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

말은 실체를 인간 마음이 파악할 수 있을 정도로 축소시킨다. 언어는 성대에 의해 생성되는 다섯 개의 기본적인 소리로 이루어져 있다. 그것들은 , , , , 의 다섯 가지 모음이다. 나머지 소리들은 공기 압력 조절을 통해 만들어지는 , , 등의 자음들이다. 이러한 기본적인 음의 몇 가지 조합만으로 당신이 누구인지, 우주의 궁극적인 목적이 무엇인지, 아니면 한 그루의 나무나 돌멩이 하나에 대해서라도 그 깊은 곳에서 그것이 무엇인지를 정말로 설명할 수 있다고 믿는가?

 

(66)

그러나 만약 우리가 사물들을 자아 강화의 수단으로 사용한다면, 즉 사물을 통해 자기 자신을 찾으려 한다면, 우리는 실제로는 사물을 존중하는 것이 아니다. 에고가 하는 일이 정확히 그것이다. 에고가 사물과 동일화되면 사물에 대한 집착과 강박관념이 생겨나고, 그것으로부터 우리의 소비 사회와 경제 구조가 만들어진다. 이곳에서는 발전의 유일한 측정 기분이 언제나 더 많이이다. ‘더 많이와 끝없는 성장을 위한 이 억제되지 않는 분투 노력은 하나의 기능장애이고 질병이다. 자기를 증식시키는 것만이 유일한 목표이고, 실제로는 자신이 그 일부인 전체 조직체를 파괴해 결국 자신도 파괴되는 결과가 됨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암세포의 기능 장애와 똑같다. 경제 전문가들 중에는 성장이라는 개념에 너무 집착한 나머지 어떻게든 그 단어를 사용하기 위해 경기 후퇴를 마이너스 성장이라고 부르는 사람도 있다.

 

(76)

어떻게 하면 물질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을 수 있는가? 그런 것은 시도조차 하지 않는 것이 좋다.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물결 속에서 자신을 찾으려고 하지만 않는다면 물질에 대한 집착은 저절로 떨어져 나간다. 그때까지는 자신이 물질에 집착하고 있음을 알아차리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때로는 어떤 것을 잃거나 잃어버릴 위험에 처하기 전까지는 자신이 그것에 집착하고 있다는 것을, 즉 자신이 그것에 동일화되어 있다는 것을 모를 수가 있다. 잃어버릴까 봐 화를 내거나 불안해한다면 당신이 그것에 집착하고 있다는 의미이다. 자신이 물질과 동일화되어 있음을 알아차리면 그 동일화는 더 이상 완전하지 않다. ‘집착이 있음을 알아차리는 그 알아차림이 바로 나 자신이다.’ 그것이 의식 변화의 시작이다.

 

(84-85)

내부의 몸은 사실은 육체가 아니고 생명 에너지이며, 형상과 형상 없음 사이의 다리이다. 가능한 한 자주 내부의 몸을 느끼는 습관을 들이는 것이 좋다. 얼마 후면 눈을 감지 않아도 느낄 수 있게 된다. 예를 들어,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면서도 내부의 몸을 느낄 수 있다. 예를 들어,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면서도 내부의 몸을 느낄 수 있다. 모순처럼 들리지만, 내부의 몸과 접촉하고 있을 때 사실은 더 이상 육체와 동일화되지 않으며 자신의 마음과도 동일화되지 않는다. , 더 이상 형상과 동일화되지 않고 형상과의 동일화로부터 멀어져서 형상 없음으로 향해 간다. 이 형상 없음을 우리는 존재라고 부를 수도 있다. 그것이 당신 정체성의 핵심이다. 몸에 대한 그 알아차림은 당신을 지금 이 순간에 닻에 내리게 할 뿐 아니라, 에고라는 감옥으로부터 빠져나오는 출구가 된다. 이것은 면역 체계와 신체의 자연 치유력도 강화시켜 준다.

 

(101-102)

자신이 옳다고 여기는 것만큼 에고를 더 강화시켜 주는 것은 없다. 옳다는 것은 하나의 관점, 의견, 판단, 이야기 등과 같은 정신적 입장을 자기와 동일시하는 것이다. 그런데 자신이 옳기 위해서는 당연히 틀린 누군가가 필요하다. 그래서 에고는 옳기 위해 누군가를 틀리게 만들기를 매우 좋아한다. 바꿔 말해, 자신의 더 강한 자아의식을 얻기 위해 다른 사람들을 틀리게 만들 필요가 있다. 사람뿐만이 아니라 상황도 불만과 반응을 통해 틀린 것으로 만들 수 있다. “이런 일은 일어나면 안 돼.”라고 말하는 것이다. 자신이 옳다는 주장은, 잘못되거나 문제가 있다고 판단되는 사람과 상황에 대해 자신을 상상 속에서 도덕적으로 우월한 위치에 올려놓는다. 에고가 갈망하는 것이 그 우월감이며, 그것을 통해 에고는 자신을 강화시킨다.

 

(117)

에고의 밑바탕에서 모든 행동을 지배하는 감정은 두려움이다.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되는 것에 대한 두려움, 존재하지 않게 될 것 같은 두려움, 죽음의 두려움이다. 결국 에고의 모든 행동은 이 두려움을 없애기 위해 기획된 것이다. 하지만 에고는 기껏해야 가까운 관계, 새로운 소유물, 혹은 이런저런 성취들로 일시적으로 이 두려움을 덮여 버리는 것밖에 할 수 없다. 환상은 결코 당신을 만족시키지 못한다. 오직 나는 누구인가의 진리만이, 만약 당신이 그것을 깨닫는다면, 그것만이 당신을 자유롭게 할 것이다.

 

(125)

소심함은 종종 눈에 띄게 부정적인 자아의식, 즉 자신에게 무엇인가 많이 부족하다는 믿음과 함께한다. 자기 자신을 이러저러하게 보는 관념 속 자아의식은 내가 최고야.’라는 식의 두드러지게 긍정적이든, 아니면 나는 형편없어.’라는 식의 부정적이든, 어느 쪽이든 에고이다. 모든 긍정적인 자아의식 뒤에는 그럼에도 아직 충분히 좋지 않다는 불안이 숨어 있다. 모든 부정적인 자아의식 뒤에는 최고가 되고 싶고 다른 사람보다 나은 존재가 되고 싶어하는 욕구가 숨어 있다.

 

(142-143)

어린 자식이 있다면 최선의 능력을 다해 돕고 지도하고 보호해야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아이에게 공간을 허용하는 일이다. 존재할 공간을, 아이는 당신을 통해 이 세상에 왔지만 당신의 것이 아니다. ‘무엇이 너를 위해 가장 좋은지 내가 잘 안다라는 믿음은 아이들이 아주 어렸을 때는 진실일지 모른다. 그러나 아이가 커 갈수록 그것은 점점 더 진실이 아니게 된다. 아이의 삶이 어떻게 펼쳐져야만 하는가에 대해 기대가 크면 클수록, 당신은 아이를 위해 이 순간에 존재하기보다는 당신의 생각 속에 더 많이 사로잡혀 있게 된다. 모든 인간이 그렇듯이 아이도 언젠가는 실수를 저지를 것이고 어떤 형태로든 고통을 경험할 것이다. 사실 그것들은 당신의 관점에서 볼 때만 실수일지도 모른다. 당신에게는 실수로 보여도 아이에게는 꼭 필요한 행동과 경험일 수도 있다. 가능한 한 도움과 조전은 주어야 하지만, 특히 이제 막 성인이 된 아이는 때때로 실수할 필요가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그리고 때로는 고통을 겪게 해주어야만 할지도 모른다. 고통은 뜻밖에 찾아올 수도 있고, 지신이 저지른 실수의 결과로 올 수도 있다.

 

(148)

사랑한다는 것은 다른 사람 안데 있는 자신을 알아보는 것이다. 그때 그 다른 사람의 다름은 순전히 인간적인 영역, 형상의 영역에만 존재하는 환상임이 밝혀진다. 모든 아이 안에 있는 사랑에 대한 갈망은 형상 차원뿐 아니라 존재 차원에서도 부모가 자신을 알아봐 주기를 바라는 갈망이다. 부모가 인간 차원에서만 아이를 존중하고 존재 차원을 하다면, 아이는 그 관계가 불충분하며 절대적으로 중요한 무엇인가가 빠져 있다고 감지할 것이다. 아이의 내면에 고통이 쌓이고, 때로는 무의식중에 부모를 원망할 것이다. “왜 나를 알아봐 주지 않는 거야?” 아이의 고통과 원망은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152-153)

에고는 왜 역할을 연기하는가? 제대로 조사해 보지도 않은 한 가지 가정, 한 가지 근본적인 오류. 한 가지 무의식적인 생각 때문이야. 그 생각은 나는 충분하지 않다.’라는 것이다. 이 생각으로부터 다른 무의식적인 생각들이 뒤따른다. ‘나는 충분한 자신이 되는 데 필요한 것을 얻기 위해 역할을 연기할 필요가 있어.’ ‘더 많이 존재하기 위해 더 많이 얻을 필요가 있어.’ 그러나 당신은 당신인 것보다 더 많이 당신이 될 수 없다. 왜냐하면 육체적 심리적 형상 밑바탕에서 당신은 생명그 자체, ‘존재그 자체와 하나이기 때문이다. 형상 곳에서는 당신은 언제나 어떤 사람보다 열등하고 어떤 사람보다 우월할 것이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본질 속에서는 당신은 누구보다 열등하지도 않고 우월하지도 않다. 진정한 자존과 진정한 겸손은 이 깨달음으로부터 생겨난다. 에고의 눈으로 보면 자손과 겸손은 대립적이다. 진리 속에서는 그 둘은 하나이며 같은 것이다.

 

(159)

어떻게 하면 지금 평화로울 수 있는가? 현재의 순간과 화해하는 것이다. 현재의 순간은 삶의 놀이가 일어나고 있는 장이다. 삶의 놀이는 다른 곳에서 펼쳐질 수 없다. 현재의 순간과 화해하면 무엇이 일어나는지 보라. 자신에게 무엇이 가능한지, 어떤 행동을 선택할 수 있는지를, 아니 더 정확히 말해, 삶이 당신을 통해 무엇을 하는지를, 삶의 예술에 대한 비밀, 모든 성공과 행복의 비밀을 전하는 세 단어가 있다. ‘삶과 하나가 되기이다. 삶과 하나가 되는 것은 현재의 순간과 하나가 되는 것이다. 그때 당신은, 자신이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삶이 당신을 살고 있음을 깨닫는다. 삶은 춤추는 자이고, 당신은 그 춤이다.

 

(186-187)

우리는 길을 잃어버린 종이다. 자연 속 모든 존재들, 모든 꽃과 나무, 모든 동물들이 우리에게 중요한 교훈을 가르쳐 준다. 우리가 멈춰 서서 바라보고, 귀를 기울이면 들을 수 있다. 오리가 가르쳐 주는 교훈은 이것이다. “날개를 털어라.” 그것을 해석하면 이야기를 내려놓으라.”이다. 그리고 힘을 가진 유일한 장소로, 현재의 순간으로 돌아오라.

 

(188)

과거의 사건들은 기억으로 당신 안에서 계속 살아가지만, 그 기억 자체는 문제가 안 된다. 그뿐 아니라 기억 덕분에 과거로부터, 그리고 과거의 실수로부터 배움을 얻을 수 있다. 기억, 즉 과거에 대한 생각에 당신이 완전이 지배되고 그것이 짐으로 바뀔 때 비로소 기억이 문제가 된다. 또한 그것이 당신의 자아의식의 일부가 될 때, 과거에 의해 조건 지어진 성격이 당신을 가두는 감옥이 된다. 당신의 기억들에 자아의식의 옷이 입혀지고, 당신의 이야기는 당신이 생각하는 가 되어 버린다. 작은 나는 환상이며, 시간을 초월하고 형상을 초월한 현존으로서의 진정한 정체성을 흐려 버린다.

 

(191-192)

이 세상에 태어나는 모든 신생아는 이미 감정적 고통체를 가지고 있다. 그중에는 다른 사람들보다 더 무겁고 단단한 고통체를 가지고 있는 아이도 있다. 언제나 행복한 듯한 아이도 있고, 큰 불행을 지니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아이도 있다. 충분한 사랑과 관심을 받지 못하기 때문에 잘 우는 아이가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특별히 이렇다 할 이유가 없는데도 마치 주변 사람을 자신처럼 불행하게 만들고 싶어 하는 것 같은 아이도 있다. 그리고 종종 그것이 성공한다. 이러한 아이는 인류 고통의 짐을 특히 많이 가지고 이 세상에 온 것이다. 어머니와 아버지가 발산하는 부정적인 감정을 느끼기 때문에 잘 우는 아이도 있다. 부모의 부정적인 감정이 아이에게 고통을 주고, 부모의 고통체로부터 나오는 에너지를 흡수해 아기의 고통체가 커진다. 어느 경우든 아이의 신체가 자라남에 따라 고통체도 함께 커간다.

 

(195-196)

세상 만물은 끊임없는 움직임 속에서 진동하는 에너지 장이다. 당신이 앉아 있는 의자, 손에 들고 있는 책은 견고하고 움직임이 없는 물질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단지 당신의 감각기관들이 그 진동하는 주파수를 그런 식으로 지각하기 때문이다. 물질은 의자든 책이든 나무든 몸이든 끊임없이 진동하는 분자, 원자, 전자, 그리고 미립자들로 이루어져 있다. 우리가 물질로 지각하는 것은 특정한 주파수 영역에서 진동하는, 혹은 움직이는 에너지이다. 생각도 역시 똑같이 에너지 진동이지만 주파수가 물질보다 높기 때문에 볼 수도 만질 수도 없는 것이다. 생각에는 생각만의 주파수대가 있는데, 부정적인 생각은 더 낮은 쪽 주파수로, 긍정적인 생각은 더 높은 쪽 주파수로 진동한다. 고통체의 진동 주파수는 부정적인 생각의 주파수와 공명한다. 그래서 부정적인 생각만이 고통체의 먹이가 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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