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케플러는 우주의 조화를 지배하는 영원불변의 법칙을 좇고 있었다. 그건 마치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뒤엉킨 덤불을 헤치며 전설의 사냥감을 향해 살금살금 다가가는 것과도 같았다. 아주 은밀하게 움직이는 사냥꾼만이 목표물을 정확하게 겨냥할 기회를 얻는 법.
무기라고는 아직 불완전한 계산과 미완성의 공신뿐이고, 더군다나 가장 노릇과 책임, 빌어먹을 가정이라는 이름표가 붙은 종을 번갈아 울려대며 소리치고 날뛰는 광대들에게 에워싸여 있는데 어떻게 그런
기회를 노리단 말인가? 그러나 딱 한 번, 아주 잠깐이나마
그 전설의 새를 본 적이 있다. 기껏해야 작은 점에 불과했지만 하늘 높이 날아오르는 그것을 보았단 말이다. 섬광 같은 그 짧은 순간을 그는 결코 잊을 수 없었다.
(126)
케플러는 내기를 위해서, 그리고 튀코의 자료를 빼내기
위해서 자신을 속인 셈이었다. 화성은 그렇게 만만한 대상이 아니었다.
그보다 똑똑한 학자들이 수없이 도전했음에도 화성은 수천 년간 비밀을 내주지 않았다. 코페르니쿠스의
이론대로 우주에서 행성이 태양이 아닌 지구의 위치에 따라 그 값이 결정되는 왕복 운동을 하고 있다면, 그
행성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행성이 일정한 속도로 완벽한 원을 그리며 돈다면, 궤도상에서 동일한 거리를 이동하는 데 걸리는 시간이 달리지는 까닭은 무엇일까?
그는 화성의 궤도를 규명하기에 앞서 이런 의문점을 비롯해 여러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오히려 그는, 시치미를 뗀 채 곳곳에 흩어져 있는 중요한 사실들을 손끝으로 더듬어 가며 매끈하고 복잡한
설계도를 재구성해야 하는 장님이 된 기분이었다.
(221-222)
제 입장을 간략하게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우주가
인간에게 영향을 미친다는 것은 우리가 분명히 볼 수 있지만, 구체적으로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는 여전히
수수께끼입니다. 저는 행성이나 별의 위상, 즉 행성끼리 이루는
각도와 그 배치와 인간의 삶에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고 믿습니다. 하지만 좋은 위상과 나쁜 위상을 따지는
건 어리석은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천체의 움직임은 좋고 나쁘고를 따질 수 없습니다. 우주의 현상은 조화와 규칙성, 아름다움, 강렬함, 약함, 불규칙함, 이렇게 분류할 수 있을 뿐이지요. 별들은 우리에게 그 무엇도 강요하지
않고 자유의지를 없애는 것도 아니며 개인의 구체적인 운명을 결정하지도 않습니다. 다만 인간에게 특정한
성격과 기질을 불어넣을 뿐입니다. 인간은 이 세상에 태어날 때 별자리가 지닌 특성과 양상을, 하늘에서 지구로 내려오는 별빛의 특징을 그대로 받아서 무덤에 갈 때까지 지니게 됩니다. 이 특성이 그의 육체 형태와 몸가짐, 태도, 성향, 정서적 감응에 뚜렷한 흔적을 남기지요. 그래서 어떤 사람은 생기 넘치고 친절하며 사교적인 반면, 또 어떤
사람은 무기력하고 나태하여 매사에 시큰둥한 특징을 보이는 겁니다. 아름답고 정확한 별자리일 때 태어났는지
광범위하고 볼품없는 모양일 때 태어났는지에 따라, 그리고 행성들의 색깔과 움직임에 따라 그런 특징이
결정된다는 말입니다.
(233-234)
대사님, 갈릴레오의 얇은 책이 간결하고 단순해 보인다는
이유로 오해해선 안 됩니다. 그의 저서 <별의 전령>은 아주 중요하고 훌륭한 책입니다. 몇 쪽만 훑어보아도 금세
알 수 있지요. 그러나 그가 주장하듯 그 안에 담긴 모든 내용이 독창적인 것은 아닙니다. 황제께서도 예전에 작은 망원경으로 달을 관찰하신 적이 있답니다! 또한
다른 사람들도 비록 증거를 제공하진 못했지만 은하수가 무수히 많은 별의 무리일 거라고 추측한 바 있습니다. 행성에
위성이 존재한다는 사실도(저는 그가 발견한 네 개의 새로운 행성이 위성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 놀라운 것이 아닙니다. 지구 주위를 도는 달이 있다면 다른
행성에도 위성이 있지 말라는 법이 없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무수한 별이 있다고 추측하는
것과 그것들의 위치를 지도에 표시하는 것에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251)
나의 사랑하는 레기나야. 나는 삶이란 게 정해진
형체도 없이 끊임없이 변하는 물질이 아닐까 생각했다. 말하자면 우리에게 주어진 용해된 유리 덩어리와도
같아서, 아주 조야한 도구조차도 없이 오직 맨손으로 만지고 다듬어 완벽한 모양으로 빚어 우리 안에 품어야
하는, 그런 물질 같다고나 할까. 그것이 우리가 이생에서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했단다. 바깥세상의 혼돈을 내면의 완벽한 조화와 균형으로 바꾸는 것. 하지만 아니더구나. 삶이 우리를 품는 것이고, 우리가 커다란 유리구슬에서 지워 내야 할 흠집인 것 같다. 물에
빠진 사람은 숨을 거두기 직전에 자기 일생이 주마등처럼 지나가는 걸 본다고들 하지. 사실 어찌 물에
빠져 죽는 사람만 그렇겠니? 어떤 방식으로 죽든 누구나 그럴 거라고 생각한다. 마지막 순간에 우리는 자신의 수많은 모습과 행동과 생각 속에 감춰져 있던 본질적인 모습을 인식하게 될 거야. 죽음은 완성을 위한 수단이지.
(278)
정신은 모든 수학적 개념과 형태를 자연스럽게 익힙니다. 경험적인
신호를 통해 이미 아는 것을 기억해 낼 뿐이지요. 수학적인 개념은 정신의 본질입니다. 정신은 한 지점으로부터의 등거리를 생각해낸 뒤, 다른 어떤 감각
인식이 없어도 그 점으로부터 원을 그립니다. 이렇게 설명해 보지요. 만약
정신이 신체의 눈을 쓰지 못한다면, 외부에 있는 사물을 상상하기 위해 눈이 필요하므로 눈을 만들어 내는
데 필요한 나름의 법칙을 지시할 것입니다. 정신 속에 원래부터 존재하는 양(量)에 대한 인식이 눈의 존재 방식을 결정합니다. 따라서 정신의 존재 양태에 따라 눈의 존재 양태가 결정되는 것이지, 그
반대가 아닙니다. 기하학은 눈을 통해 인식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아미 우리의 정신 속에 존재하니까요.
(280)
나는 다시 한번 화성에 원 궤도를 적용해 연구를 시도했지만 실패했습니다. 결론은 간단했습니다. 화성 궤도는 양옆이 안쪽으로 들어가고 위아래는
바깥으로 나가는 모양이라는 것입니다. 솔직히 말하면 이 타원형 궤도에 나는 깜짝 놀랐습니다. 그것은 학자들이 천문학이라는 학문이 처음 시작될 때부터 고수해 온 원동운 규칙에 어긋나는 것이었으니까요. 하지만 내가 찾아낸 증거는 부정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 모양의 궤도가
화성뿐 아니라 지구를 포함한 나머지 행성들에도 적용된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소름이 끼치더군요. 미천한 내가 어떻게 우주의 모습을 다시 만들어낸단 말입니까? 그리고
거기 들어갈 노력과 수고란! 주전원과 행성의 역행, 그리고
나머지 모든 것이 들어 있는 마구간을 싹 치우고 이제는 수레에 가득 실린 말똥, 즉 이 타원형 궤도만
남았습니다. 어찌나 악취가 지독한지! 그런데 이제 그 안에
들어가 구린내나는 말똥을 혼자 끌어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