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6)
느릿느릿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나는 그제야 어머니가 가장 사랑하는 자식은 나라는 사실을 진정으로 깨달았다. 어머니는 나와 작별인사를 할 때면 먼 옛날 내가 어머니 배 속에 있었던 것처럼 이제는 어머니가 내 안에 쏙
들어와 계속 남고 싶다는 듯이 내 품에 꼭 안겼다. 어머니가 건강할 때는 어머니의 몸이 내 몸에 닿는
것이 싫었지만 지금은 좋았다.
(438)
“또 고소를 당할 거예요. 골치
아픈 일만 잔뜩 늘어날 테고 결국 법이란 법을 어기는 사람이 아니라 법을 두려워하는 사람에게만 효과적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게 될 거예요. 아이들을 위해서라도 그렇게 생각하고 싶지는 않아요.”
(607)
지난날 국가를 무너뜨리려 했던 세력 앞에 겁에 질려 물러났던 민중은 이제 여러 명분 아래 국가를 섬기는 척하면서
사과 속에 생긴 거대한 벌레처럼 먹어치운 이들에게 신물이 나 뒤로 펄쩍 뛰었다. 화려한 권력의 향연과
신중치 못하고 오만한 언어의 홍수 아래 숨어 있던 검은 파도가 점점 더 드러나면서 이탈리아 전역에 흘러넘쳤다. 유년
시절 우리 고향만이 국가의 혜택을 받지 못한 것이 아니었다. 나폴리만 구제 불능이었던 것이 아니었다.
(638)
“대답한 거야. 네가 이해하지
못한 척할 뿐이지. 글을 쓰려면 삶의 의미가 될 정도로 간절히 원하는 무언가가 있어야 해. 그런데 나는 살고 싶은 마음도 없어. 나는 한 번도 너처럼 강렬하게
살려는 의지를 가졌던 적이 없어. 우리가 지금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이 순간 나 자신을 지워버릴 수
있다면 정말 행복해질 것 같아. 그런 내가 글이라니 당치도 않아.”
…..
…..
“컴퓨터는 겉보기에나 깨끗하지 실은 지저분하기 짝이 없어. 주변을 지저분하게 만드는 물건이야. 사람들에게 여기저기 흔적을 남기고
다닐 수밖에 없게 해. 아무데서나 쉴 새 없이 똥을 싸고 오줌을 누고 다니는 것과 다를 바가 없어. 나는 나와 관련된 것은 아무것도 남기고 싶지 않아. 내가 가장 좋아하는
컴퓨터 자판은 삭제키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