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사랑에 빠지면, 자기가 꿈꾸는 것을 이루려 한다면 억압체제에 저항하게 돼요. 왜냐하면 체제에서 하지 말라고 하니까요. 사랑과 자유는 항상 같이 가는 거예요. 인문학의 정신이 사랑과 자유가 아니면 뭐겠어요. 그 두 가지 내용을 가진 것이 인문주의고, 정치적으로는 민주주의예요. 자유로운 사람만이 사랑을 할 수 있고, 사랑하는 사람만이 자유를 얻을 수 있어요.


(33)

노예사회, 농노사회, 노동자사회, 본질적으로 진보한 것이 없다는 거죠. 왜냐하면 이들 다수는 자기가 원하는 것을 만들지 못해요. 지금 노동자들이 아무리 농노보다 생활수준이 높아졌다고 하더라도 사회적 생산이 아니라 특정 소수, 부르주아들이 원하는 생산을 하고 있잖아요. 자기가 원하는 것을 하는 사람들을 주인이라고 하고, 남이 원하는 것을 사람들을 노예라고 불러요. 고전적 정의예요. 질적으로 보면 아직도 억압사회인 거죠. ‘소비사회라는 논리로 자본주의가 발달해야 되기 때문에 노동계급한테 소비자의 위상을 주는 거예요. 월급을 주고 물건 만들고, 또 그 돈으로 소비하고, 이 과정이 계속 돌면서 계속 월급쟁이 생활을 하지만, 과거 농노보다는 경제 사정이 좋죠. 하지만 자기가 원하는 것을 못 하기는 마찬가지예요.


(52)

인문(人文)이라는 말이 영어로 휴머니티(humanity)이기도 하지만, 한자로 사람 인() 자에 무늬, 결 문()자잖아요. 천문(天文)은 하늘의 무늬를 뜻하고, 지문(地文)은 땅의 무늬잖아요. ‘터무니없다는 말이 터의 무늬가 없다는 뜻인데, 풍수지리적으로 봤을 때 좋지 않다는 얘기죠. 그러니까 인문은 사람의 문맥을 읽어야 된다는 말이에요. 그러니까 배운다는 것은 무늬를 만들어내는 사람이 된다는 말이에요. 그 안에 콘텍스트가 많이 들어 있는 거죠.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표현을 잘하는 사람을 좋아하는 이유가 글을 잘 쓰거나 말을 잘해서라고 생각하지만, 콘텍스트가 많이 들어 있어서 오해 없이 설명을 해서예요. 예를 들어 영화를 보고 나서 표현을 잘 못하는 사람들은 별점으로 점수를 줘요. 그런데 평론가는 왜 좋았는지를 길게 쓰잖아요. 어떤 사람들은 평론가의 글을 읽고, ‘이게 무슨 말이야?’라고 할 수 있죠. 콘텍스트가 불분명해서 생기는 반응이에요. 한마디로 글을 잘못 쓴 거예요. 그렇지만 대개의 경우 평론가의 얘기가 더 쉬워요. ‘너무 좋았어이렇게만 말하면 뭐가 좋았는지 모르잖아요.


(65)

젊은 친구들을 만나서 즐거운 것은 놀랍고 새로운 이야기를 하기 때문이잖아요. 할아버지, 할머니가 손주하고 얘기할 때 빵빵 터지잖아요. 할아버지, 할머니가 우선순위에서 밀어놓은 것은 손주는 가장 중요하다고 이야기하니까요. (웃음) 이상한 상상력을 가진, 새로움을 접하니까요. 젊다는 것은 새롭고 낯설다는 거예요. 어린아이들끼리는 서로 차별도 하지 않아요. 어린아이가 피부색이 다르다고 인종차별을 할까요? 그러지 않잖아요. 차별은 위계질서가 굳어지고 우선순위가 매겨진 기존 사회에서 물려받은 거예요. 지금 우리 사회의 문제는 그런 거죠. 새롭고 낯설게 생각하는 아이들을 만나지 못한다는 현실은 굉장히 슬픈 일인 것 같아요.


(88)

자본주의는 공동체에서 쪼개진 개개인들이 생계를 걸고 참여하는 게임 같은 거예요. 여기서 중요한 것은 정보고요. 누군가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어떤 필요를 만들 수 있는지를 분석해서 신제품을 만드는 것이 자본의 논리니까요. 그래서 빅데이터가 중요한 거예요. 노동자는 그 정보를 계속 빼앗기고 있고, 자본은 계속 그 정보를 축적하고 있단 말이에요. 플랫폼 기업들이 나보다 나를 더 잘 하는 사회가 됐어요. 내가 모르는 내 습관까지 알고 있어요. 내 나이와 가족 관계는 어떻게 되는지, 취미는 뭐고 관심사는 뭔지, 내가 언제 어디서 얼마나 머물렀는지, 방문했던 사이트에서 무엇을 검색하고 구매했는지…… 내 흔적들이 당신이 좋아할 만한 책과 영화, 상품으로 광고 창에 뜨잖아요. 내가 남긴 소비의 흔적들이 플랫폼 기업의 자본이 되는 거죠. 소비자, 곧 노동계급이 필요로 하는 것을 알고, 사치품이 필수품이 되도록 강요하는 것이 자본주의의 핵심 팽창 전략이에요.


(124)

자본주의사회는 나이 든 사람이 권력이나 재력을 가지고 있지 않으면 배울 게 없는 존재로 만들어놨어요. 기계 조작도 서툴고, 데이터 분석 같은 일들은 젊은 직원이 대신 해줘야 돼요. 권력이 있기 때문에 해주는 거예요. 사실 기계는 초등학교 아이들이 가장 잘 다뤄요. 할머니 할아버지 스마트폰은 손주들이 다 세팅을 해주잖아요. 이 순간 손주들이 우외에 있고 할아버지 할머니는 열등한 위치에 있게 돼요.


(152)

간혹 가다가 진보를 표방하는 사람들이 자기들이 살지도 않는 집을 하나 더 가지고 있으면서 임대료를 얻어서 생활을 한다고 해요. 그러고선 다들 그렇게 산다고 얘기를 하잖아요. 노동을 하지 않았는데도 수익이 생긴다면, 그건 다른 누군가의 노동을 착취한 거예요. 임대료의 경우는 물론 주거가 불안한 사람들로부터 착취한 거죠. 작은 자본가고 작은 지주인 거예요. 그래서 속상하고 이런 사람들하고 만나고 싶지도 않아요. 큰 집에서 사는 건 상관이 없지만, 대신 집으로 임대료를 받으면 안 돼요. 그런데요, 집이 없는 사람들이 많잖아요. 간혹 월세 등을 받아서 노후를 유지하는 할아버지 할머니가 있죠. 이 경우는 조금 난감해요. 가족공동체가 와해되어서 돌봄이 필요한 분들이지만, 이것이 자본주의적 방식으로 이루어지니까요. 이런 서글픈 경우가 아니라면 진보를 표방하는 사람들은 부동산 투기나 주식 투자 등으로 이윤을 얻으려고 해서는 안 돼요. 자본가처럼 지주처럼 살면서 어떻게 노동계급을 아낀다고 떠들 수 있나요?


(178)

철학적으로 말해서 좋은 교육은 모순적인 표현이에요. 교육은 나쁜 거예요. 기성세대든 억압세대든 자신의 말을 잘 듣도록 하는 것이 교육이니까요. 더군다나 교육이 아이들을 가르친다는 의미라면, 교육은 인문주의자가 목숨을 걸고 없애야 할 대상일 거예요. 교육이라는 말을 없애고 차라리 성장이란 말을 써야 할 것 같아요. 정확히는 성장을 돕는 거죠. 예를 하나 들어볼까요. 책과 교재는 다른 거예요. 교재 즉 교과서는 아이들을 졸게 만들죠. 반면 그 교과서 밑에 몰래 숨겨놓고 읽는 책은 그렇지 않잖아요. 선생님이나 부모가 읽으라는 교재와 자신이 읽고 싶은 책은 이렇게 차이가 있어요. 앞에서 저는 자신이 원하는 걸 하는 사람이 주인이고, 반대로 타인의 권위에 눌려 타인이 원하는 걸 하는 사람은 노예라고 말했어요. 결국 교재는 노예의 문자고, 책은 주인의 문자였던 거예요.


(179)

결국 아이들이 원하는 것, 사랑하는 것을 찾아주는 일, 아니 정확히 말해서 아이들이 자신을 사랑하는 것을 찾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 중요하죠. 자신이 원하는 것을 찾기만 한다면, 아이들은 이제 자신의 삶을 주인으로 살아낼 수 있는 길에 들어선 거예요. 물론 그렇다고 해서 아이들이 아무런 저항도 없이, 그리고 노력 없이 주인으로 살아가게 된다는 이야기는 아니예요.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하지만, 그걸로는 생계가 해결되지 않을 수도 있으니까요. 폭력 수단과 정치 수단을 독점했기에 국가는, 그리고 생산수간을 독점한 채 국가의 비호를 받기에 자본을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아이들에게 직간접적으로 찾은 아이들은 이미 물을 만난 물고기와 같아요. 그러니 국가나 자본이 땅에서 살기를 요구해도, 그들은 가급적 물을 떠나지 않으려 할 거예요. 한편으로는 자신을 노예로 만들려는 경향과 맞서 싸우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하면서 우리 아이들은 조금씩 아주 조금씩 모두가 주인으로 살아가는 사회를 만들어갈 거예요. 여기에 바로 인류의 희망과 미래가 있죠.


(205)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그 사람의 자유를 사랑하는 거예요. 나를 좋아할 수도 있고, 좋아하지 않을 수도 있는 자유는 온전히 주어졌을 때, 그때 나를 좋아해줘야 기쁘고 희열이 있죠. 스토킹은 그 사람의 자유를 제거한 상태에서 나만 좋아하게 만들면 되는 거잖아요. 그런데 살아 있는 사람의 자유를 박탈하는 것은 쉽지 않아요. 자유를 제거하는 방법은 그 사람을 죽이는 데서 정점에 이르는 거예요. 그리고 여기서는 타인의 쾌락과 즐거움은 중요하지 않고, 나의 쾌락과 즐거움만 있는 거죠. 개인주의적 자아는 자기 안에 갇혀서 쾌와 불쾌만을 따진다고 했잖아요. 그러니까 누구를 사랑한다는 말은 그 사람의 자유를 사랑한다는 말과 같아요. 사르트르가 <존재와 무>에서 한 말이죠.


(228)

21세기 초반 한국 사회는 이런 모습이에요. ‘강남청와대, ‘여의도를 장악하려는 강남좌파와 강남우파의 각축장이죠. 신자유주의로 무장한 강남우파의 무기가 기만적인 자유개념에 집중되어 있다면, 강남좌파는 노동계급에 대한 애정, 사회적 약자에 대한 사랑을 표방해요. 사회적 양극화가 심해질수록 유권자들은 강남좌파에 표를 던지기 쉬워요. 강남좌파의 애정 공세에 넘어간 셈이죠. 그래서 강남좌파는 특히나 사회적 약자의 문제 민감해요. 그들은 대중이 감정이입을 하며 분노하는 이슈에 대해서는 감정적이라고 할만큼 개입을 해요. 그래야 여론의 지지를 받고 새로운 선거에서 승리를 해서 자신의 기득권을 유지할 수 있으니까요. 그러므로 강남좌파는 여러모로 좋은 지주를 닮았어요. 좋은 지주는 소작농의 집을 찾아가 그를 위로하는 말을 하고 쌀을 두고 가지만, 결코 자신이 독점한 땅을 주지는 않으니까요.


(256)

세상이 좋아지리라는 막연한 희망도 버려야 해요. 또 세상은 변하지 않으리라는 비관도 버려야 하고요. 자본과 국가라는 구조적 악은 여전히 강력하게 거대한 요새처럼 우리를 가로막고 있어요. 이 요새의 문은 개개인의 노력으로는 꿈쩍도 하지 않죠. 그렇지만, 아니 그렇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그 문을 밀어붙어야 해요. 열리지 않더라도 그 문 앞에서 외쳐야 돼요. ‘거기, 누구 없어요? 저랑 함께 이 문을 밀어 열어젖힐 분 없나요?’ 바로 이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에요.


(267)

<조선혁명선언>에서 신채호는 구시대의 혁명을 주정해요. “인민을 지배하는 상전, 곧 특수세력이 있는데, “구시대의 혁명이란 것은 특수세력의 명칭을 변경하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죠. ‘상전의 교체가 아니라 상전이 없어지는 것, 개인의 자유와 정의로운 공동체를 스스로 주인이 돼서 만드는 것이 혁명이라는 얘기예요. 신채호가 간디보다 수천 배 위대한 이유죠. 상전의 자리에 일본인이 들어오든, 아니면 한국인이 들어오든 마찬가지예요. 상전의 자리에 어떤 권력자가 들어오든 마찬가지죠. 상전의 자리, 형식, 혹은 제도 자체를 없애지 않으면 안 돼요. 결국 신채호의 시선에서 촛불집회는 혁명일 수 없어요. 여전히 수많은 상전의 형식이 털끝 하나 상하지 않은 채 작동하고 있으니까요. 상전인 회사의 CEO가 있고, 자본가가 있고, 국가는 명령을 내리고 있고, 입법으로 그것을 강제하고 있잖아요.


(301)

거대 문명이 탄생한 기원전 3000년 이래로 지금까지 인류는 복종의 시대에서 5000~6000년 정도를 살아가고 있는 거예요. 그리고 분업 체제에 진입을 해서 이 사회 시스템을 벗어나서는 먹고살 수 없을 정도로 분업의 강도사 세졌어요. 자동차 바퀴만 고칠 수 있는 사람이 생태운동을 할 수 있나요? 자동차가 존재해야 자기가 사는데, 산업화된 시스템에서 하나의 나사가 되지 않으면 생계의 위험에 빠지는 사회인 거예요. 타율적 복종에서 자발적 복종으로 바뀐 것뿐인데, 체제는 타율자율만 강조해서 자본주의사회가 왕조시대보다 더 발달했다고 얘기를 해요. 그런데 내가 볼 때는 복종에 방점을 찍어야 돼요. 노동자를 정확하게 출퇴근 노예라고 부르잖아요. 그러면 노예는 이렇게 정의 내리면 되죠. ‘출퇴근이 불가능한 노동자.’


(329-330)

저도 바람을 좋아해요. 제가 왜 산에 가냐면 산에서 느끼는 바람은 다르거든요. 더 정확히 말하면, 산에서는 수많은 바람들을 만날 수 있어요. 산에 오르면서 몸이 뜨거워지고 땀도 나니까, 작은 바람도 쉽게 느껴지죠. 그래서 계곡으로 올라가지 않고 능선을 타요. 순간순간 바람이 불고, 비바람이 치고 이런 게 너무 좋아요. 그리고 산등성이에서 갑자기 구름 생기는 것 못 봤죠? 비 오는 날 산에 가면 얼마나 좋은지 몰라요. 습한 날은 바람이 조금만 불면 등성이에 구름이 생겼다 없어졌다 생겼다 없어졌다 그래요. 그런 광경이 너무 예뻐요. 그게 정서적으로 저랑 맞는 것 같아요. 타르코프스키하고 미야자키하고 모네하고 정서적으로 맞아요. 바람을 모티프로 자기 얘기를 드러내는 것, 바람과 멀리 있는 문명과 바람과도 같은 자연, 우주적인 것들에 감수성이 있는 것 같아요. ‘바람이 분다! 살아야겠다!’ 철학자이자 시인인 폴 발레리(1871~1945)<해변의 묘지>라는 시 마지막 구절이에요. 시가 아주 철학적이요. 미야자키 하야오의 <바람이 분다>는 이 구절이 자막으로 올라가면서 시작이 돼요.


(369)

몸의 시간은 정신보다 느리고 조심스럽고 그만큼 안정적이다. 아픈 몸도 마찬가지다. 아주 작은 벌레가 가는 듯 마는 듯 걷는 것 같아, 언제나 몸이 좋아질까 감이 오지 않기 때문이다. 결국 건강한 몸이 아파지는 것도 그런 과정을 거쳤을 것이다. 얼마나 집중도 높게 집필 작업을 했는지, 얼마나 정열적으로 강연을 했는지, 그래서 얼마나 내가 몸을 힘들게 했는지 알게 되었다. 그러니 말을 할 수 없는 몸이 퍼져버린 것이다. ‘너 이제 혼자 가. 나는 더 이상 못 가겠어.’ 몸은 몸으로 그리 표현했던 셈이다. 이제는 몸의 시간이었다. 몸의 마음에, 몸의 속삭임에 귀를 기울어야 했다. 지금까지 나의 말을 묵묵하게 들어주었던 몸 아닌가. 이제는 내가 몸의 말을 귀담아 들어주어야 할 때였다. 몸이 걷고 싶을 때 걸을 것이고 몸이 쉬고 싶을 때 쉴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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