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0)
“오늘의 문제에 대한 해답은 그 문제들을 야기한
사고방식으로는 찾을 수 없다”고 한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의 말이 떠오릅니다. 해답이 될 새로운 사고방식은 미래의 과학자들이 처방했듯이 언어입니다. 언어는
생각을 이끄는 힘입니다. 서로를 위하는 따뜻한 언어는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데 더없이 좋은 도구입니다. 언어는 살아 있는 생물과 같아서 번성하기도 하고 사라지기도 합니다. 인간의
욕망을 부추기는 언어는 번성하고 이익이 되지 않거나 관심에서 벗어난 언어는 쉽게 사라집니다. 생태언어는
관심에서 벗어나기 쉽습니다. 인간의 욕망과 동떨어져 있어 쉽게 잊히고 사라집니다. 언어가 없다면 언어가 가리키는 존재도 보지 못한다는 뜻이지요. 미래에서
온 과학자들이 생태계에 온기를 불어넣을 수 있는 말들을 모아 많은 사람들이 읽을 것을 처방한 이유입니다.
(23-24)
“그래서 마음이란 무엇인가요?”라고 질문하기는 쉽지만 답하기는 어렵습니다. 왜냐면 마음의 기본
값이 ‘흔들림’이기 때문입니다. 흔들림이 기본 값이라니. 그럼 마음은 알 수 없는 것일까요? 마음은 알고 싶어도 알 수 없는 것입니다. 굳이 정의를 내리자면
오락가락하는 감정을 가리키는 것이 아닐까요? 선과 악, 사랑과
미움, 옳고 그름, 진실과 거짓, 믿음과 배신, 정의와 불의, 손해와
이익, 욕망과 권태, 저항과 순종, 채찍과 당근, 판단과 보류, 갈까와
말까, 안과 밖을 오락가락하는 것이 마음입니다. 마음은 아침에
출근하고 저녁이 되면 집에 돌아오듯 몸 안과 몸 밖을 오가며 살아갑니다. 생존을 위해서 밖으로 나가
각종 정보들을 접한 다음 안에 들어와 그것을 소화하고 판단해야 합니다. 그래서 내부와 외부 사이의 균형을
유지해야 합니다. 균형을 잃지 않도록 마음을 모아 중심에 두어야 합니다. 내부 세계에서만 파묻혀 살면 고립되고, 외부로만 향하여 있다면 내부가
고갈되어 산만해지니까요. 마음이 중심에 있으면 흔들리지 않고 자신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사랑하면 됩니다. 간단하지요. 간단한 것이 실천하기는 어렵습니다.
(39)
생태감수성을 지닌 사람들은 모든 생명체가 공존할 수 있는 건강한 환경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가치를 구현하기 위해 행동합니다. 지구 환경 문제를 거시적이면서도 실천적인 측면에서 해결하려고 노력하고, 자연과 자신의 삶이 깊게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이해하며, 주변의
다른 생명체에 대한 사랑과 존중을 표현합니다. 이들은 생태계에도 깊이 공감하며 모든 것이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를 살펴보고, 특정 새나 식물의 부재와 같은 현지 생태계의 미묘한 변화에 주목하기도 합니다. 환경 윤리를 따르는 제품을 구입하거나 일회용품 사용을 피하고, 지금
세대와 미래 세대가 어떻게 하면 공존할 수 있는지를 모색합니다.
(66-67)
고통의 기억은 자신을 보호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고통은
괴로움을 안겨주지만 손상된 부위를 보호하게 하고, 앞으로 닥쳐올 상황을 미리 예측하여 피해를 막는 역할을
합니다. 극히 드문 일이지만 선천적으로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고통이 없다면 행복할 것 같지만 불행하게도 오래 살지 못한다고 합니다. 식물이든
동물이든 고통과 아픔을 느껴야만 살아남는 데 유리합니다. 그러나 고통의 기억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서
쉽게 사라집니다. 우리는 고통이 원인이 제거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이내 잊어버립니다. 그래야 또 사니까요. 하지만 고통의 의미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왜냐면 고통이 남기는 교훈마저 놓쳐버리게 되니까요.
(74)
땅과 교감하며 발맘발맘 걷다 보면 생태감수성도 생깁니다. 땅과
접촉하지 않는 사람은 신(God)과도 멀어진다는 말이 있듯이. 신발을
신으면서부터 인간은 자연과 멀어졌습니다. 걷기를 통해 발바닥에서 올라오는 알싸한 고통이 다른 생명의
아픔처럼 전해오면서 환경을 보호하려는 마음도 생깁니다. 대지의 여신 가이아는 스킨십을 원합니다. 부드러운 발바닥으로 땅을 어루만지면 땅의 기운이 온몸을 정화해줍니다. 프랑스의
철학자 장폴 스르트르는 “인간은 걸을 수 있는 만큼만 존재한다”고
말했습니다. 혼자서 걸으며 길 위에 떨어진 나뭇가지나 조그만 돌멩이 하나에도 의미를 부여하기도 하고, 무심히 떠가는 구름을 쪼개보거나 이웃 구름과 만나게 해서 새로운 모양을 만들어보기도 할 때 살아 있음을 느낍니다. 걷기는 나무가 그토록 하고 싶어 하는 일입니다. 일단 걸어보세요. 걷기의 힘이 무한하다는 것을 느끼게 될 테니까요.
(107)
자연 속에 존재하는 이름도 만만치 않습니다. 한복이
허리춤에 다는 복주머니처럼 생긴 복주머니꽃은 한때 개불알꽃이라고 불렸습니다. 꽃봉오리를 숙이고 있다고
하여 할미꽃, 제비꽃의 방언인 앉은뱅이꽃, 갈고리 같은 가시의
쓰임새를 상상한 며느리밑씻개, 비하의 의미를 지닌 개똥쑥, 개옻나무, 거지딸기 같은 이름도 있습니다. 동물에도 꼽추재주나방, 무당벌레, 벙어리뻐꾸기, 송장벌레, 문둥이박쥐 등 부정적인 이름이 많습니다. 개가 들으면 기절할 이름인
개나리, 개비자, 개여뀌,
개살구처럼 ‘개’가 접두어로 들어가면 부정의
의미를 지녀 어떤 것의 아류쯤으로 인식하게 됩니다. 바꿔 생각하면 개들의 사회에서 못된 개를 일컬어
‘사람 같은 개’라고 부르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121)
눈이 자란 궤적을 가지라고 합니다. 작은 가지와
눈, 그리고 잎은 외부 세계를 감지하는 레이더 역할을 합니다. 다양한
정보를 수집하여 분석하는 곳이지요. 낮과 밤의 길이를 재고, 중력과
바람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며, 주변 가지들의 방향을 탐지합니다. 만약
잘못된 정보를 수집했거나 분석이 잘못되면 그 가지는 여지없이 삭정이가 됩니다. 그래서 가지들은 끊임없이
질문을 하며 주변을 살펴야 합니다. 필자가 관찰해본 결과 나무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지며 벋어나간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126)
겨울에는 없지만 봄이 되면 방들은 빼곡히 들어차 각자의 일을 하겠지요. 여러분들도 겨울 숲에서 나무를 올려다 본다면 수많은 가지들이 질문을 던지며 망설이고 있는 모습을 보실 수 있을
겁니다. 왜 그렇게 많은 질문을 하느냐고 물어보면 가지들은 이렇게 대답할 것입니다. “우리는 떨어져 있는 것 같지만 서로 연결된 몸이거든요. 서로 배려하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는 존재이니까요. 사람도 그렇지 않나요?”
(133-134)
<산경표>는
땅에 대한 두 개의 인식 체계를 품고 있습니다. 첫째, 산은
물을 가르고 물은 산을 넘지 않는다는 산자분수령입니다. 한반도의 뼈대를 이루는 백두대간은 북에서 남으로
중심 줄기를 나눈 것입니다. 선조들은 산과 강을 따로 보지 않았습니다.
산과 강은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조화를 이루고 있다고 본 것입니다. 이 땅에 산 없이 시작하는
강은 없고 강을 품지 않은 산은 없으니까요. 둘째, 산은
나누고 물은 합친다는 산분수합입니다. 산은 물만 나누는 것이 아니라 생활 습관, 언어, 문화를 나누지만 물은 모든 것을 합칩니다. 같은 수계(水系)에 살면
음식 문화도 같고 생활 습관도 같습니다. 그러니 <산경표>는 지리서이기도 하지만 문화까지 다루고 있는 인문서이기도 합니다.
(170-171)
나무에게 바람이란 어렸을 때는 무서운 훈육 주임이고, 사춘기에는
친구이고, 청년기에는 연인이며, 장년기에는 질서와 규율이고, 노년기에는 스킨십을 잊기 못하게 하는 추억과 같습니다. 멀리 벋어
살아남기 위해 애써야 합니다. 나무가 좀 더 커서는 바람을 맞이할 준비가 되어 있으므로 친구처럼 대하고, 어엿한 나무가 되면 바람을 그리워하게 됩니다. 이는 마치 연연을
기다리는 것과 같습니다. 나무가 장성하여 숲의 주인이 되어갈 즈음이면 바람은 누구랄 것도 없이 더 크고자
하는 욕망을 통제하는 훈육 주임이 됩니다. 그러고 보니 훈육 주임이 두 번 등장입니다. 무서운 것도 잠시, 수백 년이 흘러 노목이 되면 무성했던 가지와
잎들도 사라지고 엉성한 가지들 사이로 바람도 피해가고 가지들의 울렁거림도 사라집니다.
(177)
나뭇가지와 잎에는 동물의 눈과는 다른 개념의 눈이 있습니다.
그 눈의 이름은 피토크로뮴이라는 식물의 단백질 색소로서 밝음과 어두움을 감지하는 역할을 합니다. 나무는
동물보다 더 넓은 범위를 감지할 수 있지만 사물의 자세한 움직임을 볼 수는 없습니다. 왜냐면 빛의 신호를
그림으로 바꾸어줄 수 있는 신경 체계가 없기 때문입니다. 동물과 식물 모두 빛을 감지하지만 나무는 주변의
사물들을 대상의 그림자로 인식합니다.
(187)
인류는 개처럼 후각이 뛰어나지 못하고, 고양이처럼
날렵하지도 못하며, 새처럼 눈이 좋지도 않지만 지구상에서 가장 성공했다고 자부하는 종입니다. 사람의 크기는 어떤가요? 사람의 크기가 커지면 더 많은 자원을 필요로 하게 되어
불리해질 텐데, 지구의 모든 사정을 고려할 때 지금의 사람 크기가 적당했나 봅니다. 지구의 역사에서 공룡같이 덩치가 큰 동물들이, 자신의 그늘에 숨어있던 작은 생물들이 살아남은 모습을
곁눈으로 지켜보며 사라져갔다는 것을 떠올려보면, 마냥 크다고 좋은 것도 아니고 작다고 좋은 것이 아니라는
사실만 알 뿐입니다. 공룡이 멸종할 당시 인류의 조상이었던 포유류는 몸집이 작은 존재였다는 점에서 운이
좋았을 뿐입니다. 크기는 상대적이며 주관적인 것이니까요.
(190-191)
흙이 더럽다는 인식을 두고는 흙의 입장과 사람의 입장이 서로 다릅니다. 사람들은 흙 속에 동물의 똥이나 사체들이 들어 있어 흙을 더럽다고 여기고, 흙의
입장에서는 오염 물질이 유입되거나 못하는 가장 주된 원인은 밟혀서 다져진 땅이 되었을 때입니다. 정상적인
흙은 광물질 45퍼센트, 수분 25퍼센트, 공기 25퍼센트, 유기물 5퍼센트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이 수치에서 흙 속의 절반이 비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빈 공간이 줄어들면 물과 공기가 저장되지 못하고 살아 있는 생명체들이 내뿜은 탄산가스마저 빠져나가지 못하는 불행한 일이 벌어집니다. 그렇게 되면 식물은 물론이고 대부분의 생명체들이 죽고 썩어들어가면서 에너지를 순환하지 못하고 흙이 ‘더러운 것’이 됩니다.
(202)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무수히 많은 생명체가 존재합니다. 생명체
각각은 자신만의 역할과 기능을 지닌 채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우리 인간도 그 연결 고리의 한 부분이며, 많은 생명체와 함께 살아가고 있지요. 특히 세포학의 연구를 통해
인간의 몸속에 수많은 미생물들이 존재하며 그들이 서로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공생 관계는 자연의 기본 원칙 중 하나이며, 서로 이익을 주고받기 위한 생태계의 필수 덕목입니다. 세포질을 연구한 미생물학자 린 마굴리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수분을
제외한 우리 몸의 10퍼센트 이상은 살아 있는 박테리아로 이루어졌다.
그들의 일부는 비록 우리 몸의 직접적인 구성원은 아닐 지라도 그들 없이는 우리도 존재할 수 없다.”
(218)
나무는 속을 비웁니다. 오래된 나무는 대부분 속이
비어 있는 것을 보실 수 있습니다. 나무는 나이를 먹을수록 중심을 비우므로 하늘과 땅의 소통을 이룹니다. 비어 있음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텅 빈 공간입니다. 노자는 마차
바퀴의 중심이 비어 있어서 유용하다고 했습니다. 나무는 속을 비워내므로 많은 생명체들이 그 안에 깃들어
삽니다. 아늑하고 따뜻하며 숨기 좋은 그곳은 하룻밤 동물들이 쉬어가고 새들의 집이나 곤충들의 사냥터가
되기도 합니다. 살아서 몸을 보시하는 보살의 화신인 것이지요. 한편
나무가 속을 비운다는 것은 과거를 잊는 것과 같습니다. 나무는 지나간 시간을 잊고 오로지 현재에만 존재합니다.
(220)
수많은 질문을 던지며 지구를 연구한 외계인은 나무 전문가의 말과 스스로 연구한 기록을 토대로
삼아 다음과 같은 짧은 보고서를 작성하고 지구를 떠났다고 합니다. “답은 나무다. 나무는 공기를 정화하고 물을 가두며 흙을 움켜쥐고 모든 생명을 보듬는다. 따라서
지구의 모든 생명체는 나무에게 빚을 지고 있다. 그러나 나무의 고마움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은 것 같다. 나무를 불평하지 않고 어디서든 잘 자라며 봉사할 준비가 되어 있는 이타적인 존재이기 때문이다. 지구가 빨개진 이유는 사람들이 전쟁과 약탈을 일삼으며 나무를 파괴했기 때문이다. 인류는 지금 ‘볼 빨간 사춘기’를
맞이한 것 같다. 지구인들은 이웃 나라와 부딪히며, 망가진
지구를 재건할 생각은 안 하고 우주 어디론가 떠나고 싶어 한다. 이대로 가다가는 지구를 구할 골든타임을
놓칠 위험에 처해 있다. 이제 지구인이 살아남는 방법은 나무에게 지혜를 구하고 실천하는 데 있다. 이상.”
(282-283)
생태계의 꼴은 지구의 살림입니다. ‘살림’은 곧 ‘생명’을 가리키고, ‘목숨을 살리다’는 문장의 명사형이기도 하며, 한 집안을 이루고 살아가는 일을 가리키기도 합니다. 지구 살림은
너무 큰 탓에 사람들이 무관심하기 마련입니다. 만약 아이들이 들판에서 땅벌에 자주 쏘인다면 누구를 원망해야
할까요? 한참을 궁리해야 할 겁니다. 사람들은 사물을 보면
그 사물이 맺고 있는 상호 관계 대신에 단순한 인과 관계만을 인식하는 경향이 있어서, 복잡한 상호 관계를
바탕으로 이루어진 생태계를 잘 이해하지 못합니다. 생태계는 넓은 시각으로 보아야 잘 보입니다. 불교의 연기법에 따르면 어떤 생명체 중에도 독립된 실체는 없으며 다른 것과 상호 연관을 맺어야만 생명이 유지된다고
합니다. 따라서 연기의 고리를 끊지 말고 낱 생명을 넘어 온 생명을 들여다보아야 비로소 생태계에 대한
총체적인 이해가 가능해집니다. 우리에게 익숙한 아래의 노래가 생태계의 특성을 잘 보여줍니다. “원숭이 엉덩이는 빨개, 빨개면 사과, 사과는 맛있어. 맛있으면 바나나,
바나나는 길어, 길으면 기차, 기차는 빨라, 빠르면 비행기, 비행기는 높아, 높으면
백수산.”
(322)
소설가 박경리 선생이 “인간이란 모름지기 자연의
이자로만 삶을 꾸려야 한다”고 말씀하셨는데도 말입니다.
(368-369)
보전(保全)은
앞으로도 계속해서 자연의 자원을 사용하기 위해서는 지금부터 아껴야 한다는 생각에서 출발합니다. 따라서
보전을 지지하는 보전주의자는 인간이 지속 가능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자연을 보호하고 관리해야 한다는 의무감을 지닙니다. 환경 보호의 이유를 자연이 인간에게 유용한 자원이기 때문이라고 꼽는다면 보전론자에 가깝습니다. 보존(保存)은 미래를
위해서가 아니라 자연은 존재 자체로 가치가 있기에 원래의 모습대로 두어야 한다는 입장을 따릅니다. 인간의
생명이 소중한 만큼 다른 생명도 소중하니까 귀하게 여겨야 한다는 생각을 바탕으로 삼습니다. 많은 사람들의
이익을 위한 것이라도 전부터 존재하던 아름다운 자연을 망가뜨리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면 보존주의자입니다.
(385-386)
인류는 현재 기후 변화라는 해결이 불가능해 보이는 문제에 봉착해 있습니다. 지금보다 더 풍족하게 살 수는 없습니다. 소비를 줄이고, 나무처럼 자연의 회복 능력을 믿으며, 서로 협력하면서 작은 문제부터
해결하려는 의지를 보일 때 기후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는 희망이 찾아올 것입니다. 사람이 변할 수 있다는
사실이야말로 사람에게 가장 큰 희망입니다. 뛰어난 지능을 지난 과학자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미래를 이해하고 싶다면 과학의 시선이 머무는 곳을 바라보아야 한다고들 합니다.
과학의 시선이 지금 ‘이루어야 할 것’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후손들에게 ‘더 나은 미래를 물려주기 위한 것’에
머물 때, 인류에게 희망이 있다는 것을 명심하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