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
뉴욕으로 돌아온 오펜하이머는 러더퍼드가 자신을 불합격시켰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오펜하이머는 “러더퍼드는 나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는 브리지먼을 높이 평가하지 않았고, 내 경력 역시 그의 눈길을
끌지 못했습니다.”라고 회고했다. 하지만 러더퍼드는 오펜하이머의
지원서를 J.J. 톰슨(1856~1940년)에게 넘겼다. 톰슨은 러더퍼드 이전에 캐번디시 연구소의 소장을 맡았던
저명한 물리학자였다. 69세의 톰슨은 전자를 발견한 공로를 인정받아
1906년에 노벨 물리학상을 받았다. 1919년에 그는 행정 업무에서 완전히 손을 놓았고, 1925년 무렵에는 실험실에 띄엄띄엄 나오며 가뭄에 콩 나듯 학생을 받고 있었다. 오펜하이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톰슨이 자신을 받아 주기로 했다는 소식을 뒤늦게 듣고서는 크게 안도했다. 그는 물리학을 직업으로 선택했고, 물리학의 미래와 함께 자신의 미래
역시 유럽에 있다고 확신했다.ㄴ
(93-94)
오펜하이머는 프루스트의 소설을 처음 읽은 지 10년이
지난 후에도 잔인함을 논하는 구절을 외워 슈발리에를 놀라게 했다.
“그녀가 다른 사람들처럼 자신이 남에게 주는 고통에
무관심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사악함이 그토록 드물고, 비정상적이며, 소외된 상태가 아니고 심지어 그 안에서 편히 쉴 수도 있다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그와 같은 무관심을 지칭하는 단어는 여럿 있지만, 결국은 끔찍하고
영구적인 형태의 잔인함이라고 할 수 있다.”
코르시카에서 오펜하이머는 이 글을 외울 정도로 반복해 읽으면서 자신이 남에게 끼치는 고통에
무관심하다는 것을 의식했을 것이다.
(105)
나중에 MIT 총장까지 오르게 될 콤프턴은 당시
오펜하이머의 박학다식함에 기가 눌리는 것 같았다. 그는 과학 분야에서는 오펜하이머의 맞수가 될 수 있었지만, 이 젊은이가 문학, 철학, 심지어
정치 상황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하면 전혀 대응할 수가 없었다. 오펜하이머는 동생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괴팅겐에 와 있는 미국인들은 대개 “프린스턴 대학교나 캘리포니아에서 온 기혼자 대학 교수들이야. 그들은 물리학에 대해서는 일가견이 있지만, 교양 교육은 전혀 받지
못한 것 같아. 그들은 독일인들의 섬세하고 잘 조직된 지적 활동을 부러워하고 있고, 그와 같은 물리학을 미국으로 이식하고 싶어 하지.”라고 썼다. 이는 확실히 콤프턴을 염두에 둔 발언이었다.
(113)
양자 물리학은 확실히 젊은이들의 과학이었다. 젊은
물리학자들은 아인슈타인이 새로운 물리학을 완강하게 거부하는 것을 그의 시대가 지나갔음을 알리는 신호라고 생각했다.
몇 년 후 프린스턴 대학교에서 아인슈타인을 만난 오펜하이머는 실망한 채로 동생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오만방자하게도 “아인슈타인은 완전히 맛이 갔어.”라고 썼다. 하지만 1920년대 말까지만 해도 괴팅겐의(그리고 보어의 코펜하겐의) 젊은이들은 여전히 아인슈타인에게 그들의
양자 이론을 설득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고 있었다.
(118)
괴팅겐은 성인이 되어 가던 젊은이로서 오펜하이머가 처음으로 진정한 승리를 거둔 곳이었다. 오펜하이머는 과학자가 된다는 것이 “터널을 통해 산을 오르는 것과
같다.”라고 비유한 적이 있다. “터널 반대편이 계속 위쪽으로
이어져 있는지, 아니면 출구가 있기는 한 것인지 알 수 없다.” 양자
혁명의 끝자락에 걸쳐져 있던 젊은 과학자에게 특히 그러했을 것이다. 오펜하이머는 물리학의 대변동에서
참가자라기보다는 오히려 증인에 가까웠지만, 자신이 물리학을 평생 직업으로 삼을 만한 지적인 능력과 의지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짧은 9개월 동안 그는
학문적 성과와 성격의 변화를 이루었고, 그 결과 스스로에 대한 자신감을 가질 수 있었다. 단지 1년 전만 해도 그의 생존까지 위협했던 불안한 감정 상태는
이제 상당한 학문적 업적과 그에 따르는 자신감으로 바뀌어 있었다. 이제 세상이 그를 부르고 있었다.
(156)
1929년 오펜하이머는 동생에게 “모든 남자들은 여성들에게 매력적으로 보이고 싶어 하지. 그런 욕망이
꼭 허영심만은 아니야. 하지만 그와 같은 매력은 가지고 싶다고 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니야. 사람들은 멋진 취향이나 행복을 갖고 싶어 하지만 의지만으로 그것들을 얻을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지. 그것들은 한 사람의 삶의 방식을 그대로 반영하는 것들이야. 행복하려고
노력하는 것은 아무런 설계도 없이 기계를 만들려는 것과 같을 테니까.”라고 썼다.
(188)
오펜하이머는 1954년 심문관들에게 “1936년 무렵에 나의 관심사가 바뀌기 시작했습니다.”라고 설명했다. 나는 독일에서 유태인들이 겪는 일에 대해 지속적이고 사무치는 분노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독일에 친척들(고모와 사촌들 몇 명)이 있었고, 나는 그들이 미국으로 올 수 있도록 도움을 주었습니다. 나는 대공황이 나의 학생들에게 미치는 영향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적절하지 못한 직장을 구할 수밖에 없었고, 심지어 아예 직장을 구하지 못하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그들을 통해 나는 정치적이고 경제적인 사건들이 인간의 삶에 이토록 깊은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나는 공동체의 삶에 보다 적극적으로 참여해야겠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244-245)
요점을 말하자면 오펜하이머는 항상 스스로 자유롭게 사고하고 스스로의 정치적 선택을 할 수 있기를
바랐다. 어떤 대의에의 헌신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올바르게 균형 잡힌 시각에서 보아야 한다. 매카시 시기의 가장 해로운 특징은 그러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오펜하이머의
정치적 편력에 대한 가장 중요한 사실은, 그가 1930년대에
미국의 사회, 경제적 정의를 위해 헌신했다는 것이고, 이러한
목적을 이루기 위해 좌파의 편에 서기로 선택했다는 것이다.
(273)
오펜하이머는 양자 역학을 책만 읽어서는 배울 수 없다고 생각했다. 설명하는 과정에서 언어를 가지고 씨름하는 것 자체가 이해에 이를 수 있는 첩경이었다. 그는 같은 강의를 두 번 하지 않았다. 와인버그는 “그는 자신의 수업을 듣는 학생들을 의식하고 있었습니다.”라고 회고했다. 그는 청중의 얼굴을 보고 어떤 부분에서 이해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지를 파악하고는 즉석에서 설명 방법을 완전히
바꾸기도 했다. 한번은 단 한 명의 학생의 관심을 자극하기 위해 강의 시간 전체를 특정한 문제를 설명하는
데 집중하기도 했다. 수업이 끝나고 그 학생은 오펜하이머에게 달려가 그 문제를 자신이 풀어 봐도 괜찮겠냐고
물었다. 오펜하이머는 “좋아, 그것이 내가 오늘 세미나를 한 이유라네.”라고 대답했다.
(284-285)
오펜하이머는 이와 같은 정치적 덤불 속으로 뛰어들었다.
1941년 10월 13일자 그의 편지는 예의
바르고, 재기 넘치며, 풍자적이다가, 마지막에는 날카로운 빈정거림으로 끝맺었다. 오펜하이머는 인권 선언이
급진적인 신념을 가질 권리뿐만 아니라, 그 신념을 “익명으로(with anonymity)” 말 또는 글로 표현할 권리까지 보장하고 있다는 점을 상기시켰다. 그는 “공산주의자이거나 공산주의 동조자인 교수들의 활동은 회합을
가지고, 그들의 의견을 밝히며, 그것들을 (주로 익명으로) 출판한 것으로, 이러한
것들은 인권 선언에 의해 구체적으로 보장된 행동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라고 썼다. 그는 이 편지를 다음과 같이 도전적인 문장으로 마무리했다. “신성한
체 하는 애매함과 빨갱이 사냥으로 점철된 당신의 성명서를 보고 나서야 나는 당신이 의장을 맡고 있는 위원회를 둘러싼 감언이설, 협박, 오만함에 대한 소문들이 사실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327)
한때 괴짜 이론 물리학자이자 장발의 좌파 지식인이었던 오펜하이머는 이제 대단히 효율적으로 일을
처리할 수 있는 일류 지도자로 거듭나기 시작했다. 윌슨은 “그에게는
품위가 있었습니다. 그는 매우 똑똑한 사람이었지요. 그는
우리가 그의 약점이라고 지적했던 것들을 단 몇 달만에 말끔하게 털어버렸습니다. 게다가 행정적인 절차들에
대해서도 우리보다 훨씬 더 많이 알고 있었습니다. 우리의 의구심은 깨끗이 사라졌습니다.”라고 말했다. 1943년 여름 무렵이면 윌슨은 “그와 함께 있으면 내 능력 이상을 발휘할 수 있었습니다…… 나는 오펜하이머의
사람이 되었고, 그를 매우 존경하게 되었습니다…… 나는 완전히
생각이 바뀌었습니다.”라고 회고했다.
(419-420)
바이스코프는 보어가 자신에게 “폭탄은 무서운 물건일지
모르나, 또한 ‘위대한 희망’이 될 수도 있습니다.”라고 말했다고 회고했다. 그 당시 보어는 자신의 우려하는 바를 알리는 글을 오펜하이머에게 보내 의견을 구하기도 했다. 1944년 4월 2일
무렵에 그는 만족할 만한 초고를 완성할 수 있었다. 보어는 일이 어떻게 진행되더라도 “우리는 이미 인류의 미래에 깊은 영향을 미칠 것이 분명한 과학과 기술의 위대한 쾌거를 손에 넣은 것이 확실하다.”라고 주장했다. 가까운 미래에 “유례없는
무기가 만들어져 전쟁의 성격을 완전히 뒤바꿀 것이다.” 이것은 좋은 소식이었다. 나쁜 소식 역시 명징하고 예언적이었다. “우리가 빠른 시일 내에
이 새로운 물질을 어떻게 통제할 것인지에 대한 합의에 이르지 못한다면, 그로 인해 얻을 수 있는 일시적인
이익보다 그것 때문에 인류가 받게 될 영구적인 생존의 위협이 훨씬 커질 것이다.”
(443)
오펜하이머는 로스앨러모스의 무시무시한 비밀을 세계가 알지 않고서는 전쟁을 끝낼 수 없다는 주장을
전개함으로써 설득에 성공했다. 이것은 모두에게 중요한 순간이었다. 보어의
논리는 오펜하이머의 동료 과학자들에게 특히 설득력이 있었다. 하지만 그들 앞에 서 있는 카리스마 넘치는
사람 역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윌슨이 그 순간을 회고했듯이, “내가
당시 오펜하이머에게 느꼈던 것은, 이 사람은 천사처럼 진실하고 솔직해서 잘못된 일을 할 수 없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나는 그를 믿었습니다.
(462)
만약에 오펜하이머가 히로시마 폭탄 투하 전에 대통령이 “일본인들은
평화를 원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음을 인지했다면, 그리고
대도시를 대상으로 한 원자 폭탄의 군사적 이용이 8월에 전쟁을 끝내기 위해 필수적인 것이 아니었음을
알았다면, 그가 어떻게 반응했을지 아무도 확신할 수 없다. 하지만
우리는 그가 전쟁이 끝난 후 자신이 속았다고 믿게 되었고, 이로 인해 그가 정부 관료들이 하는 말이면
뭐든지 의심하게 되었음을 알고 있다.
(501)
몇 분 후, 뜨거운 뉴멕시코의 태양을 받으며 단상
위에 앉아 있던 오펜하이머는 그로브스 장군으로부터 감사장을 받기 위해 일어섰다. 낮고 조용한 목소리로, 그는 앞으로 연구소의 작업에 참여했던 모두가 자부심을 가지고 그들의 성취를 돌아볼 수 있기를 기원했다. 하지만 다른 한편 그는 말했다. “오늘 그 자부심은 깊은 우려와
함께해야 합니다. 원자 폭탄이 무기고의 신무기에 불과한 것이 된다면,
인류가 로스앨러모스와 히로시마의 이름을 저주할 날이 올 것입니다.”
(506)
나중에 누군가 대통령이 “손에 피라니, 제길. 그는 내 손에 묻은 피의 절반도 묻히지 않았어. 그걸 아프다고 떠들고 다니다니.”라고 중얼대는 것을 들었다. 그는 나중에 애치슨에게 “나는 두 번 다시 저 개자식을 만나고 싶지
않아.”라고 말했다. 1946년 1월까지도 이 일은 그의 마음에 각인되어 있었고, 그는 애치슨에게
오펜하이머를 “5~6개월 전에 내 사무실로 찾아와 손을 비비면서 원자력 에너지를 발견하여 자신들의 손에
피를 묻혔다고 말한 울보 과학자”라고 표현했다.
(571)
그래도 오펜하이머는 연구소가 과학뿐만 아니라 인문학까지도 아루르는 것이 중요하다고 굳게 믿었다. 연구소에 대한 그의 강연에서 오펜하이머는 과학자들이 과학 자체의 특성과 결과를 보다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인문학이
필수적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나 수학자들은 불과 몇 명만이 그의 의견에 동의를 표했을 뿐이었다. 노이만은 자신의 분야만큼이나 고대 로마사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오펜하이머처럼 시에 관심이 있었다. 그는 이 연구소를 인간의 삶이 처해 있는 상황들을 총체적이고
다면적으로 이해하는 데 관심을 가진 과학자, 사회 과학자, 그리고
인문학자들의 안식처로 만들고 싶어 했다. 이는 그가 청년 시절부터 동등하게 관심을 기울여 왔던 과학과
인문학을 화합시킬 수 있는 놓칠 수 없는 기회였다. 그런 의미에서 고등 연구소는 로스앨러모스의 정반대이자
심리적 해독제였다.
(576-577)
1949년 보어가 프린스턴을 방문했고, 아인슈타인의 70회 생일을 축하하는 논문집에 에세이를 쓰기도 했다. 보어가 아인슈타인은 서로 만나는 것을 즐겼다. 하지만 오펜하이머처럼, 보어 역시 아인슈타인이 왜 그토록 양자 이론을 혐오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기념 논문집의 초고를 보고 아인슈타인은 칭찬만큼이나 독설이 많다고 논평했다. 그는 “이것은 나를 기념하는 책이 아니라 규탄서 같군.”이라고 말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의 생일인 3월 14일이
되자, 프린스턴의 강당에는 오펜하이머, 라비, 위그너, 그리고 바일을 비롯한 저명한 학자 250명이 아인슈타인 생일 기념 강연회에 참석하기 위해 모여들었다. 동료들이
얼마나 아인슈타인과 의견을 달리했던 그가 강당 안에 들어서자 공기 중에는 기대감으로 전류가 흐르는 듯했다. 순간적인
침묵이 흐르고 나서, 모두는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물리학자로
기억되리라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을 사람에게 기립 박수를 보냈다.
(684)
1953년 무렵이면 냉전은 워싱턴과 모스크바가 선택할
수 있는 정책의 선택지를 협소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핵의 지니 요정을 호리병 속에 가두려 했던 오펜하이머의
노력은 미국 내부에서의 정치적 기류로 인해 강력한 반대에 부딪혔다. 이제 공화당 출신의 아이젠하워가
대통령에 당선되자 그 정치 기류는 오펜하이머를 병에 가둬 바닷속으로 던져버리려 했다.
(701-702)
그는 가까운 미래에 “우리는 두 강대국들이 상대방은
물론이고 인류 문명 전체를 끝장낼 수 있는 위치에 도달하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다만 자국의 파멸까지도
각오해야 할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그러고 나서 오펜하이머는
“우리는 유리병 속에 든 두 마리의 전갈과 같습니다. 서로
상대방을 죽일 수 있는 능력을 가졌지만, 그러려면 자신의 목숨을 걸어야 하는 것이지요.”라고 덧붙여 청중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
(721)
1953년 가을에 워싱턴은 마녀사냥에 사로잡혀 있었다. 수백 명의 공무원들이 사소한 혐의 때문에 공직에서 물러나야만 했다. 그
누구도, 심지어 대통령조차도 매카시 상원 의원에 맞서려 하지 않았다.
1953년 11월 24일에 매카시는 라디오와
텔레비전을 통해 아이젠하워 행정부가 “애처로운 유화 정책”을
펴고 있다며 맹공을 퍼부었다. 다음날 잭슨은 <뉴욕
타임스>의 제임스 레스턴에게 자신은 “매카시가 대통령에게
전쟁을 선포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레스턴은 이 말을
익명의 백악관 관계자의 이야기라며 자신의 칼럼에 인용했다. 한 아이젠하워 보좌관은 기사를 읽고서 잭슨의
발언은 “매카시와 그의 동지들이 대통령의 정책을 지지하기 어렵게 만들 뿐”이라며 비난했다. 잭슨은 매카시의 공격에 아무도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는
것을 보며 아연실색했다. 그는 자신의 일기에 “내가 지난
몇 달 동안 ‘지도력의 부재’에 대해 걱정하던 느낌들이 이번
주에 기어코 현실화되고 말았다. 나는 두렵다’라고 썼다. 그는 대통령 수석 보좌관 셔먼 애덤스에게 자신은 이번 사건으로 인해 최소한 매카시가 “알고 보면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대통령 보좌관들의 생각이 바뀌기를 바란다.”라고
말했다.
(746)
아인슈타인은 자신의 폴드 홀 사무실로 걸어가면서 오펜하이머가 있던 방향으로 고개를 끄덕이면서
자신의 조교에게 “저기 나르(nar, 바보)가 간다.”라고 말했다. 아인슈타인은
물론 미국이 나치스 독일과 같다고 생각하지 않았고, 오펜하이머가 도망쳐야 한다고도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매카시즘에 크게 놀랐다. 1951년 초에 그는 자신의
친구인 벨기에의 엘리자베스 여왕에게 편지를 써서, 이곳 미국에서 “수년
전 독일에서의 재앙이 다시 반복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악의 세력들에게 저항도 하지 않은 채 묵종하고
그들과 보조를 맞추고 있습니다.”라고 썼다. 그는 오펜하이머가
정부의 보안 위원회에 협조함으로써 자신을 굴욕에 빠뜨릴 뿐만 아니라 그와 같은 유해한 과정 자체에 정당성을 부여하게 되는 것을 두려워했다.
(811)
개리슨은 이어서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본 청문회에서는
오펜하이머 박사만 재판을 받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미합중국 정부 역시 재판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개리슨은 “이 나라를 휩쓸고 있는 걱정”에 대해 말하며 은근히 매카시즘에 대한 비판의 칼날을 세웠다. 트루먼과
아이젠하워 행정부 시기에 창궐했던 반공 히스테리로 인해 미국의 국가 안보 기구들은 이제 “공산주의라는
단일한 세력이 훌륭한 재능을 가진 사람들을 파괴하는 결과를 낳게 될 것처럼” 행동하고 있었다. “미국은 자국민들을 먹어 치워서는 안 됩니다.” 개리슨은 그레이
위원회가 “사람 전체를 판단”해 줄 것을 요청하는 것으로
최종 변론을 마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