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인간의 삶을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풍성하게 채우는 것들은 유대적인 관계, 온갖 느낌과 감정, 삶의 경험과 기억들이다. 하지만 삶이 끝나는 순간 이 모든 것들은 형태도 없이 사라지며 잊히고 만다.
금이 간 세상에서 피가 흐르기 시작했다. 이제 내
차례가 돌아왔다. 언젠가는 맞부딪쳐야 할 일. 마치 누군가
갑자기 내 뺨이나 콧잔등에 주먹질을 하는 것만 같다.
(53)
책장 앞에 서서 지난 수년 동안 우리가 사 모았던 책을 찬찬히 살펴보기도 했다. 수십 년간 일정한 간격으로 차곡차곡 사 모은 책들을 보고 있자니 마치 나무의 나이테 같다는 생각이 스쳤다.
(99)
모든 것이 끝이었다. 어쩌면 운명이란 것은 삶이
자연스럽게 끝나기도 전에 이미 그 목적을 이행하도록 결정지어진 것이 아닐까? 비록 죽음이 눈앞에 다가오지
않았다 하더라도 말이다. 이제 얼마 가지 않아 내 신체 중에서 의지대로 움직일 수 있는 모든 근육들은
시들어 버릴 것이다.
내 손으로 스스로의 운명을 좌지우지할 수 없는 이 상황이 마치 악몽처럼 느껴졌다.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때가 늦었다는 생각에 더더욱 견딜 수 없었다.
그것은 공포였다.
(118)
우리가 우주와 떼려야 뗄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생각한다면 그것은 꽤 그럴듯하게 들리기도 한다. 우리 또한 초신성 폭발로 인해 생성된 물질로 이루어진 존재이니까. 그렇다. 우리는 우주의 티끌, 우주진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우리 스스로를 우주의 티끌이라 칭하기보다 우주의 불꽃 또는 섬광이라 부르면 어떨까? 우리는 우주의 암흑 속에서 빛을 발하는 존재이기도 하니까.
(124)
나는 이 세상 전부를 빌려 살아왔다. 이제 그 빚을
갚아야 한다. 할부는 생각할 수도 없다. 단번에 모든 것을
갚아야 한다. 사랑하는 사람도 남겨 두고 떠나야 한다. 채무
문서에 그렇게 적혀 있다. 내겐 사랑하는 아들과 며느리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만큼 사랑스러운 아들과
며느리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만큼 사랑스러운 손녀딸 사라가 있다. 친구와 동료들도 있다. 하지만 무릎을 꿇고 애원해도 변하는 건 없을 것이다. 그들은 삶이
내게 건네주었던 선물이자 빚이기도 하다. 이제 나는 지나온 삶에 감사하며 빛을 갚아야 할 때가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