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기후위기에 대응하는 농업의 주체는 지역의 소농이다. 땅심을 북돋고, 논밭 농사와 상호 순환하는 축산을 유지하고, 지역사회 먹을거리체계를 지탱하는 원천은 소농이다. 미국 농무부가 지원하는 다국적 농기업은 할 수 없다. 그러므로 기후위기에 대응하는 농업통상은 소농의 자치를 지원하는 것이어야 한다. 기후위기를 해결하는 힘은 무역이 아니라 소농이 중심이 된 지역사회 자치에 있다. 특히 새 농업통상은 여성 농민의 역할을 중요하게 인식한다. 지구의 보편적 규범으로, 여성이 생산과 유통의 주체가 되어 지역사회 속에서 식량보장계획을 주도하도록 지지해야 한다. 한국에서는 여성 농민에게 농업 공동경영주의 법칙 지위를 보장하는 데에서 출발해야 한다.

 

(36)

이제 도시로의 집중과 개발은 한계에 달했다. 코로나19, 기후위기, 환경위기, 농업위기가 이를 보여주고 있다. 이제는 생존을 위해서라도 우리의 삶의 방식을 바꿔야 한다. 먼저 농어촌을 돌봐야 한다. 농어촌 주민에게 기본소득은 이러한 문영의 전환을 위한 소중하고 든든한 버팀목이 될 것이다. 코로나19는 인류에게 가지 않았던 길을 가도록 요구하고 있다. 농촌기본소득은 그 길의 나침반이자 든든한 동반자가 될 것이다.

 

(56)

재생가능에너지를 정말 옹호한다면, 자신이 서 있는 자리부터 돌아봐야 한다. 지배엘리트의 관점에서 농촌, 산촌을 내려다보고 있는 것은 아닌지, 숲과 환경을 지배 대상으로만 보고 있지 않은지 돌아봐야 할 것이다. 농촌의 관점, 농민의 관점, 숲의 관점에서 재생가능에너지를 바라보고, 다시 한번 자기 지역 에너지는 자기 지역에서 해결한다는 원칙을 세우는 것이야말로 에너지전환을 앞당기는 방법이 될 것이다. 그래야 도시와 공장 곳곳에서 재생가능에너지를 확대하려고 애쓰게 될 것이고, 전기 소비를 줄이려고 노력하게 될 것이다. 그것이 진정한 전환을 앞당기는 방법이다.

 

(58)

농촌 없는 사회란 상상할 수도 없다. 농촌이 사람이 살지 못하는 곳이 되면, 그 사회는 망할 것이다. 농민이 있어야 농촌이 살지만, 농촌이 살 만한 곳이 되지 못하면 농민도 있을 수 없다. 그래서 농촌, 농민, 농업은 서로 떼래야 뗄 수 없다. 그리고 기후위기가 심각해질수록, 농촌-농민-농업의 가치가 중요할 수밖에 없다. 기후위기는 한반도에서 식량위기로 나타날 것이다. 곡물자급률이 20%대에 머무르는 사회에서 정치와 언론이 이렇게 농촌-농민-농업을 홀대한다는 것은 사회적 자살행위나 다름없다.

 

(102)

농사를 대규모로 짓고 농사짓지 않고 착취하는 수탈계급이 생기면서 인간 문명은 망가지기 시작했다는 걸 알게 되면서 농사를 바라보는 저의 관점은 이중적이 되었습니다. 농업문명은 지주-소작인 계급문명으로 변질되더니 약탈과 전쟁이 불가피하게 되었습니다. 자급 중신의 농사문명이 교환 중심의 농업문명으로 바뀐 건 동력 기계와 자본주의가 출현하면서 결국에는 농업이 산업에 종속되는 결과를 초래했습니다. 서구 제국주의 지식인들과 아류들이 말하는 직선적 역사발전 단계설이란 결국 탐욕과 착취를 무한 추구하는 어리석은 인간들이 쌓아올린 바벨벨탑입니다. 자본주의 근대문명의 꼭대기에서 바라보는 세상은 역사가 종식된 지상천국이 아니라 지옥이지요. 그러니 이제 우리 모두는 모래성을 허물고 흙으로 되돌아가야 하지 않을까요?

 

(108-109)

한 스위스 수녀님이 20대 때 우연히 한국에 오게 되었답니다. 1970년대 초였는데 서울의 판자촌에 가게 되었던 거예요. 그리고 거기서 여남은 명 되는 동네 아이들이 아이스크림 하나를 나눠 먹는 장면을 보았다고 해요. 이 수녀님이 그 모습을 보고 굉장히 충격을 받고, 또 감격을 했던 거예요. 그래서 한국에서 이런 사람들하고 같이 살고 싶다고 결심을 하고 고아들, 집 없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 거두면서 평생을 한국에서 살았답니다. 그리고 은퇴를 해서 충청도 어디 시골에 가서 혼자 살고 계셨는데, 그 당시에 기자가 찾아가서 인터뷰를 했어요. 그동안 한국에서 살아온 이야기, 지금 살고 있는 이야기를 기자가 들었는데, 그분이 굉장히 화가 나 있더라는 거예요. 한국이 너무 달라졌다,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이곳으로 와서 살지 않았다, 지금 한국은 사람 사는 사회가 아니라 돈만 아는 짐승들이 사는 곳이다, 한국이 이렇게 사나운 사회가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고 하면서 눈물을 흘리셨다고 합니다. 그걸 제가 신문에서 보면서 마음이 얼마나 아프던지요.

 

(114-115)

20세기 초에 미국 농무성 토양관리국장으로 있던 프랭클린 H.킹이라는 사람이 조선, 일본, 중국, 만주를 둘러보고 난 뒤에 돌아가서 <4,000년의 농부>라는 책을 썼어요. 동양에 가보고 탄복했다, 동양 사람들이 굉장히 지혜롭게 토양을 관리하더라는 거예요. 이 사람이 깜짝 놀란 게 뭐냐면 인분을 거름으로 쓰는 거였어요. 서양 사람들은 가축분뇨를 퇴비로 쓴다는 것까지는 알지만 임분을 쓴다는 개념이 없었어요. 그런데 인구가 많은 동아시아 지역에서 인분을 농사에 쓰지 않고 강이나 바다에 버리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강물, 바다 다 오염됩니다. 동양 사람들은 과학적 지식이 있어서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오랜 옛날부터 이것을 삭혀서 발효시켜가지고 도로 농토로 넣어줬어요. 그렇게 해서 농토가 지력이 고갈되지 않았던 것이죠. 우리가 작물을 키워서 먹으면 그만큼 땅에 있던 양분이 뺏기는 거잖아요. 그래서 이런 식으로 다시 땅으로 돌려주는 거예요. 이 순환을 4,000, 아니 만 년 동안 계속하니까 땅이 보호가 되는 거죠. 게다가 논농사는 수전(水田)입니다. 표토가 날아갈 일이 없어요. 그리고 논은 기후도 조절합니다. 우리나라 전체 대형 댐 한 10개 이상의 물 저장 효과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논이라는 게 굉장히 중요한 거예요.

 

(116)

저는 밥에 대해서 우리가 좀 생각을 해봤으면 좋겠습니다. 이 밥이 어디서 나오는가. 이 밥을 지키기 위해서 농민들이 어떻게 고생하는가. 하늘과 별과 바람과 비가 땀과 결합해서 종합 예술품으로서 쌀이 나오는 거잖아요. 일찍이 해월 최시형 선생님이 밥 한 그릇을 제대로 알면 만사를 안다 그랬는데, 하나도 과장된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리고 그걸 압축하고 있는 말이 공양인 거예요. , 하늘과 농부와 별과 바람과 비가 결합해서 하나의 제물이 되어서 나를 모시는구나. 그걸 깨닫는 순간 밥 먹는 시간이 한없이 거룩해집니다. 쌀 한 알 한 알 씹으면 희열이 생깁니다. 나한테 희생되겠다고 온 거잖아요. 그렇게 되면 뭐 쌀 아껴라, 밥풀 함부로 버리지 마라, 이런 말을 할 필요가 없겠죠. 자연히 경건해지니까요. 해월 선생은 이천식천(以天食天)이라고 그랬습니다. 만물의 관계는 이천식천이다. 하늘이 하늘을 먹여 살리는 구조로 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그분이 말한 하늘은 모든 생명을 말하는 거예요. 하늘의 도움 없이, 하늘의 정기 없이는 어떤 생명도 이 세상에 태어나는 게 없어요.

 

(207)

2015년 여름 인권사회학자 조효제 교수는 칼럼 기후변화, 절체절명의 인권’(<한겨레>, 2015 8 19)에서 기후변화를 가장 심각한 구조적 폭력이며 “21세기 인권침해의 주범 중 주범이라 확신한다며, 기후변화가 인권에 주는 끔찍한 함의를 걱정하는 사람이라면 불면의 밤을 뒤척여야 정상이 아닐까라고 물었다. 인권침해의 가해자와 피해자가 설정되는 관계만을 인권문제로 파악하는 기존의 인권담론에서는 기후위기로 인한 시스템적, 구조화된 인권문제는 배제된다는 진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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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3-21 00:1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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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3-21 00:4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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