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문화유산답사기 11 : 서울편 3 - 사대문 안동네 : 내 고향 서울 이야기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11
유홍준 지음 / 창비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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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유홍준 님의 <나의 문화 유산 답사기> 시리즈 서울편 3권을 읽었단다. 코로나 시절 서울편 1, 2권을 몇 년 전에 재미있게 읽으면서 코로나 끝나면 그 책에 나왔던 곳들을 너희들과 함께 가봐야지, 그렇게 마음을 먹었다가 그 마음먹은 것까지 잊고 말았구나. 이번에 3, 4권을 읽으면서 그때 마음 먹었던 것이 기억났어. 이번에 읽은 3, 4권에서 나온 곳들도 너희들과 함께 가보고 싶구나.

몇 달 전인가 코로나로부터 좀 자유로워지기 시작했을 때 너희들과 함께 인사동 나들이를 간 적이 있었잖니. 이 책을 읽고 인사동에 갔다면 너희들에게 좀더 많은 이야기를 해주었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단다. 3권에서 인사동도 이야기해주었거든. , 서울이 그리 먼 곳도 아니고 또 가면 되지...

서울은 조선왕조 600년의 수도로써 역사적인 유물이 많이 있는 곳이잖니. 조선뿐만 아니라 일제시대에도 중심지이다 보니 아픈 역사의 현장도 많이 남아 있는 곳이 서울이란다. 이번 3권의 부제목은 <사대문 안동네 : 내 고향 서울 이야기>더구나. 지은이 유홍준 님은 사대문 안에서 태어나서 자란 순수 서울 토박이라고 하시는구나. 글 속에서 서울 토박이에 대한 자부심도 크신 것 같았어. 그래서 3권의 이야기는 다른 책과 달리 자신이 자라온 이야기와 경험담이 많이 실려 있었단다. ‘서울의 문화 유산 이야기플러스 유홍준의 어린 시절 이야기라고나 할까. 3권에서는 북악산, 서촌, 인왕산, 북촌, 인사동, 북한산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주고 있단다.


1.

서울의 주산인 북악산에서 이야기를 시작한단다. 멀리 한강이 앞에 흐르고 북악산이 병풍처럼 막고 있는 서울의 옛 사대문 안은 무학대사가 아니라도 누가 봐도 명당 자리인 것 같구나. 일제 시대는 조선총독부가 있었고, 해방 후에는 청와대가 있다 보니 오랫동안 금단의 지역이었는데 최근에 전면 개방된 곳이란다. 그래도 서울에 사는 사람들도 안 가본 사람들이 있지 않을까 싶구나. 아빠는 청와대를 개방한 사람을 싫어하고 개방한 이유도 마음에 안 들어서 더욱 안 가려고 한단다.

역사와 문화유산의 측면에서 봤을 때, 북악산 인근에는 많은 역사 유물이 많다고 하더구나. 영조의 어머니 숙빈 최씨를 기리기 위한 육상궁이 있고, 이 육상궁을 포함하여 나중에 왕을 낳은 일곱 명의 후궁의 사당인 칠궁도 이곳에 있다고 하는구나. 육상궁, 칠궁 모두 아빠는 처음 들어보는 궁이로구나. 조선의 역사는 긴 만큼 유물도 다양하고 많구나. 그밖에 북악산 근처에 있는 여러 문화유산들을 이야기해주고 발길을 서촌으로 돌린단다.

서촌은 인왕상 아랫동네를 부르는 말인데, 원래는 청운동이니, 효자동이니 동 이름으로 불렀는데, 최근에 관광객 유치를 위해서 북촌과 비슷하게 서촌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하는구나. 아빠도 서촌이라는 말을 최근에 많이 들었는데, 그런 이유가 있었구나. 이곳 서촌은 지은이 유홍준 님의 고향으로 어린 시절의 이야기도 많이 해주고, 어린 시절에는 보존되었다가 지금은 없어진 건물이나 장소 등도 많이 이야기해주었단다. 예전에 아빠도 결혼하기 전에 서울에서 일 보다가 본가에 갈 때 이쪽에 있는 자하문 터널을 이용했었단다. 이쪽 길을 하다 보면 오래된 집들이 많아서 고풍스러우면서 편안한 느낌이 들었어.

서촌의 대표적인 명소인 통인시장, 자하문로, 자교교회, 국립서울맹학교 농학교뿐만 아니라 그곳 출신 아니면 모를 것 같은 형제상회라는 곳도 사진과 함께 소개해 주더구나. 서촌에는 인왕산 경치를 볼 수 있는데, 인왕산 하면 유명한 화가 겸재 정선이잖니, 그 정선도 이곳에서 태어났다고 하는구나. 서촌 지역에 유독 친일파 집도 많았다고 하는데, 매국노 이완용이 살았던 집도 이곳 옥인동에 있었고, 이완용보다 더 심한 매국노인데 사람들이 많이 모르는 윤덕영이라는 악질 친일파도 인왕산 자락에 벽수산장이라는 프랑스식 3층 건물을 짓고 살았다고 하는구나. 그런데 벽수산장은 2만평의 땅에 이 프랑스식 3층 건물을 포함해서 18채의 건물을 짓고 떵떵거리면서 살았다고 하는구나. 이 벽수산장은 아빠가 재작년에 읽은 심윤경 님의 <영원한 유산>이라는 소설의 배경으로 알게 된 곳이기도 하지. 그 벽수산장의 주인인 윤덕영이 친일파라는 것은 알았는데, 얼마나 악덕한 친일파라는 것은 이번에 새롭게 알았단다. 1910년 경술국치 때 옥새를 치마폭에 숨겼던 순종의 황후 순정효황후. 그 황후의 치마폭에서 옥새를 빼내어 도장을 빼낸 이가 바로 윤덕영이라는 놈이라고 하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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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8)

윤덕영(尹德榮, 1873~1940)은 순종황제의 부인인 순정효황후의 큰아버지로 1910년 경술년 강제 한일합병 조인 때 순정효황후가 옥새를 치마폭에 숨기고 내놓지 않는 것을 알고 강제로 빼앗아 총리대신 이완용에게 넘겨준 인물이다. 윤덕영은 그 공로로 조선귀족 자작이 수여되어 일제로부터 당시 5만 엔의 은사공채금을 받아 옥인동 일대를 사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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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난 남자들이 나라를 팔아 먹으려고 할 때 옥새를 빼앗아 치마폭에 넣었다는 순정효황후의 이야기는 가슴을 아프게 하는구나. 심윤경 님의 소설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해방 이후 벽수산장은 유엔 한국통일부흥위원회(UN Commission for the Unification and Rehabilitation of Korea), 줄여서 언커크의 건물로 사용되었고, 나중에 보수공사 중에 화재로 전소되었다고 하는구나. 이것도 심윤경 님의 <영원한 유산>이라는 소설에서 이야기되었었지.

….

인왕산에 송성원이라는 추사 김정희가 쓴 암각 글씨가 있었다고 하는구나. 오래 전에 찍은 사진도 있는데, 그것이 지금은 사라졌대. 정확한 위치를 몰라서 못 찾고 있다고 하는데, 안타까우면서 어디선가 불쑥 짠~ 하고 나타났으면 좋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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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석원 바위에는 추가 김정희가 큰 글씨로 쓴 송석원이라는 암각 글씨가 있었다. 글씨 옆에 정축 청화월 소봉래 서(丁丑淸和月小蓬萊書)’라고 관지가 쓰여 있어 추가 31세 때인 1817 4월에 쓴 것임을 알 수 있다. 소봉래는 추사의 또 다른 호이다. 이 바위는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는데, 최종현은 <오래된 서울>에서 박노수미술관 뒤쪽에 계단식 바위벽에 새겨져 있었는데 지금은 흙에 묻힌 상태로 추정하고 있고, 혹자는 지금은 폐업한 술집 마당에 이 암벽이 있는데 시멘트로 덮여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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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북촌은 그야말로 핫 플레이스로 떠오르는 곳이란다. 전통 한옥 마을이 자리를 잡고 있으면서도 현대식 건물의 서울 도심이 내려다보이는 곳이 있어서 서울의 옛모습과 오늘날 모습을 함께 볼 수 있는 곳으로 외국 관광객의 필수코스가 된 곳이란다. 그냥 단순히 북쪽에 위치해서 북촌이라고 부르는 줄 알았는데, 정확하게는 종로 이북에 위치해서 북촌이라고 불렀고, 종로 남쪽은 남촌이라고 불렀다고 하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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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촌이라고 하면 우리는 막연히 조선왕조 대대로 내려오는 양반 동네를 떠올리기 쉽다. 북촌이라는 말의 유래 때문이다. 예부터 한양을 동서로 가로지르는 청계천과 종로를 중심으로 남쪽 남산 아랫동네는 남촌, 북쪽 동네는 북촌이라고 불러왔다. 매천 황현은 <매천야록>에서 이렇게 말했다.

서울의 대로인 종각 이북을 북촌이라고 부르며 노론이 살고 있고, 종각 남쪽을 남촌이라고 하는데 소론, 남인, 북인 삼색(三色)이 섞여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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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는 노론들이 살던 북촌이 개화기로 넘어오면서는 신문화를 이끌던 개화파들이 많이 살았다고 하는구나. 박지원의 손자이자 개화파를 이끌었던 박규수가 이곳에 살았는데, 박규수의 제자들 중에는 김옥균, 서재필, 홍영식 등이 있는데 이들은 모두 갑신정변의 주역들이었단다.  비록 실패했지만그밖에 여운형, 유길준, 현상윤 등도 이곳에 살았대. 아빠가 유홍준 님을 좋아하긴 하지만, 현상윤에 대한 유홍준 님의 평가에는 동의할 수 없구나. 유홍준 님은 현상윤이 교육자로써 존경할 만하다고 했는데, 아빠가 알기로는 현상윤은 변절한 친일파로 알고 있거든. 그리고 현상윤의 생몰년을 1893~1945로 기록하면서 한국전쟁 중에 사망했다고 해서 어떤 것이 잘못되었나 찾아봤더니 생몰년이 잘못되었더구나. 한국전쟁이 일어난 1950년에 사망했다고 하는구나. 오타 발견. 아무튼 현상윤은 친일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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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촌 다음으로 인사동은 3개 챕터에 걸쳐서 이야기해주고 있단다. 그만큼 사연도 많고 유물도 많고 역사도 많이 깃든 곳인가 보구나. 삼일절 기미독립선언서를 읽었던 태화관도 이곳에 있는데, 아빠가 얼마 전에 <만세열전>이라는 책을 읽고 이야기한 것처럼 기미독립선언서는 이곳 태화관이 아닌 종로 거리에서 많은 백성들 앞에서 낭독했어야 옳은 것이라 생각한단다. 인사동이란 이름은 일제시대 행정 지역을 개편하면서 생겼다고 하는구나. 이후 인사동은 출판사와 서점의 거리로 시작해서, 고서점과 헌책방의 거리, 고미술상과 민예품을 파는 거리, 화가들이 전시회를 여는 거리 등으로 변해왔다고 하는구나. 지은이는 이런 인사동을 시대별로 구분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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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체험에 입각해보건대 인사동길이 전통과 현대가 어우러지는 서울의 대표적인 문화예술의 거리로 변해온 발자취는 대략 다음과 같다. 1960년대는 고서점, 1970~80년대는 화랑과 고미술상, 1980~90년대는 전통찻집과 카페, 2000년 이후는 쌈지길과 관광 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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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마지막으로 사대문 안은 아니지만, 서울의 대표적인 명도 북한산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주었단다. 서울에 북한산이 있는 것은 서울 사람들에게는 큰 축복이라고들 한단다. 대중교통을 이용해서 그렇게 크고 아름다운 산을 갈 수 있으니 말이야. 산 정상에서 시원한 바람을 쐬면서 내려다보는 서울의 풍경 또한 멋지고아빠는 서울 사람이 아니지만 북한산을 여러 번 올랐는데 갈 때마다 좋았단다. 나중에 너희들과도 함께 오르고 싶구나.

북한산의 비봉이라는 곳에 가보면 진흥왕 순수비가 놓여 있단다. 아빠도 이것을 본 적이 있는데, 그때 사촌형님이랑 같이 갔는데, 그 형님께서 진흥왕 순수비가 국보 3호라고 알려주어서 그제서야 진흥왕 순수비가 국보 3호라는 것을 알게 되었단다. 일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에라서 국보 1호만 알았지,

국보 3호도 모르고 있었다니그런데 국보 2호는 뭐였지? 그러면서 그때 국보 2호를 찾아봐서 아빠는 국보 2호가 원각사지 십층석탑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단다. 이렇게 알게 되어서 그런지 국보 2, 3호는 잘 안 까먹게 되는구나. 북한산의 진흥왕 순수비에 대해서 이번 책을 통해서 알게 된 사실 두 가지가 있단다. 첫째는 이 비석이 진흥왕 순수비라고 확인한 분이 추사 김정희였다는 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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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흥왕 순수비 3기는 모두 세월의 흐름 속에 잊혔다. 황초령 순수비의 존재는 조선 중기에 알려지기 시작했으나, 북한산 순수비를 사람들의 무학대사비라고 했다. 세상에 전하기로 무학대사가 한양 도읍 자리를 물색하기 위해 비봉에 올라오니 무학이 잘못 찾아와 이 비에 이르렀다라고 쓰여 있어 놀라서 내려갔는데 세월이 흘러 글씨가 안 보인다고 전해온 것이다. 이것이 다시 진흥왕 순수비임을 확인한 이는 추사 김정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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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는 북한산 비봉에 있는 진흥왕 순수비의 복제비를 문재인 대통령님이 참여정부 때 민정수석으로 계시면서 제안을 했고, 당시 문화재청장이었던 유홍준 님이 추진해서 만들었다는 것이란다. 진짜 진흥왕 순수비는 훼손의 이유로 국립중앙박물관에 있고, 원래는 작은 안내 표지석만 세워져 있었는데, 2006년 당시 문재인 민정수석 제안, 유홍준 문화재청장 실행으로 복제품을 만들어 세웠다고 하는구나.

이상으로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서울편 3권에서 소개한 서울의 이야기 중 일부를 이야기해보았단다. 최근에 서울에 외국인 관광객들이 무척 많이 늘어난 것 같더구나. 한류의 열풍에 힘입어 우리나라를 찾는 관광객들이 부쩍 는 것 같구나. 거기에 코로나도 끝나서 더 많은 사람들이 우리나라를 찾는 것 같아. 그리고 아무래도 많은 사람들이 우리나라의 대표도시인 서울을 먼저 찾지 않을까 싶구나. K-, K-영화, K-드라마, K-푸드 등에 맞춘 여행 코스가 많이 차지하겠지만, K-역사를 알리는 코스도 많았으면 좋겠구나. <나의 문화 유산 답사기> 서울편 시리즈가 많은 도움이 될 것 같구나. 영문판으로 번역을 하면 어떨까, 싶다가도.... 외국인들에게 읽기에는 너무 내용이 깊은 것 같기도 하고... ㅎㅎ 자, 오늘은 여기까지조만 간에 서울편 4권도 이야기해줄게.


PS:

책의 첫 문장: 북악산은 높이 342미터의 화강암 골산으로 서울의 주산(主山)이다.

책의 끝 문장: 아무튼 진흥왕 북한산 순수비의 복제비 건립은 그에게나 나에게나 큰 보람이자 자랑이다.


광화문 대통령 시대는 대통령 집무실에 반드시 필요한 지하 벙커와 헬기장 등의 부지를 광화문 인근에서 찾을 수 없어 현실적으로 실현 불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리면서 문재인 대통령에게 관저만 삼청동에 있는 안가 두세 채를 합쳐 옮길 것을 건의했다. 그러나 문재인 대통령은 이를 위해서는 또 예산을 들여야 하고 공사가 완료되자면 시간이 걸려 실제로 살 수 있는 기간이 얼마 안 된다며 자신은 소박하게 옮기고 싶으나 다음 대통령에게 멀쩡한 관저를 두고 작은 집으로 가서 살라고 하는 셈이 된다고 거부했다. - P41

현실적으로 이미 개방한 청와대의 문을 다시 닫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장기적인, 나아가서는 최종적인 개방 형태에 대해서는 명확한 그림을 제시해야 한다. 청와대라는 역사적이고 상징적인 공간을 앞으로 어떻게 사용할 것이라는 마스터플랜을 제시해야 하는데, 이는 대통령 혹은 문화부장관이나 문화재청장 개인의 상식적인 소견에서 나오는 것이어서는 안 된다. 전문가들의 의견을 듣는 것도 단편적이고 아이디어 제공이라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 P56

이후 조영석의 증언대로 그(겸재 정선)는 그림을 그릴 때면 백악산과 인왕산을 바라보며 우리 산천의 생김새를 탐구했고, 그가 그리면서 쓴 붓을 내다 쌓으면 무덤이 된다고 할 정도로 끊임없는 수련과 연찬을 통해 이루어낸 것이 겸재 예술이다. 그런 의미에서 겸재 예술의 자산은 좋은 스승, 벗들과의 어울림, 학문, 문학과 미술의 만남, 그리고 여행이었다고 할 수 있다. 만 권의 책을 읽고 천 리를 여행하는 것이 문인의 길이라는 것을 몸소 실천한 결과였다. - P96

서촌의 공간적 가치는 기에 있고 그 길 중간중간에는 작은 한옥들이 담장을 맞대고 있는 골목이 있고 그 골목엔 역사 인물의 자취가 있고 길끝에는 유적지가 있다는 점이다. 거기에다 인왕산이라는 아름답고 듬직한 산이 받쳐주고 조금만 올라가도 명승이 나온다는 점에서 매력과 가치가 더해진다. - P106

인사동 민예품 가게 진열장에 있는 그 흔한 신라토기, 가야토기의 경우 시가로 몇 십만 원이면 살 수 있는데 반출 허가를 받을 수 있는지 없는지 모르기 때문에 사실상 거래가 막혀 있는 것이다. 이는 심각하게 재고되어야 한다. 영국 사람이 가야토기를 사가면 영국 토기가 되는 것이 아니라 영국 사람도 가야토기를 통해 한국 문화를 사랑하고 존경하게 되는 것이다. 귀중한 유물은 당연히 반출이 금지되어야 하지만 민예품 가게 진열장에 있는 평범한 것까지 규제하는 것은 우리 문화의 국제적 홍보를 막는 행위이다. - P2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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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시우행 2023-07-05 00:0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서울을 더욱 깊게 알수 있어서 좋네요. 젊을 때 더 많이 다녀볼 걸... 후회도 되네요. 칠십대 중반 나이에 가난에 밀려 이젠 경기도로 나왔으니 점점 그 길이 멀어 보이네요.ㅠㅠ

bookholic 2023-07-05 09:51   좋아요 0 | URL
호시우행 님께서 이 책을 읽으시면 추억도 함께 읽으실 것 같습니다. 늘 건강하시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