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여자 1 - 20세기의 봄
조선희 지음 / 한겨레출판 / 2017년 6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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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이번에 이야기 해줄 책은 <세 여자> 1권이란다. 모두 두 권짜리야. 작년에 신간소개에서 알게 된 책이야. 일제시대 독립운동을 했던 세 명의 여자 이야기라고만 정말 대충 알고 있던 책이야. 아빠는 일제시대에 독립운동 했던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들에 관심이 많아.. 특히 많이 알려지지 않은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라면 더욱 관심이 가. 아빠가 어른이 되어 책들을 읽어보니, 학창 시절에 배웠던 위인들이 전부는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 뒤부터 더욱 그런 것 같아.

남북으로 갈라진 것은 국토만이 아니었고, 이념은 더 깊게 갈라져 버렸고, 남한과 이념이 달랐던 독립운동가들은 교과서에서 완전히 빠져버렸거든학교에서 배운 것은 잘해야 절반밖에 안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 지금 생각해보니, 이제서라도 그들에 대한 이야기를 아는 것이,  그들의 희생을 조금이라도 기억해 주는 것이 그들로 인해 평화로운 나라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의 일종의 의무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 같아. 그래서 그들에 관한 이야기에 관심이 많아졌던 것 같아. 그리고 그들의 삶이 다들 너무 극적이었어.

이번에 읽은 세 명의 여자들의 이야기도 실화로 하기에는 너무 가슴 아픈 이야기였단다. 주세죽, 허정숙, 고명자. 그들은 모두 부잣집 규수로 태어나 시대에 부응하며 편하게 살 수도 있었어. 하지만 그들은 그런 삶을 선택하지 않았단다. 이 소설의 부제가 “20세기의 봄이라고 되어 있지만, 그들은 여름의 뜨거운 태양보다 더 뜨거운 젊음을 보냈어. 책 표지에 젊고 아름다운 세 여인이 냇가에 발을 담그고 있는 빛 바랜 사진이 하나 있어. 저 사진을 찍을 당시에 그들은 그들의 미래를 알고 있었을까? 그 사진을 찍을 당시 그들의 마음을 헤아려 보았어. 그들은 행복한 미래를 꿈꾸고, 자신의 꿈을 생각하고 있었을 거야. , 그럼 그들의 이야기를 해줄게

1.

어떻게 이야기를 시작해야 할까? 삼일 운동을 이끌었던 민족대표 33. 그 중에 인권변호사로 일했던 허헌이라는 사람이 있었어. 그 허헌은 딸이 하나 있었는데, 그 딸의 이름은 허정숙. 허정숙은 신여성이었어. 자신이 하고 싶은 공부도 마음껏 할 수 있었어. 그래서 일본에 유학을 갔었는데, 그 사이에 우리나라에서는 삼일운동이 일어난 거야. 일본에 있던 허정숙은 그런 일이 있어났는지도 몰랐어. 나중에 방학 때 집에 왔을 때 그 소식을 접하고 나서 나라를 잃었는데, 편하게 공부나 하고 있다는 것은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어. 그래서 일본이 아닌 상해로 가겠다고 했어.

아무리 의식 있는 아버지였지만, 딸 혼자서 위험한 곳으로 가는 것을 허락하겠니. 유학을 일본으로 가지 않으려면 안전한 미국으로 가라고 했어. 허정숙은 아버지를 속이고 무조건 상해로 갔어. 상해에 도착한 다음에야 상해에 도착했다고 소식을 보냈어. 상해에서는 아버지와 친분이 있어 안면이 있던 이동휘를 무작정 찾아갔어. 당시 상해는 조그마한 지구라고 할 수 있었고, 식민지 조선의 망명객들이 많이 모여들 곳이었어. 1920년대 상해를 좀더 자세히 설명한 글이 소설 속에 있어 발췌해 보았단다. 아래 글을 읽어보면 당시 상해의 모습을 더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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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1920년의 상해는 나이 스물의 식민지 청년들이 자유와 해방의 공기에 한껏 들뜰 만한 도시였다. 퇴폐와 향락의 도시였지만 동시에 사상과 문화의 별천지였다. 동양이면서 서양이었고 중국이면서 유럽이었다. 근대식 석조건물들이 아스팔트 대로를 따라 즐비했고 프랑스조계에는 식민지 베트남 남자들이 순사복 차림으로 경계를 섰고 영국조계에는 터번을 두른 인도 순사가 돌아다녔다. 또한 백주대낮에 조폭집단 청홍방이 사제폭탄으로 빌딩 하나를 날려버리기도 하고 밤마다 정치적으로 복잡하게 얽힌 암살사건이 일어났다. 챙이 넓은 모자를 쓰고 금시계를 찬 신사 숙녀들이 백화점과 오락관을 드나드는 번화한 거리 뒷골목에선 아편굴이 번창했고 식민지 조선의 망명객들이 개미굴 같은 하숙들을 얻어놓고 은밀히 움직이고 있었다. 프랑스조계는 거리나 상점, 학교에서도 영어나 불어를 썼다. 점원이나 인력거꾼, 하인 들만이 중국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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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해에서 허정숙은 사회주의 연구소에서 사회주의를 공부하게 되었는데, 그곳에서 주세죽이라는 조선 여자를 만났어. 주세죽은 상해로 음악을 공부하러 왔다가 사회주의를 접하게 되었어. 허정숙은 조선에서부터 알고 지내던 박헌영을 상해에서 다시 만나게 되었는데, 박헌영과 주세죽을 서로 인사시켜 주었는데, 박헌영과 주세죽은 서로 사랑하는 사이가 되었지. 정숙은 박헌영의 동료 임원근과 교제를 하였단다.

상해에는 많은 조선인들이 모여들었다고 했잖아. 그중에는 김단야라는 사람도 있었어. 박헌영, 임원근, 김단야. 그들은 모두 1900년생 동갑이었고, 모두 공산주의자였어. 그렇다 보니 자주 어울렸어. 거기에 주세죽, 허정숙도 함께 했지. 상해에서 박헌영과 주세죽은 결혼을 했고, 주례는 여운형이 했어. 당시 상해에서의 독립운동은 러시아 공산당으로 독립자금을 받곤 했단다. 조선의 공산주의자들은 러시아 혁명을 본보기로 생각했단다. 러시아 혁명이야 말로 마르크스가 주장한 프롤레타리아 혁명으로 봉건군주제를 무너뜨린, 진정한 공산주의 혁명이라고 다들 생각하고 있었거든.

하지만 공산당 내부에 여러 당파가 있는 것이 문제였어. 그들 당파간의 내분이 골칫거리였고, 공산당과 함께 할 수 없다고 하는 임시정부와 갈등도 있었어. 나라 잃은 사람들이 이것저것 너무 많이 따지는 것 같구나.

2.

박헌영, 임원근, 김단야는 국내에 잠입하여 조선공산당을 창건하려고 했으나 잠입하다가 잡혀 형무소에 2년 동안 갇혀 있다가 나왔어. 허정숙과 주세죽도 국내로 와서 여성동우회 활동을 했어. 그리고 연인 관계에 있던 허정숙과 임원근은 결혼을 했단다. 정숙과 세죽이 여성동우회를 참여하면서 고명자라는 사람을 알게 되었어.

고명자의 아버지는 판사로써 부잣집이었어. 어린 시절 집안에서 점지한 혼처도 있지만, 그런 결혼은 죽기보다 싫다고 했어. 정숙과 세죽을 통해 김단야를 알게 된 고명자는 사랑에 빠지고 둘은 연인 관계가 되었단다. 주세죽과 박헌영. 허정숙과 임원근. 고명자와 김단야. 당시 그들은 뜨거운 젊은이들이었어. 그들이 오늘날에 만났다면 알콩달콩 예쁜 사랑을 하였겠지만, 당시 시대는 그들은 그냥 두지 않았어. 그들 또한 사랑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들이 있었어.주세죽과 박헌영은 결혼한 사이지만, 혁명을 위해서 아기도 뒤로 미루어 두었어.

박헌영, 임원근, 김단야는 생계를 위해서 기자 일을 시작했어. 박헌영과 임원근은 동아일보 기자, 김단야는 조선일보 기자로 일했어. 그리고 비밀리에 조선공산당 창건을 준비했지. 드디어 1925 4 17일 경성의 어느 한 중국집에서 조선공산당을 창당했고, 다음날 청년조직인 고려공산청년회를 박헌영의 집에서 만들었어. 당시 박헌영과 주세죽의 신혼집은 손님으로 늘 가득 찼고, 늘 토론과 회의를 했고, 주세죽은 그들의 끼니를 걱정해야 했어.

조봉암이 모스크바에 조선공산당 창당을 보고하러 가기로 했는데 책임비서로 박헌영이 동행했고, 주세죽도 일행에 포함되어 모스크바에 다녀 왔어. 그런데, 얼마 안되어 일본은 공산주의를 불법으로 규정하였고, 조선공산당은 불법단체가 되었어.

허정숙은 기자 생활을 하면서 <신여성>이라는 잡지의 편집장 일을 하게 되었어. 그리고 당시로서는 혁신적인 단발 머리로 자르고 단발특집호를 내기도 했어. 그 잡지에 실린 사진이 바로 이 책의 표지로 뽑은 사진이란다. 세 여자 중에 허정숙은 다른 여자와 다른 점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바로 사랑에 대한 생각이야. 결혼을 하고 나서도 호감이 가는 사람이 생기면 다른 남자와 데이트를 할 수 있다고 생각했어. 오늘날 여자들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는데 말이야. 정숙은 그래서 결혼 후에도 다른 남자와 데이트도 했어.

정숙은 자신도 공산주의자라고 생각을 하지만, 공산주의를 하는 남자들이 파벌싸움을 하는 것을 무척 싫어했단다. 박헌영은 정숙의 소비와 자유연애 등을 보고 공산주의자라 인정을 하지 않았어. 허정숙과 박헌영은 자주 말다툼을 하곤 했지..

고명자는 김단야의 추천으로 코민테른 후원으로 모스크바 유학 길을 떠나기로 했어. 집에서는 난리 났고, 고명자는 내심 김단야와 함께 가길 원했지만, 김단야는 국내에 남았어.

3.

앞서 이야기했듯이 일본이 공산주의를 불법으로 규정했다고 했잖아. 그래서 조선공산당에 대한 탄압이 있었어. 1925 11월 제 1차 조선공산당 사건이 있었는데, 이때 임원근, 허정숙, 박헌영, 주세죽 모두 잡혀 들어가 신의주 경찰서로 압송되었어. 허정숙은 허정숙의 아버지가 손을 써서 풀려 나왔어. 고향에 있다가 체포를 피한 김단야는 그들의 체포 소식을 접하고 조선을 탈출했어. 주세죽은 갇힌 지 한 달 만에 풀려나 경성으로 왔어.

허정숙과 임원근 사이에는 두 아들이 있었는데, 둘째 아이의 아버지는 임원근이 아니라는 소문도 돌았대. 허정숙의 아버지 하헌은 세상의 정세를 파악하고 공부하고 위해 세계일주를 계획했어. 허헌이라는 분도 정말 대단한 사람인 것 같구나. 그 당시에 세계일주 할 생각을 하다니허정숙이 스케일이 크고 생각이 트여 있는 것은 아버지의 피를 받은 것 같구나. 그런데 허헌은 한술 더 떴어. 허정숙에게 미국 유학을 가라고 한 것이야. 자신과 함께 미국에 갔다가 자신은 세계 일주를 하고 정숙에게는 그곳에서 공부를 하라는 것이었지. 허정숙은 흔쾌히 좋다고 했어. 이 일로 세죽과 잠시 트러블도 있었단다.

나라 꼴이 이렇고 공산당 재건이라는 큰 일을 두고 자본주의 국가 미국으로 유학이라니세죽은 정숙의 결정을 이해할 수 없었지. 허정숙은 콜롬비아 대학에 다니게 되었단다. 1926 6.10 만세운동이 일어났고, 이 일의 여파로 공산당 탄압이 다시 한번 있었는데, 이것을 제 2차 조선공산당 사건이라고 부른단다. 이때 세죽은 또 유치장에 갇혔다가 한 달에 풀려났어. 2차 조선공산당 사건은 세계일주를 마치고 돌아온 허헌 등이 변호사로 변호를 했어.

박헌영는 극심한 고문으로 폐인이 되었고, 사람들은 그를 미쳤다고 했어. 그렇게 병보석으로 풀려나게 되었어. 미국 유학 중이었던 허정숙도 국내소식을 접하고 1년 반 만에 유학을 중단하고 귀국했어. 세죽과 화해도 했어. 한편 김단야는 상해를 거쳐 모스크바에 들어가서 명자와 재회를 했단다.

헌영은 병보석 상태였는데, 몰래 세죽과 함께 모스크바로 도망을 갔단다. 당시 세죽은 아이를 임신한 상태였는데 모스크바를 가는 길에 아이를 낳았고, 모스크바에 도착한 그들은 명자, 단야와도 재회했어. 그리고 헌영과 세죽은 모스크바에서 요양도 하면서 공부도 했어.

처음 느껴보는 행복.. 단란한 가족헌영과 세죽은 딸의 이름을 영이라고 지었어. 그리고 헌영은 모스크바에서 조선공산당 대표로 활동을 했어. 당시 러시아는 권력 투쟁이 한창이었어. 레닌이 죽고 나서 스탈린이 정권을 잡았는데 레닌과 성향이 비슷했던 트로츠키는 국외로 추방되었고 스탈린은 일인 지배 체제를 만들어갔어.

명자와 단야는 잇달아 국내로 들어왔어. 당시 국내는 신간회 활동이 활동하였고 여자들의 조식은 근우회가 있었는데, 근우회는 여성운동과 계몽운동에 앞장섰어... 한편 정숙은 임원근과 이혼을 하고 송봉우와 재혼을 했단다. 앞서 이야기했듯이 정숙은 연애만큼은 자유주의자였잖아. 임원근과 이혼은 했지만 옥살이 뒷바라지는 계속 했고, 동지로써 관계도 유지했어. 정숙도 근우회에 활동을 했어.

단야의 귀국 소식이 일본경찰에 알려지면서 다시 압박이 왔고 단야는 다시 러시아로 가기로 했어. 아빠는 이때 명자도 함께 가야 한다고 생각했어. 사랑하는 사이인데 말이야. 그렇다고 조선이 안전한 곳도 아니고 말이야. 명자도 그러고 싶었지만... 단야는 홀로 갔어. 그리고 얼마 뒤 명자는 감옥에 갔다가 풀려났어.

명자의 엄마는 돌아가시자 아버지는 명자를 반 강제로 고향으로 데리고 갔지. 그리고 나중에 서울에 다시 왔다가 메이데이 사건으로 다시 체포되었고, 모진 고문 끝에 풀려났어. 이후 공산주의자들 사이에 명자가 전향을 했다는 소문이 퍼졌고, 아무도 명자에게 가까이하려 하지 않았어.

정숙은 송봉우의 아이를 임신한 상태에서 체포되어 감옥에 갔다가 아이를 낳는다고 가석방되었고, 아이를 낳은 후에 다시 감옥에 갔어. 아버지 허헌도 감옥을 수감되었고, 그러다가 1932년 허헌과 허정숙 모두 출감을 했단다. 그때는 이미 신간회와 근우회는 모두 해산되고 없어진 뒤였단다. 암흑의 시절이었지.

4.

한편, 러시아에서 공부를 마친 헌영과 세죽은 상해로 돌아왔어. 코민테른으로부터 조선 공산당 재건이라는 임무를 부여 받았어. 네 살이 된 딸 영이는 모스크바 보육원에 맡겨둔 채였어. 그들은 상해에서 중국인 부부 행세를 했어. 당시 상해는 그들이 마지막 상해를 떠났던 십 년 전과는 상황이 전혀 달랐어. 이제 상해는 일본의 손아귀 안에 있었어. 살벌한 분위기였지. 한인애국단의 윤봉길 의사의 홍구 공원에서의 폭탄 투척 의거이라는 쾌거도 있었지만, 일시적이었던 것이었고 일본경찰의 삼엄한 경계는 행동반경을 좁게 만들었단다.

러시아로 가려던 단야도 상해에 머물고 있어서 그들과 재회하기도 했어. 그런데, 결국 헌영은 일본 경찰에게 체포되어 조선으로 압송되었어. 당시 상해에 많은 조선인들이 체포되어 조선으로 끌려갔어. 세죽은 더 이상 상해에 있으면 안되겠다고 생각하고 다시 모스크바로 갔어. 이때 단야와 함께 갔는데, 안전을 위해서 둘은 중국인 부부 행세를 하였단다.

그리고 모스크바를 떠난 지 이 년 만에 도착을 하였어. 딸 영이는 세죽을 기억하지 못했어. 한국말도 다 잊고 러시아말로만 이야기를 했어. 그것을 보고 세죽은 어찌나 가슴 아파했는지 몰라. 남편 헌영은 조선으로 끌려가고, 남편 친구와 도망을 위해 위장 부부 행세를 하고, 어린 딸은 자신을 전혀 기억하지 못하고공산주의고 뭐고, 이상국가 건설이고 뭐고, 다 때려 치고 싶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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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6-287)

세죽은 벤치에 앉아 함흥에서의 어린 시절을 떠올렸다. 가장 그리운 건 조선의 봄이었다. 조선의 봄은 따스했다. 세죽은 동네 아이들과 나물 캔다고 마구니 들고 들판과 야산을 쏘다녔다. 6년 전 함흥을 떠날 때 마지막으로 뵈었던 어머니의 모습이 떠올랐다. 남산만 한 배를 부둥켜안고 성치 않은 남편과 서로를 부축하면 집을 떠날 때 어머니는그래, 어여 멀리멀리 가거라라고 오른손을 휘휘 저으면서 왼손으로 옷고름을 쥐고 눈물을 찍어냈다. 올해 일흔여섯인데 생전에 어머니를 다시 뵐 수나 있을까. 남편은 지금 어찌하고 있을까. 멀쩡할까 미쳤을까. 살았을까 죽었을까. 딸은 아직 그녀를 엄마로 부르지 않는다. 아이는 보육교사를 엄마로 여기고 있는 것 같다. 그녀의 인생은 뜻대로 된 것이 하나도 없었다. 처음 세상에 눈 떴을 때부터 세상은 위험하고 불친절했다. 삶은 앞으로 얼마나 더 많은 절망을 떠안길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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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고 이후 모스크바 생활이 행복한 것도 아니었어. 모스크바도 이 년 전보다 더 강력해진 스탈린의 일인 독재 체제가 구축되었고, 공포정치가 모스크바를 점령하였어. 세죽과 단야도 몸을 사려야 했고, 상황이 그들을 같이 살게 만들었어. 세죽은 단야와 혼인신고를 하였단다. 세죽은 헌영이 조선에서 당연히 죽은 줄 알고 있었거든.단야는 헌영의 소식을 알고도 세죽에게 알려주지 않았다는 그런 썰도 있단다.

5.

감옥에서 나온 정숙은 송봉우가 전향을 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관계를 끊었어. 그리고 아버지의 지원으로 태양광선 치료원을 시작했어. 물론 그 사이에 많은 시련을 겪기도 했지. 아버지 허헌도 금광사업을 시작했고, 가끔 정숙의 치료원에 들렀어. 어느날은 공산주의자 청년 최창익을 치료원에 데리고 왔는데, 정숙과 최창익은 이후 사랑을 하게 된단다. 명자의 부친상 소식에 정숙은 오랜만에 명자를 만나 이야기를 나눴는데, 소문과 달리 명자는 밀정 같지는 않았어. 하지만 이제 명자는 더 이상 공산주의자는 아닌 듯 보였지. 허정숙은 마음 속으로는 여전히 열렬한 공산주의자였고, 무장투쟁을 하기 위해 창익과 함께 다시 조선을 빠져나가 남경에 갔어. 그리고 창익과 결혼을 하였단다.

모스크바에서는 세죽이 단야의 아이를 임신하여 아들을 낳았어. 아들의 이름은 비탈리로 지었단다. 보육원에 있는 딸 영이와 가끔 만나지만, 딸 영이는 세죽을 불편해하는 것 같았어. 당시 모스크바에서는 스탈린의 공포정치가 극에 달아 스탈린은 자신들의 측근들도 토사구팽하듯 숙청시켰단다.

그리고 조선인들 사이에 일본 스파이가 있다면서 의심이 가는 사람들은 죽였어. 조선인들은 이걸 이용하여 서로 반대파에 있던 이들을 무고하기도 했는데, 이성태라는 사람이 김단야를 밀정이라고 무고했단다. 김단야는 아무도 모르게 끌려갔고, 세죽은 김단야가 죽은 지 몇 달이 지나고 나서야 그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어.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어. 신고를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가족에게도 벌이 내려졌어. 그래서 세죽은 갓난 아기를 데리고 카자흐스탄으로 유형을 가게 되었단다. 추운 겨울 긴 유형 길을 비탈리는 견디지 못하고 결국 병에 걸리 운명을 달리했단다. 홀로 카자흐스탄에 도착한 세죽은 외롭고 무서운 유형 생활을 시작했어.

정숙과 창익은 남경에 있다가, 일본군의 남경 점령 전에 빠져 나와 무한으로 도망갔고, 다시 일본군에 쫓겨 연안에 도착했어. 당시 연안은 중국 소비에트의 수도이자 본거지였어. 그리고 많은 조선인들도 항일 투쟁을 하고 있었지. 정숙은 항일군정대학에 입학하여 공부를 하였고, 그곳에서 모택동, 주은래 등 중국공산당의 핵심 인물들과 인연을 만들었단다. 또 항일투쟁을 하는 조선인들도 많이 만났는데, 김산으로 더 유명한 장지락을 만나기도 했어. 연안에서 세 계절이 지나고 정숙과 창익은 실재 전투가 일어나고 있는 태항산으로 이동하였단다. 1939 7 10일이었지.

여기까지가 세 여자 1권에 대한 이야기였단다. 아빠가 이야기를 시작하면서 이야기한 것처럼 세 여자가 오늘날 태어났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계속 들었어. 아빠는 소설을 읽을 때 감정이입을 하면서 책을 읽고는 하는데 세 여자 중에 특히 세죽에게 자꾸 감정이입이 되더구나. 그녀의 삶이 너무 안타까웠어. 순간순간 최선의 선택을 하였지만, 세상은 그녀의 삶을 행복하게 하지 않았어. 멀고 먼 유형길을 떠나 낯선 곳에서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이 또한 다 지나간다고 했는데

다시 행복한 날은 올 수 있을까.


(61)
정숙이 반격에 나섰고 목소리에 날이 서 있었다.
“소설이란 말이죠. 인물의 심리묘사만 제대로 해도 사회적 의미를 가지는 거예요. 심리가 사회를 반영하니까. 그 안에 리얼리즘도 있고 인민성도 있어요. 소설에 그렇게 교조적인 잣대를 들이대면 톨스토이도 설 자리가 없어요. 레닌은 톨스토이를 러시아혁명의 거울이라 했지만 플레하노프는 그저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 귀족 작가 정도로 취급했지요. 그래서 플레하노프는 레닌이 될 수 없는 거예요. 융통성 없는 원칙주의는 종국에는 분파주의밖에 못 되는 거지요. 단순한 주의주장으로 달려가버리면 소설이 아니라 팸플릿이 되는 거예요. 카라마조프의 둘째 아들 이반이 그런 말을 했잖아요. 우직한 건 단순하고 현명한 것은 모호하다고. 그리고 진실은 복잡한 데 숨어 있는 거라고.”

(337)
언제부터였을까, 그녀의 인생이 깨진 거울처럼 돼버린 것이. 딸을 두고 상해로 갈 때였을까, 조선을 떠나 블라디보스토크로 밀항할 때였을까, 아니 영생학교에서 퇴학당할 때부터였을까. 거울이 한 번 깨지고 나면 거울에 비치는 모든 것은 갈라지고 어긋날 수밖에 없다. 단야도 마찬가지였다. 이 풍운아에겐 아내도 가정도 바람이고 구름이다. 줄잡아 열 군데 학교를 전전하던 다혈질의 학생이 고향 집 아내에게 무슨 정이 있었겠으며 명자와는 결국 아내냐 애인이냐의 딜레마를 벗어나지 못했고, 이제는 친구의 아내를 맞이했으니 운명이 그에게 행복한 남편이 될 기회를 허락하지 않았다. 세죽은 단야에게 미안했다. 그리고 단야처럼 유쾌하고 낙관적인 마음을 가지려 노력하기로 했다. 그런 결심은 효과가 있었다. 마음을 가볍게 띄워 올리자 자주 웃음이 터졌다.

(394-395)
“조선에 있을 때는 사회가 미성숙하고 여건이 열악하다 보니 최선의 인간이라는 공산주의자들조차 쓸데없는 파벌투쟁에 힘을 낭비하고 있구나 했어요. 연안은 물론 많이 달랐지만 결국 인간의 한계 아닌가 싶어요. 당이 전투력을 유지하려면 때로 숙당작업이 불가피하겠지요. 한데 온갖 개인감정과 파벌적 음모가 끼어들면서 활동가들이 개죽음한단 말이지요. 그걸 피할 수 없는 게 인간이라면 인간성이란 원칙적으로 진화가 불가능한 걸까요? 혁명 과정의 문제이고 혁명이 완료되면 달라질까, 하는 생각도 해보지만 소련을 보면 꼭 그런 것 같지도 않아요.”

(395)
창익은 읽은 책을 접어 탁자 위에 놓고 침상으로 왔다.
“혁명이 완료되면 달라질 거다, 라는 생각이 바로 이상주의라는 것 아니겠소. 나는 그런 이상주의는 스무 살도 되기 전에 버렸소. 정치란 양의 얼굴을 한 늑대요. 어떤 정치에도 최선은 없소. 진보는 상대적인 것이고 더 나은 쪽을 택한다는 것뿐이오. 마르크시즘이 봉건제보다 낫고 자본주의보다 우월하니까. 끼니도 해결 못하는 중국 인민들에게 아편을 강제로 떠먹인 것이 자본주의요, 그 자본의 나갈 길을 개척하는 게 제국주의 총칼 아니오? 부르주아 정치라는 게 뭐요? 자본가들과 지주들을 보호하는 시스템이요. 장개석이 지금 하는 짓이 그것 아니오? 지주 자본가들이 장개석군대를 먹여 살리고 있잖소? 장개석 일파는 중국이 일본 식민지가 되더라도 공산정부의 토지개혁보다는 낫다고 생각하는 자들이오. 장개석은 끊임없이 일본하고 뒷거래하고 있소. 아마 서안사변 없었으면 일본에 황하 이북을 내줬을 거요. 중국을 반토막 내서 그 반쪽이라도 챙기는 게 낫다는 심보요. 그런 장개석에 비해 모택동은 단연 우월하오. 정치에 최선은 없소. 차선을 선택하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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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4-21 00: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4-21 00: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8-04-21 11:0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권김현영 님 강연을 통해서 ‘허정숙’이라는 분을 처음 알았어요. 권김현영 님이 사회주의 페미니스트인 허정숙에 주목해야 한다고 말씀하셨거든요. 허정숙의 삶과 활동을 중점적으로 다룬 책이 있는지 찾고 있는 중입니다. <세 여자> 이외에는 없는 것 같습니다.

bookholic 2018-04-21 22:10   좋아요 0 | URL
아무래도 허정숙이 광복 이후 북한에서 활동을 하다 보니 더욱 그런 것 같습니다. 남북 관계가 더욱 좋아지면 허정숙과 같은 북한에서 활동한 이들에 대한 저술도 많아지지 않을까 싶습니다. 즐거운 휴일 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