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
낮이건 밤이건 들려오는 징과 피리와 꽹과리 소리에 남측은 상시 신경이 곤두설 수밖에 없었다. 스트레스를 받아 피가 나올 때까지 제 귓속을 후벼 파거나 머리카락을 쥐어뜯거나 점잖지 않은 욕설을 뱉어댔다. 대중 음악의 세례 속에서 자라난 젊은 미군들이 특히 힘들어하여 ‘박자, 저 염병할 박자 좀 어떻게 해줘’하고 비명 지르다 까무러치곤 했다. 프랭크 시나트라의 감미로운 목소리와 엘비스 프레슬리의 흥겨운 로큰롤 리듬에 길들여 있던 그들에게 징지쿵삐리딱징땡땡
하는 엇박자 굉음은 그저 고문이었다. 이 음파 고문에 남측은 집단 공황을 일으켰다. 숫자만 많았다 뿐이지 개별 전투력은 허접했던 중공군이 고작 악기 연주-여보게
그게 과연 연주인가-로 무섭게 기세를 올리는 중이었다. 당장
뾰족한 수가 필요했다.
(100)
하지만 그게 바로 전쟁이었다. 총알이 떨어져 아무
작대기나 들고 싸우다 수류탄이라도 하나 생기면 세상을 다 얻은 양 우쭐해져서 상대편 모인 곳으로 던졌다. 그
수류탄이 터질 때마다 부근에 있던 수많은 군인이 방사형으로 날아갔다. 부모가 있고 친구가 있고 꿈이
있는 이들이었다. 거기서 무시했다면 고향에 돌아가 연인을 만들고 가족을 만들고 음탕한 유전자 정보를
활용해 한 성씨의 시조도 될 수 있던 이들이었다. 그런 이들 수십 명이 싸구려 화약을 채운 수류탄 하나로
신의 공에 맞은 볼링 핀처럼 쓰러졌다. 그렇게 하여 얻은 건 고작 한두 뼘의 땅인데, 사실 군인 대부분이 저 멀리 북쪽이나 저 아래 남쪽 출신이어서 철원의 험준한 땅덩어리 한두 뼘을 맹렬히 탐낼
이유가 없었다. 따져보면 이유는 딱 하나, 남북 수령 간의
사이가 안 좋아 졸개끼리 머리통 터지게 싸우는 것이었다.
(178-179)
들어라, 미개한 국민이 자유만 원한다면 한탄하던
해방 직후의 남한 지도층은 북한이 쳐들어오니 자유가 위협받는다고 난리를 쳤다. 그들은 북한을 혐오하려
자유를 내세웠음에도 자유를 억압하기 때문에 북한을 혐오하는 척했다. 이윽고 북한이 패퇴하자 지도층은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가 무슨 복지원이니 무슨 학원이니 고상한 이름들을 단 강제수용소를 전국 방방곡곡에 세워 국민의 자유를 회수했다. 백골단이나 땃벌레나 각목부대 등의 이름으로 움직이는 관변 정치 깡패들도 기승을 부렸다. 준공무원을 자처하는 이들 정치 깡패는 사람의 어디를 때리면 가장 아픈지, 가장
상처가 크게 나는지, 가장 오랫동안 낫지 않는지 외과 의사만큼 잘 아는 자들이었다. 다만 지도층도 정치 깡패도 박복대의 자유는 함부로 건드리지 못했다. 박복대가
입은 미국 군복 때문이었다. 군인도 아니고 군무원도 아닌 관계로 박복대의 군복에는 계급장이 없었다. 다만 이름이 적혀 있었다.
(208)
인쇄란 정교하고 전문적이긴 하나 숙달된 노동자한테는 다소 지루한 작업이다. 뉴스를 물어 와 기사 쓰는 신문사와 달리 의뢰인이 써 온 글을 사용하는 것이어서 약간의 교정 교열과 판형 및
용지 선택, 조판 등 뻔한 과정을 반복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박복대는 그 무한 반복이 좋았다. 박복대는 전쟁이 터지기 전만 해도 자신이 농사를 무한히 반복하며 늙을
줄 알았다. 그에 비하면 인쇄라는 무한 반복은 몸이 더 편하고, 더
배울 게 많고, 보수도 아무튼 농사보다야 많고, 자연재해라는
예상치 못한 골탕을 먹을 일도 적고, 글씨를 연습하거나 인쇄물을 읽는 등 자유롭게 사용할 시간도 많았다. 세상에 이런 작업이 있는 줄 알았다면 천생 농부인 아버지도 당장 갈아탔을 것이다. 말은 거의 없지만 눈이 마주칠 때마다 씩 웃어주는 황 씨, 변 씨랑
지내는 것도 좋았다. 작업 전 청소, 교정 교열, 식자, 인쇄, 작업 후
청소와 뒷정리로 이어지는 매일의 일과가 퍽 행복했다. 시간이 잘 갔다.
무엇보다도 저녁밥이 너무나 맛있었다. 저녁 시간이 되어갈 때마다 이번에는 대체 어떤 반찬과
어떤 국이 나올까 궁금해 애가 탈 지경이었다. 한국에 있는 진미라는 진미는 모두 먹는 것 같았다. 자연히 살이 뒤룩뒤룩 쪘다. 한 해가 안 되어 80킬로그램을 훌쩍 넘겼다. 스무 살 넘은 나이에 키도 더 자라 177센티미터나 되었다. 당시 한국 남자의 평균 체격보다 많이 컸다.
(238)
들어라, 박정희 시대가 저물고 이제 세상이 좋아지나
했더니만 웬걸, 불과 두 달도 못 돼 또 다른 군인 자식이 쿠데타를 일으켰다. 이게 웬 횡재냐 하면서 허리 좀 펴보려 했던 사람들은 하늘이 무너진 것처럼 좌절했다. 한복 입은 모진 할아버지를 만나 죽도록 맞고, 그놈이 가자 이때다
하고 튀어나온 군복 입은 땅꼬마한테 또 죽도록 맞았는데, 그놈도 간 후 고개를 들어보니 저 앞에 군복
입은 대머리가 해머를 질질 끌며 오는 중이었다. 그게 바로 전두환의 등장을 대하는 시민들의 심정이었다. 이놈의 군인들은 적과 싸울 땐 부리나케 도망치던 주제에 제 나라 국민 두들겨 패는 일에는 미슐랭 레스토랑 앞에서처럼
줄을 서 있는 모양이었다.
(349)
박복대는 오랫동안 모른 채 살아왔다. 상한 고통만큼
잃은 고통도 큼을 모르고, 크게 쓰러지면 다시 일어날 수 없음을 모르고, 우리 삶이란 아찔한 상실의 연속임을 모르고 살아왔다. 그러나 피비린내
진동하는 화암동 계곡에 홀로 서세 된 박복대는 제 인식의 결핍을 채우기 위해 조연화에게 매달렸다. 조연화는
박복대와 정반대였다. 그녀는 손쓸 수 없이 다쳐버린 사람들을 너무 많이 돌보았다. 자기 삶을 쪼개가며 간호했다. 그런 이유로 초자연적인 치유의 비밀을
알기도 전부터, 알고 나서는 더더욱, 그녀에게 박복대는 저
참담한 헌신에서 눈을 떼 잠깐이나마 쉬게 해주는 존재였다. 박복대에게 조연화가 마땅히 달려가야 할 목표였다면, 조연화에게 박복대는 숨 돌릴 수 있는 휴식이었던 셈이다. 둘이 서로에게
자신을 가져다 묶은 이유는 그처럼 달랐다. 박복대는 자신을 완전케 해주는 사람을 찾아서, 조연화는 자신을 쓸모없게 해주는 사람을 찾아서.
(408)
부랑자의 재활을 위해 형제복지원이 있는 게 아니었다. 형제복지원의
운영을 위해 부랑자가 필요했다. 부랑자가 ‘나 부랑자야’하고 말할 리야 없겠으나 들어보면 어처구니없이 잡혀 온 원생이 너무 많았다. 집
주소를 쓰고 보호자 이름을 대고 전화번호까지 또박또박 읊어봤자 소용없었다. 용구산 공원에서 꽃을 꺾다가
잡혀 온 꼬마가 있었다. 자갈치시장에서 생선을 구경하다가 잡혀 온 소녀가 있었다. 늦게까지 회사 업무를 보고는 사랑하는 아내와 어린 아들이 기다리는 집으로 터벅터벅 걷다 잡혀 온 남자도 있었다. 그는 자신이 잡혀 온 사태를 전혀 이해 못했고, 작은 아버지가 국회의원을
했다느니 매형이 큰 사업을 한다느니 큰 소리로 바락바락 대들다가 피투성이가 되도록 두들겨 맞았다. 그쯤에서
멈췄으면 좋으련만, 어디 두고 보자며 대놓고 이를 갈았는데 이 협박에 위협을 느낀 조장들한테 두들겨
맞아 자대 배치도 받기 전에 깨꾸닥했다. 그의 협박은 거짓말이 아니어서, 정말로 일주일 뒤에 전직 국회의원인 작은아버지와 크게 사업하는 매형이 찾아와 무덤을 파고 시신을 인수해 갔다.
(597)
아는 얼굴이 점점 줄어들고 있었다. 그 많은 추억을
대체 어쩌라는 건지 몰라 막막한 심정이었다. 맥이 풀리고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요한 신부님마저 떠나자 이제 아무도 없는 것 같았다. 그게 걱정되어
우리 다정한 신께서 박복대가 잘 아는 얼굴, 툭하면 꿈에 나오던 얼굴,
결코 잊을 수 없는 얼굴 하나를 노숙자 차림으로 창신시장 국밥집에 데려다 앉혀놓았다.
(615)
하지만 박복대는 한국전쟁은 경험했다. 북한군에게도
맞아봤고 중공군과 유엔군에게도 맞아봤고 남한군에게도 맞아봤고 깡패에게도 맞아봤고 서북청년단에게도 맞아봤고 경찰에게도 맞아봤다. 시민한테도 맞아봤고 어린애한테도 맞아봤고 자랑은 아니지만 동생과 애인한테도 맞아봤고 병 고치는 의사한테도 맞아봤고
부자한테도 맞아봤고 거지한테도 맞아봤고 외국인한테도 맞아봤고 자동차한테도 맞아봤고 젠장 곰한테도 맞아봤다. 춘천에서
맞아봤고 홍천에서 맞아봤고 서울에서 맞아봤고 이북에서 맞아봤고 철원에서 맞아봤고 대구에서 맞아봤고 광주에서 맞아봤고 삼청교육대에서 맞아봤고 형제복지원에서
맞아봤고 무슨 연구소에서 맞아봤고 깊은 산속에서 맞아봤고 자기가 사장으로 군림하는 식당에서 맞아봤다. 분명하게
맞아봤고 모호하게 맞아봤고 적당히 맞아봤고 무분별하게 맞아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