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
병실에서 안드레이는 창문 근처 초록색 식물 옆에, 내
침대를 마주 보는 작은 침대에 앉아 있고, 간호사들은 내가 침대 위에 앉을 수 있도록 도와준다. 우리는 아무 말 없이 서로를 바라본다. 문이 닫히고, 우리만 남겨진다. 그가 말한다. 나스티아, 곰을 용서했어? 다시 침묵, 곰을
용서해야 해. 나는 바로 대답하지 않는다. 내겐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것을 알지만 처음으로 나는 운명에, 연결고리들에, 우리가
향하는 이 모든 불가피한 것들에 저항하고 싶다. 곰을 죽이고 싶었다고,
내 체계 밖으로 곰을 쫓아내고 싶었다고, 내 얼굴을 이렇게 망가뜨려 놓은 것을 무척이나
원망한다고 그에게 소리 지르고 싶다. 그러나 나는 소리 지르지 않고,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나는 숨을 몰아쉰다. 그래, 곰을 용서했어.
(62-63)
학자로서 나는 이해할 수 있다. 연구 주제를 학생들과
공유하고 참여시키는 것, 지식의 범위를 넓히기 위해 모든 기회를 이용하는 것, 특정한 대상을 주제로 토론하는 것 모두, 오늘 그 대상이 나라는
사실만 빼면, 의대생들이 여왕벌을 따르는 벌들처럼 교수를 따라 내 병실에 들어온다. 나와 비슷한 또래이거나 겨우 몇 살 더 어릴 뿐인 학생들이 공책을 손에 들고,
흰 가운을 입고, 학구적인 눈빛으로 나의 사례를 설명하는 교수에게 집중한다. 얼굴과 머리에 곰에게 물린 자국, 오른쪽 머리에 난 다수의 상처, 오른쪽 다리에 물린 자국, 그들이 메모를 하는 동안, 나는 그들을 하나하나 관찰한다. 그들은 매우 깨끗하고, 단정하고, 흰 가운을 걸친 몸에서는 빛이 나는 것 같다. 그런데 나는? 여기 도착하고 나서 나를 보러 온 한 지인이 뱉었던, 그다지 섬세하지 않은 말이 떠오른다. 더 최악의 상황이 닥칠 수도
있었어. 너는 소련의 강제노동수용소에서 막 나온 사람처럼 보일 뿐이야.
그들의 시선에서 나를 보호하기 위해 베일로 얼굴을 감싸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다. 그들이
오늘 저녁 친구들에게 두개악안면외과에 송환된 ‘곰의 여자’ 이야기를
하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나는 이미 혼자 상상한 반응을 억누르고 애쓴다. 얼굴이 다 망가졌어. 불쌍하기도 하지, 전에는 분명 예뻤을 텐데 말이야.
(73-74)
프랑스에서 받는 첫 수술 날이다. 내 수술을 담당하는
외과의사와 의료진 내 턱에 소련의 플레이트를 그대로 두는 것에는 위험이 따르고, 따라서 이를 서방의
플레이트로 교체하는 게 나을 것이라는 결정을 내렸다. 엑스레이 사진을 보면 플레이트가 너무 큰 나사로, 의료진을 표현을 빌리자면, ‘러시아 방식으로’ 고정되었다. 설상가상으로 그것을 매우 두꺼운 데다, 재활 운동을 어렵게 만들지도 위치에 고정되어 있다. 어쩌면 바로
그 순간에 나는 러시아 사람들을 신뢰한다고 말해야 했을지도 모른다. 우선 집으로 돌아가서 회복할 수
있는 시간을 가지고 싶다고도, 모르겠다. 이 밤의 시점에서는
어떠한 진실에도, 어떠한 당연한 것에도 접근할 수가 없다. 하지만
그것들이 언제는 가능했었나? 그렇게 내 턱은 고요하지만 가차 없이, 프랑스와
러시아의 의료 냉전 현장이 되었다.
(88)
그날 밤, 나는 야수를 믿어야 한다고, 그들의 침묵과 그들의 신중함을 믿어야 한다고 쓴다. 경계 태세를, 이 병실의 헐벗은 백색 벽을, 노란 침대 시트를 믿어야 한다고. 중립성과 무관심, 횡단성이 존재하는 비공간 안에서 몸과 영혼에 작용하는
후퇴를 믿어야 한다고. 형태가 없는 것이 조용히 그리고 급작스럽게 구체화되고, 그려지고, 재정의된다. 신경
분포를 막고, 다시 신경을 분포시키고, 섞고, 병합하고, 이식하고, 곰과
그의 발톱이 지나간 내 몸, 피가 흐르지만 죽음이 없는 내 몸, 삶으로, 실밥과 손길로 충만한 내 몸, 여러 존재가 만나는 열린 세계의 모습을
한 내 몸, 그들과 함께, 그리고 그들 없이 회복하는 내
몸, 내 몸은 혁명이다.
(124-125)
어른이 살면서 내내 간절히 찾는 은신처를 태아는 이미 가지고 있다. 우리는 때때로 매일 영양분이 유입되는 포궁의 내벽을 우리 주위에 재건할 수 있어야 한다. 나는 우리가 실패할 때, 세상이 운명의 장난으로 우리를 다시 그곳으로
되돌려 보내려고 한다는 이상한 생각이 든다. 바깥의 무엇인가가 우리를 겉보기에 어딘가 음산해 보이는
문 안에 가두며 내면의 삶을 상시기킨다. 그러나 그 공간은 사실 구원의 공간이다. 사이가 좁은 네 개의 벽, 작은 문과 제한된 접촉, 빅토르 위고는 섬 안에서 바다를 마주하고, 시를 써나갔다.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은 미국 버몬트의 숲에서 러시아 이야기를 다시 썼다. 레프
트로츠키는 감옥을 전전하면서 죽음을 피했고, 썼다. 맽컴
라우리는 바다에 직면한 그의 오두막에서 그가 있던 곳에서는 보이지 않는 세상의 소리를 종이 위에 수집했다. 내가
죽음의 문턱에서 돌아오며 화산 아래의 숲에서 머무는 동안 하고 있는 일 역시 그들이 이룬 것과 다르지 않지 않을까? 나를 관통하는 징후와 시대의 모순, 분노, 비극과 완전한 종말을 드러내는 신호들을 더 잘 보기 위해 대담하게 옆으로 비켜나는 것 외에 내가 무엇을 하고
있단 말인가? 나는 너무나도 다른 짐승의 세계를, 병원에선
너무나도 인간적인 세계를 봤다. 나는 내 자리를 잃었고, 그
중간을 찾는다. 나를 재구성하기 위한 공간, 이 피정은 내
영혼이 다시 회복하는 것을 도울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이 세계 사이의 다리를, 문을 만들어야 할 것이다. 포기란 내 내면의 사전에 존재하기 않기
때문에.
(126)
가끔 어떤 동물은 인간에게 선물을 주기도 해. 인간들이
처신을 잘했을 때, 그들의 삶 내내 귀를 기울였을 때, 너무
나쁜 생각을 품지 않았을 때, 그녀는 시선을 내리깔고 천천히 숨을 내쉰 다음 고개를 들고 다시 미소를
짓는다. 곰들은 우리에게 선물을 줬지, 너를 살려둠으로써
말이야.
(147)
엄마들은 그들이 사랑하는 존재가 고통받는 것을 원하지 않거든요. 흠, 그가 중얼거린다. 우리는
침묵 속에서 차 한 모금을 마신다. 곰이 인간과 다른 점은 그들이 스스로를 똑바로 바라볼 수 없다는
거야. 이제 무슨 말인지 알겠어? 네, 이해했어요. 곰들이 거울을 가지고 있지 않은 게 다행이네요. 한 그랬으면 모두 미쳐버렸을걸요! 마시아가 맑은 웃음을 터뜨리고
나도 함께 웃는다.
(160-161)
2015년 8월 25일, 그날의 사건은 캄차카 반도의 산 어딘가에서 곰 한 마리가
프랑스 인류학자를 공격한 것이 아니다. 사건은 곰 한 마리와 한 여자가 만나고 세상의 경계가 파열한
것이다. 이는 인간과 짐승이 대면하면서 그들의 몸과 머리에 균열에 생기는 물리적 한계로만 정의 내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현실과 신화의 만남이고, 과거와
현재의 만남이고, 꿈과 실재의 만남이다. 이 장면은 오늘날에
전개되었지만 천 년 전에도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이는 우리가 개인적이고 미미한 궤적에 무관심한
도시에 세계에서 나와 곰의 이야기일 뿐이지만, 라스코 동굴 멱화에서처럼 상처를 입은 들소와 발기된 성기를
하고 비틀거리는 인간의 원형적인 대면이기도 하다. 동굴 벽화의 장면처럼, 결투 결과의 불확실성이 이 놀랍고도 필연적인 사건을 지배한다. 하지만
우물 벽화와는 반대로, 이다음의 일은 수수께끼로 머물지 않는다. 우리
중 아무도 죽지 않았고, 불가능한 일에서 살아 돌아왔기 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