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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권으로 읽는 백제왕조실록 ㅣ 한 권으로 읽는 실록 시리즈 3
박영규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04년 11월
평점 :
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우리 식구들이 얼마 전에 부여 당일치기
역사(?) 여행을 하고 왔잖니, 날씨가 너무 좋은 날 가서
좋은 추억 만들어 온 것 같구나. 부여는 백제의 수도 중에 하나로 가장 마지막 수도이면서 백제의 멸망을
함께 했던 곳이란다. 그곳에 우리가 여행을 가서, 다시 복원한
부여성도 가보고, 금동대향로도 보고, 정림사지 오층석탑에서
탑돌이도 하고, 궁남지라는 호수에서 달구경도 하고 멋진 야경도 보는 등 알찬 여행이었지. 아빠가 백제 역사에 대해 좀더 많이 알고 있었다면 좀 더 많은 이야기를 해주었을 텐데, 그러지 못했던 점이 좀 아쉬웠지.
그래서 여행 오자마자 책장 속에 잠자고
있던 <한 권으로 읽는 백제왕조실록>을 찾아내어
읽었단다. 예전에 한참 베스트셀러에 올랐던 <한 권으로
읽는 … 왕조실록> 시리즈 중에 하나야. 아빠는 고려 편, 조선 편을 읽었고, 신라 편, 백제 편, 고구려
편은 사두기만 안 읽었거든. 이번에 백제 편을 꺼내 읽었단다. 진작에
여행 가기 전에 읽고 갈걸, 아빠가 뒷북을 잘 치잖니.
책은 참 재미있었단다. 그리고 백제의 역사를 한반도에 국한 두지 않고, 중국 대륙에서도
번성했었다는 대륙백제로 해석한 부분도 신선했어. 우리 고대사의 역사 기록이 남아 있는 것이 많지 않다
보니 삼국시대 이전의 역사들에 늘 논란이 있었어. 어떤 역사가들은 옛 기록들을 찾아내서 우리나라 삼국시대의
삼국이 모두 중국 대륙에서 활동했다고 주장하기도 했어. 아빠도 오래 전에 그런 책들을 읽어보기도 했단다. 그들의 주장이 아무 터무니 없는 것이 아니라서, 역사의 또 다른
해석일 수 있겠다고 아빠는 생각했어.
우리나라가 일제 36년의 지배하에 있으면서, 왜곡된 식민사관이 해방 후에도 영향을
주었기 때문에, 학교에서 배우는 역사가 모든 것이 진실이라고는 아빠도 믿지 않고 있으니까 말이야. 아무튼 이 책의 지은이 박영규 님도 백제의 역사를 한반도 국한하지 않고, 대륙과
일본에 진출한 역사로 보는 시각이라서 책을 읽는데 더욱 흥미를 주었단다. 너희들도 나중에 이 책을 읽게
되면, 학교에서 배운 내용과 조금 다른 부분이 나올 수 있어. 어느
것이 옳다, 틀리다 단정 짓지 말고 역사는 다양한 해석이 있을 수 있구나 하고 생각하면 좋겠구나.
1.
어떤 한 시대의 역사를 이야기를 하게
되면 왕 같이 나라를 이끈 사람들을 중심으로 이야기뿐만 아니라 일반 백성들이 어떻게 살았고, 어떤 문화를
가지고 있고, 어떤 예술품을 만들었는지에 대한 이야기도 하곤 하는데,
이 책은 백제의 왕 중심으로 주로 이야기를 했단다. 그래서 우리가 부여 당일치기 여행을
가서 본 정림사지 오층석탑이나 금동대향로 같은 이야기는 나오지 않았어.
…
백제는 총 31명의 왕이 있었단다. 조선시대 왕이 총 27명이었는데, 그보다 많구나. 백제를
세운 사람은 너희들도 잘 알다시피 온조왕이란다. 그 온조왕의 아버지는 고구려를 세운 주몽이었고… 그런데 친아들이 아니고 양자일 가능성이 높다고 하더구나. 주몽이
소서노와 결혼을 하였는데, 그 때 이미 소서노는 사별한 전 남편 사이에 낳은 아이들이 있었대. 그 아이들이 바로 비류와 온조였어. 그래서 주몽은 친자인 유리를
태자로 삼은 것이고 말이야. 권력 다툼에서 밀려난 소서노는 아들들을 데리고 고구려를 떠나 하남으로 가서
정착했다고 역사서에 써 있다고 하는구나.
그런데 일반적으로 이 하남을 한강 이남이라고
해석을 했는데, 그것이 아니고 중국의 옛 역사서에서 이야기하는 하남은 중국 황하강 남쪽이라고 했대. 그 지역이 대방이었어. 그러니까 고구려를 떠난 소서노 일행이 정착한
곳은 중국 황하 남쪽 대방이라는 곳이야. 비류가 형이니까 아무래도 대방에서 지휘자 역할은 비류가 했고, 온조에게 명을 내려 바다 건너 땅을 알아보라고 해서, 온조가 미추홀에
오게 되었다고 하는구나. 미추홀도 오늘날 어느 지역인지 정확한지 모르지만, 인천지역이라는 것이 일반적이란다. 온조는 미추홀을 거쳐 지금의 한강
아래 지역인 오늘날 하남에 정착을 하게 되었단다.
한편 비류와 소서노가 머무르고 있던 대방
지역에 낙랑군이 침략해 들어와서 그곳을 떠나 미추홀로 오게 되었어. 온조는 이미 한반도 땅에서 자신이
정착을 했기 때문에 형인 비류가 오는 것을 꺼림칙하게 생각했어. 그러자 소서노가 격분하여 직접 군사를
이끌고 온조에게 쳐들어갔는데, 온조에게 패하고 전사하게 되었다고 하는구나. 아들과 엄마가 전투를 하고 엄마가 전사되었다? 온조가 왕이 되었겠지만
마음이 편치 않았을 것 같은데…
…
온조는 한강 이남에 수도를 정하고 나라의
기틀을 마련하였단다. 온조의 뒤를 이어 2대 기루왕 3대 다루왕이 각각 50년 이상씩 통치를 하면서 백제라는 나라의 모습을
만들어갔어. 7대 사반왕이 며칠 만에 왕에 물러났는데, 이것으로
왕위 찬탈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고 했어. 그렇게 왕위에 오른 이가
8대 고이왕인데, 고이왕은 52년간 왕위에 머무르면서, 대륙 진출을 하여 요동 반도와 요서 지역을 점령을 하였대. 옛 백제
땅을 다시 차지하려고 말이야. 그렇게 고이왕은 앞서 이야기했던 대륙 백제 시대를 열었다고 하는구나. 9대 착계왕 10대 분서왕은 아예 대륙에 머물면서 통치를 했대. 그리고 낙랑군과 전쟁을 벌이기도 했다는구나. 착계왕은 낙랑군과 전투
중에 전사하고, 분서왕은 자객에 의해 죽고 말았지만 말이야.
11대 비류왕, 12대 계왕을 거쳐 13대 근초고왕이 왕이 되었단다. 근초고왕은 백제의 전성기를 연 왕으로
너희들이 배우는 교과서에 등장하는 백제의 가장 대표적인 왕이란다. 346년부터 375년까지 29년 2개월
왕위에 있었어. 그런데 교과서에서 알려진 것과 달리 근초고왕은 집권
29년 중에 20년을 대륙에 머물면서, 대륙백제의
안정에 힘썼다고 하는구나. 양자강과 요동지역을 진출하였대. 그런데
이 20년의 기록이 삼국사기에는 적혀 있지 않고, 중국 역사서에
기록이 남아 있다고 하는구나. 삼국사기라는 것이 승자의 역사 기록이다 보니, 백제의 기록을 작게 왜곡하거나 누락되어 있는 것이 많이 있다는구나. 아무튼
근초고왕은 대륙에서 기반을 쌓아 북쪽으로는 고구려와 대치하였대. 역사 기록에 평양성까지 공격을 했다고
하는데, 이 평양성도 우리가 알고 있는 북한의 평양성이 아니라 중국 요령성 주변이라고 추정을 하는구나. 그러니까 고구려와 백제의 전투는 한반도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중국 대륙에서 이루어진 거라는 거야. 이 전투에서 고구려 고국원왕이 화살에 맞아 사망하게 된단다. 근초고왕
때는 대륙에서 기반을 닦은 것뿐만 아니라, 왜에도 문물을 전달했다고 해. 그렇게 근초고왕은 백제라는 나라의 영토를 넓히면서 전성기를 구가했단다.
2.
근초고왕의 뒤를 이은 14대 근구수왕은 근초고왕의 아들로 근구수왕은 태자시절부터 평양성 공격에 참여를 했고, 왕위에 오른 후에도 평양성 공격을 했는데, 전염병과 흉년이 들면서
내부 분열로 평양성 공격이 중단되었단다. 15대 침류왕은 짧은 치세라서 큰 업적은 없었는데, 인도로부터 불교가 전래되었다고 한다. 16대 진사왕과 17대 아신왕은 서로 대립했었는데, 진사왕은 아신왕에 의해 살해되었다고
하는구나. 아신왕은 침류왕의 맏아들로 유능했지만, 그의 적군이
고구려 광개토왕이었다는 것이 불운이라면 불운이었지. 아신왕은 고구려 광개토왕과 전투에서 패배하고 항복을
했어. 후에 왜, 가야와 연합하여 복수를 꿈꾸었단다. 당시 고구려는 신라와 연합하여 대응했어, 백제, 가야, 왜 진영과 고구려, 신라
진영의 대규모 전쟁이 있었고, 아신왕은 광개토왕의 기세에 후퇴할 수밖에 없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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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7)
아신왕과 광개토왕은 둘 다 391년에 정권을 장악하고 392년에 왕위에 올랐다. 당시 광개토왕은 18세, 아신왕은 이십대 중반의 나이로 모두 혈기 왕성한 때였다. 이들은 젊은 혈기를 바탕으로 동북아시아의 패자를 자처했고, 그것은
결국 전쟁으로 이어진다. 선제 공격을 가한 쪽은 광개토왕이었다. 고국원왕의
전사 이후 소수림왕과 고국양왕은 줄기차게 복수전을 꾀하였으나 번번이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그러나 젊고
용맹한 광개토왕이 즉위하면서 상황은 급변했다. 광개토왕은 백제가 왕위 계승 문제로 내분을 겪자,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대륙백제의 북쪽 요충지인 관미성과 주변 10개
성을 공략하여 얻음으로써 먼저 승기를 잡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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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대 아신왕이 급사로 죽고 나서 왕위 계승 다툼이 일어났는데, 왜에서 돌아온 태자 영이 왕위에 오르는데 18대 전지왕이란다. 왕위에 오르기 전에 친족간 왕위를 두고 혈전을 벌였는데, 우여곡절
끝에 왕위에 올랐대. 집권 중에 이웃 나라와 화친을 유지하는데 노력을 했대. 18대 전지왕의 장남인 19대 구이신왕은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랐고, 당시 팔수 태후라는 사람이 왕권 행세를 했는데 구이신왕은 7년 9개월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재위했단다. 그래서 20대 비유왕이 반정으로 왕이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했어. 더욱이
비유왕은 18대 전지왕의 서자라고 하는구나.
20대 비유왕은 27년 9개월 동안 왕위에 있었어. 신라 눌지왕에 화친을 제의하여 성사되었고, 신라와 화친하며 고구려 남하 정책에 대응을 했단다. 그런데 비유왕도
급사했다고 하는구나. 반란군에 의해 죽은 것으로 추정된다고 했어. 비유왕이
죽고 21대 개로왕이 왕위에 오르게 되는데, 개로왕의 동생이자
비유왕의 삼남 곤지에 대해서 좀 이야기를 해야겠구나. 개로왕이 왕자 신분일 때 곤지에서 명령을 내려
일본으로 가라고 했어. 자신이 입지가 약해져서 왜에 도움을 요청하기 위함이지. 그런데 곤지는 자신의 신분 보장을 위해 개로왕의 부인을 데리고 가겠다고 했어.
개로왕은 이를 허락하고 함께 일본을 갔는데, 당시 개로왕의 부인은 임신을 하고 있었고, 일본으로 가는 도중 각라도라는 섬에서 아이를 낳게 되어 개로왕의 부인은 아이와 함께 다시 백제로 돌아오고, 곤지만 일본에 가게 되었다고 하는구나. 그때 각라도에서 낳은 아이가
나중에 왕위에 오르게 되는 무령왕이란다. 아무튼 곤지는 일본에 가서 왜 천황을 보필하여 왜 조정에서도
일했는데, 개로왕이 죽고 나서 백제로 돌아왔으나 해구라는 사람에게 살해되었다고 하는구나. 곤지의 이야기는 예전에 아빠가 재미있게 읽은 최인호 님의 소설 <제 4의 제국>에도 나오는데, 이
책은 나중에 너희들이 꼭 읽었으면 좋겠구나. 정말 재미있거든.
…
아무튼
21대 개로왕은 455년부터 475년까지 20년간 재위하는데 반란군을 진압하느라 10년동안 분쟁에 휩싸였었대. 고구려 장수왕이 보낸 생간(간첩,
스파이) 도림에게 속아서 전쟁에도 지고, 고구려군에게
참수 당했다고 하는구나.
3.
22대 문주왕은 고구려의 남진 때문에 수도를 웅진(공주)로 옮겼어. 당시 해씨 해구라는 사람이 막강한 권력을 가지고 있었는데, 앞서 이야기했던 곤지가 해구와 맞서다 죽고, 문주왕도 해구에게 살해당했다고
하는구나. 문주왕의 아들 삼근왕이 15살에 왕위에 올랐는데, 이때 진씨 진남의 혁명군이 해구를 몰아내고 권력을 잡았대. 삼근왕의
짧은 치세 다음에는 14대 동성왕이 왕이 되었어. 동성왕은 왜에 있다가 왕으로 추대 받고 와서 왕이
되었는데, 20년간 재위했대. 처음에는 대륙백제의 영토를
회복하기 위해 북위와 두 차례 전쟁을 벌이기도 했지만, 나중에는 사치와 향락에 빠져 왕노릇을 제대로
하지 않았다고 하는구나. 그에 원한을 품은 신하에 의해 죽음을 당했대.
다음
25대왕이 앞서 이야기했던 개로왕의 아들이자, 곤지의 양자인 무령왕이 왕위에 오르게 된단다. 왕위에 오른 뒤 대국화를 위해 노력을 했대. 한수 이북 영토를 안정화시키고, 섭라 지역과 임나 지역을 차지했단다. 임나에 대한 것은 나중에 이야기할
기회가 있으면 할게. 고대사의 논란이 되는 부분인데, 이
책에서는 임나에 대해 아래와 같이 이야기를 하고 있으니 참고하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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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6-257)
하지만 일본 사학계의 주장처럼 임나가 일본에 의해 지배된 것은 아니었다.
임나엔 백제, 가야, 왜의 군대가 모두 주둔하고
있었고, 백제와 왜는 대사관 격인 객관을 두고 있었다. 하지만 <일본서기>의 기록을 살펴보면, 임나의 땅 주인은 가야이다. 가야는 6개의 분국으로 갈라져 있는 상태였고, 백제와 왜에 비해 국력이 쇠약했다. 그래서 가야는 왜와 백제 양국과 동맹을 맺고, 임나 지역을 자유무역
도시로 내놓고 공동 관리를 한 것이다. 덕분에 임나는 당시 최대의 국제무역 도시로 성장할 수 있었으며, 왜와 백제는 물론이고 고구려와 중국의 제국들도 임나에서 거래되는 물품을 사갔을 정도였다. 고구려가 섭라에서 사서 중국에 팔던 옥도 역시 임나에서 거래되던 것이었다. 현재
한반도 내에서 옥 생산지가 어디였는지 밝혀지지는 않았지만, 옥은 아마도 임나 지역에서 대거 생산되었던
듯하다. 임나는 그 옥을 기반으로 경제권을 형성하고, 국제적인
무역 도시로 성장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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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령왕은 아들 시아를 일본에 파견하는
등 일본 정치에도 영향을 주었다고 하는구나. 26대 성왕은 31년 2개월간 재위를 하면서, 대륙백제 확대 의지를 보였어. 그래서 고구려를 계속 공격했는데, 계속 패배하면서 오히려 국력이
쇠퇴되었단다. 결국 수도를 다시 사비(부여)로 도읍을 옮기고 국토도 ‘남부여’로
바꾸면서 재정비를 했대. 그러니까 우리가 얼마 전에 당일치기 여행으로 다녀온 부여는 성왕 때부터 백제의
수도였던 거야. 20대 비유왕 때 맺어진 신라와 화친이 계속 이어져왔는데 이때 신라가 백제를 배신하고
고구려와 손을 잡고 백제를 공격했단다. 성왕은 관산성 전투에 참여했다가 전사하고 말았단다.
성왕에 이어 27대 위덕왕이 왕위에 오르고 44년 5개월 동안 재위했어. 위덕왕은 성왕의 장남으로 관산성 전투에 참여했었어. 그래서 성왕의 죽음에 대한 죄책감을 갖고 있었대. 이때도 계속 고구려와
신라의 공격을 받았고, 위덕왕은 왜와 가야에 도움을 요청했어. 28대는
위덕왕을 보필하던 위덕왕의 동생 혜왕이 조카를 제거하고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고 하는구나. 당시 혜왕의
나이가 칠십도 넘었다고 하는데, 권력에 대한 욕심은 나이에 상관이 없구나. 28대 혜왕은 1년이라는 짧은 기간 재위했고, 29대 법왕은 혜왕의 맏아들로 5개월이라는 짧은 시간 재위했지만, 불교를 장려하고 왕흥사라는 절을 짓기 시작했대.
법왕 다음은 위덕왕의 서자였던 무왕이
왕위에 올랐는데, 무왕은 서동요로 유명한 바로 그 사람이란다. 서동이라는
뜻은 마를 캐는 아이라는 뜻인데, 왕위에 오르기 전에 마를 캐는 생활을 하다가 신하의 추대로 왕위에
오르게 되었단다. 서동요는 백제의 무왕과 진평왕의 딸인 선화공주가 주인공으로 나오는데, 이것은 삼국유사에만 나오는 이야기로 신빙성이 떨어진다고 하는구나. 서동요에서
등장하는 공주는 백제의 29대 법왕의 딸일 가능성이 높다고 하는구나.
30대 무왕은 40년 10개월간 재위하면서, 안정화를 찾고 영토 수복에 노력을 했어. 신라를 공격하여 옛땅을
되찾기도 했지만, 신라는 당에 도움을 요청했어. 그래서 백제도
당의 의중을 살펴서 공격에 소극적이기도 했어. 말년기에는 풍류와 불교에 빠지기도 했대. 그리고 법왕 때 짓기 시작한 왕흥사를 이때 창건되었다고 하는구나.
백제의 마지막 31대 왕은 의자왕이야. 백제의 마지막 왕이고, <한국을 빛낸 100명의 위인들>이라는 노래에도 나와서 너희들도 아는 왕이잖니. 의자왕은 무왕의
맏아들로 처음 즉위했을 때는 신라를 공격하여 성을 함락시키는 등 성과를 냈어. 위기에 빠진 신라는 고구려에
화친을 요청했다가 거절 당하고 당에 구원을 요청했어. 당이 개입하면서 의자왕은 전쟁은 멈추었지만, 당의 지원을 받은 신라가 공격해 왔지. 신라의 김유신 장군이 공격해
왔고 초반에는 백제가 우세해서 승리를 거두었단다. 하지만 의자왕이 자만에 빠지고 향락에 빠지면서 국정을
소홀히 하게 되었어. 나름 왕 노릇 잘 하던 의자왕이 왜 그런 생활을 했을까? 궁금하구나. 의자의 그런 추태를 보다 못한 성충이라는 신하가 충언을
했지만, 오히려 성충을 감옥에 보냈다고 하는구나.
소정방이 이끄는 당나라 군대와 신라군의
공격이 이어졌고, 계백 장군이 마지막까지 버텼지만 결국 방어에 실패하고 말았단다. 의자왕은 사비성을 버리고 후퇴하여 웅진성으로 피신했지만 결국 항복하고 당으로 압송되었다고 하는구나. 그렇게 백제는 700년 가까이 이어져 오던 역사를 마무리하게 되었다고
하는구나. 때는 660년이었어. 참 안타까운 일이로구나.
…
우리가 여행했던 부여에서 본 정림사지
오층석탑. 그 탑의 1층의
4개 면에는 어떤 글씨가 잔뜩 써 있다고 했어. 실제로 보면 오래되었지만 한자들이 빼곡히
적혀 있단다. 그 내용은 다름 아닌 당나라 장수 소정방이 백제를 무찌르고 자신의 승전 내용을 파 넣은
것이라고 하더구나. 아, 아픈 역사의 내용이 천 년이 넘어도
지워지지 않고 그곳에 새겨져 있었던 것이었어.
…
백제의 역사를 읽긴 했는데, 그 기억이 얼마나 오래갈 지 모르겠구나. 그래서 나중에라도 다시
보려고 좀 자세히 적다 보니 길이 엄청 길어졌구나. 아빠의 이번 편지를 다 읽었다면 고생깨나 했겠구나.^^ <한 권으로 읽는 백제왕조실록> 괜찮았단다. <한 권으로 읽는 신라왕조실록>과 <한 권으로 읽는 고구려왕조실록>도 함 읽어봐야겠구나.
PS:
책의 첫 문장: <삼국사기>는 백제를 건국한 비류와 온조의 출생에 대해서
서로 다른 두 가지 견해를 전하고 있다.
책의 끝 문장: 이렇듯 비록 실패로 끝났지만, 왕조가 몰락한 뒤에도 무려 3년 동안이나 이어진 백제부흥운동은 백제인들의 무서운 저력을 보여준 사건으로
678년 동안 타오르다 한 줌의 재로 사그라진 백제 왕조에 대한 진혼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중국이 백제라는 나라를 인식하기 시작한 것은 백제가 대륙에 영토를 개척한 서진 이후부터였다. 그 전까지 중국에선 한반도 중부 이남을 삼한의 땅으로 인식했고, 때문에 백제가 대륙에 진출하기 전에는 삼한의 맹주인 마한과 마한의 중심국인 목지국에 의해 그 땅이 다스려지고 있다고 믿었다. 말하자면 백제가 처음 대륙에 진출할 때까지만 해도 중국인들은 백제를 마한으로 인식했다는 것이다. <송서>와 <남제서>, <위서>, <주서>에 백제 편은 있으나 신라 편은 없는 것도 당시에 중국은 신라를 진한의 한 소국으로 인식한 반면, 백제는 대륙에 진출한 비교적 큰 나라로 보았기 때문이다. <남사>에서는 신라의 위치를 ‘백제의 동남쪽 5천여 리에 있다’고 쓰고 있는데, 이는 백제의 대륙 영토를 중심으로 서술한 것이다. 5천 리라는 개념은 백제를 대륙에 설정하지 않고는 나올 수 없는 수치인 까닭이다. - P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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