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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근대사 산책 2권 - 개화기편, 개신교 입국에서 을미사변까지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07년 11월
평점 :
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강준만 님의 <한국
근대사 산책> 2권을 읽었단다. 2권의 부제는 <개신교 입국에서 을미사변까지>란다. 1권이 갑신정변이 일어난 1884년에 끝이 났고, 2권이 을미사변이 일어난 1895년에 끝이 나니 2권의 이야기는 약 11년간의 이야기를 해주겠구나. 전에도 이야기했지만, 역사적 사건에 육십갑자가 있는데, 갑으로 시작하면 OOO4년에 일어난 일이고, 을로 시작하면 OOO5년이라는 것,
기억해보자… 자, 그럼 바로 이야기를 해보자.
..
1권의 마지막 이야기는 갑신정변이었잖아. 민영익이라는 사람이 있어. 원래 개화파로 미국까지 다녀왔던 그 사람, 기억나지? 그 사람이 귀국 후에 보수파가 되었고, 개화파에 밉보이게 되어 갑신정변 때 개화파들에 의해 칼까지 맞고 중상을 입었단다. 민영익을 치료한 사람은 의료선교사로 한국에 와있던 알렌이라는 사람이란다. 알렌의
치료로 민영익이 건강을 회복하게 되었고, 그 공으로 알렌은 1885년 4월 광혜원이라는 근대식 병원을 최초로 개원하였단다. 광혜원은 나중에
제중원이라는 이름으로 바꾸고 더 나중에는 세브란스 병원으로 이름을 바꾸었단다. 너희들도 알겠지만 세브란스
병원은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단다.
갑신정변이 3일천하로
실패한 후 수구파는 개화파에 대한 보복을 했단다. 국내에 머무르고 있던 홍영식을 죽이고, 개화파가 운영했던 한성순보도 폐간시켰어. 외국으로 망명간 이들은
우리나라에 올 수가 없었지. 김옥균 같은 경우에는 계속 암살 시도가 있었고, 결국 1894년 그를 상하이로 유인하여 홍종우가 그를 암살하는데
성공했단다. 홍종우는 원래 개화파였는데 배신을 하고 김옥균을 죽인 것이란다. 아빠가 예전에 조재곤 님의 <그래서 나는 김옥균을 쏘았다>라는 책을 읽었는데 김옥균 죽음에 대해서는 그 책을 읽고 쓴 독서편지를 읽어보면 좀 도움이 될 수도 있겠구나. 그런데 먼 기억으로는 그 책이 썩 재미있지는 않았던 기억이구나. 김탁환
님의 소설 <리심>과 신경숙 님의 소설<리진>에도 홍종우와 김옥균의 이야기가 나왔던 기억이 있구나.
…
갑신정변 이후 조선과 일본 사이에 한성 조약을 맺었는데 일본이
입은 피해를 보상한다는 굴욕적인 조약이었단다. 알고 보면 일본이 개화파를 뒤에서 부추긴 것도 있는데
말이야. 또 청과 일본 사이에 텐진 조약을 맺었는데, 양군
모두 조선에서 철수하고 파병하게 되면 사전에 통보하자는 내용이란다. 전에는 청나라가 조선에 영향력이
컸는데 텐진 조약으로 인해 조선의 영향력에 있어 청나라와 일본이 동등한 조건이 된 거야. 그러니까 이
조약은 일본에 유리한 조약이 된 거지.
청나라는 상황 판단 능력이 떨어졌나? 이런 불리한 조약을 했을까. 갑신정변이 있었던 1884년에 있었던 일 한가지도 더 이야기하자면 그 해에 방곡령을 실시했단다.
당시 우리나라의 곡물이 무분별하게 일본으로 유출되고 있었는데 일부 지역의 곡물의 유출을 막는 제도였단다. 얼마나 큰 효과가 있었는지는 모르겠구나.
1.
해가 바뀌어 1885년이
되었단다. 1885년 언더우드를 비롯한 많은 개신교 선교사들이 입국을 했단다. 당시 천주교 신부들에 의한 선교가 많이
이루어졌는데, 개신교 선교들이 들어와서 비밀리에 선교를 했다고 하는구나. 그래서 천주교 측과 개신교 측간 갈등도 생겼대.
한편 1885년 5월에는 영국이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 거문도를 점령한 일이 일어났어. 당시
조선이 힘이 없다 보니 누군가 불법 점령을 한다고 해서 그들을 몰아낼 수 없으니 백성들만 고생을 하고 안타깝더구나. 더 답답한 것은 이런 사건을 정부에서는 전혀 모르고 있다는 사실. 조선
정부는 영국이 거문도를 점령한 지 한달 만에 청으로부터 알게 되었단다. 영국은 러시아가 이곳을 점령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고 무려 22개월간이나 거문도를 점령하였다가 철수했다고 한다. 이 지역이 해상 요충지로 만약 러시아가 거문도를 점령하게 되면 영국이 점령하고 있는 중국 남부 지역도 위협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었어. 영국에 거문도 사건에 청나라가 깊숙이 개입하여 영국을 도와주었는데, 이런 이유로 조선은 청에서부터 벗어나 러시아에 의존하려고 했단다. 청에
대한 배신감을 느꼈을 수도 있겠구나. 조선 주변의 있는 강대국들이 다 지들 이익을 위해 움직이고 있는데
어디에 붇던 조선이 유리한 경우는 없을 것 같구나.
…
미국에서 공부하던 유길준은 갑신정변의 소식을 들었단다. 자신들과 친했던 사람들이 일으킨 갑신정변. 하지만 곧바로 귀국하지
않았어. 삼일천하로 끝났다는 소식도 들었겠지. 그는 갑신정변이
실패로 돌아가고 5개월이 지난 후 미국 유학을 마치고 귀국길에 올랐단다. 바로 오지 않고 6개월간 유럽, 이집트, 싱가폴, 홍콩, 일본을
거쳐 귀국했단다. 음, 코스가 얼마 전에 읽은 쥘 베른의 <80일간의 세계일주>와 아주 흡사하구나. 그는 일본에서 김옥균을 만났고, 김옥균이 귀국을 만류했지만, 국내로 들어왔다고 하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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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
김옥균은
유길준에게 귀국을 만류했지만 유길준은 다음과 같은 답으로 거절하고 12월 2일 일본을 떠났다.
“형님께서 진심으로 걱정해주시는
생각은 정말로 고맙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나는 아무래도 귀국을 해야 하겠어요. 물론 들어가서 장차 어떤 일을 당할지 그건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런 건 생각하지 않겠습니다. 그걸 생각하면 들어갈 수가 없겠지요. 또
나는 살기 위해서 형님들과 관련이 없다고 변명하러 들어가려는 것도 아닙니다. 변명이 될 일도 아니고
형님이나 나나 내일의 일을 예측할 수 없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나는 지금 형님의 처지와는 좀
달라요. 형님들은 어떻게 됐든 한번 일을 했지만 나는 아무것도 한 것이 없지요. 그런데 까닭 없이 일본에 앉아서 나라의 불행한 현실만 바라보고만 있을 수는 없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어쨌든 들어가서 한번 부닥쳐볼 작정입니다. 요행히 살아남아 발붙일
곳이 마련된다면 나는 국민을 계몽하는 일부터 시작하겠습니다. 이렇게 해서라도 내가 국내에 교두보를 마련하는
것이 장차 형님에게도 재기하시는 데 절대 필요한 발판이 되지 않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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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옥균이 만류한 이유가 있었단다. 유길준은 귀국하자마자 갑신정변을 일으킨 개화파의 측근이라는 이유로 7년간
연금생활을 했다는구나. 그 7년 동안 그가 미국과 세계여행을
경험한 것을 적은, 그 유명한 <서유견문>과 조선의 중립화를 주장한 <중립론>을 썼다고 하는구나.
…
1885년에 전선을 설치를 하여
1888년에 전신을 개통했다고 하는구나. 갑신정변 이후 폐간된 <한성순보>이후 신문이 없었는데 1886년 <한성주보>를
창간했다고 한다. ‘순보’의 ‘순(旬)은 10일을 뜻하는 한자로 10일에 한번씩 신문을 냈는데 한성주보는 주마다
한번씩 신문을 냈단다. 그리고 한성주보는 한성순보와 달리 국한문 혼용체로 출간했다고 하는구나.
….
개화기의 두드러진 특징은 근대식 교육기관이 생기기 시작한
것인데, 1886년 최초의 근대식 공립교육기간인 육영공원이 헐버트라는 사람에 의해 개교했고, 이후 배재학당, 이화학당 등이 뒤를 이었단다. 이때 조선에 처음으로 전기도 생겨났대. 주미 한국공관 설립을 위해
박정양 등이 미국을 가기도 했다는구나. 일반 백성들이 살기 힘들 때 종교가 널리 퍼지게 되는 경우가
많은데 1880년대 후반도 그런 이유로 개신교가 널리 퍼졌대. 관리들의
부정부패는 더욱 심해지고, 일본의 경제 수탈도 더욱 심해지니 백성들의 삶은 점점 팍팍해지고 종교의 의지하려고
했던 거야.
…
조선이 청나라와 거리를 두려고 했지만 청나라는 계속 간섭하려고
했어. 위안스카이가 계속 내정 간섭을 하고 외교 간섭도 했단다. 청나라
상인들도 계속 들어와서 우리나라 상인들과 대립하기도 했어. 명동 근처에 차이나 타운이 생긴 것도 이
즈음이란다.
2.
1권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최제우가 1860년에 동학을 창시했다고 했잖아. 1880년대에는 2대 교주 최시형을 중심으로 퍼져 나가던 시기였단다. 최시형은 충청도
보은을 중심으로 활동을 했는데 이를 북접이라고 했고, 전라도를 중심으로 활동하는 동학 세력을 남접이라고
했단다. 전봉준의 동학 운동은 아빠가 다른 책을 이야기하면서 두어 번 이야기한 적이 있으니 오늘은 짧게
이야기를 할게.
전라도 고부 군수 조병갑의 학정과 만행이 심해져서 그를 몰아내달라고
민원을 올렸지만, 조병갑은 재임명되었고 그러자 농민들은 전봉준을 중심으로 봉기를 했고, 조병갑은 도망을 갔단다. 이때가
1894년이었어. 조사관으로 이용태라는 사람이 왔는데, 조사는
하지 않고, 농민군 주도자를 잡아 족치고 폭력을 진압했어. 어쩔
수 없이 지도부는 고창으로 도망을 갔단다. 1894년 4월
전봉준, 손화중, 김개남 등은 고창에서 동학농민군을 봉기해서
황토현 전투에서 대승을 하고 전주성을 점령했단다.
이에 당황한 고종은 큰 실수를 하게 된단다. 동학농민군을 진압하기 위해 외세 세력을 끌어들인 거야. 대화로 풀어보거나
그것도 안되면 우리 관군으로 진압을 했어야지. 농민군의 봉기가 무서워 외세를 끌이다니… 쯧쯧… 결국 청나라와 일본군이 동시에 국내 진입하여 동학농민군을
퇴거시켰단다. 조선 정부의 입장에서는 동학 농민군을 진압했으니 청나라와 일본에게 다시 군대를 철수하라고
이야기했겠지. 하지만 엉덩이 무거운 이들은 말을 안 듣고 계속 주둔하고 있었단다. 기회만 엿보던 이들인데, 다시 돌아가겠니?
힘없는 조선이 할 수 있는 것은 별로 없었어. 그 와중에 조선정부는 청나라에 의지하려고 했어. 그러자 일본은 청나라에게
물러가라고 했고, 조선은 일본에게 물러가라고 했단다. 이에
일본군은 경복궁을 공격하여 한 달 가까이 점령하다가 철수하는 일도 있었어. 고종과 명성황후가 청나라
편을 들자, 일본군은 운현궁에 머무르고 있는 흥선대원군을 만났고, 대원군은
일본군의 술책에 넘어가 그들과 손을 잡게 된단다. 대원군은 일단 명성황후의 반대세력과 손을 잡으려는
거지. 그리고 일본군의 무력으로 민씨세력을 몰아내고 대원군이 다시 집권을 하게 되는데 그의 나이 74세였단다. 일본을 등에 업은 개화파에 의해 자리에서 물러났던 대원군이
일본을 등에 업고 다시 권력을 잡은 아이러니한 사건이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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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00)
참으로
묘한 일이었다. “10년 전 개화파의 갑신정변에 밀려났던 대원군이 조선 역사상 가장 급진적인 정치 개혁의
얼굴 마담”이 되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1894년 7월 28일(음력 6월 26일) 정오 74세의 노인인 대원군은 비상시국의 첫 번째 회의를 주재하면서 “나는
완고한 사람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나를 완고의 장본인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나는 개화가 필요하다는 것을 충분히 알고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대원군은
이 회의에 군국기무처라는 이름을 부여하면서 개혁지지를 선언하고 김홍집을 영의정 겸 군국기무처 총재로 임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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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얼마
못 가 대원군은 이내 일본과 대립하게 되었대. 청군과 동학군에 밀지를 보냈다는 설도 있다는 구나. 동학군의 2차 봉기는 이런 대원군의 밀지를 통해 일어났다는 설도
있대. 그리고 대원군은 다시 개화파를 제거하려는 계획을 세웠지만 실패했대. 계속된 청일 간의 갈등은 결국 전쟁까지 이어졌단다. 청일전쟁은 청나라와
일본이 겨룬 전쟁인데, 안타깝게도 우리나라에서 전쟁을 벌였단다. 예상과
달리 전쟁은 일본의 일방적이 우세였고 평양 전투에서 일본이 대승을 거두면서 일본이 이겼어.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후 일본은 우리나라에 간섭이 심해졌단다. 청나라에 조공 중단할 것, 과거 시험 폐지할 것, 노비 제도 파타할 것, 조혼 금지,
과부재가 허용할 것, 일본의 제도와 화폐제를 도입하는 등 조선을 일본의 '보호국'으로 만들려고 했단다. 친일
세력인 김홍집, 어윤중, 유길준 등에 의해 위의 내용을 남은
갑오개혁을 하게 했단다. 대원군이 이에 반발하였고, 일본
공사로 와 있는 이노우에가 대원군에 압력을 행사하였어 그러자 대원군은 더 이상을 힘쓰지 못하고 대원군은 정계 은퇴를 하였단다. 이후 일본은 조선에서 각종 특권을 얻어냄으로써 조선에서 영향력을 높여갔어.
...
이 즈음 남쪽에서는 동학 농민군의 2차 봉기가 있었단다. 전봉준, 김개남의
부대에 김학진의 부대가 연합했어. 그들은 7일간의 우금치(오늘날 공주)에서 관군과 일본군에 맞서 싸웠으나, 무기의 현저한 차이로 인해 대패했단다. 동학 농민군 2만명 중에 500 여명만 살아남았다고 했어. 전봉준이 장소를 이동하면서 끝까지 항전했지만 부하인 김경천의 배신으로 생포되고 말았단다. 그렇게 동학농민운동은 실패도 끝나고 말았어... 이때부터 일본은
더 본격적으로 조선에 대한 침략의 발톱을 드러내고 다녔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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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
김용옥은
“우금치에서 동학농민군 수십만 명이 목숨을 잃은 뒤부터 조선은 사실상 일본의 식민지 상태에 들어갔으며
이때부터 일본제국주의는 조선을 집어먹기 시작했다”며 “우금치
전투 이후 일본의 조선 침탈은 가속됐고 일본은 식민통치 기간에 좌우 이념 대결, 6.25 동란에 이르기까지
한반도에 모든 죄악을 다 뿌려놓은 것입니다”라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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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공사 이노우에의 권력도 점점 강해지면서, 친일 세력인 박영효와 서광범을 복권시켰단다. 이들은 갑신정변 이후
조선정부로부터 쫓기던 사람들이었잖니... 잘 살아 버티다 보니 또 전세역전되는구나. 박영효가 내무대신, 서광범이 법무대신이 되었단다. 명성황후도 일본의 힘에 눌려 박영효와 전략적 화해를 했대. 일본을
등에 업고 내무대신이 된 박영효는 뜻밖에도 반일노선을 걸었다고 하는구나. 그리고 1895년에는 갑오개혁의 연장선에 있는 홍범14조를 제정하여 개혁을
추진하기도 했대.
...
청일전쟁 이후 청나라와 일본을 시모노세키 조약을 맺었는데, 이 조약에 조선의 독립을 보장한다는, 어처구니 없는 내용과 청나라의
랴오둥 반도를 일본이 차지한다는 내용이 있었단다. 일본의 랴오둥 반도 점령은 서양 열강에 충격을 주었고, 이내 러시아, 프랑스, 독일이
이 일에 간섭하게 되었고, 일본은 어쩔 수 없이 랴우둥 반도를 다시 청나라에 반환했단다. 하지만 조선에서 일본의 간섭은 더욱 심해졌어. 조선은 김홍집을 중심으로
친일 내각이 세워졌고 친러 인사는 모두 물러나게 되었대. 그리고 미우라 고로 일본 공사를 중심으로 일본에
척을 두고 있던 명성황후마저 시해하는 끔찍한 만행을 저질렀단다. 이것이 을미사변이라는 사건이란다. 조선은 왜 미리 준비하지 못했을까. 안타깝구나.
3.
여기까지가 2권의
이야기란다. 이 책을 통해서 당시 조선의 일반 백성들의 모습들도 엿볼 수 있었는데, 재미있는 이야기 하나 전해주고 마치련다. 조선시대에 1616년에 담배가 들어왔는데 그 담배가 들어선 이후 조선은 애연가의 나라, 골초의
나라가 되었다고 하는구나. 그 골초는 개화기까지 이어졌고, 개화기
때 외국에서 온 사람들이 보고 기록에 남길 정도로 골초였다고 하는구나. 그렇게 담배를 피면서 건강해
보인다는 말이 재미있기도 하구나. 그래도 최근에는 흡연율이 많이 떨어져서 다행이구나. 어디 가서 골초국가로 불리지 않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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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개화기에
조선을 방문한 서양인들은 이구동성으로 조선인들의 지극한 담배 사랑에 놀라곤 했다. 독일인 애쏜 써드는 1902년에 발표한 글에서 “대한제국의 남자들이 얼마나 골초인가 하면
그들이 50여 년 일생 동안 피우는 담배연기만으로도 우리나라 베를린의 국립보건소 인원 전체를 그 자리에서
쓰러져서 죽게 할 만하다. 그런데도 조선 남자들은 모두가 괄괄하고 건강하게만 보인다”고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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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책의 첫 문장: 1884년 12월 4일 일어난 갑신정변 시 수구파의 실력자인 민영익은 칼을 맞아 얼굴과 목 그리고 등에 치명적 상처를 입고 생명이
위독한 상태였다.
책의 끝 문장: 조선 스스로 그런 도임의 주체가 될 수 있게끔 조금만
더 일찍 눈을 뜨고 실천에 옮겼더라면 하는 아쉬움을 갖게 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조선을 세계에 알리는 데에 있어서 사진은 결코 우호적이거나 중립적이지 않았다. 카메라는 자주 폭력적이었다. 사진에 대한 민중의 저항에 그런 폭력성에 대한 자각이 작용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늘 피사체가 되어야만 하는 처지에선 사진을 결코 좋게 볼 수 없었으리라. 조선의 운명도 그와 같지 않았을까? - P15
사실 조선의 기독교야말로 전형적인 ‘역사적 상황의 산물’이었다. 물론 기독교가 조선인들에게 ‘출애굽기’만 가르친 건 아니었다. 1900년대 후반 일제의 압박이 강해지면서 정반대되는 메시지를 전파하기도 했다. 다만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서양을 대변하는 것으로 여겨진 기독교는 일부 조선 민중에게 하나의 대안 모델이었던 동시에 내외로 착취당하는 현실에 대한 보호막이나 방파제이기도 했다는 점이다. 보호받을 길 없는 ‘민족공동체’에서 보호와 위로가 주어지는 ‘교회공동체’로 발길을 돌렸다고나 할까? - P108
김옥균에 대한 평가는 양극을 치달린다. 개화파와 척사파의 견해가 다른 건 물론 개화파 내부의 견해도 다르다. 정변 동지 서재필은 김옥균을 "시대의 추이를 통찰하고 조선을 힘 있는 근대 국가로 만들기를 절실히 바란" 위인으로 평가했지만 정변에 불참한 윤치호는 "위로 나랏일을 실패하게 하고 아래로 민심을 흔들리게 한 경망스런" 인물로 폄하했다. - P146
민비 시해의 음모 단계에서부터 가담한 조선인이 한 명 있었는데 그는 훈련대 제2대대장으로 있던 우범선(1857~1903)이었다. 훈련대는 그해 4월 친일정권에 의해 창설되었는데 우범선은 민씨 정권의 훈련대 해산계획에 불만을 품고 있었다. 주한일본공사 미우라 고로에게 포섭된 우범선이 이 사건에서 맡은 임무는 훈련대 병력동원과 민비의 시신 ‘처리’였다. 폭도들에 의해 시해된 후 불태워진 민비 시신의 타고 남은 재는 궁궐 내 우물에 버려졌고 유해 일부는 우범선의 지시로 휘하의 윤석우가 증거인멸을 위해 땅에 묻어버렸다. - P296
"쿵, 무거운 곡괭이가 검은 흑벽을 크게 찍어내자 돌연 반짝반짝 노랗게 빛나는 것이 보였다. ‘노 터치! 노 터치!" 즉각 미국인 채굴 감독의 고함이 광구 속을 쩡쩡 울렸다. 조선인 광부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또 금맥이 나왔구나. 땅속에서 금맥이 드러날 때마다 미국인들이 지르는 소리는 똑같았다. 노 터치(No touch, 손대지 마라)! 혹여 금을 훔칠까봐 소리치는 것인데 조선인 광부들의 귀에는 ‘노다지’로 들렸다. 그들은 ‘노다지’는 ‘금’을 가리키는 양인들 말이라고 믿었고 그래서 자신들도 금맥을 발견하면 즉각 소리쳐서 금이 나왔음을 알렸다. "노다지! 노다지!" 평안북도 운산 금광의 조선인 광부들에게 황금은 곧 노 터치였다. ‘노다지’라는 단어는 처음에는 ‘광물이 쏟아져나오는 광맥이 발견되었다’는 뜻의 광산 용어로 쓰이다 이내 ‘큰 횡재’를 뜻하는 말로 조선인의 일상생활 속에 들어갔고 이제 100여 년이 지난 지금은 어엿이 한국어사전에도 올랐다." - P3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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