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악취가 나는 곳은 배수로가 아니에요.” 여자가 말했다. “세월이에요. 말하자면
부패한 세월이죠. 부패하고 타락하고 황폐해진 세월!”
(29)
“형편없는 시기에서는 말똥 맛이 나. 좋은 시가에서는 담배 맛이 나고, 아주 좋은 시가에서는 세상맛이
나지!”
(102)
수면 시간은 짧아졌고 자는 내내 뒤숭숭한 꿈이 끊이질 않았다.
이따금 프로이트 교수의 조언에 따라 잠에서 깨는 즉시 꿈 내용을 기록하면서 걷잡을 수 없이 사나워진 자신의 정신 상태를 다스려보려
했다. 그러나 허사였다. 소용이 없었다. 전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었다. 아네스카가 그의 가슴에서 심장을
꺼내 들고 다니는 것 같았다. 그의 가슴에서 여전히 두방망이질하는 건 이미 그녀의 소유가 되어버린 심장에
대한 기억뿐이었다. 그 심장은 이제 그녀의 활짝 벌린 손에 들려 있었고, 그녀의 앞치마 주머니에 들어가 있었고, 그녀가 누운 침대 틀의 버팀목
사이에 눌려 있었고, 그녀 잎에서 뜨겁게 고동치며 식탁 위에 놓여 있었다.
(122-123)
사랑하는 프란츨,
네가 말한 그 ‘이유’가
뭔지 잘 알 것 같아. 그래도 한 가지만 말하마. 오늘의
이유는 내일이면 벌써 어제의 이유가 되고, 늦어도 내일모레가 되면 잊어버린단다. 네가 여기 와서 불쑥 부엌 창문 앞에 서 있었다면 난 아마 너무 기뻐서 심장 마비로 죽었을지도 몰라. 그대로 네가 집으로 돌아오지 않아 나는 자랑스럽단다. 그렇지, 사람에겐 책임감이라는 게 있어야지! 무엇보다 자신의 양심을 지킬
줄 아는 책임감이. 그리고 어차피 집에는 일찍 오게 될 거야. 너를
꼭 껴안아주고 싶구나.
-
엄마가
(151)
“그 문제에 대해선 내가 도와줄 수 없을 것 같구나.” 프로이트가 말했다. “마음에 맞는 여자를 찾아내는 건 우리가 사는
문명에서 가장 어려운 일 중의 하나야. 그건 저마다 오롯이 혼자 해결해야 할 일이지. 우리는 혼자 세상에 태어나고 혼자 죽는단다. 하지만 처음으로 아름다운
여자 앞에 섰을 때 우리가 느끼는 고독에 비하면, 태어나고 죽는 건 그야말로 일대 사회적 사건처럼 생각되지. 중요한 문제가 생기면 우리는 처음부터 자기 자신에게 의지해야 해. 우리가
무엇을 원하는지, 어디로 가고 싶은지 늘 자신에게 물어야 해. 바꿔
말하면, 네 머리를 수고롭게 하라는 뜻이야. 그래도 답을
얻지 못하면, 네 심장에 물어봐!”
(239-240)
프로이트는 한숨을 쉬었다. “어쨌든 대부분의 길이
뭔가 낯익다고 생각되기는 하더구나. 하지만 길을 아는 것이 우리의 운명은 아니란다. 길을 알지 못하는 것이야말로 우리의 운명이지. 우리가 세상에 태어난
건 대답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질문을 하기 위해서야. 말하자면 끊임없이 이어지는 어둠 속에서 더듬거리며
가는 거지. 크게 운이 좋아야만 간혹 작은 빛이나마 타오르는 걸 볼 수 있어. 그리고 커다란 용기를 내거나 끈기를 보이거나 우직함이 있어야만, 가장
좋은 건 이 세 가지를 다 갖춰야만 스스로 여기저기 흔적을 남길 수 있는 거야!”
(254)
그게 참 뭔가 이상해요. 하루하루가 길어질수록 인생은
더 짧게 느껴지거든요. 모순이죠. 하지만 그게 원래 그래요. 내가 하나 물어볼게요. 인생을 연장하고 하루하루를 줄이기 위해 사람들은
무얼 할까요? 이야기를 해요. 이야기를 하고, 종알거리고, 수다 떨고, 남들
얘기를 해요. 그것도 거의 한시도 쉬지 않고. 이제야 드디어
조용한 곳에 왔구나. 하고 가끔 생각할 때가 있죠. 예를
들면 교회라든가, 그보다 더 조용한 공동묘지라든가 하는 곳에 갔을 때,
하지만 이게 웬걸! 벌써 누가 또 재잘재잘 수다를 떨기 시작해요! 아마 그건 천상이나 지하라고 해도 똑같을 거예요. 늘 누군가 입을
벌려 이야기를 하죠. 그런데 한 가지 말씀드리면, 하루 종일
사람들 입에서 나오는 것들은 대부분 그냥 쓰레기통에 처박아도 되는 것들이에요! 너도나도 다 이야기를
하지만 뭔가를 아는 사람은 없으니까요.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아는 사람이 없어요. 뭔가 사정을 아는 사람이 없어요. 제대로 아는 사람이 없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