었다. 그런데, 내가 욕심이 많았나 보다.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잘못하면 아이들을 놓칠까 봐 계속 아이들만 쫓아다니느라 정신이 없었다. 결국 기대했던 여유로운 책읽기는 상상으로만 하고, 각자 책 한 권씩 골라 나왔다. 난 신간으로 나온 이후 계속 눈여겨 보았던, 내가 엄청 좋아하는 역사학자 한홍구가 쓴 <사법부>란 골랐다. 간만에 알라딘이 아닌 다른 서점에서 책을 샀다.

한홍구. 그 분은 정말 한결 같은 분이다. <대한민국>을 시작으로 그 분의 책은 거의 다 읽었는데, 한번도 실망을 준 적이 없었고, 늘 큰 가르침을 주었다. 왜곡된 우리나라 현대사를 바로 잡아주려는 노력에 늘 고마움을 느낀다. 절대 신뢰!!! 가끔씩 팟캐스트에 손님으로 출현할 때는 꼭 챙겨 듣곤 하는데, 얼마나 반가운지 모른다. 이번에 그가 쓴 <사법부>란 책은 우리나라 사법부의 민낯을 낱낱이 까발려주는 내용이었다. 어쩌다 사법부가 이 꼴이 되었다 답답하면서도, 또 희망도 걸어보았다.

사법부

포탈사이트 다음에서 사법부라는 말은 아래와 같이 정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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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법부의 주요임무는 분쟁의 해결이다. 법원은 모든 법률문제를 결정해야 하며배심재판을 받을 사안이 아닌 경우에는 사실문제까지도 결정하게 된다. 그러나 사법부가 분쟁에 대한 판결만을 담당하는 것은 아니다. 민사사건의 대부분은 재판에까지 이르지 않으며 법정 밖에서 해결된다. 그러한 사건에 있어 법원의 기능은 행정적인 것이다. 판결을 요하는 사안인 경우에는 소송당사자를 확정하고 증거를 채택하며, 소송절차의 개시 및 재판단의 배정과 관련된 문제를 다루는 규정들에 의한다. 사법절차 자체도 별도의 규칙에 따르게 되어 있다. 한국에서는 다른 민주국가들과 마찬가지로 국가권력을 입법•행정•사법으로 나누고 그 각각을 별도의 독립적 국가기관에서 담당하도록 하는 권력분립, 또는 3권분립의 원칙을 따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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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사전에 충실한 정의다. 그런 사전적 의미로서 사법부는 민주주의 국가에서 꼭 필요한 조직이다. 사람들 간에 분쟁이 일어날 수 밖에 없고, 그 분쟁을 법의 잣대로 판결을 내려주는 사람이 있어야 하는 거다. 그런데, 정치적인 분쟁은 어떨까? 법이란 것이 모든 것을 명확하게 판결할 수 있을 수는 없다. 법이라는 것이 결국 글자로 써 있기 때문에, 그 해석을 사람마다 달리 할 수 있는 거다. 최대한 객관적이고 합리적으로 법을 바탕으로 판결해야 하지만, 오늘날 우리나라 사법부는 그렇지 못하고 있다. 특히 정치적인 이슈에 대해서는 어떤 사람이 판사이냐에 따라 결과가 달리는 경우가 허다하다. 자존심을 버린 지는 옛날그냥 권력이 시키는 대로 돈 많이 벌면서 편하게 사는 길을 택한 것이다. 바로 직전에 읽었던 <이회영 평전>에서 이회영과 그의 형제들이 걸어간 길과는 하늘과 땅 차이다. 어쩌다 사법부가 이 모양이 되었는지를 밝혀주는 책이 바로 이 책이다. 이 책은 2009년부터 2010년까지 한겨레에 연재했던 것을 편집해서 엮은 책이라고 한다. 그 시절도 신뢰를 잃은 사법부였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사법부는 백성들과 더욱 멀어지고, 권력과 더욱 가까워졌다.

 

 

[예전에는 그러지 않았다?]

이 책을 읽고 놀라운 것은 서슬 퍼런 독재시대의 사법부는 오히려 지금보다 더 독립적이고, 정의로웠다는 점이란다. 이승만 시절은 반대파 정치인을 마구 죽이던 시절이고, 군사 독재 시절때도 독립적이고, 정의로운 판사들이 있었다. 물론 동백림 사건이나 인혁당 사건 등 권력에 고개를 숙인 판결도 많았지만, 그것은 독재 시대 후반부에 많이 있었고, 이승만 시대와 박정희 군사 독재 시절 초반부에는 그래도 사법부가 사법부다웠다고 한다. 그래서 권력이 사법부를 미워할 정도였단다. 박정희 정권과 검찰의 공안사건에 판사들이 집단으로 사표를 제출하는, 막강 자존심을 가지고 있던 시절도 있었다니, 오늘날의 사법부를 생각하면 신기하기까지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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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

1971 6월과 7, 대법원의 국가배상법 위헌판결과 서울형사지법에서 행한 시국 사건에 대한 연이은 무죄판결은 사법부의 독립성을 만천하에 고취한 것이었다. 이와 같은 독립성은 사실 평지돌출로 나온 것은 아니었다. 무장군인 법원난입 사건이나 동백림 사건 당시의 괴벽보 사건은, 그때만 해도 법원은 정상적으로 작동하고 있었으며 그래서 권력이 법원을 몹시 불편해했음을 보여준 사례다. 사법파동의 주역이었던 홍성우 변호사나 최영도 변호사는 1960년대 후반부터 사법 파동 이전까지 법관들은 권력의 눈치를 거의 보지 않았다고 증언했다. 법원으로서는 중정이나 검찰의 눈치를 봐서 그 위세가 무서워할 걸 못한다든가 하는 분위기나 없었다는 것이다. 적어도 사법파동 이전까지는 상당히 자유롭고 배짱대로 재판을 할 수 있는 분위기를 누렸다. 그 당시 서울형사지법 단독판사는 누구의 말도 듣지 않아서 서울시장보다도 힘이 세다는 말까지 나돌았다고 한다. 그러나 이런 분위기는 오래가지 못했다. 위로는 대법원부터 아래로는 지방법원까지 박정희 정권의 심기를 거스르는 판결이 연이어 나오자 정가와 법조계에는 정부가 어떤 형태로든 사법부를 손볼 것이라느니 정부가 바라는 대로 판결하지 않은 판사들은 다칠 것이라느니 하는 소문이 파다하게 돌았다. 그리고 이 소문은 곧 현직 법관 두 명에 대한 검찰의 영장청구라는 형태로 가시화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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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신 속 사법부]

정권에 반항하는 사법부에 대해 정권도 가만히 지켜볼 수만은 없었다. 자신이 왕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인데 말이다. 처음 사법파동이 일어났을 때는 직접 사태를 처리를 했었지만, 판사들을 곱지 않은 시선을 보였다. 그리고 유신 정권에 들어오면서, 그들의 권력은 하늘을 뚫을 듯했다. 정권의 비위를 거슬리는 판결을 한 판사들은 좌천되기 일쑤고, 자격 정지를 밥 먹듯 했다고 한다. 그러니, 정권에 손바닥 비비는 판사들만 살아남아서 판사 자리에 있게 된다. 그러다 보니 인혁당 사건 같은 말도 안 되는 일도 일어나게 된 거다. 당시 권력을 유지하는 방법 중에 하나가 반공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1970년대 들어서면서 남파하는 간첩의 수가 급격하게 줄었다고 한다. 그래서 대공수사 요원들은 자신들의 할당량을 채우기 위해 있지도 않은 간첩을 채웠다고 한다. 조작을 해서그 중에 가장 대표적인 것이 인혁당 사건이었다. 유신 반대를 하는 사람들을 간첩으로 몰아서, 사형 선고를 내리고, 선고를 내린 지 18시간 만에 사형을 집행한 사건이 기점으로 대한민국 사법부는 죽었다고 할 수 있다.

유신 시절, 긴급조치 9호가 발표되었다. 여러 가지 강압조치가 있었는데, 공안 사건을 일반법원에서 판결하도록 했단다. 그 전에는 군법원에서 해서, 일반 법원의 판사들은 부담을 덜 수 있는데, 이제부터는 자신들이 칼을 쥐게 된 거다. 그래서 일부 판사들의 법관 기피가 늘어났고, 더 양심 있는 판사들을 법복을 벗고 변호사가 되었다고 한다. 그렇게 최고권력의 시녀가 된 사법부는 무죄 판결이 거의 없었다고 한다. 1976 221명을 판결했는데, 2번만 무죄였다고 한다. 그런데 그 무죄 판결을 낸 판사는 좌천되었다가, 판사 자리를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이게 대한민국의 시스템이었던 것이다.

문제점을 심각하게 인식한 종교계에서도 움직였다. 천주교 중심으로 원주에서는 원주 선언이라는 시국선언을 했는데, 당시 원주에 있던 천주교 지학순 주교와 김지하, 장일순 등이 참여했다고 한다. 그리고 개신교에서도 시국 선언을 했는데, 장소는 교회가 아닌 명동 성당이었다. 권력의 탄압이 여의치 못해서, 장소를 구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김수환 추기경이 오케이를 해서 명동 성당에서 하게 되었다고 한다. 장소가 서울이다 보니, 재야 인사 뿐만 아니라 전현직 정치인들도 많이 참여했는데, 그 대가로 구속을 당해야만 했다. 그분이 죽기 전까지 사법부는 점점 권력의 하인이 되는 길을 가게 되었다.

 

[새로운 독재의 사법부 길들이기]

영원할 것만 같았던 그분이 세상을 떴다. 그것도 자신의 최측근의 총으로… 우리나라는 다시 한번 민주주의로 갈 수 있는 기회가 있었지만, 그러질 못했다. 혹시 아무도 준비를 하지 못했나? 너무 갑작스러운 독재의 종말을마치 갑작스러운 해방과 찾아온 미군정과 친일파의 재득세처럼… 독재가 가고 또다른 독재가 정권을 잡았다. 독재를 보낸 김재규. 새로운 독재는 사법부를 장악하고, 김재규를 자신들의 입맛에 맞는 판결을 해버렸다. 김재규의 변호사는 이 사건은 우발적으로 발생한 단순 살인이라고 주장했지만, 판결은 새로운 독재의 입맛에 맞게 판결이 나왔다. 일부 양심 있는 판사들의 소수 의견이 있었지만… 그저 소수 의견이었다.

새로운 독재. 그 또한 무서운 사람이었다. 총칼로 아무런 죄없는 백성들을 죽이면서, 청와대로 들어갔으니 말이다. 그리고 정치적으로 반대편에 있는 이에게 내란을 일으키려 했다고 누명을 씌워 사형을 선고하기도 했다. 그런데, 이 때 재판이 있기 전 문제를 제기한 판사들이 있었는데, 그들을 당연한 듯 면직 처리했다고 한다. 이게 불과 몇 십 년 전 우리나라의 모습이다사법부의 모든 사람들이 권력의 시녀였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런 시녀들만 살아남았던 것이다. 권력에 저항하는 일부 판사들이 있었지만, 그들은 좌천 또는 면직이었다. 그것은 대법원장도 마찬가지였다고 한다. 말 안들으면 쫓아버리고, 좌천하고, 어쩔 수 없이 사표 쓰게 하고그리고는 변호사도 못내게 하였다고 한다. 당시 시위하는 학생들에게 즉결심판이라는 권한을 판사에게 주었는데, 일부 판사들은 양심대로 무죄를 판결하기도 했다는데, 그렇게 되면 바로 안기부에서 해당 판사의 뒷조사를 했다고 한다. 이로 인해 법복도 많이 벗었다고 한다. 새로운 독재에서 이런 일을 도맡아 하는 것은 안기부였다.

판사들은 그래도 양심있고 소신을 가지고 있던 판사들이 있었던 것 같은데, 검찰은 그야말로 떡검이라는 명찰을 일찌감치 달았다. 요즘도 홍만표라는 이가 무지막지한 범죄를 했음에도 검찰이라는 든든한 울타리 안에서 보호를 받고 있는 것을 보면, 아직 우린 그런 시스템 속에 살고 있는 것이다. 지은이 한홍구 선생님이 대한민국 검찰에 대해서도 따로 책을 쓰셨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회사 업무가 갑자기 바빠져서 책읽는 시간도 많이 줄고, 리뷰 쓸 수 있는 시간은 더욱 줄었다. 혹시 졸필이 되어 버린 이 리뷰를 읽고 한홍구의 <사법부>에 대한 기대를 저버리는 이가 있으면 안될 일이다. 이 시대 세금을 내면서 살고 있는 사람이라면 꼭 읽어볼 책이다.

 

 

 

※ 이 리뷰는 <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를 수정하여 작성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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쭈니 2016-06-27 08: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모르고 있던 새로운 사실들의 알게됐습니다
감사히 잘 읽었습니다

bookholic 2016-06-28 00:06   좋아요 0 | URL
네, 감사합니다. 쭈니님도 기회되시면 한번 읽어보셨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