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

일본의 참전 목적은 유럽에서 전쟁 중인 서구 열강들이 아시아에 신경 쓸 겨를이 없음을 틈타서 힘의 공백상태에 있는 중국을 침략하려는 것이었다. 일본은 대규모 병력을 동원하여 중국 안에 있는 독일 조차지(租借地)와 독일령 남양제도에 주둔하고 있는 영세한 규모의 독일군 병력을 공격하여 쉽게 점령함으로써 중국 대륙을 침략을 교두보를 마련하는 데 성공하게 된다. 또한 일본은 유럽에는 군수품을 수출하고 동남아에는 생필품들을 수출하는 거대한 공급기지가 됨으로써 제1차 세계대전이 일으킨 특수경기의 수혜자가 된다.


(130)

윌슨의 민족자결권이든 레닌의 민족자결권이든, 민족자결권에 대한 한반도의 오독은 이념적 경계선을 훌쩍 넘어버린다. 윌슨의 그 유명한 ‘14개조에는 자결이라는 용어는 없다. 그러니 아무리 눈 씻고 찾아도 민족자결권이라는 이미지가 만들어진 것은 영국 수상 로이드 조지(Lloyd George, 1863~1945) 1918 1 5일 영국 노동조합연맹에서의 연설에서 볼셰비키의 자결이라는 용어와 윌슨의 피치자의 동의를 섞어 쓴 이후의 일이었다. 아직까지도 한국의 역사 서술에서 윌슨의 민족자결권은 부동의 상식이자 진리다. ‘레닌의 민족자결권또한 20세기 한반도의 역사에서 해석학적 오류의 생산성을 잘 드러내준다. 마르크스주의로부터의 일탈을 감수하면서까지 레닌은 공식적으로 피억압 민족의 분리, 독립을 승인했다. 그것은 마르크스주의가 중심부의 노동해방에서 주변부의 민족해방 이론으로 전환되는 계기이기도 했다. 그러나 레닌의 속내는 피억압 민족의 프롤레타리아트가 분리 독립이 아닌 통합을 스스로 결정, 자결했으면 하는 것이었다.


(158)

신복룡은 세상사를 속속들이 알고나면 우리는 늘 마음이 쓸쓸해진다는 노엄 촘스키의 말을 인용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3.1운동 지도부의 전략과 당일의 처사를 볼 때 우리는 꼭 같은 심정을 느낀다. 왜 그럴까? 그 이유는 간단하다. 3.1운동을 영웅사관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3.1운동을 민중운동의 시각에서 볼 때 그 참된 위대함과 진면목을 이해할 수 있다. 3.1운동의 주역에는 이름 없는 사람이 더 많다. 역사의 조타수(操舵手)는 당대의 지식인들이지만, 역사의 추진세력은 그 시대의 민중일 수밖에 없다.”

33인의 감옥생활은 길어야 3년이었던 데 반해 지방시위를 주도한 농민 지도자의 감옥생활은 15년이나 되었다는 지적도 있다.

김성보는 “33인 개개인을 존경하는 것은 자유이지만 이들이 마치 민족대표로서 3.1운동을 지도한 것처럼 인식한다면 이것은 오히려 3.1운동에서 표출된 전민족의 숭고한 민족해방의 의지와 정신을 손상해버릴 수 있다그들이 보여준 모습은 그들을 민족대표라 부르기에는 너무나 나약하였다고 주장했다.


(180-181)

이완용이 어떻게 하면 기독교를 믿을 수 있느냐?”고 묻자 스코필드는 기독교를 믿으려면 먼저 이천만 국민 앞에 사죄해야 한다며 일침을 놓았다고 한다. 프로그램을 제작한 김동관 프로듀서는 우리가 모르던 역사적 사실을 담고 싶었다. 독립기념관을 비롯해 공공기관에서도 비무장, 비폭력 만세운동이 있었던 삼일절과 석호필 박사에 대한 만족할 만한 자료를 찾고 보여주는 일이 쉽지는 않았다특히 석 박사는 유품으로 지갑과 여권만 남길 정도로 남에게 베풀고 검소한 삶을 살아갔다고 전했다.


(220-221)

일제가 1920년에 <동아일보>의 발행을 허가한 속셈은 무엇이었을까? <조선일보>는 친일단체에게 허가한 것이므로 굳이 그 속셈을 따질 필요가 없다 하더라도 <동아일보>의 경우엔 보다 깊은 뜻이 있었을 것이다. 그 깊은 뜻은 당시 일본 고등경찰과장의 다음과 같은 술회에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다.

“<동아일보>를 한다는 청년들이 장래 조선의 치안을 소란테 할 것인가 안할 것인가를 판가름하는 중심인물들임에도 틀림없습니다. 그럴수록 이런 인물들을 항상 한 자리에 모이게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 적을 알아야 이쪽의 방비책도 쓸 수 있을 줄 압니다. 저의 정보망만으로 그들의 움직임을 완전 파악할 수는 없습니다. 신문을 허가함으로써 그들의 동정을 낱낱이 알 수 있을 줄 믿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을 모아 놓아야만 일조유사시에 일망타진하는 경찰행동을 취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일단 문제가 생겼을 때는 정간이든 발행 중지든 마음대로 시킬 수도 있습니다. 이 신문을 허용하는 것은 백 가지 이득이 있을지언정 한 가지 해도 없을 줄 압니다.”


(258-259)

당시 간도에 주재한 캐나다 선교사 마틴은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겼다.

먼동이 틀 무렵 일본군 보병이 무장하고 기독교 신자가 많은 이 마을을 포위하여, 먼저 노적가리에다 불을 질러 태웠다. 곧 이어 집안에 들어 있는 사람들을 밖으로 나오게 하여, 무릇 남자는 노인과 어린애를 막론하고 그 자리에서 총살하였다. 채 숨이 끊어지지 않았으면 섶에 불을 붙여 그 몸 위로 던지니, 숨이 넘어가려는 사람의 아픔을 못 견뎌 펄펄 뛰며 비명을 질렀다. 그리하여 숨진 뒤에는 그슬려져 누구의 시체인지 알아볼 수 없게 되었다. 그들은 이처럼 잔인하게 사람을 죽이면서도 사망자의 부모처자로 하여금 지켜보게 했다. 동시에 집에 불을 질러 온 마음이 순식간에 초토화되었다. 일병은 또 다른 마을로 가서 기독교들을 박해하였는데, 산골짜리에서 모든 촌락들이 이러한 참변을 당했다. 일병들을 만행을 자행하고 나서 병영으로 돌아가 일본 천황의 탄생일을 축하하였다. 그러한 참변을 당한 마을은 확실히 알고 있는 것만도 36개 마을이며, 어느 마을에서는 양민 145명이 죽었다고 한다. 중국은 국력이 미약해 이에 대항할 힘은 없지만, 이러한 역사상 일찍이 없던 만행을, 대부분이 기독교국으로 구성된 국제연명에 왜 제소하지 않는가.


(345)

우리들의 희망은 오직 한 가지 어린이들을 잘 키우는 데 있을 뿐입니다. 내 아들놈 내 딸년들을 자기의 물건 같이 여기지 말고 자기보다 한결 더 새로운 시대의 인물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어린이를 어른보다 더 높게 대접해주십시오. 어린이를 결코 윽박지르지 마십시오. 어린이는 항상 칭찬해가며 기르십시오.”

방정환의 연설이 끝나자 참석한 천도교, 기독교, 불교단체의 소년회장과 조선소년단장 등이 어린이, 어른들에게 당부하는 말씀을 계속 한다.

돋는 해와 지는 해를 반드시 보기로 합시다.”

어린이를 책망할 때는 성만 내지 말고 자세하게 타일러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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