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베리아의 별, 이위종 - 대한제국 외교관에서 러시아 혁명군 장교까지, 잊혀진 영웅 이위종 열사를 찾아서
이승우 지음 / 김영사 / 2019년 7월
평점 :
절판



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근현대사에 관련된 책을 읽거나 공부를 할 때 꼭 등장하는 역사적 사건이 1907년 만국 평화 회의 헤이그 특사 파견이란다. 3명의 조선인 특사 3명이 헤이그에 갔는데, 이상설, 이준, 이위종이 그 분들이다. 이상설은 그 이전에도 많은 독립운동을 하셨고, 이준은 헤이그에서 서거를 하셔서 많이들 언급되곤 하는데, 이위종은 다른 두 분에 비해 많은 관심을 받지 못하곤 했어.. 아빠만 그렇게 생각할 수 있지만 말이야. 인터넷 서점에서 우연히 이위종의 책에 대해 알게 되어 구입했단다. 이 책을 읽고 나서, 이위종이라는 분과 그의 아버지 이범진이라는 분이 정말 멋지고 훌륭한 분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단다. 우연히 알게 된 책이지만, 이 책을 만나 읽게 된 것이 정말 행운이었다고 생각할 정도로 멋진 분을 만나게 되었어.

지은이라는 이승우라는 분인데, 한국역사학회, 한국근현대사학회의의 역사연구가라고 하시는구나. 이위종에 대한 자료가 많지 않다 보니, 지은이의 상상력으로 채워진 부분도 많다고 서두에 이야기를 했단다. 그러니까 이 책의 일부는 사실이 아닐 수 있지만, 그래도 인간 이위종에 대해 알 수 있는 좋은 기회였던 것 같구나. 이위종이 했던 연설문 원문과 이위종의 후손들과 인터뷰한 내용들도 실려 있어서 좋았단다.

 

1.

이위종은 18841 9일 태어났단다. 그의 아버지 이범진에 대해서 먼저 이야기를 해야겠구나. 아버지 이범진은 서출 출신으로 무시당하며 지냈지만, 갑신정변 때 명성황후를 피신시킨 공으로 고종에게 발탁되었단다. 이후 아관파천을 주도하는 등 고종의 최측근이되었어. 명성황후가 살해당한 후 사건의 진상에 대해 조사를 했는데 이로 인해 일본의 기피대상 1호가 되기도 했어. 아관파천으로 조선 정부에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 러시아는 일본이 기피대상 1호로 삼은 이범진을 국내에 두는 것을 부담스러워했어. 그래서 이범진은 미국주차 특명전권공사라는 직함으로 미국으로 보냈단다.

이때가 1896 7 16일이었는데, 이범진은 당시 12살이었던둘째 아들 이위종을 미국에 데리고 갔단다. 이위종은 미국에서 공부를 했고, 13살에는 미국횡단열차를 타고 여행을 했단다. 그것도 아버지 없이 통역을 담당했던 이의담과 단둘이 말이야. 이 여행으로 견문도 넓히고 생각도 깊어지지 않았을까 싶구나. 그리고 13살짜리 아들을 이국땅에 혼자 여행을 보내는 이범진도 대단하시구나.

1899년 이범진은 러시아, 프랑스, 오스트리아 3국 특명전권공사로 부임하게 된단다. 그래서 이범진은 이위종과 함께 미국을 떠나 프랑스 파리로 갔단다. 이위종은 파리에서 리쎄 대학에 입학해서 국제법을 공부한단다. 1902년에는 생시르 육군사관학교에 입학을 해서 군사학을 공부했어. 우리나라 사람이 그 당시 프랑스의 육관사관학교를 다녔다니... 이 시절에 이위종은 애덤스미스와 루소를 공부하여 영향을 받았다고 하는구나. 이범진은 이번에는 러시아공사를 임명되어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로 가게 되었어. 이번에도 이위종도 함께 갔는데, 어느덧 성인이 된 이위종은 조선공사관 판임관 3등참서관으로 임명 받아 가게 된 것이란다.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이위종은 인생의 반려자를 만나게 되는데 러시아 사람 엘리자베타였단다. 나중에 알고 보니 육군사관학교 친구인 빅토르의 여동생이었대. 아버지가 처음에는 반대를 했지만, 이위종은 아버지를 설득하고, 결혼을 위해서 필요한 러시아정교 세례까지 받고 엘라비베타와 결혼을 했단다. 행복했던 이위종과 달리 당시 러시아 사회는 혼란스러웠단다. 1905 1월에는 피의 일요일 사건이 있었는데 이를 직접 목격한 이위종은 민중의 삶에 대해 새로이 알게 되었대. 거기에 러시아는 일본과 전쟁에서 패배하고 말았어. 전쟁은 러시아가 졌는데, 우리나라가 더 큰 피해를 얻게 되었단다. 조선의 지배권을 일본이 주도권을 쥐게 된 거야.

그런 분위기는 1905 11월 을사늑약까지 이어졌단다. 하지만 이것은 불법이었잖니. 얼마 전에 읽은 <헐버트의 꿈, 조선은 피어나리!>에서 이야기했듯이 을사늑약은 고종이 승인하지 않았기 때문에 불법인 것이야. 이런 부당을 알리기 위해 1907년 만민평화회의가 열리는 헤이그에 특사를 보내기로 했어. 그렇게 뽑힌 사람이 이상설, 이준, 이위종이었단다. 국내에 있던 이상설과 이준은 블라디보스토크로 갔고, 그곳에서 이범준과 이위종을 만났단다. 그들은 상트페테르부르크를 거쳐서 1907 6월 헤이그에 도착했단다. 만국평화회의에 을사늑약의 불법성을 심의해달라고 요청했어. 이때 활약을 한 이가 러시아어, 프랑스어, 영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이위종이었단다. 이위종은 각국 언론과 인터뷰를 하고 외교관을 만나 설득했단다. 기자들 앞에서 연설을 할 기회가 있었는데 프랑스로 연설을 했다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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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3-164)

그 순간 연설회장은 찬물을 뒤집어쓴 듯 정적이 감돌았다. 위종은 조용한 장내를 천천히 둘러보며 잠시 숨을 고른 뒤에 입을 열었다.

“세상에 부자와 빈자가 있듯이 강한 나라가 있으면 약한 나라도 있습니다. 강한 나라가 약한 나라를 모두 먹어치우는 세상이라면 그 세상을 정의의 신이 지배한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이 믿는 정의의 신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이웃의 재물을 탐해서는 안 되고, 이웃을 사랑하며, 가난한 사람에게 자선을 베푸는 것이야말로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자 예수의 가르침이 아닙니까?

하지만 문명국가의 시민이자 그리스도인이라고 자부하는 여러분은 지금 일본의 침탈과 압제로 고통받는 우리 대한제국을 외면하고 있습니다. 우리 국민은 아직 잘 조직되어 있지는 않으나 독립과 자유라는 공동의 목표를 위해서는 정신적으로 확고하게 결합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일본인의 잔인하고도 비인도적인 침략이 종말을 고할 때까지 싸울 것입니다. 우리는 실패에 처하더라도 결코 절망하지 않고 다시 하나로 뭉쳐서 최후의 한 사람이 남을 때까지 저항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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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만국평화회의는 겉으로만 평화회의였지, 열강들이 식민지 탈취의 목적을 숨긴 채 겉으로만 생색만 낸 행사였단다. 이준 열사는 그곳에서 패혈증으로 순국하시게 된단다. 일본은 이 사건 이후 고종을 강제로 폐위시키고, 궐석재판을 통해 이상설은 사형, 이미 순국하신 이준과 이위종은 무기징역을 선고했어. 이들은 끝내 다시는 조선땅을 밟지 못했단다.

 

2.

이범진은 이위종에게 연해주로 가서 의병활동을 하라고 해서 이위종은 연해주로 오게 된단다. 그곳에서 이위종은 최재형과 이범윤과 만나 의병활동을 시작했어. 이위종은 동의회 회장을 맡아 국내연합작전에도 참여했단다. 이위종은 프랑스 육관사관학교 출신으로 의병들에게 도움을 주었어. 당시 연해주에서 의병 활동하던 이들에는 너무나 유명한 안중근과 전재익, 엄인섭 등이 있었단다. 이범진은 군자금으로 1만루블을 보내주어 국내연합작전을 지원했단다. 하지만 국내진압작전은 실패로 돌아갔어. 예전에 안중근에 관해 이야기할 때 했듯이 안중근이 포로들을 살려주는 바람에 일본군의 역습을 받고 패배했었잖니.

이후 연해주의 의병활동이 위축되었고, 최재형과 이범윤 사이의 계파 갈등도 고조되는 등 분위기가 안 좋았어. 이위종은 다시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돌아왔어. 둘째딸이 태어났거든... 이위종의 아버지도 먼 타국에서 독립운동을 위한 활동을 했지만 역부족이었고, 경술국치 소식을 듣게 되었단다. 이 소식을 들은 이범진은 1911 1 26일 자결을 마고 만단다. 안타까운 일이로구나.

....

이위종은 조선 독립을 위해서는 강대국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판단하고 러시아 장교로 지원하여 합격을 했어. 그런데 이때 1차세계대전이 일어나게 되어 러시아 장교로 1차세계대전에 참가하게 된단다. 동부전선에 투입되었다가 부상입고 독일에 포로로 잡히게 돼. 6개월 동안 포로로 잡혀있다가 탈출하여 다시 러시아로 왔어. 당시 러시아제정에 대한 민심은 완전 바닥이었어. 결국 1917 10월 러시아혁명이 일어나고 제정은 무너졌단다.

이위종은 조선독립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했어. 이번에는 러시아혁명을 이끈 소비에트에 가입을 해서 붉은 군대에 입대했단다. 그는 조선독립을 위해 소비에트에 가입을 한 것이지만, 향후 그의 이런 행적은 조국에서 공산주의자라는 평가를 받게 되어 한동안 그의 공을 제대로 평가 받지 못하게 되었단다. 붉은 군대 소속인 이위종은 일본이 지원하고 있는 백군을 상대로 싸웠어. 연전연승을 거두면서 그는 '시베리아의 별'이라는 별명을 얻었단다. 국제연대 사령관이 되어 군대를 이끌었단다.

어느날은 적군 사령관의 편지를 받게 되었단다. 그 사령관은 다름 아닌 육군사관학교 친구이자 엘리자베타의 오빠 빅토르였어. 편지에는 큰딸의 병사소식도 있었단다. 이위종에게는 큰 슬픔이고 아픔이었을 거야. 다음날 적군은 철수하고 적지에는 아무도 없었단다. 이 책이 앞서 이야기했듯이 사실과 작가의 상상력이 함께 포함되어 있다고 했잖아. 이 부분이 사실일지, 작가의 상상력일지 궁금하구나. 전쟁터의 기록이 남아 있을 것 같지 않아 작가의 상상력일 가능성이 높긴 한데, 조선 사람의 신분으로 러시아 붉은 부대의 사령관이 되어 전쟁을 치른다고 하니 얼마나 복잡한 심정이고 힘든 일이 많았을까 싶구나. 큰딸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지만 전쟁터를 비울 수 없었어.

이위종은 소비에트에 허락을 받고 고려인 부대 창설을 하기로 했단다. 이 부대를 만들기 위해 연해주로 이동하면서 우리나라 사람의 자원을 받았으나 그리 많이 모이지는 않았대. 연해주 우스리스크에 도착한 이후 의병대와 만나 고려인 부대를 창설하였어. 하지만 이내 일제에 체포되었다고 하는구나. 이카시라는 일본 장교가 주도를 했는데, 이위종에게 협박과 회유를 했지만 이위종은 뜻을 굽히지 않고 총살당하고 말았단다. 이 책에서는 이렇게 비극적인 삶으로 마감을 했지만, 실제 이위종은 마지막은 실종이라고 하는구나. 인터넷 검색을 해보니, 이위종은 1917년부터 1924년까지의 자신의 행적이 담긴 자서전을 일종의 보고서로서 소련 공산당에 제출하였대. 그러니까 1924년까지는 생존해 계셨던 거구나. 그 이후 행적은 알 수 없다고 하더구나. 그래서 더욱 안타깝구나.

...

식상한 단어이긴 하지만 정말 파란만장한 삶을 사신 것 같구나. 영화나 드라마를 찍어도 매력 있는 캐릭터로 그려질 것 같은데 없는 것이 아쉽구나. 지은이는 이 책을 기반으로 영화를 계획하고 있다는데 아직 소식이 없지만, 꼭 영화로 만들어졌으면 좋겠구나. 헤이그 특사만 해도 충분히 멋진 영화가 될 것 같은데... 언젠가는 만들어질 것을 기대해본다.

, 그럼 오늘은 여기까지...

 

PS,

책의 첫 문장: 몇 년 전 하바롭스크에 있는 러시아 외무성 문서보관소 창고의 한 낡은 서류철에서 이력서가 한 통 발견되었다.

책의 끝 문장: 이 책에서는 빅토르라는 이름으로 그를 살려냈지만 귀족 신분과 성향 때문에 러시아 혁명 후 그가  스탈린의 숙청을 피할 수 있었을지는 의문이다.



위종의 미국 횡단 여행은 한 달이 걸렸다. 위종은 9월 신학기에 중급학교에 입학하여 본격적으로 공부를 시작했다. 샌프란시스코를 왕복했던 기차 여행은 위종의 의식을 더욱 성숙시켰으며 사물을 보는 그의 시각을 놀라울 만큼 넓고 깊어졌다. 그는 이른 나이에 문명의 진보가 인간의 삶에 어떻게 작용하는가를 몸으로 직접 체험했다. 그 여행은 인종차별과 같은 인간의 부정적인 일면을 일깨우기도 했지만 반면에 차별받는 사람들에 대한 이해와 연민이 위종의 인성을 변화시키며 그의 의식을 더욱 따뜻하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 P63

위종은 그날, 눈 덮인 겨울궁전 광장에서 흰 눈 위에 뿌려지던 노동자들의 붉은 피를 잊을 수가 없었다. 눈을 감아도 눈을 떠도, 눈밭에 뿌려진 선홍색 핏자국을 떨쳐낼 수가 없었다.
이 도시 상트페테르부르크는 지금까지 위종에게 그저 아름답고 낭만적인 곳이었다. 하지만 피의 일요일이 지나간 이 도시는 위종에게 다른 의미의 도시가 되고 말았다. 위종은 요즈음 이 도시를 떠돌아다니는 음산한 기운이 자신의 의식 속으로 파고드는 느낌을 받았다. 위종은 자신의 의식 속에 슬금슬금 똬리를 틀고 있는 이 기운이 자신을 오랫동안 붙들고 놓아주지 않을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그것은 혁명의 기운이었다.
- P127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서 열강들은 식민지 탈취라는 목적을 책상 아래 숨기고 입으로만 평화를 부르짖었다. 이런 자리에서 ‘일본의 불법적인 외교권 탈취’라는 한국 대표단의 주장은 애초부터 잠꼬대 같은 소리에 불과했다. 더불어 암암리에 식민지 나눠먹기를 묵계했던 열강들이 한국 대표단의 참가 봉쇄를 담합했기 때문에 특사들은 아무런 성과도 거두지 못한 채 헤이그를 떠나야 했다.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의 문이 인류의 평화와 이익보다는 오직 국익만을 좇는 제국주의 국가들에만 열려 있었다는 것이 대한제국 특사들에게는 불운이었다. - P175

근대적인 유럽식 장교 교육을 받은 위종은, 나이는 약관이었지만 이미 전술과 전략 등 전반적인 군사 분야에서 모든 의병장을 지휘하고도 남을 만한 능력이 있었다. 러시아어, 영어, 프랑스어와 같은 외국어 구사 능력도 탁월했고 만국공법과 전제주의와 공화주의 정치 체제에 관해서도 해박했다. 위종의 국제 정세에 관한 깊은 통찰력과 법 지식은 안중근이 지금까지 어디에서도 들어보지 못했던 것들이었다. 안중근은 만국공법과 세계사를 포함하여 열강들의 제국주의 행태에 관한 위종의 논리 정연한 해설을 들으면서 새로운 세상에 눈을 떴다. 그것은 지금까지 안중근이 경험하지 못했던 신학문이 깨우쳐준 충격이었다. - P222

러시아 정부의 대일본 유화 정책의 실체를 파악한 위종은 이런 환경에서 대규모 의병전쟁으로 항일운동을 강화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다. 지금까지와는 다른 투쟁 방법을 취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더구나 만주 지역에 파병된 일본군은 아예 만주를 점령하기 위해 더욱 많은 병력을 증파했다. 따라서 만주에서 영향력을 강화하려는 러시아와의 충돌은 시간 문제였다. 어느 한쪽이 물러서지 않는 한 또 한 번의 전쟁을 피할 수가 없었다. 위종은 조국 독립을 위해서는 일본을 견제할 수 있는 프랑스의 적극적인 개입이 필요했지만 영국과 미국은 이미 일본과 야합하여 동아시아에서의 영향력이 크지 않았으며, 신해혁명으로 갓 태어난 신생 중국은 내전으로 남의 형편을 눈여겨볼 처지가 아니었다. 따라서 한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러시아만이 그 해결책을 가지고 있었다. - P254

우수리 원주민과 자작나무는 한국인과 소나무의 관계와 같다. 이들은 사람의 영혼은 나무에서 태어나며, 이승에서 삶을 마치면 남자의 영혼은 버드나무로, 여자의 영혼은 자작나무로 돌아간다고 믿는다. 이들은 숲속의 모든 나무에 정령이 깃들어 산다고 여긴다.
봄이 되면 나무는 잠을 깨고 새로운 영혼으로 다시 태어난다. 숲에서는 죽음도 없고 슬픔도 없는, 영혼이 영원히 순환하는 곳이라고 이들은 생각했다. 그들은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살아 있으며 서로 에너지를 교환한다고 믿었다. 그 에너지는 자연에서 잠시 빌려 쓰다가 언젠가는 자연에 돌려줘야 하는 것이었다. 이들에게 삶과 죽음이란 이런 주기의 반복이며 에너지의 순환일 뿐이다. 따라서 이들은 나무도 꼭 필요한 만큼만 베어낸다.
- P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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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힐 2024-08-01 11:1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늘도 이위종이라는 훌륭했던 우리나라 조상님을 소개해 주신 bookholic 께 감사드립니다. 좋은 하루 되십시요!

bookholic 2024-08-03 11:16   좋아요 1 | URL
잘 알려져 있지 않거나 이름만 알고 있는 독립투사들이 많이 계신 것 같아요..
그 분들의 노력으로 오늘날 우리나라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마힐 님도 즐거운 주말 되십시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