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3)
파리의 노트르담 성당은 아직 오늘날에도 장엄하고 숭고한 건물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그것이 늙어가면서도 아무리 아름다운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하더라도, 최초의
돌을 놓은 샤를마뉴와 최후의 돌을 놓은 필리프오귀스트에 대한 경의를 저버리고, 세월과 인간들이 동시에
이 존경할 만한 건축물에 가한 무수한 풍화와 훼손 앞에서 한숨을 쉬지 않고 분개하지 않기란 어려운 일이다.
(209)
대개 어느 나라에서나, 특히 프랑스에서는, 중세의 경이로운 예술이 그렇게 취급되어 왔던 것이다. 그 파괴에서
세 가지 상해를 구별할 수 있는데, 그 세 가지 모두가 저마다 다른 깊이로 상처를 입히고 있으니, 우선, 세월은 눈에 띄지 않게 여기저기 표면에 구멍을 내고 도처에
녹이 슬게 해놓았고, 다음으로 정치적, 종교적 혁명은 그
자체의 성격상 맹목이요 분노인지라, 소란스럽게 그것에 달려 들어, 조각물과
세공품의 풍부한 복장을 찢고, 원화창들을 도려내고, 아라비아식
장식과 작은 상(像)들의 목걸이들을 부서뜨리고, 자기들의 주교관을 위해 혹은 자기들의 왕관을 위해, 조상들을 뽑아내
버렸으며, 끝으로, 갈수록 기괴망측해지고 어리석어진 유행이었으니, 건축양식의 필연적인 타락 과정에서, 르네상스의 무정부주의적인 화려한
탈선 이래로 갖가지 유행이 바뀌었다. 유행은 혁명보다도 더 많은 해독을 끼쳤다. 유행은 뿌리째 뽑아내고, 예술의 뼈대를 침식하고, 형식에서나 상징에서, 논리에서나 미(美)에서, 건물을 베고
자르고 무너뜨리고 죽여놓았다. 그런 뒤에 유행은 고쳐 만들었는데, 세월이나
혁명은 적어도 그런 야심은 없었던 것이다.
(229-230)
그 꼭대기에 숨을 헐떡거리면서 도착하는 구경꾼에게 그것은 맨 먼저 눈부신 지붕과 굴뚝과 거리와
다리와 광장과 종루 들이었다. 모든 것이 한꺼번에 눈을 사로잡았다. 깎아지른
듯한 합각머리, 뾰족한 지붕, 성벽 모퉁이에 매달린 소탑, 11세기의 피라미드식 석조 건물, 15세기의 판암 오벨리스트, 아성의 꾸밈없는 둥근 탑, 성당의 장식 네모탑, 큰 것, 작은 것, 육중한
것, 경쾌한 것 등등. 눈길은 오랫동안 그 미궁 속에 깊이깊이
잠겨 드는데, 거기에는 저마다 제 나름의 독창성과 동기와 특성과 아름다움이 없는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었고, 전면에 물감 칠과 조각을 하고, 바깥으로 뼈대가 불거지고, 문이 반궁륭이고, 위층들이 앞으로 불쑥 나온, 작디작은 가옥에서부터 당시에는 탑이 즐비했던 장엄한 루브르 궁에 이르기까지,
예술에서 오지 않은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256)
그런데 현재의 파리는 아무런 공통성도 없다. 그것은
여러 시대의 견본들의 집합체인데, 가장 아름다운 것들은 사라져버렸다.
수도는 가옥들로만 커져가고 있거니와, 무슨 가옥들이 그 모양인가! 파리는 이대로 가다가는 오십 년마다 새로워질 것이다. 그러므로 파리의
건축물의 역사적 의의는 날마다 사라져가고 있는 것이다. 기념적인 대건축물들은 더욱더 드물어져가고, 집들 속에 잠겨서 차츰 삼켜져가고 있는 것 같다. 우리 선조는 돌의
파리를 가지고 있었는데, 우리 자손은 회반죽의 파리를 갖게 될 것이다.
(262)
보통, 낮에 파리에서 풍겨 나오는 소음은 도시가
이야기하는 것이요, 밤에는 도시가 숨을 쉬는 것인데, 지금
여기서는 도시가 노래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종탑들의 총 합주에 귀를 기울이고, 오십만 인구의 중얼거림을, 강물의 영원한 하소연을, 바람의 끊임없는 숨결을, 거대한 파이프오르간 상자처럼 지평선 언덕에
흩어져 있는 네 숲에서 멀리 들려오는 장중한 사중창을 그 모든 것 위에 퍼뜨리고, 마치 반음 속에서처럼, 중앙의 종소리가 가진 너무도 거칠고 날카로운 모든 것을 거기에서 부드럽게 하고, 그리고 말하라, 이 세상에서 이 종소리와 인경 소리보다도, 이 음악의 도가니보다도, 300척 높이의 돌 피리 속에서 한꺼번에
노래하는 이 수만의 청동 목속리보다도, 이제 하나의 오케스트라에 불과한 이 도시보다도, 폭풍 같은 소리를 내는 이 교향악보다도, 더 풍부하고, 더 즐겁고, 더 금빛이고, 더
눈부신 것을 그대는 알고 있는지를.
(324)
그 반면 연금술은 가지가지의 발견을 하였소. 다음과
같은 결과들에 나리는 이의를 내세우시렵니까? 1000년 동안 땅 아래 갇혀 있던 얼음은 바위 수정으로
변해 가고 있습니다. 납은 모든 금속들의 선조입니다. (왜냐하면
금은 금속이 아니고 빛이니까요.) 납은 각각 200년의 기간만
있으면 차례차례로 납의 상태에서 적비소(赤砒素)의 상태로, 적비소에서 주석으로, 주석에서 은으로 옮아 갑니다. 이러한 것들이 사실이 아닙니까? 그러나 <작은 열쇠>를 믿고, 충만한
선을 믿고, 별들을 믿는다는 것은, 옛중국 사람들과 더불어, 꾀꼬리가 두더지로 변하고, 밀알이 잉어과의 물고기로 변한다고 믿는
것과 마찬가지로 어리석은 일이란 말입니다!”
(332-333)
내 판단으로는, 그 사상에는 두 가지 면이 있었다. 그것은 첫째 신부로서의 사상이었다. 그것은 새로운 요인, 인쇄물이 대한 성직의 공포였다. 그것은 구텐베르크의 빛나는 인쇄기에
대한 성직자의 두려움과 경탄이었다. 그것은 인쇄된 말에 놀라는 강단과 수사본이요, 구두의 말과 필기의 말이었다. 천사 레지옹이 600만의 날개를 펴는 것을 보는 참새의 당황과도 비슷한 그 무엇이었다. 그것은
해방된 인류가 웅성거리는 소리를 벌써 듣고, 미래에 지성이 신상을 서서히 무너뜨리고, 여론이 믿음의 자리를 빼앗고, 세계가 로마를 뒤흔드는 것을 보는
예언자의 외침이었다. 인쇄기에 의해 발산된 인류의 사상이 신정(神政)의 그릇에서 증발하는 것을 보는 철학자의 예언. 청동의 파성추를 살펴보고
‘탑이 무너지리라’고 말하는 군인의 공포. 그것은 하나의 힘이 바야흐로 다른 힘을 이어받으리라는 것을 의미했다. 그것은
‘인쇄기가 성당을 죽이리라’는 것을 뜻하고 있었다.
(337)
모든 문명은 신정(神政)으로 시작되고 민주주의로 끝난다. 통일성에 뒤이어 오는 이 자유의
법칙은 건축술에 쓰여 있다. 왜냐하면, 이 점은 강조해 두거니와, 벽돌 공사가, 신전을 건축하고 신화와 성직의 상징체계를 표현하고
그 돌의 책장들에 율법의 신비로운 일람표들을 상형문자로 옮겨 쓰는 데만 효력이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만약 그렇다면 모든 인류 사회에는, 신성한 상징이 자유사상 아래
닳아 없어지고 인간이 성직자를 피하고 철학과 제도들의 부속물이 종교의 얼굴을 갉아먹는 시기가 오게 되므로, 건축술은
인간 정신의 이 새로운 상태를 재현할 수 없을 것이고, 그 책장들은 표면은 가득 차 있되 이면은 텅
비어 있을 것이고, 그 작품은 온전하지 못할 것이고, 그
책은 불완전할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가 않다.
(342)
이렇게, 구텐베르크에 이르기까지, 건축술은 주요한 문자요 보편적인 문자이다. 동양에서 시작되고 그리스
로마의 고대에 의해 계속된 이 화강암 책은, 중세가 그 마지막 페이지를 썼다. 게다가 우리가 앞서 중세에서 관찰한 특권계급의 건축술의 뒤를 이은 이 민중의 건축술이라는 현상은, 인류의 지성에서, 역사상의 다른 위대한 시대들과 유사한 모든 운동과
함께 재현된다. 그리하여 여기서 모두 설명하자면 여러 권의 책이 필요할지도 모를 하나의 법칙을 간추려서
서술어 본다면, 원시 시대의 요람인 저 고대의 동양에는 인도의 건축술 다음에 아라비아 건축술의 풍만한
어머니인 페니키아의 건축술이 왔고, 고대에는 이집트 건축술(에트루리아
양식과 키를롭스 건축술들은 이집트 건축술의 변종에 불과하다) 다음에 그리스식 건축술이 왔고(로마 양식은 그리스식의 연장에 불과하되, 카르타고식 둥근 지붕을 이고
있는 점만이 다르다), 근대에서는 로마네스크 건축술 다음에 고딕 건축술이 왔다.
(347)
그러므로 인쇄술이 발명된 때부터 얼마나 건축술이 시나브로 여위어가고 오그라져가고 발가벗겨져
가는지 보라. 물은 줄어들고 진(津)은 밭아 들고 시대와 국민의 생각은 건축술에서 물러가는 것을 사람들은 얼마나 절감하고 있는가! 냉각은 15세기에는 거의 지각할 수 없다. 인쇄술은 아직 너무도 허약하여, 고작 해봤자 강력한 건축술의 잉여생명력을
우려먹는다. 그러나 16세기부터는 건축술의 병이 눈에 보이고, 건축술은 이미 절대적으로 사회를 더 이상 표현하지 못하고, 비참하게도
고전 예술이 되고, 갈리아의 건축술, 유럽의 건축술, 토착의 건축술에서 그리스와 로마의 건축술이 되고, 진정하고 근대적인
건축술에서 의(義)고대적 건축술이 된다. 이러한 쇠퇴를 사람들은 르네상스라고 부른다. 그러나 화려한 쇠퇴다. 왜냐하면 고딕의 낡은 천재가, 마인츠의 거대한 인쇄소 뒤로 저물어가는
이 태양이, 아직 얼마 동안은 그 마지막 햇살로 라틴의 홍예와 코린트의 원주들로 이루어진 그 모든 잡동사니의
건축물 더미를 비춰주고 있으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