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17)
숨지 말 것
- 에리히
프리트
시대의
일들 앞에서
사랑 앞으로
숨지 말 것
또한
사랑 앞에서
시대의 일들 속으로
숨지 말 것
(24)
그렇게 못할 수도
- 제인
케니언
건강한 다리로 잠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렇게 못할 수도 있었다.
시리얼과 달콤한 우유와
흠 없이 잘 익은 복숭아를 먹었다.
그렇게 못할 수도 있었다.
개를 데리고 언덕 위 자작나무 숲으로 산책을 갔다.
오전 내내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고
오후에는 사랑하는 이와 함께 누웠다.
그렇게 못할 수도 있었다.
우리는 은촛대가 놓인 식탁에서
함께 저녁을 먹었다.
그렇게 못할 수도 있었다.
벽에 그림이 걸린 방에서 잠을 자고
오늘과 같은 내일을 기약했다.
그러나 나는 안다, 어느 날인가는
그렇게 못하게 되리라는 걸.
(27)
그렇다. 우리의 소소한 일상은 얼마나 축복된 시간인가. 살아 있다는 것은 큰 기회이다. 그 ‘특별한’ 일상들이 사라질 날이 곧 올 것이기 때문이다. 물 위를 걷는 것이 기적이 아니라 두 발로 땅 위를 걷는 것이 기적이다. 삶은
수천 가지 작은 기적들의 연속이다. 그것들을 그냥 지나쳐선 안 된다고 시인은 말한다. 시에는 적혀 있지 않지만 행간마다 ‘늦기 전에 깨달으라’라는 말이 숨어 있다.
(40-41)
그 겨울의 일요일들
- 로버트
헤이든
일요일에도 아버지는 일찍 일어나
검푸른 추위 속에서 옷을 입고
한 주 내내 모진 날씨에 일하느라 쑤시고
갈라진 손으로 불을 피웠다.
아무도 고맙다고 말하지 않는데도.
잠이 깬 나는 몸속까지 스몄던 추위가
타닥타닥 쪼개지며 녹는 소리를 듣곤 했다
방들이 모두 따뜻해지면 아버지가 나를 불렀고
나는 그 집에 잠복한 분노를 경계하며
느릿느릿 일어나 옷을 입고
아버지에게 냉담한 말을 던지곤 했다
추위를 몰아내고
내 외출용 구두까지 윤나게 닦아 놓은 아버지한테.
내가 무엇을 알았던가, 내가 무엇을 알았던가
사랑의 엄숙하고 외로운 직무에 대해.
(46)
필요한 것은 ‘사랑받지 않을 용기’이다. 사랑을 구걸하지 않으려면 고독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군중의
물결에 휩쓸리지 않고 강둑에서 자신의 방향을 정할 수 있다. 사람들이 당신을 곁눈질로 쳐다보면 당신도
곁눈질로 보며 웃을 수 있어야 한다. 스스로 모순 덩어리가 될 수 있어야 한다. 자신의 모순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합리적인 머리만으로는 멋진 춤과 음악을 만들 수 없다. 사람들이 나를 추방하기 전에 나 스스로 추방자가 되어야 한다. 남들과
다르다는 것은 신이 준 선물이다.
(52-54)
서서히 죽어 가는 사람
- 마샤
메데이로스
습관의 노예가 된 사람
매일 똑같은 길로만 다니는 사람
결코 일상을 바꾸지 않는 사람
위험을 무릅쓰고 옷 색깔을 바꾸지 않는 사람
모르는 사람에게 말 걸지 않는 사람은
서서히 죽어 가는 사람이다
열정을 피하는 사람
흑백의 구분을 좋아하는 사람
눈을 반짝이게 하고
하품을 미소로 바꾸고
실수와 슬픔 앞에서도 심장을 뛰게 하는
감정의 소용돌이보다
분명히 구분하는 걸 더 좋아하는 사람은
서서히 죽어 가는 사람이다
자신의 일과 사랑에 행복하지 않을 때
상황을 역전시키지 않는 사람
꿈을 따르기 위해 확실성을 불확실성과 바꾸지 않는 사람
일생에 적어도 한 번은 합리적인 조언으로부터 달아나지 않는 사람은
서서히 죽어 가는 사람이다
여행을 하지 않는 사람, 책을 읽지 않는 사람
삶의 음악을 듣지 않는 사람
자기 안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하지 못하는 사람은
서서히 죽어 가는 사람이다
자신의 자존감을 파괴하고 그곳을 에고로 채운 사람
타인의 도움을 거부하는 사람
자신의 나쁜 운과
그치지 않고 내리는 비에 대해
불평하면서 하루를 보내는 사람은
서서히 죽어 가는 사람이다
시작도 하기 전에 계획을 포기하는 사람
알지 못하는 주제에 대해 묻지도 않고
아는 것에 대해 물어도 대답하지 않는 사람은
서서히 죽어 가는 사람이다
우리, 서서히 죽는 죽음을 경계하자
살아 있다는 것은
단순히 숨을 쉬는 행위보다 훨씬 더 큰 노력을
필요로 함을 기억하면서
(100-102)
절반의 생
- 칼릴 지브란
절반만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하지 말라
절반만 친구인 사람을 접대하지 말라
절반의 재능만 담긴 작품을 탐닉하지 말라.
절반의 인생을 살지 말고,
절반의 죽음을 죽지 말라
절반의 해답을 선택하지 말고
절반의 진리에 머물지 말라.
절반의 꿈을 꾸지 말고
절반의 희망에 환상을 갖지 말라.
침묵을 선택했다면 온전히 침묵하고
말을 할 때는 온전히 말하라
말해야만 할 때 침묵하지 말고
침묵해야만 할 때 말하지 말라
받아들인다면 솔직하게 받아들이라.
가장하지 말라
거절한다면 분명히 하라
불분명한 거절은 나약한 받아들임일 뿐이므로.
절반의 삶은 그대가 살지 않은 삶이고
그대가 하지 않은 말이고
그대가 뒤로 미룬 미소이며
그대가 느끼지 않은 사랑이고
그대가 알지 못한 우정이다.
절반의 삶은 가장 가까운 사람들에게 그대를 이방인으로 만들고
가장 가까운 사람들을 그대에게 이방인으로 만든다.
절반의 삶은 도착했으나 결코 도착하지 못한 것이고
일했지만 결코 일하지 않은 것이고
존재하다 존재하지 않은 것이다.
그때 그대는 그대 자신이 아니다.
그대 자신을 결코 안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때 그대가 사랑하는 사람은 그대의 동반자가 아니다.
절반의 삶은 그대가 동시에 여러 장소에 있는 것이다.
절반의 물은 목마름은 해결하지 못하고
절반의 식사는 배고픔을 충족시키지 못한다.
절반만 간 길은 어디에도 이르지 못하며
절반의 생각은 어떤 결과도 만들지 못한다.
절반의 삶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순간이지만
그대는 할 수 있다.
그대는 절반의 존재가 아니므로
그대는 절반의 삶이 아닌
온전한 삶을 살기 위한 존재하는
온전한 사람이므로.
(112-113)
역사책 읽는 노동자의 의문
-
베르톨트 브레히트
일곱 개의 성문을 가진 테베를 누가 건설했는가?
책에는 왕의 이름들만 적혀 있다.
왕들이 울퉁불퉁한 돌 덩어리를 직접 날랐는가?
그리고 수없이 파괴되었던 바빌론
그때마다 그 도시를 누가 재건했는가?
황금으로 빛나는 리마의 건설 노동자들은
어떤 집에 살았는가?
만리장성이 완성된 날 저녁
석공들은 어디로 갔는가?
위대한 로마제국에는 승리의 개선문들로 가득하다
누가 그것들을 세웠는가?
로마의 황제들은 누구를 딛고 승리를 거뒀는가?
끝없이 칭송되는 비잔티움제국에는 궁전들만 있었는가?
전설의 대륙 아틀란티스에서조차
바다가 그곳을 집어삼키는 밤에 사람들은
물에 빠져 죽어 가면서 그들의 노예를 애타게 불렀다고 한다.
젊은 알렉산더는 인도를 정복했다.
그 혼자서?
카이사르는 갈리아인들을 물리쳤다.
적어도 취사병 한 명은 데려가지 않았을까?
스페인의 필립 황제는 자신의 함대가 침몰하자 울었다.
그 혼자 울었을까?
프리드리히 2세는 7년전쟁에서
승리했다.
그 혼자 승리했을까?
모든 페이지마다 승리가 적혀 있다.
누구의 돈으로 승리의 잔치가 열렸을까?
십 년마다 위대한 인물이 나타났다
그 비용은 누가 부담했을까?
너무도 많은 목록들
너무도 많은 의문들
(153)
한번은 오랜만에 어머니를 뵈러 가서, 이제 자식들도 다 컸으니 어머니
자신의 삶을 살라고 하면서 무엇을 할 때 가장 행복하냐고 물었다. 그러자 어머니는 오늘처럼 음식을 만들어
네가 맛있게 먹는 것을 볼 때가 가장 행복하다고, 음식이 너의 입으로 들어가는 것만 봐도 배가 부르다고
하시면서 얼른 또 다른 접시를 내오셨다. 내가 갖고 있는 ‘행복’의 개념이 얼마나 이기적이었던가. 나는 아직도 어렸을 때 어머니가
만들어 주신 그 음식들이 아니면 맛을 잘 모른다.
(171)
세상으로부터 인정받지 못하는 고통이 크다. 그러나 내면의 포기가 주는
고통은 더 크다. 대시인의 시가 감동을 줄지라도, 자신이
쓴 시만큼 자기 삶의 중요한 부분을 건드리는 시는 없다. 시를 써서 바람에 읽어 주면 바람이 머릿결을
쓰다듬어 줄 것이다. 겨울강에게 읽어 주면 강물이 얼음장 밑에서 화답할 것이다. 그러면 자신을 둘러싼 세상과 가까워지는 것을 느낀다.
(178)
결국 우리가 후회하는 것은 시도한 일보다 시도하지 않은 일들이다. 인생의
광물을 끝없이 캐내지 않은 광부에서 남는 것은 불만뿐이다. 행복 여부는 우리가 외부에 행사하는 통제력이
아니라 우리가 하는 시도에 달려 있다. 잘랄루딘 루미는 “너는
자신이 문의 자물쇠라고 생각하지만 너야말로 그 자물쇠를 여는 열쇠이다.”라고 썼다. 자신이라는 열쇠로 어떤 자물쇠를 열려고 시도해 보았는가? 산골짜기
모래를 파헤쳐 사막을 만들려고 해 본 적이 있는가? 금을 발견하든 발견하지 못하든 쇳조각이라도 캐내
한번 깨물어 보는 것, 그것이 인생이 아니고 무엇인가?
(181)
내일(5월 23일)은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일이다. 정치인을 떠나 인간적으로 내가 좋아한
사람이다. 그를 처음 본 것은 오래전, 그가 종로구 국회의원에
출마했을 때였다. 저녁 무렵이었는데, 선거 유세를 하기 위해
내가 사는 동네에 왔다. 그의 연설을 듣는 이는 선거 운동원을 제외하면 나를 포함해 서너 명에 불과했다. 그럼에도 그는 열정을 다해 말을 했고, 끝난 뒤 내가 인사를 하자
반가워하며 내 시집과 내가 번역한 <성자가 된 청소부>를
잘 읽었다고 말했다. 깨달음과 진리 추구는 결국 인간의 정의를 실현하려는 노력이라는 데 우리는 동의했다. 나에게 각인된 그의 인상은 정치인이기 이전에 순수한 열혈청년의 모습이었다. 아름답고
정의로운 마음을 가진 그가 세상을 떠나고, 우리는 아직도 많은 문제들을 힘겹게 헤쳐 나가고 있다.
(202)
우리가 하려는 일에 대해 세상은 언제나 ‘왜’냐고 묻는다. 마치 자신들은 인생이 가야 할 길을 알고 있는 것처럼. 인도를 가려고 하면 왜 위험한 그런 곳을 가려느냐고 묻는다. 핀란드에
오로라를 보러 가려고 하면 왜 자격증부처 따지 않느냐고 묻는다. 채식을 실천하려고 하면 채소에는 생명이
없느냐고 묻고, 무정부주의자라고 하면 너는 어느 나라 사람이냐고 묻는다. 그런 질문들에는 일일이 답할 필요가 없다. 어떤 대답을 해도 이해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세상을 이해시키느라 자신 안의 불을 다 태울 필요는 없다. 외롭고 쓸쓸할 때, 눈을 멀리 돌리고 산을 바라보라. 훨씬 더 외롭고 굳건한 산이 거기 말없이 있지 않은가.
(210)
어떤 사람
- 레이첼
리먼 필드
이상한 일은 어떤 사람을 만나면
몹시 피곤해진다는 것. 그런 사람과 함께 있으면
마음속 생각이 모두 움츠러들어
마른 잎처럼 바삭거린다는 것.
그러나 더 이상한 일은
또 다른 사람을 만나면
마음속 생각이 갑자기 환해져서
반듯불이처럼 빛나게 된다는 것
(230)
위험
- 엘리자베스 아펠
마침내 그날이 왔다
꽃을 피우는 위험보다
봉오리 속에
단단히 숨어 있는 것이
더 고통스러운 날이
(239)
시(poem)의 그리스 어원은 ‘창조하다(poiein)’이다. 시는 우리에게 ‘너의 삶을 창조하라’고 말한다. 삶에는
특별한 순간들이 있다. 비가 내리는 순간, 꽃이 피는 순간, 사랑과 고독의 감정이 일어나는 순간…… 시는 그 특별한 순간들을
이야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