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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렌 굴드, 피아노 솔로 ㅣ 동문선 현대신서 102
미셸 슈나이더 지음, 이창실 옮김 / 동문선 / 2002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천재 수학자들 중에는 괴짜들이 많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어. 그리고
사회 생활을 극도로 멀리하고, 집에 박혀 지내는 히키코모리 같은 천재 수학자들의 이야기는 심심치 않게
들었단다. 그런데 히키코모리 스타일의 피아니스트라면? 피아니스트라고
하면 보통 대중들 앞에서 공연을 하면서 대중들과 소통을 하면서 자신의 음악을 들려주어야 하는데, 그런
사람이 사람들 만나는 것을 싫어하고 혼자 있으려고만 한다면 어떨까.
글렌 굴드. 그런 마치 괴짜 수학자를 보는 듯한 천재 피아니스트가
있었으니, 바로 글렌 굴드라는 사람이란다. 아빠가 이 사람을
알게 된 것은 풍월당 박종호님의 책을 통해서 알게 되었어.. 그리고 인터넷 서점 서핑을 하다가 이 책을
알게 되었고, 그래서 읽어봐야겠다고 생각하고 읽었단다.
1.
아빠는 절대자의 존재를 믿지 않는단다. 그런데 이 굴렌 굴드라는 사람의
인생을 알게 되고 나서, 혹시 절대자가 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 천상의 피아니스트를 실수로 지구로 내려 보낸 것은 아닌지.. 그래서
지구의 생활에는 적응하지 못하고, 할 줄 아는 것이라고는 피아노를 치는 것. 그것도 피아노에 푹 빠져서 남들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심지어
중얼거리면서 치다니. 자신의 피아노곡에 자신의 몸을 실은 것 같은 체스처. 건반 가까이 코가 닿을 것만 같은 자세로 말이야.
절대자가 그의 포지션을 실수로 잘못 지정한 것 같다는 생각마저 들었어. 그
실수를 뒤늦게 알게 되어 그를 빨리 천상으로 데리고 간 것은 아닌지… 절대자가 아니라면 유전자들이 그런
사람을 만들어낸 것인가? 유전자들의 짓이라면, 왜 글렌 굴드와
같은 사람을 조정했을까? 다른 유전자들에게 가끔은 신비의 음악을 들려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 것일까.
…
그는 1932년생이고, 캐나다에서
태어났단다. 음악을 하는 부모님의 영향이었는지 음악 신동의 유전자를 가지고 태어나서, 어렸을 때부터 피아노 신동이라는 소리를 듣곤 했어. 또한 피아노
치는 것을 좋아했어. 하지만 그는 어렸을 때부터 사교성이 없었어. 그것은
많은 사람들 앞에서 연주하는 것을 무척 어렵게 했지. 그는 어렸을 때부터 혼자 있는 것을 좋아했고, 그래서 피아노 연주와 책만 가까이 했다고 하는구나.
1946년 토론토에 있는 왕립음악원의 학생들로 이루어진 오케스트라와
첫 협연을 하면서 점차 유명해지게 되어 1947년 14살
때 첫 독주회도 갖게 되었어. 1950년 캐나다에서는 이미 스타가 되어 있었단다. 1952년 텔레비전에서 연주를 하기도 하고, 1955년 드디어 미국에
진출하여 워싱턴에서 연주를 하기도 했어. 그의 성공적인 공연은 그를 이제 세계적인 스타로 만들어 놓았단다. 그는 유럽에 진출해 1957년 유럽 순회 공연도 성공적으로 마쳤어.
그런데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피아노 치는 것은 좋아했지만, 사람들
앞에서 공연하는 것은 무척 싫어했단다. 그에게 엄청난 스트레스였을 거야. 이런 극도의 스트레스 때문인지 그는 어려서부터 우울증과 병에 시달렸어. 그리고
결벽증세도 나타났고 나중에는 심해져서 약병과 자신이 먹을 생수들은 직접 챙기기도 했대. 연주하기 전에 30분 이상 뜨거운 물에 손과 팔을 담그고 있는 습관도 생겼어.. 그의
이런 결벽증과 우울증은 심해져서 비행기도 안타고 먹는 것도 조심해서 먹었다고 하는구나. 그렇게 받는
스트레스를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그는 최정상의 자리에 있던 1964년 공연 은퇴를 선언했단다. 그리고 그는 고독과 함께 삶을 같이 하게 되었어.
2.
그가 공연을 더 이상 하지 않았지만 피아노를 그만 둔 것은 아니야. 오히려
자신만의 피아노에 빠져 지낼 수 있었어. 그의 삶은 수도자의 은둔생활과도 같았단다. 음악 속으로 숨어버린 것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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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
음악의 핵심 속으로의
온전한 칩거, 모든 것으로부터의 결별, 성급한 떠남, 이 모든 일은 굴드가 무대를 떠난 순간 이미 일어나 있었던 일이었다.
1963년의 사건은 그의 긴 탐구의 첫 단계가 아니고 마지막 단계였다. 후퇴 혹은 은거는
결렬이라기보다 음악과 이 반복되는 실종간의 해묵은 내밀한 공모였다. 이미 오래 전부터 음악은 그에게
참으로 존재하며, 그를 사로잡는 유일한 것이었다. 그 밖의
것은 모두, 연주회는 한층 고통스럽게 그를 음악으로부터 갈라 놓는 것이었다. 집착하는 모든 것, 만남, 아이들, 일상의 작업들과 같은 기쁨과 고통의 이 매듭들은 늘 그에게 탈주를 꿈꾸게 했다. “아무곳이든지, 세상 밖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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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렌 굴드가 공연을 하지 않았지만, 스튜디오 녹음을 계속 했단다. 그를 그리워하는 팬들은 그렇게 그를 만나야 했어. CBS는 그가
살고 있는 토론토에 녹음 스튜디오를 만들어졌다고 했어. 그곳에서 촬영된 그가 연주하는 모습은 지금도
유투브를 통해서 볼 수 있단다. 그 영상을 아빠도 찾아서 봤어. 아빠가 피아노 연주를 즐기는 편은 아니지만, 그가 피아노 치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왠지 모르게 자꾸 끌리게 되더구나.
앞서 이야기했지만, 그는
결벽증과 우울증으로 각종 약을 많이 먹고 그런 것들에 영향으로 건강을 잃게 되었고, 1982년 50년 짧은 삶을 마감하게 되었단다. 그는 그렇게 다시 천상으로 돌아갔단다. 그곳에서는 우울증 없이, 약도 먹지 않고 원 없이 피아노를 치고
있을는지…
PS:
책의 첫 문장 : 1964년, 그때까지
뛰어난 연주자였던 캐나다의 피아니스트 글렌 굴드는 대중 앞에서의 연주를 완전히 그만두게 되었다.
책의 끝 문장 : 글렌 굴드는 음악을 앓고 있었다. 치유될 수 없는 병.
(22)
혼자 있다고 꼭 고독 속에 있는 것은 아니다. 내가 말하는 고독은 물론 ‘다른 사람이 없는 상태’를 의미하지만 이 순간 나는 나 자신을 벗삼고 있다. 반면 내자 혼자 있든 누구와 함께 있든 나 자신이 내게 결핍되어 있을 때, ‘내게 결핍되어 있는 그 누구’가 다름이 아닌 나 자신일 때, 이런 상태는 고립이다. (반대로 사랑은 상대방이 거기 있을 때조차 그가 그리운 상태를 말한다.) 고독 속에 있다는 것은 상대방이 거기, 내 안에 있다는 확신을 느끼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상대방과 내가 모두 결핍되어 있는 단절도 있다.
(41)
굴드는 청중 쪽으로 등을 반쯤 돌린 채 다리를 꼬고, 거의 비스듬히 앉은 자세로 첫번째 악장을 연주했다. 그리고 나서 느린 악장에 이르자 입이 반쯤 벌어지고 무대 천장에 눈이 고정된 그의 모습은 황홀경에 빠진 사람과도 같았다. 그 다음 마지막 악장에 가 거의 뒤로 나자빠진 듯한 자세가 된 그의 머리는 건반에서 너무도 떨어져 있어, 자신의 손을 마치 자기 것이 아닌 양 바라보는 것 같았다.
(74)
그는 음악에 옷을 입히기를 좋아하지 않았다. 그는 음악이 옷을 벗기를 원했다. 또한 음악이 우리를 헐벗게 하고 살가죽을 벗기는 것을, 털을 곤두서게 하는 것을 알고 있었다. 마지막 사진들 속의 그는 몹시 마른 모습이다. 뼈의 열기를 식히기 위한 살의 부드러움은 찾아볼 수 없다. 하지만 이 몸에는 엄청난 힘이 배어 있다. 일상의 과육이 해체되는 이 순간, 푸가의 골격에서 찾아지는 그런 힘이.
(108)
굴드의 연주에는 몹시도 신비한 무엇이 들어 있다. 아주 스타카토적이고 점묘적이라고까지 할 만한 이 세코(secco)식이 연주를 통해 탁월한 밀도와 놀라운 연속성이 드러나는 것이다. 굴드는 페달을 통한 음의 용해나 손가락의 레가토 연주 증 외부적인 무엇으로 연결성을 만들어 내지 않고, 크레셴도와 디크레셴도를 통해 리드미컬하다기보다는 강양이 위주가 된 프레이징을 만들어 낸다. 연속성은 인접성을 통해서가 아니고, 완전히 별개인 음들의 꾸준한 단계적 상승을 통해 이루어진다. 이렇게 해서 재봉틀로 땀을 드느냐, 모호한 후광을 만들어 내느냐 하는 딜레마를 비켜 간다.
(149)
고독 속에 있을 때 우리는 어디에 있는가? 안에 있는가, 밖에 있는가? 음악 속에 있을 때 우리는 어디에 있는가? 이따금 음악이 일체를 엄습해 깡그리 지워 버리고 만다. 그리고 음향 외에는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나는 그곳에 없을 수도 있지만, 음향은 거기에 있다. 그것은 거기에 있는 것이다. 존재하는 것이다. 때론 아주 미미한 것, 거의 무효화된, 아니면 부서진 무엇일 때도 있다. 하지만 어디에 있는 것일까? 음악은 내 안에 있고, 나는 음악 안에 있다. 피아노를 연주한다는 것은 끊임없이 내부에서 외부로, 내면이 된 외부로 나아감이다. 마치 내면에 이미 외부가 존재하는 양. 음악은 신의 자질들을 지니고 있어 성 아우구스티누스가 말했듯이 보존하면서 채운다. 그것은 에워싸고 조여 온다. 그러면서도 귀로 올라오는 기쁨, 혹은 첨예한 고통으로서, 아주 작은 부분이 되어 내부에 머문다.
(190)
나는 굴드가 연주한 <골트베르크 변주곡>의 마지막 녹음의 마지막 부분(아리아의 재현)의 마지막 음들을 듣는다. 지속된 화음이 잠시, 새가 날아가 버린 가지가 희미하게 떨리듯이 부르르 떤다. 굴드를 들으며, 굴드에 관해 쓰며 결국 알게 된 것은 나 자신이다. 자신들의 삶을 살지 않았던 예술가들, 그러나 이들 덕분에 우리가 우리 자신의 삶을 그나마 괜찮게 살 수 있게 된 그런 예술가들을 경험할 때 늘 그렇듯이. 이 놀라움은 놀래키고 당황하게 만들고 기발하게 보이려는 욕구에서 생겨나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 참된 놀라움은 아름다움 앞에서 우리가 "그래, 이거야. 이렇게밖에는 될 수 없었어"리고 말하도록 만든다. 발설된 것은 방금 전까지도 생각할 수 없었지만 이젠 돌이킬 수 없는 것이 되어 버렸다. "예술은 가장 높은 사명을 지닐 때 거의 인간적이 아닌 무엇이 되어 버린다."고 언젠가 굴드도 말한 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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