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

폴리네시아의 여러 섬 사회는 그렇게 각기 경제적 전문화, 사회적 복잡성, 정치적 조직, 유형 생산품 등이 크게 달랐다. 이는 인구 규모 및 밀도와 관련되어 있었고 그것은 다시 섬의 면적, 분열, 고립성, 그리고 먹거리를 구하거나 식량 생산을 강화할 수 있는 기회 등에 차이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폴리네시아의 여러 사회는 원래 동일한 하나의 조상 사회에서 갈라져 나왔지만 각기 다른 환경으로 인해 얼마 안 되는 지표면적에서 비교적 짧은 기간 동안 그 사회의 차이점들이 다양하게 발전했던 것이다. 폴리네시아 내부의 그러한 문화적 차이의 범주들은 본질적으로 세계의 다른 모든 지역에서 나타난 것들과 일치한다.

(94)

그러므로 아타우알파가 생포된 사건은 근대사의 가장 큰 충돌이자 결정적인 순간이었다는 점에서 우리의 관심을 끈다. 하지만 그보다 일반적인 측면에서도 관심을 가질 만하다. 왜냐하면 피사로가 아타우알파를 사로잡을 수 있게 만든 요인들은, 본질적으로 근대에 세계 각지의 이주민과 원주민 사이에서 벌어졌던 유사한 많은 충돌 사건들, 그것들을 결정 지었던 요인들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타우알파 생포 사건은 세계사를 들여다볼 수 있는 넓은 창문인 셈이다.

(112)

간단히 말해서 문자 덕분에 스페인인들은 인간의 행동과 역사에 대한 방대한 지식을 갖고 있었다. 그와 대조적으로 아타우알파는 스페인인들에 대해 전혀 몰랐다. 또한 바다 건너에서 쳐들어온 침략자들을 일찍이 경험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다른 곳에서, 다른 사람들에게, 그리고 역사적으로 앞선 다른 시대에 무수히 일어났던 유사한 침략 위협에 대해서도 전혀 듣지도 읽지도 못했다. 그러한 경험의 격차 때문에 피사로는 함정을 파게 되었고 아타우알파는 그 속으로 걸어 들어갔던 것이다.

(274)

유라시아에서의 동서 확산이 쉬웠던 데 비해 아프리카의 남북 축을 따라 확산되기는 얼마나 어려웠는지 살펴보자. 비옥한 초승달 지대의 창시 작물은 대부분이 매우 신속하게 이집트에 도착했고 거기서 다시 남쪽으로 에티오피아의 서늘한 고지대까지 전파되었지만 그 너머로는 전파되지 못했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지중해성 기후는 그 농작물들이 자라기에 이상적인 환경이었겠지만 에티오피아와 남아프리카공화국 사이에 위치한 3200km에 이르는 열대 지역은 이 농작물들이 도저히 넘을 수 없는 장애물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에서는 저위도 지방인 사헬 지대나 열대 서아프리카의 기후, 즉 기온이 높고 주로 여름에 비가 내리며 낮의 길이가 비교적 일정하다는 조건에 이미 적응한 토종 야생 식물들을 작물화하면서 농업이 시작되었다.

(287-8)

질병은 인간을 죽게 하는 가장 큰 요인이므로 역사를 변화시키는 결정적인 요인이기도 했다. 2차 세계 대전에 이르기까지 전시에 사망한 사람들 중에는 전투 중 부상으로 죽은 사람보다 전쟁으로 발생한 세균에 희생된 사람이 더 많았다. 위대한 장군들을 칭송하는 전쟁의 역사는 인간의 자존심을 무너뜨리는 한 가지 진실을 외면하고 있다. , 과거의 전쟁에서는 반드시 가장 훌륭한 장군이나 무기를 가졌던 군대가 승리하지는 않았으며 가장 지독한 병원균을 적에게 퍼뜨리는 군대가 승리할 때가 많았다는 사실을 말이다.

(294-5)

그러나 세균은 인간의 몸속 영양분을 섭취하도록 진화되었으며 피해자가 죽거나 저항할 때 새로운 피해자가 몸으로 날아갈 수 있는 날개를 갖지 못했다. 그래서 많은 병원균들은 피해자에게서 피해자로 옮겨가는 여러 가지 방법을 진화시켜야 했다. 이러한 수법 중에는 인간이 흔히 질병의 증상으로 경험하는 것들이 많다. 그러나 인간이 인간 나름대로 대응 방법을 진화시켜 왔고 병원균들은 다시 거기에 대한 대응 수법을 진화시키는 것으로 대처해 왔다. 그리하여 인간과 인간의 몸에 기생하는 병원체들은 점점 더 격화되는 진화적 경쟁 관계 속에서 서로 옴짝달싹 못하게 되었다. 패배의 대가는 어느 한 쪽의 죽음이며 자연선택이 심판을 맡고 있다.

(352-3)

토머스 에디슨의 축음기는 좋은 예라고 볼 수 있다. 이것은 현대의 가장 위대한 발명가가 이룩한 가장 독창적인 발명품이다. 1877년 에디슨이 최초의 축음기를 만들었을 때 그는 이 발명품이 소용될 만한 열 가지 용도를 제시하는 글을 발표했다. 거기에는 죽어가는 사람의 마지막 말을 보존하는 일, 시각 장애자들이 들을 수 있도록 책을 녹음하는 일, 시간을 알려주는 일, 철자법을 가르치는 일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음악을 재생하는 일은 에디슨이 제시한 우선순위에서 상위권에 들지도 못했다. 그리고 몇 년 후 에디슨은 자신의 발명품에 상업적인 가치가 없다고 조수에게 말했다. 그러나 다시 몇 년 후에는 마음을 바꾸어 축음기 판매사업을 시작했다. 그런데 그 용도는 사무용 구술 기계였다. 다른 기업가들이 축음기를 이용하여 동전을 넣으면 대중 음악이 흘러나는 주크박스를 만들어냈을 때 에디슨은 자기 발명품이 사무용이라는 중요한 용도를 벗어나서 그렇게 전락하는 것에 반대했대. 그리고 20년이 흐른 후에야 비로소 에디슨도 축음기의 주된 용도는 음악을 녹음하고 재생하는 일이라는 데 마지못해 동의했던 것이다.

(383)

각 대륙의 면적, 인구, 확산의 난이도, 식량 생산의 출발 시기 등에서 나타난 이 같은 차이에 따라 기술 발전의 격차는 더 크게 벌어졌다. 기술을 자가 촉매 작용을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유라시아는 처음부터 상당히 유리한 입장에 있었지만 1492년에 와서는 엄청나게 앞서게 되었다. 그것은 유라시아인들의  지능이 탁월해서가 아니라 유라시아의 지리적 요건이 탁월했기 때문이었다. 내가 알고 있는 뉴기니인들 중에는 잠재적인 에디슨이라고 할 만한 사람들도 많다. 그러나 그들은 그 천재성을 자신들이 처한 상황에서 필요한 기술적인 문제들을 해결하는 데 활용했다. , 축음기를 발명하는 문제보다는 뉴기니의 정글에서 아무것도 받아들이지 않은 채 살아남는 문제에 주력했던 것이다.

(527)

가령 1519년 코르테스가 이끄는 초라한 탐험가들이 멕시코 해안에 상륙했을 때 수천 명의 아스텍 기병들이 아메리카 원산의 가축화된 말을 타고 달려와서 그들을 다시 바다로 내몰았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아스텍인들이 천연두에 걸려 죽은 대신 질병에 저항력을 가진 아스텍인들이 아메리카의 병원균을 퍼뜨려 오히려 스페인인들이 전멸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동물의 힘에 의존하는 아메리카 문명이 정복자들을 파견하여 유럽을 황폐화시켰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같은 가설적인 일들은 수천 년 전에 일어났던 포유류의 멸종으로 이미 실현 가능성을 잃고 말았다.

(543)

아메리카 내부의 이 같은 장애물에서 빚어진 여러 가지 결과들 가운데 몇 가지는 짚고 넘어갈 만하다. 식량 생산은 미국 서남부 및 미시시피 강 유역으로부터 오늘날 아메리카 대륙의 곡창 지대인 캘리포니아 및 오리건 주로 확산되지 못했다. 결국 그곳의 아메리카 원주민 사회는 적당한 가축 작물이 없어서 수렵 채집민으로 남아 있을 수밖에 없었다. 안데스 고지대의 라마, 기니피그, 감자 등은 끝내 멕시코 고지대에 조달하지 못해서 중앙아메리카와 북아메리카에서 가축화된 포유류라고는 개밖에 없었다. 마찬가지로 미국 동부의 작물화된 해바라기가 중앙아메리카에 도달하지도 못했고 중앙아메리카의 가축화된 칠면조가 미국 동부나 남아메리카로 전파되지도 못했다.

(547)

이상으로 우리는 유럽인인 침략자들이 아메리카 원주민보다 유리해질 수밖에 없었던 세 가지 궁극적 요인을 확인했다. 그것은 인간이 살기 시작한 시기가 유라시아에서 훨씬 빨랐던 점, 유라시아에는 작물화할 만한 야생 식물은 물론이고 특히 가축화할 만한 야생 동물이 훨씬 많았으므로 결국 유라시아의 식량 생산이 더 우수했다는 점, 그리고 유라시아에는 대륙 내의 확산을 방해하는 지리적 생태적 장애물이 비교적 적었다는 점이었다. 네 번째이면서 아직은 불확실한 또 하나의 궁극적 요인은 몇 가지 문물이 남북아메리카에서는 발명되지 않았다는 알쏭달쏭한 현상을 통해 파악할 수 있다. 구체적으로 중앙아메리카의 복잡한 사회는 문자와 바퀴를 발명했는데 안데스의 복잡한 사회는 대략 비슷한 시간이 있었는데도 발명하지 못했다는 것, 그리고 바퀴는 중국에서 그랬듯이 인력으로 움직이는 외바퀴 손수레에 이용해도 쓸모가 많았을 텐데 중앙아메리카에서는 한때 장난감으로만 사용되다가 다시 사라자고 말았다는 것이다.

(591)

아프리카의 남북 축은 가축의 전파에도 심각한 방해물이 되었다. 적도 아프리카의 체체파리는 트리파노소마를 옮기는데, 아프리카의 토종 야생 포유류는 저항력을 갖고 있어서 괜찮았찌만 새로 들어오는 유라시아 및 북아프리카의 가축들에게는 치명적이었다. 반투족이 체체파리가 없는 사헬 지대에서 손에 넣었던 소는 반투족이 팽창하여 적도 부근의 삼림 지대를 통화할 때 살아남지 못했다.

말은 B.C. 1800년경 이미 이집트에 도달하여 곧 북아프리카의 전쟁 양상을 바꾸어놓았지만 사하라 사막 너머의 서아프리카에서 기병대를 갖춘 여러 왕국이 건설된 것은 A.D. 1~1000년의 일이었고 체체파리가 서식하는 지역을 통과하여 남하하지는 못했다. , , 염소는 B.C. 3000sus~2000년에 이미 세렝게티 평원의 북쪽 변두리에 도달했지만 거기서 다시 세렝게티 평원을 지나 남아프리카에 도달하는 데에 2000년 이상이 걸렸다.

(594)

각각의 대륙에서도 동식물의 가축화 작물화는 그 대륙의 전체 면적 중에서 작은 일부분에 불과한 몇 군데, 즉 유난히 조건이 좋은 지역들에서 집중적으로 이루어졌다. 기술 혁신과 정치 제도의 경우에도 대부부분의 사회는 스스로 발명하는 문물보다 다른 사회로부터 받아들이는 문물이 훨씬 많았다. 그러므로 어느 한 대륙에서의 확산과 이동은 그곳의 여러 사회가 발전하는 데 중요한 영향을 미치며, 결국 각각의 사회는 (환경이 허락하기만 한다면) 대체로 다른 사회에서 발전된 문물들도 공유하게 된다. 그렇게 되는 과정은 뉴질랜드 마오리족의 머스킷 전쟁을 통하여 간단히 확인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어떤 이점을 갖지 못한 사회는 그것을 가진 사회로부터 그 이점을 얻어내거나 아니며(얻지 못하면) 그것을 가진 사회에 의하여 교체되는 마는 것이다.

(603)

이제 중국에서 있었던 이 같은 일들을, 정치적으로 분열된 유럽의 탐험 선단이 항해를 시작했을 때의 경우와 비교해 보자.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는 이탈리아인으로 태어났지만 프랑스의 앙주 공의 신하가 되었고, 다시 포르투갈 왕의 신하가 되었다. 그러다가 포르투갈 왕에게 서진 탐험을 위한 배를 내달라고 요청했지만 거절당했다. 그러자 골럼버스는 메디나 세도니아 공에서 호소했지만 그 역시 거절했다. 메디나 첼리 공에게도 호소해 보았지만 또 마찬가지였다. 마지막으로 스페인 국왕과 왕비에게 호소하자 그들도 처음에는 거절했지만 다시 요청했을 때는 결국 허락해 주었다. 그 당시 만약 유럽이 통일되어 앞의 세 왕후 중의 한 명이 다스리고 있었다면 남북아메리카의 식민지화는 무산되었을지도 모른다.

(613)

그보다는 덜 유명하지만 오히려 더 심각한 숙명적 의미를 갖는 또 하나의 사건은 1930년 여름의 자동차 사고다. 그것은 독일에서 히틀러가 집권한 시기보다 2년 전의 일인데, 당시 그는 사망석(앞좌석 오른쪽의 조수석)’에 앉아 있었고 그가 탄 자동차는 무거운 트레일러 트럭과 마주쳤다. 이 트럭은 히틀러의 자동차와 충돌하여 그를 깔아뭉개기 직전에 정지했다. 히틀러의 정신병이 나치당의 정책과 성공에 미친 영향의 크기를 감안할 때, 만약 그 트럭 운전수가 브레이크를 단 1초만 늦게 밟았다면 제2차 세계 대전의 양상은 완전히 달라졌을 것이다.

(614)

이것과 반대되는 극단적인 견해는 프로이센의 정치가 오토 폰 비스마르크의 주장으로, 그는 칼라일과 달리 정치의 내면 세계를 오랫동안 직접 경험한 사람이다.

정치가의 일이란, 역사 속에서 걸어가는 신의 발소리를 듣고 그가 지나갈 때 옷자락을 붙잡으려고 노력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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