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왜 쓰는가”와 “왜 사는가”는 같은 표현이다. 사실, 이 물음은-누구나 작가인 시대지만-작가에게만
해당하는 질문이 아니다. “왜 사는가”를 고민하지 않는 인간은
없다. 특히 어려운 시대, 어려운 상황에 처음 이들일수록
그렇다. 삶은 행위의 연속이다. 모든 행위는 침묵이든 폭력이든
놀이든 노동이든 인간관계든, 그리고 죽음의 방식까지 자신을 표현하는 퍼포먼스다. 이러한 표현은 기호(signs), 즉 말과 글로 이루어진다. 오늘날 널리 쓰이는 ‘프레젠테이션(presentation)’이
그것이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모든 표현은 자기만의 사유(특정한 렌즈)를 거치므로 각자의 몸을 통과해 ‘걸러진’ 재현(re-presentation)이다. 표현이 아니라 재현이 맞는 말이다.
(16)
‘나쁜’ 사람에게 지지
않으려고 쓰려면, 나부터 ‘나쁜’ 사람이어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글을 쓰는 과정은 나의 세계관, 인간관을 찾아가는 과정이며 나를 검열하는 과정일 수밖에 없다. 이
문제를 감당하지 못하면 글쓰기를 포기할 수밖에 없다. 글쓰기의 정치학과 미학은 이 몸무림 과정의 자연스러운
산물이다. 사람마다 행로가 다르기 때문에, 이른바 독특한
글(콘텐츠)이 나올 수밖에 없다. 흔히, 결과보다 과정이라는 말의 의미는 결과에 연연하지 말라는 군자의
비현실적인 말이 아니라, 과정에서 결과가 나온다는 뜻이다. 괴로운
과정에서 ‘최선의 올바름’, 아름다운 문장이 나온다.
(39)
이 글을 쓰게 된 이유는 책을 읽다가 ‘노무현’과 만났기 때문이다. 나는 정치적 약자(야권)의 ‘자발적 무지’, 강자의 정체성 정치(지역주의)와
약자의 그것을 구분하지 못한 결과인 민주당 분당 사건을 절대로 잊을 수 없다. 그러나 노무현 같은 인물은
다시 나오기 힘들 것이다. 그의 캐릭터는 우리 사회의 가능성이었다. 노무현의
당선은 일본의 진보 세력에게도 충격이었다. 그들은 “한국은
미래가 있는 나라”라며 부러워했다. 연주 없는 고졸 대통령. 일본은 지방의원부터 국회의원, 총리까지 몇몇 가문이 독점하는 철저한
세습 사회다. 그들은 아버지로부터 자금, 지명도, 후원회를 고스란히 물려받는다.
(53-54)
환경운동 구호 중에 “미래의 아이들을 위해 원전에 반대한다.”, “인간은 후대로부터 지구를 잠시 빌린 것이니 지구를 완전히 부숴버리지는 말자(‘지속 가능한 발전’으로 오역됨).”는
논리는 틀렸다. 다음 세대를 위해서가 아니고 현재 나를 위해 원전에 반대해야 한다. 이 구호는 여전히 인간의 것이 아닌데 누가 누구에게 지구를 ‘물려주고
말고’ 한단 말인가.
(82-83)
노년 담론 중 흔히 회자되는 논리가 ‘곱게 늙기’다. 나는 이 말을 좋아하지 않는다.
일단 나이듦은 ‘곱지 않다’는 전제가 있다. 또한 ‘내면의 아름다움’이
가능하다 할지라도 곱게 늙을 수 있는 조건을 갖춘 이들이 얼마나 되겠는가. 그리고 왜 노인에게만 곱게
살라고 하는가!
(95)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사람인 동시에 두려울 것이 없는 사람, 자유로운
사람, ‘희망찬 인생’은 바라는 것이 없는 사람이다. 원하는 것이 있을 때 인간은 무엇인가의 볼모가 된다. 희망은 욕망의
포로를 부드럽고 아름답게 조종하는 벗어나기 어려운 권력이다.
(109)
명심하길. 아메리카 원주민 지도자의 연설 중 가장 널리 인용되는 1853년 스쿼미시족의 추장 시애틀은 이렇게 말한다. “죽음이란 없다. 단지 살아가는 세계가 바뀔 뿐이다.” 우리는 언제 어디서 어떤 관계로
다시 만날지 모른다. 그러니 거짓말을 하더라도 빈 머리(익숙함)에 의존하지 말고 생각하고 발언하라.
(135)
우리는 모두 각자 다른 몸들이다. 같은 성별이라도, ‘장애인’으로 분류되어도, 같은
몸은 없다. 몸의 다름이 정치의 근거가 되어야 한다. 사람들이
가장 오해하는 말, “사는 대로 생각하지 말고 생각하는 대로 살자.”는
최악의 구호다. 인간은 평생 자기 생각에 다다르지 못한다. 생각은
몸의 배신자. 늘 타인의 시선과 욕망에서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에 머리(희망
사항)만 ‘앞서’ 간다. 오히려, 사는 대로 생각해야 한다.
모든 망상, 이데올로기, 거대 관념이 무너질
것이다. ‘저 높은 곳을 향하여’가 아니라 삶 자체를 사상으로
만들어야 한다. ‘머리로는 이해가 되는데 몸이 안 움직이는 사람’은
머리가 없는 사람이다.
(149)
‘이야기’는 곧 읽기와
쓰기다. 반응하지 않는, 감정 이입 없는 글쓰기는 불가능하다. 그러지 않아야 더 잘 쓸 수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런
주장을 하는 사람의 뇌는 진공 상태다. 글이란 자기 생각을 외부로 물질화하는 일인데, 생각이 없다면? 생각 없는 글쓰기가 가능하고 심지어 널리 읽히는
세상이다.
(193-194)
다만, 사회는 이들에게 “(힘이
없는데) 힘을 내라.”, “(보고 싶어 미칠 것 같은데) 잊어라.” “(이미 너무 참고 있는데) 참아라.”, 심지어 착취 구조에 갇힌 사회적 약자에게 “왜 그렇게 분노가 많냐.”고 분노하지 않기를 바란다. 돕고 싶다면 그들의 분노를 있는 그대로 수용하라. 가장 비윤리적인
분노, 그래서 참아야 할 분노는 딱 하나, 분노하는 이들에
대한 분노다.
(201)
우주에서 보면 인간은 하루를 사는 곤충이가 길가의 이름 모를 풀과 다를 바 없다. 그러나 인간은 우주가 아니라 자기가 만든 세상에서 산다. 이름을
얻으려고 발광하다가 타인까지 질식시키는 이들이 있는 하면, 드물지만 흔적을 지워 가며 사는 이들도 있다. 나 역시 미숙한 범죄자처럼 가는 곳마다 뭔가를 흘리고 다니지만, 나는
욕망한다.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 없는 삶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