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1)
경제성장이 멈춘 세상에서 우리의 인간다운 삶은 자급적 삶의 공간을 최대한 넓히고, 상부상조의 생활방식을 적극적으로 실천하는 데서만 가능할 것이다. 그런
각도에서 보더라도, 피폐일로에 있는 농민과 농촌을 살리고, 지역을
중심으로 소규모의 분산적 방법으로 에너지 자급능력을 획기적으로 증대하는 것이야말로 현시점에서 가장 시급한 과제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종래의 상투적인 정책과는 전혀 다른 이러한 방향으로 전환하려면, 직업
정치가들이나 소위 전문가들의 판단과 결정에 맡겨 놓을 수는 없다. 어디까지나 합리적인 정신과 건전한
상식을 가진 시민들이 주체가 되어 활발하게 논의하여 공정하고 숙고된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진실로 민주적인 정치시스템이 확보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 점에서도, 우리는 대한민국 국회가 하루라도 빨리 진정한 ‘애국심’을 발휘하여 이 나라의 최고의사결정기구로서 자신의 소임에 충실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고 만일 계속해서 지금과 같이 국회 그 자체가 백해무익한 골칫거리로 남아
있다면, 우리는 국회의 존재방식에 대한 근본적인 재검토를 고려하고, 새로운
대안을 모색해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의 운명을 자주적으로
결정하기 위한 틀, 예컨대 ‘시민의회’를 제도화하기 위한 행동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59-60)
저자에 의하면 수축사회에는 다섯 가지 특징이 있다. 첫째, 원칙이 없이 이기주의가 판을 치게 되며, 생존이 유일한 이데올로기가
된다. 보편적인 가치 혹은 기후변화와 같은 전 인류의 문제에는 관심이 없고 미국의 이익만 최우선하겠다는
트럼프 대통령의 행보가 이런 점을 잘 보여준다. 둘째, 사회적
갈등이 전방위에 걸쳐서 제로섬 전쟁 형태로 진행되기 때문에 모두가 전투 중이고, 전선은 입체적이다. 세계화와 정보통신의 발달로 모든 영역이 서로 중첩되고 서로 의존적이기 때문에,
전선은 더 입체적으로 확산되는 것이다. 셋째, 근시안적
태도가 확대되면서 미래에 대한 전망이 실종된다. 사회 전체를 아우르는 규범이 없는 아노미상태이며, 눈앞의 승리에만 집착해 전체 흐름과 미래 변화를 포착하지 못한다. 넷째, 수축사회에서도 여전히 팽창하고 있는 지역이나 분야로 집중화 현상이 두드러진다.
대도시권 집중화 현상, 한국의 경우 강남 집중화 현상 등이 그러하다. 다섯째, 서로 물고 물어뜯는 사회 분위기로 인해 의사결정이 지연되거나
집단적인 의사결정 장애가 나타나며, 치열한 전투가 지속되면서 정신적으로 황폐해진 사람들이 늘어난다.
(73-74)
그렇다면 공유경제 모델은 꼭 나쁘기만 한가. 그 역시 복잡하다. 인류가 도시를 구성한 이유 중 하나는 효율이다. 모여 살면서 정보를
주고받으면, 자원의 낭비를 줄일 수 있다. 그러나 대낮에도
비어 있는 사무실, 하루 종일 주차장에 서 있는 자동차를 보면 생각이 달라진다. 인류가 도시를 구성했음에도 낭비되는 자원, 그래서 느끼는 답답함이
공유경제 아이디어에 날개를 달았다. 아울러 도시생활은 신뢰의 축적을 어렵게 한다. 아파트 옆집에 누가 사는지 알 수 없으니까. 그런데 온라인 플랫폼의
발달은 도시에서도 신뢰를 쌓는 길을 열었다. 요컨대 공유경제는 도시의 낭비를 줄이고 도시에 신뢰를 공급하는
역할을 한다.
(88)
농민기본소득은 크게 두 가지 목적이 있다. 농업의 공익적 가치에 대한
사회적 보상, 그리고 사회적 약자인 농민에 대한 기본권 보장이다. 그러나
최근 지자체에서 실시하고 있는 농민수당제는 농업의 공익적 가치에 대한 사회적 보상 측면으로 기울어 있다. 왜
기본소득을 개별적으로 제공해야 하는가? 인간이면 누구나 누려야 할 자유와 평등, 존엄을 보장하기 위해서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현재 지자체에서 실시하고 있거나 실시할 계획인 농가수당은 농가 내 자유와 평등을 보장하지 않는다. 농가주(대부분 남성인)의
권리를 강화할 뿐 그 권리를 나누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농가 내 구성원의 평등과 권리 보장을
위해서는 개별 농민에게 지급되는 농민수당이 필요하다.
(99-100)
미국의 범지구적 헤게모니는 워싱턴이 달러의 지위를 유지하느냐 못하느냐에 달려 있다. 미국은 오일달러를 순환시키고 국채를 발행함으로써 ‘초제국주의’를 추구해왔고, (석유의 뒷받침을 받은) 지폐(달러)를 담보로
하여 방대한 적자를 메워왔다. 그리고 좀더 일반적으로는, 세계은행, 국제통과기금(IMF), 세계무역기구(WTO) 등을 통제하고 조작하는 것과 더불어 미국은 다양한 수단을 통해서 국제무역과 금융시스템을 자신에게 유리하도록
만들 수 있었다. 미국 자본주의는 자신의 세계적 지배력과 달러의 지위가 도전을 받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101)
석유가 없으면 우리는 살아남을 수 없다. 그러나 동시에, 오늘날 중국이나 인도가 추구하고, 오랫동안 서구 세계가 추구해온
‘성장’을 포기해야만 우리의 계속적인 생존이 가능하다. 또한 지속가능한 건강한 농사 없이는 우리는 살아남을 수 없다. 농사를
파괴하거나, 혹은 좀더 정확히 말한다면, 식량의 지속적 생산을
위한 원천적 조건(기후, 깨끗한 물, 토종 씨앗, 여러 세대에 걸쳐 전승되어온 전통적 농사법과 관습, 비옥한 흙 등등)을 파괴한다면 –
실제로 우리는 지금 그렇게 하고 있는데 – 우리는 커다란 재앙에 직면할 것이다.
(103)
전세계적인 농사에 대한 통제는 미국 자본주의의 지정학적 전략의 핵심이 되어왔다.
‘녹색혁명’은 석유기업들의 이해관계로부터 시작되어 세계 각처로 확대되었다. 그리하여 가난한 나라들은 농업자본이 만들어낸 화학물질 의존적 농사 모델을 채택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고, 그 결과 그러한 농사에 드는 재료와 인프라 개발을 위해 빚을 얻지 않으면 안되었다. ‘녹색혁명’ 때문에 가난한 나라들은 예속적인 부채와 불리한 무역을
강요하는 글로벌 시스템으로 끌려 들어갔다. 그리하여 그들의 민족적 및 지역적 경제는 파괴되고 말았다. 실제로 우리는 세계 각처에서 지역 중심생산시스템들이 다국적기업들의 압력 밑에서 상업화되고, 뿌리로부터 흔들리는 것을 수없이 보아왔다.
(121)
그러면 남한은 살아 남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대답은 명확하다. 남한은 에너지 소비와 검약한 생활방식이라는 면에서 북한을 닮을 필요가 있다.
남한은 에너지 낭비를 멈추고 밤중에는, 지난 수천 년 동안 그래왔듯이, 어둠에 잠겨 있어야 한다. 남한의 모든 아파트 건물에는 쓸데없는
빛이 사라져야 하고, 상업건축물의 네온사인을 제거하고, 불필요한
과잉 난방을 극적으로 줄이고, 대부분의 건물에서 보이는 높은 천정과 콘크리트와 유리와 강철 외장으로
구성된 낭비적인 디자인을 끝장내야 한다. 남한은 한반도의 역사 대부분을 통해서 특징적인 삶의 형태였던
검소함과 소박함의 전통으로 되돌아가지 않으면 안된다.
(123)
나는 북한 사람들이 오늘날보다 더 자유롭게 살고, 좀더 영양분이 풍부한
음식을 먹을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 그러나 북한 사람들은 오늘날 남한 전역을 뒤덮고 있는 – 그리하여 한때 시민들의 경제적 독립을 보장하던 가족 소유 가게들을 파괴하고 있는 – 편의점에는 자양분이 풍부한 식품이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남한 사람들도 날이 갈수록 더 많이 정신없이 소비하도록 강요하는 보이지 않는 사슬들에서 풀려나기를
바란다. 소비를 많이 하면 할수록 끝없는 경쟁이라는 야만적인 문화 때문에 친구들과 가족으로부터 점점
더 깊이 소외되는 결과만을 낳을 뿐인 사슬들로부터 말이다.
(180)
후치탄 사람들은 돈을 벌기 위해 일하지 않는다. 그들은 생활의 필요를
충족하기 위해 돈을 번다. 잉여분의 돈은 집단을 위해서 혹은 축제를 위해서 사용한다. 이런 유형의 경제는 매우 유연하다. 설령 경제적 위기상황이 오더라도
쉽게 극복할 수 있고, 자본의 논리에 따라 움직이는 기업들보다 훨씬 더 친환경적인 삶을 가능하게 한다. 기업들은 끊임없이 시장을 독점하려 하고, 이익을 내고, 투자하고, 확장하지 않으면 안된다.
따라서 안정적일 수가 없다.
(197)
책을 한 권도 가지지 않고 살고 싶다. 아무리 덜어내도 쌓이는 책. 나무에게 미안할 일이다. 다시 사람으로 태어난다면 나는 책을 모른
채, 아니, 문자를 해득하지 못하는 삶을 살다가 죽고 싶다. 그렇게 되면 지구생명에게 빚지는 삶을 살지 않을 테니. 함께 사는
모든 생명은 물론 우주의 모든 것들의 숨소리와 감정들을 이해하고 느끼고 소통하는 삶을 살 테니… 얼마나
단순하고 소박할까! 단순해서 그윽해지고 소박해서 넉넉한 삶을, 제발
한번 살아보았으면…
(234)
해외에선 핵발전 비용을 둘러싼 논쟁은 끝났다. 미국이나 유럽의 경우
핵발전이 천연가스나 재생에너지보다 비싸다고 결론이 났다. 그간 위험성이나 미래세대에 대한 책임 문제를
중심으로 진행되었던 찬핵/탈핵 논쟁이, 결국 경제성 논점으로
사실상 끝나가는 추세이다. 핵발전소 폐쇄 비용, 고준위 핵폐기물
처분 비용, 사고위험 비용 등이 드러나면서 “알고 보니 핵발전이
더 비싸다”는 사실이 알려지게 된 것이다. 하지만 우리 사회엔
아직도 “가장 ‘경제적’인
핵발전을 안하면 어떻게 하느냐”고 묻는 이들이 많다. 이들에게
핵산업계가 감춰온 청구서를 찾아볼 것을 권하고 싶다. 아직 날아오지 않았지만 조만간 우리 눈앞에 나타날
핵발전의 숨겨진 청구서 말이다. 앞으로 어떤 청구서가 날아올지 한번 살펴보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