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14)

너희처럼 자연과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은 항상 너무나 쉽게 경험적 사실에 의지해 버리고, 또 그것으로 진리를 얻었다고 믿어 버린다. 그러나 사람들이 경험에서 실제로 무엇이 일어나는가를 고찰한다면 너희들이 갖는 방식은 나에게는 매우 논란의 여지가 많은 것으로 보인다. 너희들이 말하는 것은 요컨대 너희들이 사고하는 방식에서 오는 것이며, 너희들이 알고 있다는 것은 그런 사고방식 외에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러나 그런 사고는 물론 사물 안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사물들을 직접 인지할 수는 없는 것이다. 우리는 그것들을 먼저 표상으로 변화시키고 그리고 나서 그것들로부터 개념을 형성해야 한다. 감성적인 인지를 통해 인지로부터 우리에게 몰려드는 것은 매우 다양한 종류의 인상들의 무질서한 혼합물이다. 우리가 나중에 인지한 형태나 성질들은 직접적으로는 그 인상들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이다.

(36~37)

저는 사람들이 본질적으로 그렇게 쉽게 미래를 쉽게 선택할 수 있다고 보지 않습니다. 그 까닭은 내가 훌륭한 음악가가 될 수 없다는 것은 차지하더라도 오늘날 사람들이 어느 영역에서 가장 많은 성과를 거둘 수 있느냐 하는 문제가 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문제는 그 영역의 상태에 따라 달라집니다. 음악의 경우, 최근의 작곡가들은 옛날의 작곡가에 견주어 충분히 이해가 가지를 않습니다. 17세기의 음악은 그 당시의 음악에서는 개개인의 감정세계로 이행이 이루어졌고, 낭만주의적인 19세기의 음악은 인간 영혼의 가장 깊은 곳까지 침투해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최근의 음악은 이상하게도 불안감이 짙으며 도리어 허약한 실험단계에 빠진 것같이 느껴집니다. 이 단계에서 이미 정해진 궤도에 따라서 전전하려는 확실한 의식보다는 이론적인 고찰이 더 큰 구실을 하고 있는 것같이 보입니다. 그러나 자연과학, 특히 물리학에서는 상황이 다릅니다. 그곳에서는 이미 설정된 궤도의 추구-20년 전까지만 해도 그 목표는 전자기적 현상의 이해였음에 틀림없었지만-는 저절로 공간과 시간의 구조라든가, 인과법칙의 타당성과 같은 철학적인 근본적 위치가 문제되는 그러한 곳에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바로 앞조차 뚜렷이 내다볼 수 없는 신천지가 열렸으며, 따라서 뚜렷한 대답을 얻기 위하여서는 많은 물리학자들이 여러 세대에 걸쳐 활동하지 않으면 안 되리라고 믿습니다. 이러한 분야에서 내가 무엇인가 공동작업을 할 수 있다는 것은 매우 매력 있는 일로 여겨집니다.”

(40)

예를 들면 물이라는 액체는 얼음이 녹는다든지 수증기가 액화할 때, 또는 수소가 연소할 때도 항상 그 모든 특성을 그대로 가지고 있는 똑 같은 것이 새롭게 형성되는데, 그 이유가 무엇이냐 하는 근본적인 물음이 제기되고 있는 것이다. 지금까지 물리학에서는 이와 같은 사실이 항상 전제되어 왔으나 한 번도 이해되어 본 일은 없었다. 예를 들어, 사람들이 물은 원자로 구성되어 있다고 가정한다면, 화학은 이 개념을 효과 있게 사용해 왔지만 우리가 학교에서 배운 뉴턴의 운동법칙을 가지고는 그 같은 물질의 최소부분의 운동의 안전도를 설명할 수는 없을 것이다. 따라서 이곳에서는 원자들이 항상 반복하여 같은 상태로 배열되고 운동하고, 그 결과 동일한 안정된 특성을 가진 원소들이 반복해서 생성된다는 사실을 설명할 수 있는 다른 종류의 자연법칙에 관해서는 20년 전에 발표된 플랑크의 양자론에서 최초로 시사된 바 있다.

(56~57)

그러나 볼프강은 이 같은 견해를 지나치게 실증주의 일변도로 흐를 주장으로 보았다. 그는 말하였다.

나는 뉴턴의 천문학은 원칙적으로 프톨레마이오스의 것과는 다르다고 생각한다. 다시 말하면 뉴턴은 문제 설정에 변화를 가지고 온 것이다. 그는 운동을 주된 문제로 삼은 것이 아니라, 먼저 운동의 원인을 문제삼았다. 그는 그 원인을 힘에서 찾았고, 행성계에서는 힘이 운동보다 간단하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그는 그것을 만유인력의 법칙으로 기술하였던 것이다. 우리가 뉴턴 이후에 행성의 운동을 이해하였다고 한다면 정확한 관측에 따른 행성의 매우 복잡한 운동을 대단히 간단한 것, 즉 중력에 귀착시킴으로써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을 뜻한다. 프톨레마이오스에게는 사람들은 그 복잡한 것을 원과 주전원의 중첩을 통하여 서술할 수 있었으나 그것은 단순한 경험적 사실을 받아들인 데 지나지 않았다. 뉴턴은 그 밖에도 행성의 운동에도 던져진 돌의 운동, 진자의 진동, 또는 팽이의 춤 등에서와 같은 운동과 본질적으로는 같은 운동이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뉴턴의 역학에서는 이 같은 일련의 상이한 현상들을 동일한 바탕 위에, 질량x가속도=이라는 유명한 공식에 귀착시킬 수가 있었던 데서 행성계에 관한 뉴턴의 설명은 프톨레마이오스의 설명을 훨씬 능가하고 있는 것이다.

(88)

보어는 이에 관해 이야기를 한 뒤 다음과 같이 말을 이었다.

바로 이 성에 햄릿이 살았었다는 것을 알고 나면 이 성이 달리 보이는 것은 참으로 이상한 일이 아닙니까? 우리가 말하는 과학이라는 견지에서 말한다면, 사람들은 이 성이 돌들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을 믿고 있으며, 또한 건축가가 쌓아올린 그 형식에 만족하고 있습니다. 돌들과 녹이 슬어 있는 녹색 지붕의 교회 안에 있는 부조(浮彫), 이것들이 바로 이 성입니다. 햄릿이 여기서 살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다음에도 이 모든 것들은 아무런 변화를 일으키지 않고 그대로 있는데도 이 성은 완전히 다른 성이 되어버리고 맙니다. 갑자기 이 성의 담과 돌벽은 우리에게 다른 언어로 말을 걸어옵니다. 성의 안뜰이 전세계로 바뀌고 어두운 구석은 인간 영혼의 어두움을 상기시키고, 우리는 사느냐 죽느냐라는 저 유명한 물음을 듣게 됩니다. 우리는 실제로 햄릿에 관해서 거의 아무것도 아는 게 없습니다. 다만 13세기 연대기의 짧은 주석 안에 햄릿이란 이름이 나와 있을 뿐입니다. 그가 실제로 생존했던 인물인지, 그가 여기사 살았는지 아닌지는 아무도 증명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모든 사람들은 셰익스피어가 이 인물과 어떠한 문제를 결부시켰는지, 그리고 그때 인간 영혼의 어느 깊은 곳을 비추어냈는지를 다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인물은 이 지상에서 한 장소가 필요했으며, 바로 그 장소로 이 크론보르크성을 찾아냈던 것입니다. 우리가 일단 이 모든 것을 알고 난 다음에는 이 성은 바로 다른 성이 되어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94)

나는 저만큼 떨어진 곳에 있는 전주 하나를 발견하였다. 그것은 상당히 닿을 만한 거리였다. 확률적 예상을 뒤엎고 나는 단 한 번으로 그 전주에 맞혔다. 보어는 아주 깊은 생각에 잠기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사람들이 어떻게 팔을 움직여야 하는가를 깊이 생각하면서 돌 던지기를 시도할 때는 적중할 확률은 거의 없다. 그런데 모든 이성을 무시하고 혹시 맞을지도 모르겠다는 단순한 생각 아래 던지면 사정은 좀 달라집니다. 지금 바로 그것이 일어난 것입니다.”

(108)

현재까지 우리들은 어떠한 언어로 원자 안의 사건을 설명할 수 있는지를 전혀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확실히 수학적 언어, 즉 수학적 도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의 도움을 빌려서 원자의 정상상태나 한 상태에서 다른 상태로 이행하는 확률을 계산할 수 있지만 이 언어가 우리의 통상적인 언어와 일반적으로 어떻게 연관이 있는가에 대해서는 아직 아무도 모르고 있습니다. 그것의 도움을 빌려서 원자의 정상상태나 한 상태에서 다른 상태로 이행하는 확률을 계산할 수 있지만 이 언어가 우리의 통상적인 언어와 일반적으로 어떻게 연관이 있는가에 대해서는 아직 아무도 모르고 있습니다. 이론을 실험에 적용시키기 위해서는 이 연관성이 무엇인가를 알아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실험결과에 관해서는 아직도 항상 일반적인 언어, 즉 고전물리학에서 지금까지 사용되어 온 언어를 그대로 사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아직은 양자역학을 이해하였고 말할 수 있는 단계가 아닙니다. 수학적인 도식은 이미 형성되었다고 하더라도 일반적인 언어와 맺는 연관성은 아직 형성되지 않았습니다. 일단 이것이 형성되기만 하면 사람들은 안개상자 안의 전자 궤도에 대해서도 아무런 내부모순이 없이 말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선생님께서 지적하신 난점을 해결하기에는 아직 시기상조라고 봅니다.”

(116)

과학의 진보는 그 종사자들에게 새로운 사고 내용을 받아들여서 그것을 구체화하는 것을 요구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과학에 종사하고 있는 사람들은 이를 위한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다.그러나 실제로 신세계에 들어가려면 새로운 사고 내용을 받아들여야 할 뿐만이 아니라 새로운 사실을 이해하기 위해서 사고구조를 바꾸어야 할 경우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러한 사실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거나 받아들일 위치에 놓여 있지 않다. 그리고 이와 같은 결정적인 한 발짝을 내딛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나는 라이프치히의 자연과학자대회에서 처음으로 강렬하게 느낄 수 있었다. 그래서 우리는 양자론에서도 본질적으로 어려운 고비가 눈앞에 놓여 있다는 것을 각오해야만 했다.

(127~128)

닐스 보어가 노르웨이에서 스키 휴가를 마치고 돌아왔을 때 또 한 번 어려운 토론이 벌어졌다. 그는 자기 생각을 계속 추구하면서 파동상과 입자상의 이중성을 해석의 바탕으로 삼으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그의 고찰의 중심에는 그가 이번에 새롭게 고안해낸 상보성원리가 있었다. 이 원리를 하나의 사건을 두 가지의 다른 관찰방식으로 파악할 수 있는 상태를 서술하는 것이었다. 이 두 관찰방식은 서로가 서로를 배척하기도 하지만 한편에서는 서로 보충하기도 한다는 것이었다. 이 두 가지 관찰방식을 병행함으로써 비로소 하나의 현상의 직관적 내용이 완전히 풀어진다는 것이었다. 그는 처음으로 불확정성 관계도 상보성원리의 일반적인 상황 가운데 어떤 특수한 경우라고 느꼈던 모양이고, 따라서 그는 불확정성 관계에 대해서 몇 가지 유보조건들을 제시하였다. 그러나 이 문제는 당시 코펜하겐에서 일하고 있던 스웨덴의 물리학자 오스카 클라인의 도움으로, 둘은 쌍방의 해석 사이에 커다란 차이가 없다는 데 합의를 보았다. 이제는 완전히 이해된 사실을 그것이 비록 새로운 사실일지라도 일반 물리학자들에게 공개할 때 그것이 이해될 수 있도록 표현하는 문제가 중요한 과제라는 것을 우리는 인식하였다.

(186~187)

우리들은 전자가 어느 방향에서 방출될 것인가를 알지 못 한다고 확인하였습니다. 당신으로 그러니까 이 방향 결정요소를 계속하여 찾아야 한다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그러한 결정요소를 찾았다고 가정한다면 다음과 같은 어려운 고비에 부딪치게 됩니다. 즉 방출된 전자는 또한 원자핵으로부터 방사되는 물질파로써도 파악할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은 파동은 간섭현상을 일으킬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우선 원자핵에서 반대방향으로 방사된 파동 부분은 그것에 맞추어 설치해 놓은 장치 안에서 간섭현상을 일으켜 그 장치의 결과로 어떤 일정한 방향으로의 파동은 소멸하였다고 가정해 봅시다. 이것은 전자가 이 방향으로는 결국 방출되지 않는다는 것을 예언할 수 있음을 뜻하게 됩니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새로운 결정요소를 알고, 전자가 어떤 일정한 방향으로 방출된다는 것이 완전히 결론지어졌다면 간섭현상이라는 것은 절대로 일어날 수가 없습니다. 즉 간섭에 따른 소멸은 없을 것이며, 따라서 우리가 이끌어낸 결론은 더 이상 유지될 수가 없게 됩니다. 그러나 실제로 이 소멸현상은 실험적으로 관찰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여기서 논쟁을 벌이고 있는 결정요소는 존재하지 않으며, 결국 우리가 현재 가지고 있는 지식은 더 이상의 새로운 결정요소가 없이도 이미 완전하다는 것을 자연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는 것입니다.

(193~194)

칸트는 그의 선천적인 것으로써 당시 자연과학의 인식상황을 정확하게 분석했지만 오늘의 원자물리학에서는 우리는 새로운 인식론적 상황 앞에 서 있습니다. 그것은 아르키메데스의 지레의 법칙이 당시의 기술적 측면에서는 중요한 실제적 규칙성의 정확한 정식화를 나타내고 있었지만, 오늘의 기술, 말하자면 전자기술에서는 이 법칙은 이미 충분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과 비슷합니다. 아르키메데스의 법칙은 불확실한 의견이 아니라 참지식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지레에 관해서 말해지는 한에서는 어떤 시대에도 통용될 것이며, 저 멀리 어딘가 있는 다른 성원계의 행성에도 지레가 존재한다면 거기서도 아르키메데스의 주장은 옳을 것입니다. 인류가 자기 지식의 학장과 더불어 지레의 개념만을 가지고는 이미 충분치 않은 기술의 영역에 돌입한다고 하는 진술의 제2부분은 본디 지레의 법칙이 역사적인 발전과정에서 더 포괄적인 기술체계의 일부가 되고, 따라서 그 법칙이 처음에 가지고 있던 중심적 의의가 그 뒤로는 이미 통용될 수가 없게 되었음을 뜻할 뿐입니다. 마찬가지로 칸트가 한 인식의 분석은 단순히 불확실한 의견을 포함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순수한 참지식이며, 반응할 수 있는 생물이 그 외부세계에 대하여, 우리들 인간의 처지에서는 경험이라고 불리는 그러한 관계에 서게 될 때에는 칸트의 철학은 어디에서나 정당한 것이라고 나는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칸트의 선천적인 것도 뒷날 그 중심적 지위에서 추방되고 인식과정의 좀 더 포괄적인 분석의 일부분이 되고 말 것입니다. ‘자연과학적인 또는 철학적인 지식이 어느 시대에도 그 본래적인 진리를 갖는다는 명제로서 완화하려고 하는 것은 분명히 잘못입니다. 그러나 역사의 발전과 더불어 인간의 사고구조도 바뀐다는 사실에 우리는 주의해야 합니다. 과학의 진보란 다만 단순히 우리들이 새로운 사실을 알고 그것을 이해한다는 데 머무는 것이 아니라 이해한다는 말이 무엇을 뜻하느냐 하는 것을 항상 거듭 새롭게 배워나감으로써 성취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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