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정도전이 이성계를 찾아갔을 때 두 사람의 처지는 사뭇 달랐다. 이성계는 그동안 눈부신 전공을 세워 고려를 대표하는 무장으로 자리를 굳힌 상태였다. 그러나 정도전은 반대였다. 그 또한 뛰어난 능력을 갖춘 젊은 관원으로 중앙 정치에서 두각을 나타냈지만, 1375년 이인임 등이 이끈 친원배명(親元排明) 정책에 반대하다가 전라도 나주로 유배되었다. 3년 만에 풀려났지만, 그는 관직으로 돌아오지 못한 채 이리저리 떠돌고 있었다. 그러니까 정도전은 9년이라는 짧지 않은 낙백(落魄)의 시간을 보낸 뒤 이성계를 찾아간 것이다.

(22)

어떻게 보면 정도전과 이성계 둘 다 고려의 아웃사이더가 아니었을까 합니다. 그러던 이 둘이 만나서, 즉 붓과 칼, 사상과 무력이 만났기 때문에 이런 대업을 이룰 수 있었는데요.

저는 여기서 정도전이란 사람이 똑똑하다고 여겨지는 게, 자신이 갖고 있는 것과 잘하는 것(사상)을 알고 있는 것보다 자신이 못하는 것, 가지고 있지 않은 것(무력)을 잘 알고 있었다는 점이 아닐까 싶어요. 이런 게 정도전의 천재성 같거든요. 자기가 갖고 있지 않은 걸 누가 갖고 있는지 알아내서 그 사람과 힘을 합쳤다. 이게 굉장히 인상적인 부분이었습니다.

(58-59)

, 사대문의 이름을 보면 인의예지가 다 들어가 있죠. 흥인지문(興仁之門, 동대문)()’, 돈의문(敦義門, 서대문)()’, 숭례문(崇禮門, 남대문)()’까지요. 그리고 마지막으로 ()’가 있어야 하는데, 이 숙정문(肅靖門, 북대문)()’자에 꾀한다는 뜻도 있어서 이게 지혜 ()’자를 대신해서 쓰인 게 아닐까 추정하는 견해도 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중앙에 보신각(普信閣, 종각)()’자까지 들어가서 인의예지신이 완성되는 거죠.

(67)

정도전의 생각 중 가장 중요한 것은 백성들을 위한 정치를 한다이것 아니었겠습니까. 그러면 백성들을 위한 정치를 하려면 어떻게 애햐 하느냐? 모든 것을 왕에게 맡겨 둘 수는 없다. 능력 있고 깨끗한 사람이 권력을 장악해서 백성을 위한 정치를 해야 한다. 이런 대원칙이 서 있었던 것이죠. 그래서 재상 중심의 정치(관료정치)라는 것이 <조선경국전>에 분명하게 제시되었던 것입니다.

(75)

15세기 세계 다른 지역의 역사와 비교해 볼 때, 지배층이 위민(爲民)이라는 분명한 목표와 그에 대한 책임 의식을 가지고 있었던 점, 또 그걸 실천할 수 있는 여러 제도적인 장치를 잘 만들었다는 점에서, 저는 당시에 조선 말고는 그런 것들을 성취한 나라가 없었다고 봅니다. 그래서 경제적으로 부유하고 군사적으로 강력한 나라는 아니었지만 정말 백성들이 살기 좋은 나라, 15세기 세계에서 가장 살기 좋은 나라였다고 생각합니다.

(137)

저는 이렇습니다. ‘양녕대군은 조선 최고의 전성기 세종 시대를 연출한 최고의 조연이었다.’ 결국 양녕대군의 등장이 세종을 훨씬 더 빛나게 해 줬고, 또 양녕 자신이 세종의 마음을 상당히 편안하게 해 준 점도 인정해야 합니다. 만약 양녕대군이 정치적 변란에 휩쓸렸거나 역모 사건 같은 게 일어났다면 세종도 마음껏 정치를 펼치지 못했을 것니다.

(211)

아무리 좋은 취지와 내용을 가졌더라도 모든 변화는 일단 불편하다. 제도와 규모와 중요성이 클수록 변화의 내용과 불편의 정도도 커지게 마련이다. 국가 경제의 줄기라는 측면에서 공법의 도입은 지대하고 지난한 문제였다. 이런 사정은 전근대 한국사에서 독특한 장면을 만들어냈다. 그 전까지 한 번도 시행되지 않았다고 생각되는 대규모의 의견 조사가 실시된 것이다. 조정은 1430 5개월 동안 전국 17만여 명에게 찬반 의견을 물었다. 그 때의 교통, 통신 같은 기술력과 행정력을 생각하면 인구 4분의 1을 대상으로 한 그야말로 방대하고 지난한 조사였다. 결과는 찬성 9 8000여 명, 반대 7 4000여 명으로 나타났다. 지역별로는 전라도와 경상도가 크게 찬성한 데 견주어 함길도와 평안도는 반대가 우세했다. 찬성이 더 많았지만 세종과 신하들은 공법을 서둘러 도입하지 않았다. 그들은 지루할 정도로 오래고 집요하게 제도의 장단점을 논의했다. 그런 과정을 거친 뒤에야 1441년 앞서 찬성이 우세했던 전라도와 경상도로부터 시범적으로 시행하고 3년 뒤에 전국적으로 실시했다. 의견 조사부터 전국적 실시까지 15년이라는 세월이 걸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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