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쪽)
자본주의의 역사란 이 공공재를 특권적인 소수의 강자들이 배타적으로 점유, 사유화해온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그 과정에서 농민이나 하층민들이 삶더와 생계수단을 빼앗기고 도시의 빈민으로 전락하거나 임금노예의 삶을 강요당해온 것은 잘 알려진 역사적 사실이다. 이른바 자본의 원시적 축적 단계에서 벌어진 이러한 폭력적 사태는, 실은 역사적으로 어떤 시기에 국한된 게 아니라 지금까지 그 본질은 조금도 변함없이 다양한 형태로 계속되어왔다. 즉 '강탈에 의한 자본축적'(데이비드 하비,<신자유주의 약사>, 2005)은 자본주의의 일관된 작동 기제라 할 수 있다.
(22쪽)
1999년 총선을 통해 노동당이 제1당이 되었지만, 단독 집권은 불가능해졌다. 노동당은 소수 정당들과 연립정부를 구성할 수밖애 없었고, 소수 정당의 의견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 이후에
뉴질랜드의 정책 방향에는 변화가 일어났다. 최저임금이 인상되었고, 소득세 최고세율을 33%에서 39%로 올리는 고소득층에 대한 증세가 단행되었다. 공공주택 임대사업이 개선되었고, 민영화되었던 산재보험이 국유화되었다. 노조의 설립을 장려하고 노조의 지위를 강화하는 고용관계법이 제정되었다. 그에 따라 노동자들의 실질임금은 올라갔고, 고용 안정성도 증대되었다. 2004년에는 가족수당 제도가 도입되어, 어린 자녀가 있는 저임금 노동자들에게 혜택이 돌아가기 시작했다.
(86쪽)
대학은 운영하는 대학본부는 대학의 운영 목표를 학문 탐구와 지적 성숙을 이끄는 교육에 두지 않는다. 그들의 관심은 돈을 버는 것이고, 돈을 벌기 위해 대학을 관리하는 것이다. 따라서 대학의 관리체제는 기업의 관리체제와 같다. 기업의 경영 결과가 재무제표라는 숫자로 나타나듯이 대학의 운영 결과는 대학의 순위로 나타난다. 가령 순위평가에서 7위인 대학은 6위인 대학에 비해 좋지 않은 대학으로 자리매김되기 때문에 대학의 모든 노력은 순위를 올리기 위한 것이 되고, 순위평가에서 고려 대상이 되지 않는 부문은 대학 운영진의 관심거리가 되지 않는다. 정부 역시 대학을 숫자로 관리하며, 그 숫자에 의해 재정지원 여부와 그 규모를 결정한다. 대학정보공시라는 제도는 겉으로는 각 대학에 대한 정보를 제공한다는 취지이지만, 이 정보 공시에 나와 있는 정보는 그 학교에서 무슨 연구를 하며 어떤 교육을 받는지를 말하지 않는다. 대학에 대한 정보든 숫자이다. 학생의 수, 교수의 수, 논문 편수, 예산 규모, 유학생 수 등이 공시의 내용이며, 이러한 숫자를 나열하면 대학의 면모를 알리는 것으로 간주된다. 숫자가 지배하는 대학, 돈이 지배하는 대학에 대학의 본령인 학문과 교육은 없다. 대학은 이미 몰락하였다.
(88쪽)
자본주의시대의 종말기에 처한 현재, 대학은 이에 대한 어떤 전망도 보여주지 못하고 어떤 대책도 마련하지 못하고 있다. 삶과 역사, 사회와 개인에 대한 비판적 성찰을 이끌어내는 인문학과 사회과학은 쓸모없는 학문으로 천대를 받으면서 점점 대학에서 없어지고 있다. 인류사회의 가치와 전망에는 관심이 없는 공학이나 경영학과 같은 실용 학문은 더욱 확대되고 있다. 심지어는 직업훈련 과정에 불과한 인문 소프트웨어, 로봇공학, 영상콘텐츠 개발과 같은 분야가 대학의 학문 분야로 자리매김되어가고 있기도 하다.
(142쪽)
이 급진적 변화란 무엇인가? 사실상 세계의 모든 나라에서 초,중등교육은 물론 대학에서도 인문학과 예술 교육이 축소되고 있다. 글로벌 시장에서의 경쟁력을 유지하가 위해서 쓸모없는 것들은 모조리 없애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붙들린 정책결정자들의 눈에는 인문학이나 예술은 쓸모없는 장식에 불과학 것으로 비쳐지고 있을 뿐이다. 그리하고 그것들은 학교의 교과과정에서, 그리고 부모와 아이들의 마음속에서 빠른 속도로 설 자리를 잃고 있다. 그뿐만 아니라 과학과 사회과학이 갖고 있는 인문학적 측면-상상력과 창조성에 관계된 요소 및 엄격한 비판적 사고-도 단기적인 이익추구에 혈안이 된 국가정책 때문에 설 자리를 잃어가고 있다.
(148쪽)
세계시민이 되자면 정말 인문학이 필요한가? 세계시민이 되자면 우선 많은 사실적 지식이 필요하지만, 그러한 지식은 인문적 교육 없이도 획득할 수 있다. 그러나 책임 있는 시민이 되자면 그 이상의 것이 필요하다. 즉 역사적 증거를 평가하고, 경제적 논리들을 사용하고, 그것들에 대해 비판적으로 사고하며, 사회적 공정성 여부를 평가하고, 외국어를 말하며, 세계의 주요 분쟁지역들의 복잡한 문제들을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 사실적 부분들에 관한 지식만을 얻는 데는 인문학과연관된 지적 기술이 없이도 가능하다. 그러나 그 연관관계들의 어떻게 되는, 그 의미가 무엇인지 모르고 사실적 지식만을 갖는 것은 거의 무지만큼 나븐 것이다. 왜냐하면 그런 경우, 학생들은 정치가들이나 문화적 선도자들이 제공하는 상투적인 것과 진실한 것 사이를, 진짜와 가짜 사이를 구분할 능력을 갖고 있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세계 역사나 경제에 관한 이해가 지적으로 총명한 세계시민의 육성에 쓸모 있는 것이 되려면 인문적, 비판적 능력에 의해 뒷받침되어야 하고, 따라서 종교나 정의에 관한 철학적 이론에 대한 학습과 나란히 이루어져야 한다
(149쪽)
혁신에는 유연하고 개방적이며 창조적인 정신이 요구된다. 문학과 예술은 그러한 능력을 배양시켜준다. 이런 능력이 결핍될 때 비즈니즈문화는 급격히 쇠퇴한다. 실제로 기업들이 갈수록 편협한 직업교육만 받은 학생들보다 교양교육을 받은 졸업생들을 선호하고 있는 것은, 그들이 역동적인 비즈니스 환경에서 유연성과 창조성을 발휘하여 성공할 가능성이 높다고 믿기 때문이다. 우리의 관심사가 오직 국가적 경제성장에만 있다고 할지라고, 인문적 교양과 예술 교육을 더욱 보호할 필요가 있다.
(154쪽)
<일본의 '영어화' 정책, 망국으로 가는길>이라는 제목으로 일본의 두 지식인의 토론 중에서...
일본어가 학문연구라는 고도의 의론의 장에서 사용하지 않게 된다면, 일본어도 최첨단의 용어를 갖지 못하고 뒤떨어진 언러로 전락합니다. 일본어가 그렇게 열화된다면 그것이 또 일본 국민의 우민화에 박차를 가할 것입니다. 한편으로, 표면상으로 영어를 매끄럽게 말하는 엘리트들도 모어(母語)에 입각한 깊은 사고력이라 통찰력이 없기 때문에 우수한 성과를 올릴 수는 없습니다. 결국, 일본 전체가 우민화를 면할 길이 없을 것입니다.
(179쪽)
우리가 자기 삶을 돌아보고 사회를 들여다보는 글쓰기의 저자로 거듭난다면 현실정치가 지금과 같은 파행을 지속할 수 없을 것이다. 현실정치가 유권자를 이토록 무시하지는 못할 것이다. 자율적 인간, 그리고 자율적 인간이 형성하는 공동체가 가져야 할 기본 능력이 자기를 표현하는 능력이다. 재차 강조하지만 자기를 표현한다는 것은 스스로 생각한다는 것이다. 글쓰기를 통해, 미디어를 통해 자기 목소리를 내야 한다. 분노와 절망을 글로 써내고, 꿈과 희망을 공유해야 한다. 위에 인용한 글의 저자가 말했듯이 소망하는 자만이 이룰 수 있다. 그라민은행을 설립하고 '소셜픽션'을 창안한 무하마드 유누스가 말했다. "꿈은 함께 꿀 때 더 빨리, 더 크게 이뤄진다." 사회적 글쓰기는 함께 꾸는 꿈이다. 집단지성이고 소셜픽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