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8)
“외로움과 고독 끝에 몰린 사람들은 울지 않거든. 잊었다고 해야 할지 소용없는 걸 안다고 해야 할지. 영혼 없는 눈동자로
허공만 바라보며 하루를 까먹지. 슬플 때 눈물이 난다는 거, 그래서
울 수 있다는 거, 그 나름대로 살아 있다는 의미야. 의욕을
잃은 사람들은 울지 않거든. 운다고 속이 시원해지는 것도 아니니까. 그렇게
울지 않으면 몸속 수분이 밖으로 빠져나가지를 못해. 그 수분 때문에 피가 아주 묽어지는 거지. 잘 숙성된 적포도주처럼. 그들은 우리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후각이
발달해서 그 고독한 피의 향을 맡을 수 있어.”
(121)
”엄청난 힘을 가진 세력이 있다고 하자. 무시무시한 무기를 가지고 있어서 아메리카 대륙 정도는 며칠이면 쑥대밭으로 만들 수 있는. 그들을 통제할 수 있는 단체가 있는데도 그런 세력이 있다는 걸 인간 사회 전체에 알리는 게 과연 옳을까? 나는 그게 옳다고 생각하지 않는데. 그런 세력이 있다는 걸 인간들이
알게 된다면 아마 대부분은 나쁘고 위험한 세력이니 조심하자고 생각하겠지만 인간은, 분명 그중 몇몇은
그 세력과 손을 잡을 거야.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영혼이라도 내다 팔겠지. 네가 보기에는 어때? 그럴 것 같지 않아?”
(142)
밤하늘에는 별이 빼곡하게 박혀 있었다. 유난히 밝은 별들이 있다. 저 많은 별들 중에서도 유달리 존재감을 드러내는 별들. 모리는 그것이
별이 아니고 행성일 수도 있다고 했다. 하지만 완다는 그게 별이든 행성이든 무슨 상관인가 싶었다. 완다의 눈에는 전부 똑같아 보이는걸. 가까이 들여다보면 별도 다
같은 별이 아닐 텐데 멀리서 보면 전부 똑 같은 별이었다. 그래서 완다는 멀리서 보는 것도 좋아했다. 완다는 언젠가 모리스에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그냥 다 똑
같은 별로 쳐요, 멀리서 보면 다 똑같으니까, 그게 좋은
거 같아.
(190)
세계를 넓혀 간다는 건 피부에 실을 꿰어 늘리는 과정이다. 피부가
두꺼워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오지 않는 사람일수록 세계를 넓혀 가는 데 거침이 없다. 그들은 세계를
넓혀 가면서 동시에 빠른 속도로 세상에 적응한다. 세상을 이용하고, 세상을
지배하기도 한다. 많이 넓히려면 세세한 것은 지나쳐야 한다. 황무지나
불모지여도 상관없다. 풀 한 포기 살지 못하는 세계라도 개의치 않는다.
피부가 두꺼운 사람은 전체에서 몇 퍼센트 되지 않는다. 그렇게 큰 비중을 차지하지 않는다는
이야기다.
(226)
낮에 뜬 구름보다 밤에 뜬 구름이 더 예쁘다. 해는 바라볼 수 없지만
달은 바라볼 수 있고, 해는 별을 감추지만 달은 별과 함께 뜬다. 밤에
듣는 새소리는 귀가 아닌 마음을 두드리고, 낮 동안 움직이지 않던 나무들은 그제야 부스스, 몸을 털어 낸다. 고양이 눈치를 보느라 움직이지 못했던 들쥐와 그들을
노리는 맹금류의 눈이 소란스럽게 지나가고, 그것들이 스쳐 지나간 자리에는 계절이 내려앉는다. 새싹과 꽃잎은 사람들의 눈을 피해 자랐다. 부끄러움이 많아서 그렇다. 부끄러움이 많은 것들은 낮이 아니라 밤에 움직였다. 누군가 지켜보고
있으면, 주변이 너무 환하면 제 역량을 발휘하지 못하는 것들이 있다.
(245)
“그 사람을 떠나보내도 살면서 누군가를 또 만나게 될 테니까. 한 사람에게 너무 의지하는 것은 좋지 않아. 누군가를 좋아하고 의지하고
싶은 마음 바닥에는 외로움이 깔려 있으니까. 누구에게나. 모두가
각자 외로움을 깔아 두고 있기 때문에 자신의 외로움을 타인으로 치유할 수는 없단다. 다만 누군가를 만나면
나 하나만 외로운 게 아니라는 위안을 받을 뿐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