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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탐험가 마젤란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이내금 옮김 / 자작나무 / 2014년 8월
평점 :

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최초로 세계 일주를 한 사람은
누구냐는 상식 문제는 비교적 난이도가 낮은 문제라고 생각해. 정답은 마젤란이잖니. 아빠가 어렸을 때도 이런 저런 퀴즈에 많이 나왔던 문제였던 것 같구나. 그런데
마젤란이 어떤 사람이냐고 물어본다면, 할 말이 없을 것 같구나. 아빠는
마젤란이 어느 사람인 줄도 몰랐거든. 그렇다고 아빠가 그런 마젤란이 궁금해서 오늘 소개할 책 <위대한 탐험가 마젤란>을 읽은 것은 아니란다. 이 책의 지은이가 아빠가 좋아하는 슈테판 츠바이크라서 이 책을 읽은 거야. 전에도
이야기했지만 슈테판 츠바이크는 아빠가 좋아하는 작가이고, 특히 슈테판 츠바이크가 쓴 평전들이 좋았단다. 그래서 이번에 슈테판 츠바이크가 쓴 <위대한 탐험가 마젤란>을 읽은 거야.
이번 책 또한 무척 재미있게
잘 읽었단다. 이 책을 읽기 전에는 마젤란이라는 사람에 대해서 그저 최초로 세계 일주를 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읽고 나서는 마젤란이란 사람을 자세히 알게 되었고 그 또한 평범한 사람은 아니었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되었어. 하기야 그러니 아무도 하지 않으려는 일을 시도했겠지. 이따가도 이야기하겠지만
마지막에 방심만 하지 않았다면 세계일주의 마무리까지 했을 텐데 그것이 조금 아쉽더구나. 자, 그러면 마젤란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자꾸나.
1.
이 책의 첫 문장 “일의 발단은 향료였다”에서 알 수 있듯이 동양의 향료는 유럽 사람들에게
있어 없으면 안 되는 상품이었단다. 그런데 십자군 전쟁 이후 인도와 이어지는 육로길이 막히게 되었고, 육로가 있어도 중간 중간에서 향료에 대한 엄청난 세금이 붙으면서 유럽 사람들은 육로길이 아닌 바닷길을 찾기
시작했단다. 그것이 대항해 시대를 여는 계기가 되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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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십자군전쟁은
종종 낭만적으로 묘사되듯이, 이교도로부터 성지를 탈환한다는 단순히 신비적이고 종교적인 의도만은 아니었다. 이 유럽 최초의 기독교연합은 한편으로 홍해를 가로막는 봉쇄의 사실을 깨부수고자 했다. 유럽을 위해, 기독교 신앙을 위해 동양과의 무역의 길을 열어놓고자
하는 목적의 몸짓이었다. 그러나 이 충돌은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그들은
이집트를 이슬람교도들에게서 빼앗아오지도 못했으며 이슬람교도들은 여전히 인도로 가는 길을 막고 있었다. 인도로
가는 자유롭고 독립적인 또 다른 길을 찾고자 하는 욕구가 싹튼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들의
눈길이 향한 곳은 바로 바다였다. 콜럼버스가 서쪽으로, 바르롤로뮤
디아스와 바스코 다 가마가 남쪽으로, 그리고 카보트가 라브라도를 향해 북쪽으로 떠날 수 있었던 대담함은, 그 무엇보다도 서양을 위해 간세도 물지 않고 방해도 받지 않고 인도로 갈 수 있는 자유로운 항로를 발견해서
이슬람의 패권을 꺾어놓고 말겠다는 분명한 의지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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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랫동안 포르투갈은 유럽의 변방이었는데, 1394년에 태어난 엔리크 왕자에 의해 전세를 바뀌게 된단다. 엔리크
왕자는 다른 책에서는 엔히크 왕자로 번역되기도 하는데, 이 책에서는 엔리크 왕자로 번역했단다. 엔리크 왕자는 포르투갈이 해양을 탐험할 수 있도록 적극적인 후원을 했단다. 항해
학교를 세우고, 조선술, 천문학에 많은 지원을 했어. 그의 이런 노력은 성과로 나타나는데 처음으로 아프리카 희망봉까지 항로를 개척한 바르톨로 뮤 디아스도 포르투갈
사람이고, 인도까지 바닷길을 개척한 바스코 다 가마도 포르투갈 사람이었단다.
이런 분위기에서 콜럼버스가 인도
가는 길을 개척하겠다고 포르투갈에 지원을 요청했는데, 당시 왕이었던 주앙 2세는 콜럼버스의 요청을 거절을 했다는구나. 주앙 2세는 엔리크 왕자 같은 감각이 없었나 보구나. 결국 콜럼버스는 스페인
왕국에 지원을 받아 신대륙을 발견하게 되었고 이 일로 스페인은 대항해 시대의 또 하나의 주역이 되었단다.
이런 대항해 시대가 한창이던 1480년경에 포르투갈에서 마젤란이 태어났단다. 마젤란의 어린 시절에
대한 기록은 찾기 어렵다고 하는구나. 마젤란이 기록에 처음 출현하는 것은 마젤란이 24살 때 포르투갈 함대의 일원으로 전투에 참가한 것이래. 그 전투에
참가했다가 부상을 입고 아프리카에서 치료를 받은 후 1507년 리스본에 귀향을 했다는구나. 그리고 얼마 후 다시 함대를 타고 인도로 향했고 1509년 처음으로
인도에 도착했다는구나. 유럽에서 인도를 가려면 아프리카를 삥 돌아가야 하니 누군가는 상당히 비효율적이라고
생각했을 거야. 당시에는 수에즈 운하도 없었으니 말이야. 그래서
서쪽 바다로 나아가면 더 빠른 길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몰라. 콜럼버스도 그런 생각으로 길을
나섰다가 신대륙을 발견했으니 말이야.
…
아무튼 마젤란은 인도에서 7년 동안 함대의 일원으로 전쟁에 참가하고 여러 차례 위기를 맞고, 부상도
당했지만 끝내 살아남았단다. 마젤란은 전쟁에서 여러 가지 성과도 내어 상사로부터 신뢰를 받고 용기 있는
사람으로 인정받아 장교로 진급하기도 했어. 인도에서 7년의
생활을 마치고 리스본으로 돌아왔는데, 그 사이는 리스본은 번창하여 큰 도시로 변해 있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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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
그는
이미 배가 벨렘에 입항할 때부터 놀라기 시작하였다. 바스코 다 가마가 출항할 때 그를 축복해주던 낡고
나지막한 교회 대신 이제 인도의 향료 덕분에 부강해진 조국의 첫 번째 징표라고 할 수 있는 거대하고 화려한 대사원이 완성되어 하늘로 치솟고 있었다. 눈길이 닿는 곳마다 변화가 느껴졌다. 예전엔 통행도 뜸했던 강에는
이제 돛대들이 머리를 맞대고 있었고, 강변의 조선소에서는 한시라도 빨리 더 장대한 함선들을 만들어내느라고
일꾼들이 부지런히 망치질을 하고 있었다. 항구에는 깃발은 깃발끼리, 돛대는
돛대끼리 자국선이건 외국선이건 간에 빽빽하게 모여 있었고, 정박소와 물품창고는 터질 것만 같았다. 새로 쌓아올린 웅장한 왕궁들 사이로 뻗은 길거리에는 사람들이 몰려다니며 북적대고 있었다. 해외상관과 환금창구, 중개업소에는 갖가지 언어들이 난무하고 있었다. 인도를 약탈한 덕분에 리스본은 이제 10년이 채 지나기 전에 소도시에서
세계적인 도시요, 사치와 향락의 도시가 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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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젤란은 리스본에 잠깐 머물다가
마젤란은 다시 해군으로 모로코 전쟁에 참여했다가 다리 부상을 입었어. 그런데 양떼를 적군이 넘겼다는
누명을 쓰고 갇혀 있다가 탈영해서 다시 포르투갈로 돌아왔단다. 마젤란은 왕을 만나 자신의 주장했으나
왕은 그를 믿지 않았어. 마젤란은 다시 모로코로 와서 자신의 무죄를 입증을 하고, 그것이 받아들여져서 명예를 회복하고 정식으로 군대를 제대했단다. 포르투갈에
돌아와서 그는 항해를 준비했어. 먼저 신대륙을 탐험한 사람이 작성한 항해보고서를 봤는데, 그 보고서에는 대서양과 나중에 태평양이라고 부르게 되는 바다를 잇는 뱃길이 있다고 했어.
마젤란은 그 통로를 찾아서 인도를
가면 아프리카를 돌아서 가는 것보다 빠르다고 생각했어. 그 경로로 가서 인도의 향료를 가지고 오면 자신뿐만
아니라 포르투갈에도 큰 도움이 될 거라 생각하여 국왕을 만나 지원을 요청했지만 거절당했어. 음, 포르투갈 국왕은 또 한번 좋은 기회를 걷어차는구나. 마젤란은 자신이
다른 나라를 위해서 일해도 되냐고 물어보았는데, 국왕은 그러라고 답변을 받았단다. 그때 마젤란 나이 서른다섯 살이었어.
...
2.
마젤란은 1년 뒤 스페인으로 망명을 했어. 마젤란은 대서양과 태평양을 잇는
뱃길이 있다는 확실한 믿음으로 스페인 왕에게 후원을 받으려고 했으나 스페인 왕을 만날 기회가 없었지. 그런데
어떤 상인이 마젤란의 이야기를 듣더니 돈이 될 것 같다고 생각하여 그 상인이 자신의 인맥을 이용하여 당시 스페인 왕인 칼 5세와 마젤란을 만나게 해 주었단다. 칼 5세는 결단력이 부족했던 사람으로 알려져 있었는데, 이상하게도 마젤란을
지원하는 것은 확실하게 해주겠다고 약속했대.
마젤란이 칼 5세를 잘 설득했나 보구나. 그렇게 지원 약속을 받은 마젤란은 항해
준비를 했어. 선원들을 모집할 때는 향료 군도를 떠나는 항해라고만 이야기했어. 향료 군도에 가서 향료를 얻을 수 있어 다들 큰 돈을 벌 수 있을 거라 생각했지. 그런데 항해 준비를 하면서 실무자들과 갈등이 있기도 했어. 항해가
얼마나 길어질지 정확히 모르니 식량 등을 얼마나 확보하고 선원들을 얼마나 모집해야 할지 어려웠을 것 같구나. 이렇게
마젤란이 항해 준비를 하고 있는 소식이 포르투갈에도 전해졌고, 포르투갈 정부는 마젤란의 계획을 알고
격분했다는구나. 이런 경우가 발생할까 봐 마젤란이 사전에 다른 나라를 위해 일해도 되냐고 물어보았던
것 같구나. 포르투갈 영사가 마젤란을 찾아와 협박도 하고 회유도 했고,
스페인 왕을 찾아가 항의도 했단다. 그렇게 포르투갈 영사에서 법석을 떨다 보니, 오히려 마젤란의 존재감만 부각이 되었어. 스페인 왕도 더욱 마젤란을
보호하고 포르투갈의 항의를 받아들이지 않았단다.
1년 6개월의 준비기간을
마치고 265명의 선원들, 다섯 대의 함선이 준비되었어. 각 함선의 함장들을 마젤란이 직접 고르면 좋겠지만, 자신의 배와
다른 한 배에 자신과 함께 망명한 사촌을 함장으로 임명하고 나머지 세 척은 스페인 왕이 임명한 스페인 사람들이었단다. 마젤란을 감시하는 역할도 있었던 것 같아. 그 스페인 함장들은 마젤란을
좋게 보는 사람이 없었단다. 마젤란은 1519년 9월 20일 드디어 대서양으로 출발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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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8)
1519년 9월 20일 화요일 아침이 밝아왔다.
세계사적으로 기억되어야 할 날이었다. 닻이 올려지고, 돛이
펄럭이고, 대포가 울려 퍼지는 가운데 육지는 점점 멀어져 갔다. 인류
역사상 가장 용감하고, 가장 원대한 탐험여행이 시작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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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시절은 신대륙과 오가는 항로는
개척되어 있는 상황이었어. 그런데 마젤란이 출발한 지 얼마 안되어 항로를 되돌아간 적이 있는데 그 이유는
확인되지 않았지만 이것으로 다른 함장들과 의견 충돌이 있었대. 처음부터 쉽지 않은 길이로구나. 결국 부사령관 후안 데 카르타헤나가 저항을 하며 반기를 들었어. 마젤란의
스페인 국왕으로부터 부여 받은 절대 재판관의 권한으로 부사령관을 반란자로 구속시켰단다. 마젤란이 그렇게
강경하게 나올 것이라 생각하지 못했는지 선원들은 다들 놀랬어. 일정보다 한참 지난 출발한지 11주만인 12월 13일
리우데자네이루에 도착했단다.
...
그런데 마젤란이 출발하기 전
포르투갈에서 본 항해보고서에서 본 ‘파소‘가 예상했던 위치에
없었어. ‘파소‘는 대서양과 태평양을 잇는 통로를 말한단다. 마젤란은
자신이 예상했던 위치에 ‘파소’가 없어서 대서양과 연결되어
있는 만과 강을 모두 점검하였어. 그러다 보니 또 시간은 지체되었어.
자연스레 선원들의 불만이 나올 수밖에 없었지. 이번에는 스페인 함장들이 함께 반란을 일으켰단다. 마젤란의 사촌이 함장으로 있는 함선을 약탈한 후 마젤란의 명령을 따르지 않겠다고 했어. 숫자적으로도 불리한 상황이었지만 오랜 전쟁의 경험이 있어서인지 마젤란은 기습 공격으로 반란을 제압했단다. 반란의 주동자인 케사다를 처형시키고 다른 함장들과 반란을 주도했던 신부는 해변가에 버리고 떠났단다. 반란에 참가했던 나머지 선원들은 강제노역을 시켰어.
....
두 번째 함선인 정찰 중에 폭풍우를
만나 침몰하는 사건이 일어나서 이제 함선은 네 척이 되었어. 마젤란은 여전히 대서양과 태평양을 잇는
통로를 찾는데 노력을 했지만, 찾지는 못했고, 이것으로 시간은
계속 지체되었어. 그리고 출항한지 1년도 훨씬 지난 1520년 10월 25일, 드디어 대서양과 태평양을 잇는 해협을 찾았단다. 나중에 이 해협은
마젤란 해협이라고 불렀단다. 마젤란은 다른 함장들에게 앞으로 어떻게 할지 물어보았어. 계속 항해를 하느냐, 아님 귀환 하느냐... 어떤 사람이 해협을 찾았고 일정도 많이 지체되었으니, 일단 스페인에
복귀했다가 재정비를 하고 다시 오자고 했어. 하지만 마젤란은 ‘답정너‘였어. 그는 귀환하자는 의견에 반박하고 앞으로 계속 가기로 결정했단다. 왜 물어본 거야?
그런데, 어느 날 함선 한 대가 사라졌어. 한참 찾아보았지만, 보이지 않았어. 그 배는 알고 보니 몰래 스페인으로 돌아간 것이란다. 마젤란의 계획이 무모해 보였던 거야. 하필 사라진 배가 가장 큰
배이고 식량도 가장 비축된 배였기 때문에 남은 일행들에게는 큰 손실이었단다. 하지만 그들은 조금만 더
가면 인도에 도착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어. 아무도 태평양으로 그렇게 넓고 거대한 바다라고 생각한
사람은 없었을 거야. 마젤란도 마찬가지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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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221)
1520년 11월 22일, 그의 명령에
따라 배는 정어리강의 항만을 떠났고, 며칠 후 마젤란 해협을 통과하였다(앞으로 마젤란 해협이라고 불린다). 그리고 해협이 끝나는 지점에서
마젤란은 캅 데세아도(열망의 곶)라고 명명한 곶 뒤쪽으로
유럽의 배가 아직 항행해본 적이 없는 새로운 바다가 끝없이 넘실대고 있는 것을 바라보았다. 감동적인
순간이었다. 서쪽 수평선 뒤로 보물의 섬인 향료군도가 놓여 있을 것이었다. 그 뒤로는 동양의 제국들, 중국,
일본과 인도가 있을 것이고 계속해서 가다 보면 고향인 스페인과 유럽대륙이 나타날 것이다. 지구가
개벽한 이래 그 누구도 통과해보지 못한 대양으로 돌진하기에 앞서 한 번 더, 마지막으로 휴식을 취했다. 1520년 11월 28일, 닻을 올리고 깃발이 올려졌다. 축포를 쏘아올리면서 세 척의 작은
배는 마치 생사의 결투를 앞둔 투사가 위대한 적수에게 인사하듯 낯선 바다에 경의를 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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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마젤란은 나머지 세 척을 정비하고
길을 떠났단다. 그야말로 그 바다는 아무리 가도 바다만 계속되었어. 그들
생각하기를 이미 한창 와서 지팡구(일본)을 지나쳤을 것이라고
생각했으나 아직 3분의 1도 못 간 상황이었단다. 이제는 굶주림과 싸움이었어. 이렇게 항해가 길어질 거라 생각을 못했으니, 식량이 금방 떨어지고 말았어. 선원들은 먹을 것이 없어서 소가죽으로
만든 돛 줄도 먹었어. 많은 사람들이 굶어 죽고, 병들어
죽었단다.
계속된 항해 끝에 마젤란 일행은 1521년 3월 16일, 드디어 필리핀 사마르 제도에 도착했단다. 지구가 둥글다는 것을 드디어
직접 증명을 한 거야. 마젤란은 세부 섬의 왕을 만나 접견했어. 세부의
왕은 마젤란 무리에 겁을 먹고 그들을 환대했단다. 하지만, 인근의
막탄 섬에 있는 라푸라푸는 그들을 환대하지 않고 저항하고 전투 자세를 보였어. 마젤란은 그들을 얕보고 60여 명의 사람들만 데리고 갔단다. 갑옷과 총을 너무 믿었어. 사실 부하들 대다수는 이미 지체한 시간도 너무 많이 이 탐험에 지쳐 있었던 상황이라서, 막탄 섬에 가지 말고 얼른 향료 군도에 가서 향료를 얻어 고향으로 돌아가자고 했단다. 하지만 마젤란의 의지를 꺾을 수 없었어. 마젤란 일행은 막탐 섬의
부족들의 어마어마한 원주민들과 맞서야 했어. 1521년 4월 27일 결국 마젤란은 허무하게 그들에게 죽고 말았단다. 위대한 탐험가이자
뱐란도 제압하고, 망망대해의 고난을 다 이겨내고 새로운 바다를 발견하고 새로운 항로를 개척했던 마젤란의
죽음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허망했단다. 그렇게 준비가 철저했던 사람이 그렇게 방심할 수 있단 말인가.
....
마젤란이 죽고 나서 나머지 사람들도
지휘관을 잃었기 때문에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었어. 세하웅과 바르바사가 나머지 사람들을 이끌었단다. 하지만 그들도 원주민들의 함정에 빠지게 되고, 세하웅의 친구이자
부하인 카르발요가 배신을 하고 세하웅과 바르바사를 버리고 도망을 갔어. 그래서 세하웅과 바르바사도 원주민한테
죽고 말았단다.
카르발요가 사령관이 되었어. 그는 마젤란이 원주민들에게 피해를 주지 말라는 원칙을 깨고 약탈을 일삼기 시작했단다. 그러자 다른 승무원들이 반란을 일으켜서 카르발요도 사령관 자리에서 내려오게 되었단다. 남아 있는 사람들 중에 마젤란의 측근인 고메스 데 이스피노자와 대서양에서 반란에 참여했던 이력이 있는 세바스티안
델 카노가 함장을 맡게 되었어. 남아 있는 선원들의 숫자로 보았을 때 함선 세 척을 모두 운용할 수는
없었기 때문에 한 대는 태워 버렸단다. 이제 남은 배는 빅토리아 호와 트리니다드 호 두 척뿐.
그들은 드디어 향료 군도에 도착을
했단다. 그들은 고국에 가져갈 많은 향신료들을 배에 싣고 드디어 고국 스페인으로 갈 준비를 했단다. 그런데 트리니다드 혹 고장이 나서, 고메스 데 에스피노자 함장과
절반의 선원들은 배를 고치기 위해서 남고, 빅토리아 호만 스페인으로 출발했단다. 하필 반란에 참여했던 세바스티안 델 카노가 함장으로 있는 배였다니… 아직
수에즈 운하가 만들어지지 않은 시기라 그들은 아프리카 남단 희망봉을 돌아서 가야 하니 그 길 또한 만만치 않은 항로였단다. 또 다시 식량 부족과 물 부족에 시달려서 또 많은 사람들이 죽었어.
결국 스페인을 출발한 지 3년에서 12일이 모자란 1522년 9월 8일 스페인에 도착했단다. 처음
출발할 때는 265명이었는데 18명만 살아서 스페인에 도착을
했어. 그리고 마지막 사령관은 마젤란의 배신자였던 세바스티안 델 카노였는데 모든 영광을 그가 다 차지했단다. 2년 전 마젤란을 배신하고 먼저 스페인으로 돌아온 산 안토니오 호의 사람들도 델 카노의 도움으로 모두 명예회복을
했단다.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자가 승리자이고 역사는 승리자의 기록이잖니.
....
스페인에 도착했을 때까지 있었던
마젤란과 항해기록자 피가페타의 항해일지가 사라져버렸어. 이곳 또한 스페인 정부가 자신들의 귀족들이 반란을
일으켰다는 내용이 적혀 있는 일지를 일부러 없앴다는 소문이 돌았단다.
...
마젤란이 중도에 허망하게 죽긴
했지만 그가 최초로 지구를 일주하고 태평양을 발견한 업적뿐만 아니라 그것을 실천하기까지 보여준 용기와 결단력은 높이 칭송되었다고 한다. 그는 안타깝게 죽었지만 후세에 영웅과 신화로 남았단다.
....
마지막으로 한가지 재미있는 일화... 항해기록자 피가페타는 항해하는 3년 내내 하루도 빼먹지 않고
일지를 쓰고 그날의 요일도 기록했는데 분명 수요일이었는데, 스페인 세비야에 도착을 했을 때 그곳은 목요일이라고
했어. 피가페타는 하도 이상해서 일지를 다시 점검했지만 빼먹은 날은 없었어. 당시 세계일주를 처음 하다 보니, 자전 방향으로 세계일주를 했을
때 지구 한 바퀴를 돌면 하루가 사라진다는 것을 몰랐던 거야. 나중에 이런 현상 때문에 날짜 변경선도
만들고 그랬나 보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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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3-284)
베르데
곶에서의 체류가 시간도 짧고, 위험하기도 했지만 씩씩한 기록자 피가페타는 마지막 순간에 그가 그토록
찾아헤매던 기적을 경험하게 되었다. 식료품을 사려고 해변까지 갔다온 선원들이 놀라운 소식을 전해왔는데, 육지는 목요일이라는데 배에서 수요일이 틀림없다고 했다는 것이다. 거의 3년 동안 매일같이 일지를 적어온 파가페타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한
번도 빠지지 않고 월요일, 화요일, 수요일, 그렇게 해서 한 주가 지나고, 1년이 지나도록 날짜를 계산해왔던
것이다. 그렇다면 그가 하루를 모르고 지나쳐버린 것일까. 그는
자기처럼 매일 선박일지를 쓰는 키잡이 알보에게 물어보았다. 그런데 그의 기록에도 아직 수요일이라는 것이었다. 서쪽으로 계속 항해하면 설명할 수는 없지만 하루가 달력에서 빠져나가는 것이 틀림없었다. 베르데 곶에서 처음으로 관찰한 새롭고 중요한 이 현상은 전생애에 걸쳐 그를 흥분시키고 몰두하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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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지막으로 지은이 슈테판 츠바이크의
마젤란 평가를 발췌하면서 오늘 독서 편지를 마치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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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1)
그러나
역사 속에서는 세속적인 이익이 어떤 업적의 가치를 결정하는 것은 아니다. 인류를 지속적으로 풍요롭게
하는 사람은 창조적인 의식을 고양시키는 자들이다. 이런 의미에서 마젤란의 행위는 당시 모든 행위들을
능가한다. 그의 명성 중에서 가장 특별한 것이라면 다른 지도자들처럼 자신의 이념을 위해 수천, 수십만의 목숨을 희생시킨 것이 아니라, 단 하나 자신의 목숨을 바쳤다는
사실이다. 바로 그토록 영웅적인 자기희생으로 인해 미지의 세계와의 성스러운 전쟁을 위해 떠난 다섯 척의
보잘것없고, 힘없고, 외로운 배들의 찬란한 용기가 영원히
잊히지 처음으로 실행에 옮기려 했고, 함대의 마지막 배 한 척이 이를 완수했다는 점에서 마젤란 자신도
잊히지 않는 존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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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참, 얼마 전에 책더미에서 어떤 책을 찾다가 아빠가 오래 전에 산 베른하르트 카이의 <위대한 항해자 마젤란(전 2권)>이란 책을 발견했단다. 그렇지, 아빠가 이 책을 샀었구나. 그때는 마젤란에 대해 궁금해서 샀던 것
같은데, 책더미 속에 있다 보니 ‘out of sight out of
mind’가 되었던 것 같구나. 이 책도 언젠가는 한번 읽어봐야겠구나.
그럼, 오늘은 진짜 이만.
PS,
책의 첫 문장: 일의 발단은 향료였다.
책의 끝 문장: 한 인간이 자신의 짧고 덧없는 일생을 바쳐 수백 세대를
거쳐 오는 동안 단지 꿈에 불과했던 것을 현실이 되게 하고 스러지지 않을 진실로 바꾸어놓은 것이다.
탐험의 시대는 거대한 배은망덕의 시대였다. 스페인이나 포르투갈을 위해서 전세계를 정벌해나간 저들 정복자들이 국왕에게 받은 대가는 처참하기 짝이 없었다. 콜럼버스는 사슬에 묶인 채로 세비야에 돌아왔고, 코르테츠는 왕의 총애를 잃어버렸고, 피자로는 살해되었으며, 남태평양을 발견한 누녜즈 데 발보아는 참수형에 처해졌다. 포르투갈의 투사이자 시인인 카모엔은 비열한 시골 관리들에 의해 누명을 쓰고 동지인 위대한 세르반테스처럼 몇 달, 몇 해를 오물통 같은 감옥에서 보내야만 했다. 카디스와 세비야의 골목길엔 귀향 선원들과 병사들이 불구가 되어 피폐해진 모습으로 열병에 시달리면서 거지떼처럼 헤매고 있었다. - P72
더 이상은 마젤란도 자신의 원대한 포부를 위해 바랄 것이 없었으리라. 그러나 좀더 경이롭고 중요한 일이 일어났다. 아직 어린 칼 5세는 말하자면 소극적이고 결단력이 부족한 성격이었는데, 성격과는 달리 이 원정대의 항해에 있어서는 열정적인 후원에 나섰다. 마젤란이 가졌던 남자다운 확고한 태도 때문인지, 아니면 이 원정의 대담한 때문인지, 무엇인가가 이 젊은 군주에게 특별한 열정을 불러일으켰음이 분명했다. 매주마다 진척사항에 대해 보고하도록 하는 등 누구보다도 그 스스로가 가장 장비와 항해 준비에 열심이었다. 때문에 일에 장애가 생길 때면 마젤란은 국왕에게 알리기만 하면 되었다. 그러면 왕의 서신이 모든 문제를 해결해주는 것이다. 평소에는 의지가 박약하고 남의 말을 잘 듣는 이 황제는 그의 긴 통치기간 동안 거의 유일하게 굳건한 신의를 지키며 이 위대한 이념을 실천해나갔다. - P115
그리고 이 순간 마젤란은 자신이 목적지에 도착했고, 자신의 업적이 완성되었음을 알았다. 그는 동쪽에서 출발하여 그가 12년 전에 도착한 바 있던 말라야 언어권의 한 변두리에 다다른 것이었다. 그토록 열망하는 향료의 섬에 도달하는 것은 본질적인 문제가 아니었다. 자신이 그 섬을 찾게 되던, 아니면 다른 사람이 그곳을 찾던 그것은 아무래도 좋았다. 업적의 본질은 향료의 섬이 아니라 누구든지 바다를 따라 계속 항해하면, 그것이 태양이 지는 쪽이든 뜨는 쪽이든 상관없이 자기가 출발했던 지점에 되돌아올 수 있다는 사실을 그가 증명했다는 것이다. 수천 년 전부터 철학자들이 추측해 왔고, 꿈꾸어 왔던 일이 한 인간의 용기에 의해 믿을 수 있는 사실이 된 것이다. 진정으로 지구는 둥글었다. 한 인간이 지구를 둥글게 한바퀴 돌아온 것이다. - P235
사령관이 누군지를 알았기 때문에 이제는 주로 주로 그를 겨냥했다. 벌써 두 번이나 투구를 머리에서 떨어뜨리기도 했다. 사령관은 몇 명 남지 않은 병사들과 함께 용감한 기사로서 더 이상 후퇴하려 하지 않고 자기 위치를 잘 지켰다. 이렇게 한 시간 이상을 대치해서 싸웠는데, 마침내 인디오 한 명이 사령관이 얼굴에 갈대로 만든 투창을 던졌다. 사령관은 노하여 이 공격자의 가슴을 창으로 찔렀다. 창이 찔려 죽은 사람의 몸에서 빠지지 않자 사령관은 이제 칼을 뽑으려 했지만 오른팔이 창에 찔려 마비가 되었기 때문에 절반 정도밖에 뽑지 못했다. 이를 보고 적군은 한꺼번에 그에게 달려들었고, 그 중 하나가 단칼에 왼쪽 다리를 내리치자 사령관은 땅에 얼굴을 박고 쓰러져 버렸다. 그러자 인디오들은 모두 그에게 덮쳐 창이나 다른 무기들을 가지고 그의 몸을 마구 찔러댔다. 그렇게 해서 그들은 우리의 거울이자 빛이요 위안이었던 지도자의 생명을 앗아가 버렸다. - P258
이제 하룻밤, 하루 낮, 이제 하룻밤만 지내면 된다. 단 하룻밤. 그리고 마침내(모두들 갑판으로 뛰쳐나가서 행복감에 전율하며 한 덩어리로 얼싸안았다) 산루카에서 바다와 만나는 구아달키비르 강이 육지 한가운데로 은띠처럼 반짝이며 흐르고 있었다. 바로 이곳에서 3년 전 265명이 마젤란의 지휘 아래 다섯 척의 배를 타고 출발했던 것이다. 18명의 선원들은 비틀거리면서 배에서 내리자 간신히 무릎을 꿇고 이 딱딱하고도 고마운 고향의 흙에 입을 맞추었다. 1522년 9월 6일, 항해사를 통틀어 가장 위대한 업적이 마침내 그 마침표를 찍은 것이다. - P2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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