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3월 23일
스티븐스(일본 통감부 외교고문)는 샌프란시스코 오클랜드 역
구내에서 장인환, 전명운 두 애국지사의 총격을 받았다. 두
사람은 처음부터 같이 행동한 게 아니라 서로 모른 채 각각 거사에 나섰다. 먼저 전명운이 권총을 쏘았으나
불발되자, 장인환이 다시 3발을 쏘아 2발은 스티븐스의 가슴과 허리를 관통했고 나머지 한 발은 전명운의 어깨에 맞았다. 스티븐스는 병원에 옮겨진 후 사망했다. 그는 보호조약을 강제로 맺게
함으로써 나의 강토를 빼앗았고, 나의 종족을 학살했기에 이를 통분히 여기어 그를 쏜 것이다”라고 말했다.
(42-43)
그(베델)는
마지막 숨을 거두면서 “나는 죽더라도 신보는 앵생케 해 한국 민족을 구하라”는 유언을 남겼다. 베델의 그런 한국 사랑은 그가 강한 민족주의 정서를
갖고 있는 웨일스 출신이라는 사실과 관련이 있는 걸까? 베델의 한국 사랑과 반일정신은 매우 투철해 한때
미국의 <워싱턴 포스트>는 “<대한매일신보>의 통감부에 대한 공격을 중지시킬 수 있는
방법이란 베델을 암살하는 길밖에 없을 것”이라고 쓰기도 했다. 베델의
장례식은 동대문 밖 영도사에서 수천 명이 모인 가운데 성대히 거행되었으며 그의 시신은 양화진(서울 합정동) 외국인 묘지에 묻혔고 그의 공적을 기리는 사람들의 성금에 의해 1910년
묘비가 세워졌다.
(132-133)
1910년 2월 7일 오전 9시 뤼순 법정. 당시 15만 부를 발간하던 영국 최대의 주간지 <그래픽>의 기자 찰스 모리머는 재판 참관기를 통해 “세기적인 재판의
승리자는 안중근이었다. 그는 영웅의 월계관을 거머쥔 채 자랑스레 법정을 떠났다. 그의 입을 통해 이토 히로부미는 한낱 파렴치한 독재자로 전락했다”고
썼다. 모리머는 재판을 참관하던 많은 일본인들조차 안중근에게 지극한 존경심을 가졌으며 그들에게서는 살해된
정치인의 추억보다 안중근의 명성이 더럽혀지도록 내버려둘 수 없다는 분위기가 형성됐다고 말했다. 또 그는
안중근에 대해 “그는 삶의 포기를 열렬히 염원했다”며 “이 사건으로 인해 재판에 오른 건 다음 아닌 일본의 현대문명이었다”고
말했다.
(184-185)
“한국은 종교적으로 세계에서 가장 역동적이고 활기찬
나라이나 어떤 단일 종교도 한국인들의 종교생활을 지배하고 있지 않고 있는 다종교 국가이다. 종교적 갈등을
겪고 있는 많은 동구, 중동, 아프리카 국가들과 달리 한국에서는
기독교(개신교), 천주교,
불교, 유교, 천도교가 평화롭게 공존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의 종교적 다원주의는 동아시아 국가들에게 종교적 평화의 모델이 될 것이다. 또한 한국은 유교의 문화적 전통이 가장 많이 남아 있는 나라이면서도 ‘아시아적
가치’를 변용하여 서구의 자유주의, 합리주의를 수용하는 데
가장 개방적인 나라이다. 한국은 아시아적 가치와 서구의 가치가 화해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줄 것이다.”
아니 어쩌면 한국은 새무얼 헌팅턴이 역설한 ‘문명의
충돌’에 대한 해답까지 제공해줄 수 있는 나라일지도 모르겠다. 이는
한국의 극단주의는 ‘신바람’ 특성과 맞물린 것으로 늘 잠재돼
있긴 하지만 오래 지속되긴 어렵다는 걸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이렇게 정리해볼 수도 있겠다. 한국인은 단기적으로 극단주의적이지만, 장기적으론 중용 지향적이다.
(189)
<독립신문>
1898년 2월 8일자 논설에 따르면, “사람이 시계를 살 때마다 기계 속을 모른즉 시계 좋고 아니 좋은 것을 아는 도리는 다만 전면에 비늘 둘이
시간과 분과 각을 옳게 가리키는지 아니 가리키는지 하는 것을 가지고 아는지라. 그것과 같이 사람을 옳고
그른 것을 아는 것은 그 사람의 하는 행사를 가지고 알기 외에는 다른 도리가 없는 것이라. 설령 시계가
보기에 훌륭하고 금과 보석으로 꾸민 시계나 그 시계가 시를 맞추지 아니 할 것 같으면 그것은 시계가 아니라 일개 값진 물건이라. 금과 보석을 팔면 돈은 생길지언정 시계로 쓸 것은 못 되지 그것과 같이 사람도 외양이 좋고 의복을 잘 입어
보기에는 좋은 사람 같이 보이나 자기 맡은 직무를 못 할 지경이면 무용지안이라. 그러하기에 시계 살
때에 외양과 모양은 어떠하였든지 시만 잘 맞추면 그 물건이 쓸데 있는 물건이요 사람도 지체가 없고 오양도 준수치 않더라도 맡은 직무만 착락 없이
할 것 같으면 그 사람이 보배로운 사람이라.”
(288)
“조선은 당파싸움 때문에 망했다”는 일본인들의 주장이 많은 한국인들에게도 먹혀 들어갔다면, 그건 조선이
망해 일본의 지배하에 놓이게 되었다는 명백한 사실의 힘 때문일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왜 조선이
망했는가? 이에 대한 만족스러운 답을 우리 스스로 내놓지 못한 채 “당파싸움
때문에 망한 건 아니댜”라고 주장하는 건 매우 옹색하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