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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색평론 통권 179호 - 2021년 7월~8월
녹색평론 편집부 지음 / 녹색평론사 / 2021년 7월
평점 :
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녹색평론 179호 2021년 7~8월호를 읽었단다. 녹색평론에서 창간 이래 계속 경고했던 기후변화에
대한 대처를 하지 않은 대가를 톡톡히 보고 있는 올 여름인 것 같구나. 세계 곳곳에서 대홍수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죽고, 사상 최고의 기온을 찍은 더위로 난리고, 우리나라도
예년과 달리 짧은 장마와 함께 일찍 시작한 무더위는 끝을 모르고 극성을 부리고 있으니 말이야. 이런
일들이 해를 거듭할수록 심해질 테니 더욱 걱정이구나. 진작에 기후변화에 온 세계 사람들이 대처를 했어야
했는데… 지금 와서 후회하느니 지금이라도 늦었지만 노력하면 좋겠지만,
말뿐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구나. 인류는 이 위기를 극복할 수 있을까?
…
무슨 일을 하더라도 제대로 된 방향으로 일을 추진해야 하는데, 가장
쉬운 방향으로 하는 것이 안타깝구나. 탄소중립을 위해 재생 에너지원을 사용한다고 농촌마다 깔아놓은 태양광
전지가 대표적인 예란다. 농업과 태양광 전지는 상극인 거야. 태양광
전지를 하려면 농업을 제대로 할 수 없으니 말이야. 우리는 죽어가는 농업도 살려야 하는 의무가 있거든. 뿐만 아니라 산을 깎아서 태양광 전지를 깔아 놓은 경우도 있는데, 산도
죽이고 폭우가 한번 오면 태양광 전지도 쓸려 나가고… 미관상 보기도 좋지 않고 말이야. 태양광 에너지는 그런 곳에 설치하는 것이 아니고, 고속도로 변이나
철도변 못쓰는 땅에 설치하는 것이 효율적인 것이야. 이건 아빠도 예전에 다른 책에서 본 내용이란다. 유럽의 태양광을 앞서 개발하는 나라들이 고속도로변에 태양광을 설치했다고 봤거든… 그걸 처음 봤을 때는 참 좋은 아이디어라고 생각했어. 못된 것들은
선진국 것을 잘 따라 하면서 이런 건 또 왜 안했을까? 어떤 사람의 이해관계가 걸려 있는 것일까. 참 안타까운 일이구나.
…
얼마 전에 전국에 있는 나무들에 베어지고 있다는 뉴스를 본 적이 있단다. 이런
일이 진보 진영이 정권을 잡고 있던 시기에 일어날 수 있는 일일까. 아빠는 무슨 사연이 있을 거라고
이해해 보려고 했단다. 하지만 탄소 중립을 위해서 베어버린다고 하니 더욱 이해가 힘들었단다. 탄소 중립을 위해서라면 나무를 심어야지, 나무를 베어 버린다고? 어떤 연구 결과인지 모르겠지만, 30년된 나무들은 탄소 중립에 도움이
안되고 어린 나무들이 탄소중립에 도움이 된다고 했다나? 그래서 30년된
나무들을 베어버리고 다시 나무를 심는다고… 언뜻 생각해도 도저히 이해가 가질 않는 일이로구나. 조금만 더 살펴보면 30년된 나무들이 더 많은 산소를 만들고 이산화탄소를
없앤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는데 말이야. 어떻게 결정된 것인지 모르겠구나. 지금이라도 국민청원을 해서 이 일을 막아야 되는 거 아닌가 싶구나.
….
이런 무대뽀 개발의 역사는 어제 오늘의 이야기가 아니란다. 많은 환경
단체와 시민 단체가 반대했던 새만금 간척 사업. 아빠는 새만금 간척 사업을 어렸을 때부터 들어본 것이라, 이미 다 끝난 줄 알고 있었단다. 하지만 여전히 진행 중이고 언제
끝날 지 모른다는 말에 충격을
받았단다.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 아직 언제 끝날지 모를 일이고, 얼마나 많은 돈이 들어갈 지 모른다면, 지금이라도 복원을 하든, 그것이 안되면 현 상태에서 멈추는 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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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새만금 간척사업은 유사
이래 우리나라 최대의 토건사업으로 30년째 진행 중인 사업이다.
2050년까지 사업을 계속한다는 것이 정부의 계획이다. 그러나 정부의 계획대로 새만금사업이
진행된 역사가 없다. 앞으로 50년이 걸릴지 100년이 걸릴지 알 수 없다. 현재 새만금사업은 인간의 탐욕을 부추기는
방식으로 사업의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최초에는 대규모 간척사업으로,
이후에는 동북아 경제 중심지로, 한중 경협특구로, 현재는
그린뉴딜 1번지로, 새만금 국제공항 건설로, 그동안 제대로 된 개발 없이 새만금사업은 표류해왔지만 그럼에도 계속해서 전북도민들의 탐욕을 부추기고 기대감을
부풀리는 방식으로 사업을 이어가고 있는 것이다. 사업이 계속되는 한 시민사회의 새만금살리기 활동도 계속될
것이다. 새만금 살리기운동의 짐이 미래세대에게로 계속해서 이어질 전망이다. 개발과 성장 중심의 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나 인간과 자연이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공동체를 지향하는 평화로운 새만금이
언제 온 수 있을지, 걱정과 함께 기대를 품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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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라에서는 하는 일들은 대부분은 엄청 큰 돈이 들어간다. 물론 돈이
중요한 것은 아니지만 말이야. 아빠가 하고 싶은 말은 나라에서 어떤 큰 사업을 하겠다고 할 때, 그것도 좋은 의도로 하겠다고 할 때는 좀더 신중했으면 좋겠다는 거야. 돈도
많이 들어가고 시간도 오래 걸리니 처음 시작 단계에서 좀더 많은 사람들의 의견을 듣고, 좀더 많은 자료를
찾아보고 그렇게 결정하라는 것이란다. 국가 대형 정책에는 국민들이 의견을 듣고 결정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단다.
1.
녹색평론을 만드시고 키우신 김종철 님께서 돌아가신 지 어느덧 1년이
되었단다. 늘 그렇듯 1년이라는 시간은 쏜살같이 흘러가는구나. 갑작스런 김종철 선생님의 비보에 놀랬던 것이 엊그제 같았는데, 1년이
흘렀더니… 김종철 선생님께서 그렇게 갑자기 가시고, 녹색평론이
제대로 갈까, 걱정을 했으나, 녹색평론이 지금까지 가지고
있던 담론 그대로 잘 이어지고 있어 다행이구나. 하지만 여전히 김종철 선생님의 부재는 녹색평론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의 커다란 손해로구나. 이번 녹색평론 179호에서는
김종철 선생님 1주기 기념으로 그의 사상에 대한 글들이 여럿 편 실려 있단다.
읽으면 읽을수록 그 옛날부터 오늘의 이 엉망인 세상을 예견하였다는 점이 놀랐고,
당시 그의 말을 따라 세상이 움직였다면, 오늘날 기후 위기나 전염병 팬더믹이 오지 않았을
수도 있겠다 생각이 들었어. 환경, 농업, 민주주의… 그가 지난 수십 년간 이야기한 것들의 핵심적인 말들이란다. 녹색평론 창간사부터 농업 중심의 사회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셨지. 남들
모두 농촌을 떠나 도시가 가는 모습을 모두 얼마나 답답해 하셨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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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4)
농민 중심의 민중 자치는
근본적으로 흙(지구)과의 건강한 관계를 기초로 한다. 그것은 농민이 볼 때 가장 낮은 곳에 있는 흙이 만물을 살려내는 기본 바탕임을 직관적으로 느끼기 때문이다. 한 톨의 곡식처럼 한 줌의 흙도 소중하다. 이런 겸허한 자세가 전제되지
않으면 공동체는 어렵다. “자기 자신을 내세우지 않는 겸손을 실천할 수 있어야”(<녹색평론> 창간사) 좋은
삶이나 공동체의 전망이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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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 그를 이런 사람으로 만들었을까. 그것도 서울대 영문학과라고
하는 우리나라 최고 대학에 입학한 그를… 아직 그의 삶을 그린 평전이나 자서전이 출간되지 않았는데, 그의 삶을 그린 책이 나오면 한번 읽고 싶더구나. 그에게 영향을
준 것이나 준 사람이 많이 있을 텐데, 이번 녹색평론 179호에서
소개된 사람 중에 낯익은 이가 있었단다. 몇 달 전에 읽은 올가 토카르추크의 <죽은 이들의 뼈 위로 쟁기를 끌어라>에서 소개되었던 시인
블레이크였단다. 아빠가 올가 토카르추크의 책에서 시인 블레이크를 처음 알게 되었다고 했는데, 김종철 님도 그 시인에게 많은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하더구나. 다시
시인 블레이크라는 사람이 궁금해지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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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2)
시인 지망생은 고등학교를
마치고 1965년 서울대 영문학과에 입학하는데 영문학에 큰 관심이 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선생의 문학론집 <대지의 상상력>(2019) 서문에 따르면, 서양적인 것에 대한 막연한 동경심, 그리고 영어를 익히면 ‘큰 자유’를
누릴 수 있을 것 같다는 맹목적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영문과의 한 연구실에서 새로운
길을 열어줄 ‘강력한 언어’와 만납니다. “새장에 갇힌 한 마리 로빈 새는/온 하늘을 분노로 떨게 한다. / 주인집 대문 앞에 굶주려 쓰러진 한 마리 개는 / 제국의 멸망을
예고한다.” 다름 아닌 윌리엄 블레이크의 시였습니다. 그날
이후 영문학도는 블레이크의 근원적 상상력과 철저한 민중성, 그리고 예언자적 풍모(정직성)에 사로잡힙니다. 선생이
보기에 블레이크는 민중적 전통에 입각해 “억압적 부르주아체제에 대하여 가장 근본적인 비판에 도달한 근대
최초의 지식인이자 사상가”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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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종철 선생님의 글과 사상을 읽다 보면 하나하나 마음에 새겨 할 것들이 많았어.
이 지구에서 우리가 오랫동안 생존하기 위해서는 다같이 가난하게, 하지만 품위 있고 행복하게
살아가자고 하시는 말씀. 언제부터 왜 사람의 유전자에 욕심과 탐욕이 새겨져 버렸을까. 그로 인해 스스로 삶의 터전을 망가뜨리면서까지 그 욕심을 채우는 종족이 되어 버렸을까. 김종철 선생님이 이야기하는 공빈론은 공감이 가면서, 실천하기 어려운
이상이라는 생각이 들었단다. 아빠를 포함한 세상 사람들의 욕심과 탐욕의 DNA가 너무 강력해서 말이야. 그래도 마음으로는 계속 그런 삶을
생각해 보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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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6)
김종철 선생은 가난의
중요성을 늘 강조했다. 그것은 물론 물질적 결핍이 아니라 깨끗하고 품위 있는 가난으로, 그런 가난이야말로 우리의 인간성을 고양시키는 미덕이라고 생각했다. 당연히
물 마시고 나물 먹고 그러면서 달을 희롱하는 따위의 안빈낙도하고는 다르다. 선생이 말하고자 한 것은
늘 어울려 일하고 즐기는 삶의 중요성이었다. 물론 우정과 환대에 기초한 그런 삶을 꾀하더라도 생태학적
한계를 고려해야 한다. 가난은 그 조건을 기꺼이 받아들인다는 의미에서 필수적이다. 말하자면 공생공락의 혹은 공생공락을 위한 공빈론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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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밖에 이번 녹색평론 179호는 김종철 선생님의 글과 생각에 관한
글들이 있어 좋았단다. 그렇게 그의 1주기를 그리는 특집도
좋았고 말이야. 여전히 그의 부재가 믿기기 않지만 말이야.
2.
오늘날 스마트폰과 인터넷이라는 편리함을 우리는 많은 정보를 얻고 있다… 고
생각한단다. 물론 틀린 말은 아니란다. 하지만 더 많은 정보를
우리는 누군가에 주고 있단다. 여기서 말하는 ‘누군가’는 구글이나 페이스북 같은 회사야. 물론 우리나라의 네이버나 다음
같은 회사도 마찬가지이고… 알게 모르게 우리는 감시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고 있는 거야. 하지만 그 편리함을 이기지 못하고 오늘도 열심히 스마트폰을 터치하고 있구나.
아빠는 그 동안 편리함을 얻고 우리의 정보를 주는 것이 윈윈이라고 생각하기도 했는데, 이번
녹색평론에서 감시자본주의에 대해 정형철님은 좀 다르게 생각하시는구나. 구글이나 페이스북의 고객은 우리가
아니고, 광고주들이라고 했어.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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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
여기서 주의할 점은 감시자본의
고객은 많은 사람들이 흔히 착각하고 있는 것처럼 사용자인 우리가 아니다. 우리는 마땅히 우리 자신이
고객의 지위를 누려야 할 것처럼 생각하지만 감시자본의 고객은 따로 존재한다. 즉, 감시자본의 고객은 사용자의 행동잉여 데이터의 분석을 통해 만들어진 맞춤형 광고를 사가는 광고주이다. 구글은 사용자의 서비스 개선에도 데이터의 일부를 활용하지만 이보다 훨씬 많은 양의 데이터를 광고에 활용한다. 조금 거칠게 표현하면 구글과 같은 감시자본에게 사용자는 행동잉여 데이터라는 원재료를 무상으로 공급해주는 자원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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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
감시자본은 우리의 경험과
행동을 데이터화하여 도구화할 수만 있다면, 우리가 어떤 존재인지 전혀 관심 갖지 않는다. 감시자본의 대상이 되는 순간부터 사용자 개인은 인간으로 존재하지 않고 데이터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과정에서 극단적 무관심과 타자화의 대상으로 전락한다. 여기서
말하는 극단적 무관심이라는 것은 감시자본의 입장에서는 우리가 누구인지, 어떤 존재인지, 어떤 주체인지 아무런 관심이 없다는 뜻이다. 같은 의미에서 감시자본주의하에서
우리는 자유의지와 존엄한 가치를 지닌 인간으로서 존재하지 않는다. 감시자본의 입장에서 우리는 그저 매
순간 구글의 검색창에 정보를 입력하고 페이스북의 ‘좋아요’를
누르며 인스타그램에 자신해서 사진을 올리는, 생체정보를 지닌 유기체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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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말들이 틀린 말들은 아닌데, 앞서도 이야기했지만 너무 극단적으로
평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구나. 그래도 스마트폰과 인터넷의 선한 기능도 있고, 그것으로 행복과 기쁨의 호르몬이 만들어지는 것도 사실이긴 한데… 그저
이 세상에 공짜는 없다고 사용하면 되지 않을까. 내가 ‘좋아요’를 클릭하고 구글 검색 창에 검색어를 입력한 것들이 데이터화되어 이용된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던 것도 아니고 말이야. 그냥 너희들과 소통하고, 새로운 지식을 찾는데 지금처럼 디지털 기기들을
잘 사용해 보련다.
3.
우여곡절 끝에 도쿄 올림픽이 개최되었단다. 후쿠시마의 안전성을 온
세상에 알리고 부활해 보겠다는 의지가 담긴 일본의 뜻과 달리, 올림픽은 코로나 펜데믹으로 인해 제대로
되는 것은 없고, 일정에 따라 운동 경기만 펼쳐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들더구나. 처음부터의 후쿠시마의 안전성을 알리겠다는 일본의 생각이 잘못된 것이었지. 후쿠시마는
아직도 현재 진행형이니 말이야. 그것이 숨긴다고 숨겨지고 가린다고 가려지겠니, 두 손으로 태양을 가리는 격이지… 후쿠시마 원전 사고에 대처하는
일본 정부의 무책임한 행동에 대한 글도 이번 호에 실려 있었어. 이와 관련된 글은 자주 실리는데, 이번에 올림픽에 맞춰 다시 한번 실은 것 같구나.
…
<야생초 편지>의
지은이로 유명한 황대권 님은 감옥에서 나오신 후 조용히 보내려고 했지만, 그가 정착한 마을에 핵폐기물이
들어오게 되면서, 그를 조용히 지내지 못하게 했나 보구나. 그는
오랫동안 활동한 고준위 핵폐기물 반대 투쟁에 대한 역사도 실려 있단다. 고준위 핵폐기물의 위험성은 전에도
여러 번 이야기했던 것 같아서 오늘은 생략할게. 한 가지만 이야기하면,
이번 정부 초기에 신고로 5, 6호기 건설을 계속 할 것인가? 중단할 것인가? 에 대한 공론회를 구성한 적 있어. 이 공론회에서 패배한 것이 아빠는 정말 이해가 가지 않던 일 중에 하나였는데,
탈핵 운동하는 분들도 그랬던 것 같구나. 그 일이 있고 나서 탈핵 진영의 조직들이 와해되는
후폭풍이 있었다는구나. 그만큼 충격적인 일이었던 것 같아. 그
일로 고준위 핵폐기물 반대 투쟁도 많이 힘들어졌고, 다시 처음부터 시작하는 기분이라고 하니, 많이 관심을 가져주어야겠구나. 정부가 바뀌어도 막강한 핵마피아들… 그들과 힘들게 싸우고들 있으니 말이야.
….
몇몇 주제들에 대한 이야기들이 더 있었는데, 오늘은 이 정도에서 마칠게. 앞서도 이야기했지만, 유독 긴 올 여름 무더위가 얼른 끝나기를… 그 무더위가 끝나는 날 코로나는 이유 없이 사라지기를…. 이상.
PS:
책의 첫 문장: 기후위기라는 의제가 모든 것을 압도하고 있다.
책의 끝 문장: ‘아픔을 마중하는 세계’가 바로 그런 다정한 세계라고 믿는다.
감시자본은 우리의 행동을 수집하고, 분석하고, 예측하여 상업적으로 이용하는 데 그치지 않고 다시 우리의 행동을 유도하고, 조종하고, 통제해나간다. 우리는 구글에서 자신이 필요한 것을 검색한다 생각하지만, 실상은 역으로 우리가 구글에 의해 검색당하는 것이다. 감시자본 아래에서 우리는 자유의지를 지닌 주체가 아니라 수집, 분석, 추출의 공정에 던져진 재료로서 존재한다. 감시자본의 이익을 위해 봉사하는 데이터로 전락한다. 감시자본의 이러한 도구주의적 권력 속성은 "인간에게서 반성적 의미 작용을 빼앗아 동물적 존재로 격하시키"고 "민주적 삶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인간의 능력과 자기이해를 갉아먹으며 내부로부터 민주주의를 허물어뜨리"는 데까지 나아간다. - P72
‘풀뿌리 민주주의’ 개념은 그냥 만들어진 게 아니다. 풀과 뿌리는 비바람과 폭설에 쓰러지고 파묻히면서도 다시 일어나는 생명력이 있다. 5월의 신록조차 한겨울과 초봄의 갈색 잎들 사이로 풀뿌리가 뿜어내는 기운을 받아 하나씩 새잎을 튀운 결과다. 새 손톱이 헌 손톱을 멀어내는 손톱갈이를 하듯, 새 잎사귀가 헌 잎사귀 사이로 돋아나며 해마다 산천갈이를 한다. 그러나 헌 잎사귀는 단지 새 잎사귀로 교체되는 게 아니라 스스로 썩어 거름이 됨으로써 새 에너지원이 된다. "희생 없이는 우정도 없다"던 선생의 말처럼 지난가을 낙엽들이 거름이 됨으로써 풀뿌리와 신록을 살려낸다. 나아가 풀뿌리 그 자체는 서로 얽히고설켜 아무리 뜯기고 짓밟혀도 한두 가닥 살아남아 한사코 일어선다. 바로 이런 면들이 우리가 그토록 풀뿌리 민주주의를 강조하는 까닭이다. - P135
"<녹색평론>은 이른바 ‘발전’ 혹은 ‘진보’의 이름 밑에서 인간생존의 사회적 자연적 토대를 끊임없이 훼손하는 일체의 움직임, 논리, 사고, 제도, 관행을 비판하는 데 있어서는 늘 비타협적인 자세를 취했고, 동시에 어떻게 하면 생태적으로 지속가능하고 공정하고 평화로운 사회를 구축할 것인가, 그러기 위해서 왜 우리가 민주주의의 심화라는 문제에 관심을 가져야 할지를 끊임없이 이야기해왔다." 선생이 단호한 어조로 밝힌 <녹색평론>의 정체성과 지향점은 곧 김종철 문학의 그것이라고 말해도 크게 틀리지 않을 것입니다. 한마디로 선생의 문학은 전환의 문학이었습니다. 근대문명을 넘어 생태문명으로 전환하는 모든 과정과 부문에 적극 개입하는 모든 형태의 문학. - P147
독재로부터 벗어나 선거대의제로 목소리를 찾게 된 민중이 느끼는 환희에 대해서는 언제나 언론에 크게 보도가 된다. 그러나 혹은 나중에 이들 가운데 실망감이 존재한다고 해도 그것은 뉴스가 되지 못한다. <이코노미스트>(2009년 11월 4일 발행)의 한 기사는, 대부분의 공산주의국가들이 몰락하고 20년이 지난 뒤 시민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조사해보았더니 오직 절반만이 서구식 ‘자유와 자본주의’로 전환된 것에 대해 만족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그 이유는 단순했다. "그러한 전환으로 인해 혜택을 본 것은 보통사람들보다 기업과 정치 엘리트들이라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믿고 있다." - P1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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