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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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나는 그가 좋았다.
SF, 판타지를 좋아한 대한민국의 음악 청년.
그의 집요한 광기와 좌충우돌의 불화,
어떨 땐 해학적이기까지 한 허세와 그 뒷면의 대책 없는 섬세함까지.
그는 대한민국의 1980년대가
분만한 가장 모순적인 열정을 지닌 청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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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해철.
아빠 세대면 신해철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고, 신해철을 싫어하는 사람도 찾기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해.
신해철은 음악과 말을 통해서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었고, 아빠 또한 그의 음악에 열광을
했고, 그의 말에 공감을 하고 감동을 받았고, 그의 생각과
영혼을 존경했단다.
지금은 가고 없지만, 지금도 그는 아빠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에 적지 않은 영향을 주고 있지. 많은
사람들이 그렇지만, 그를 처음 알게 된 것은 대학가요제에 참가했던 무한궤도라는 그룹을 통해서야. 그들의 시작은 너무나 강렬했으며, 그 강렬함의 여운은 아직도 진동하고
있는 듯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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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평론가로 유명한 강헌이 신해철에
대한 책을 출간한다는 소식에 아빠는 출간일을 손꼽아 기다렸단다. 이 책을 쓰신 강헌이라는 분도 아빠가
좋아하는 사람이거든… 강헌이 음악평론가로써 신해철을 알게 되었고, 그
이후에는 끈끈하고 찐~~한 인연이 이어졌다고 하는구나.
신해철이 허망하게 세상을 등지기 얼마
전에도 그들은 신해철 노래로 이루어진 뮤지컬에 대해 계획하기도 했었대. 강헌은 신해철이 죽고, 그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일필휘지로 긴 추모사를 쓴 것이 바로
이 책이라고 해. 당시 신해철의 유고집이 나오기로 되어 있어서, 이
책은 3년 뒤로 출간을 미루었다가 올 봄에 출간한 것이라고 하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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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헌은 1996년에 영화 <정글스토리>를
제작하고 있었대. 아, 정글스토리… 이 영화, 아빠도 기억하고 있어.
윤도현이 신인 시절에 주연을 했던 그 영화… 록커가 주인공이었던 그 영화… 그 영화의 제작을 강헌이 했구나… 강헌은 음악감독을 구하지 못하고
있을 때 신해철에게 부탁을 했는데 한치 망설임 없이 흔쾌히 오케이를 했다는구나. 1996년이면 이미
신해철은 일류스타였는데, 돈도 얼마 주지 못하는 음악감독을 흔쾌히 하겠다고 했대. 비록 영화는 흥행하지 못했지만, 신해철은 이 영화를 통해 영화음악감독이라는
새로운 도전을 했던 것이야. 이후에도 두어 편의 영화의 음악감독을 했었다고 하는구나. 아빠도 처음 알게 될 사실이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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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강헌은 또 한번 신해철에게 어려운
부탁을 했대. 그것은 바로 2002년 노무현 대통령 후보의
찬조 연설. 그 전까지 신해철은 정치와 담을 쌓고 음악에만 충실했는데,
이 찬조연설을 함으로써, 논객으로써의 재능도 보여주게 되었단다. 그리고 그가 직접 쓴 찬조연설은 명연설로 오늘날까지 많은 사람들에게 회자되고 있어. 이 책에도 그의 찬조연설의 일부를 실어서 아빠도 다시 한번 읽어보았는데, 지금
읽어봐도 감동이구나. 신해철은 찬조연설로 끝난 것이 아니라, 노무현
대통령과 함께 거리 유세까지 함께 했다는구나. 한번 책임을 지면 끝까지 책임을 지는 의리파 신해철. 멋지구나.
그런 노무현 대통령과 인연은 노무현
대통령의 서거 이후까지 이어져서 추모앨범 <노무현을 위한 레퀘엠>
프로듀싱을 강헌과 함께 했단다. 이 앨범은 아빠도 가지고 있어 다시 한번 꺼내봤어.그 앨범에는 신해철의 사진도 들어 있었는데, 그 사진을 보고 있노라니
뭉클해지는구나.
1.
이제 본격적으로 신해철, 그의 음악과 삶과 영혼 이야기를 해보자꾸나. 앞서 이야기했던 1988년, 이보다 화려할 수 없는 데뷔. 몇 해 전 드라마 <응답하라
1988>에서도 당시 장면을 보여 주었는데, 드라마의 등장인물이 무한궤도를 보고 놀랜
반응이 바로 당시 무한궤도를 처음 본 사람들의 반응이었을 거야. 다시 그 화면 영상을 찾아보니, 풋풋한 신해철의 모습에 또한번 옛추억 속에 빠져들게 되는구나.
사실 그보다 먼저 1988년 강변가요제에도 출전했었다고 하는구나. 그런데 본선에 진출하지는
못했대. 어렸을 때부터 음악을 하고 싶었지만, 부모님의 반대로
하지 못해서, ‘그대에게’라는 곡도 음악을 반대하는 아버지
몰래, 문방구에서 파는 멜로디언을 사서 이불 속에서 하룻밤에 만들었다고 하더구나. 그렇게 최고의 히트곡이 만들어진 ‘그대에게’는 정말 오랫동안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고 있어. 요즘도 응원가
일순위로 뽑고 있고, 각종 경연대회에서 불리고 있는 ‘그대에게’… 이제는 세대를 뛰어넘어 너희들까지 좋아하게 되었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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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룹사운드가 대학가요제에서 대상을 타는
것이 드문 일이었는데, 노래가 워낙 좋다 보니 대상을 탔을 테고, 당시
심사위원장이었던 사람이 그룹사운드 출신 영원한 가왕 조용필이었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이야기도 있더구나. 그렇게
조용필과 신해철이 인연을 맺고 나서 이후에도 그 인연을 이어갔대.
대학가요제에서 대상을 탔으니, 이제 본격적인 활동을 해야 했으나, 아마추어 그룹의 데뷔 앨범을
만들어주려는 이들이 많이 없었대. 기획사들이 원하는 것은 돈 잘 버는 솔로 가수였던 거야. 하지만, 신해철이 원했던 것은 그룹이었어. 그때 조용필이 도움을 주었단다. 조용필이 이끌었던 밴드 위대한 탄생의
멤버가 만든 신생기획사에서 무한궤도의 1집 앨범을 만들 수 있도록 도와준 거야. 그 신생기획사가 1990년대 우리나라 음반 시장을 이끌었던 대영AV였단다.
대학가요제에서 신해철은 서울대 그룹
‘실험실’을 알게 되었는데,
이때 알게 된 정석원이 무한궤도에 합류하게 된단다. (정석원은 나중에 아빠가 또 엄청 좋아하게
되는 01OB를 만들게 된단다.)아, 역사가 만들어지던 시기였구나.
그리고 무한궤도 1집…. 이 앨범에도 아빠가 정말 좋아했던 노래가 있단다. 우리 앞의 생이 끝나갈 때… 많은 기획사들의 우려를 날려버리듯 무한궤도 1집은 크게 성공을 했어. 그런데,
왜 ‘무한궤도’리는 이름을 지었을까? 그 그룹의 심오하고 멋있다는 생각은 했는데, 그 이유를 생각해 본적은
없었어. 이 책의 지은이 강헌도 직접 이유를 듣지 못했지만, 아래와
같이 추측을 했는데, 공감이 가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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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무한궤도’, 이 특이한 밴드 이름은
스무 살 음악청년의 터질 듯한 가슴에 담은 야망과 의지를 표현하기에 더없이 적절하다. 무한궤도는 산업혁명기
영국인 리처드 에지워스의 발명품으로 탱크나 불도저를 움직이는 캐터필러를 말한다. 즉 앞바퀴와 뒷바퀴를
연속적인 궤도를 연결하는 장치를 지칭한다. 무한궤도를 음악적 첫걸음을 대표하는 이름으로 채택한 이유에
관해 그가 특별히 언급한 적은 없다. 하지만 이 네이밍에서 표명하려고 한 것은 아마도 이런 의미가 아니었을까? 우리가 만드는 밴드는 앞바퀴와 뒷바퀴, 그리고 가운데의 작은 바퀴들까지
모두 일체가 되어 한 방향으로 굴러가는 하모니를 일구어낼 것이며, 땅이 울퉁불퉁하거나 도저히 전진할
수 없는 고랑이 패어 있다고 해도 불굴의 의지로 앞으로 나아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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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무한궤도 1집에 성공을 했지만, 1집으로 팀은 해체되었단다. 아무래도 신해철 1명의 대한 비중이 너무 컸던 것이 오히려 독이
되었을 수도 있단 생각이 들었어. 아무튼 신해철은 솔로로 데뷔하면서 연이어 히트 앨범을 내면서, 특급 스타 반열에 오르게 돼… 그렇게 솔로로 성공했다면 성공과 돈맛에
계속 솔로를 했겠지만, 신해철의 피는 밴드를 위한 피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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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
신해철에게 밴드는 평생에 걸친 화두이자 천형(天刑)에
가까운 숙명이다. 그는 어린 시절의 음악 친구들과 함께 밴드로 데뷔했으나 한 장의 앨범을 끝으로 솔로로
후퇴했다가, 많은 우려와 저지에도 불구하고 ‘인기 가수’의 길을 반납한 채 다시 밴드 맨의 삶에 도전해 성공을 거두었다. 그것은
지지와 비난의 극단적인 소요를 불러오는 도화선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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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다시 밴드로 돌아왔단다. 그리고 그는 그의 밴드가 아닌, 밴드 구성원 모두의 밴드가 되기
위해 노력했어. 아빠도 넥스트 1집을 사서 정말 열심히 들었던
기억이 나는구나. 본가에 아직 그 CD가 있을 것 같은데, 다음에 가면 한번 찾아봐야겠구나. 신해철의 꿈과 달리 그룹 활동의 한계도 있었어. 밴드 구성의 완벽체인 4명의 멤버로 구성이 되기까지 했지만, 여전히 신해철의 비중이 너무
컸던 것은 어쩔 수 없었어. 넥스트는 4개의 앨범으로 활동을
접는단다. 그 넥스트에 평가를 강헌은 이렇게 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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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3)
넥스트는 아직 대중적인 기반을 획득하지 못한 한국의 젊은
록 밴드들에게 하나의 이상이자 목표였고, 나아가 극복의 대상이었다. 적어도
넥스트가 이들에게 밴드도 성공할 수 있다는 희망을 준 것은 분명하다. 사실 1970년대의 신중현과 엽전들, 산울림, 1980년대의 들국화를 제외하면 이 땅에서 록 밴드는 저주받은 존재나 다름없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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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넥스트 활동을 접고 해외 유학을
떠나게 돼. 그리고 외국에서도 계속 실험적인 음악을 하고, 음악에
대한 사랑과 열정을 멈추지 않아. 정말 음악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걸 새삼 알게 되었어. 유학 생활을 마치고 돌아온 신해철은 솔로 활동, 넥스트 활동을 다시
재개하면서 삶을 마감할 때까지 음악에 대한 열정을 버리지 않았단다. 삶을 마감하던 그 해에도 컴백 앨범을
발표했는데, A.D.D.A라는 곡을 듣고 역시 신해철이라는 생각을 했었단다. 그가 그렇게 쉽게 가버릴 줄…
정말 슬프더구나.
3.
…
신해철.
그는 가수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의 부조리한 시스템에 대해서도 논리 정연한 말로 일침을 가할 수 있는 존경스러운 논객이기도 했어. 신해철은 87학번이야. 우리나라 1987년에 대학을 다니고 있었다면 국가와 사회문제에 눈을 뜰 수 밖에 없었을 거라는 생각이 드는구나. 그래서 그가 박노해 시인의 헌정 앨범에도 참여하는 영혼을 가지고 있지 않았나 싶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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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27)
신해철은 짧다면 짧은 생애 내내 롤러코스터 같은 스펙트럼을
보여주었지만, 스스로 확고한 원칙을 가진 사람이다. 그 원칙은
그가 음악만큼이나 열정을 가지고 추구한 인문학적 사유에서 비롯한다. 신해철은 ‘쫌 놀아본 오빠의 미심쩍은 상담소’같은 위악의 페르소나를 유쾌하게
연출하기도 하지만, 그럴 때에도 언제나 본능적으로 약자의 입장에서 사태의 본질을 파악하는 더듬이를 지녔다. 나는 그와 세 개의 트리뷰트(tribute, 헌정) 작업을 같이했다. 2001년 들국화 트리뷰트 앨범과 공연, 2004년 박노해의 <노동의 새벽> 트리뷰트 앨범과 공연, 그리고 마지막으로 2012년 노무현 추모 앨범과 공연. 그중에서 사회적 반향이 상대적으로
가장 약했지만, 내가 영원히 잊을 수 없는 작업은 한국 문화사에 노동자 문학의 회오리바람을 일으킨 박노해
시인이 1984년 출간한 시집 <노동의 새벽> 20주년 기념 헌정 음반 프로젝트다. 1980년대에 청년기를
보낸 세대이자 문학도였던 나와 내 동년배 사람들에게 <노동의 새벽>은 시인이자 혁명가를 자처한 박노해에 대한 입장 차이와 관계없이 충격적인 의미를 담은 예술적 사건이다. 나는 이 시집이 (출간되고 20년을
지나는 동안) 크고 작은 여러 이유로 사람들에게 잊히는 것이 너무나 안타까웠다. 더구나 <노동의 새벽>은
단일 시집으로는 가장 많은 작품이 노래로 만들어진 시집이기도 하다. 그래서 2004년 봄, 사상 최초로 시집 헌정 음반을 기획했다. 하지만 제작비도 충분치 않았고, 무엇보다도 프로듀서가 없었다. 나는 2000년대라는 새로운 흐름에서 그저 ‘운동권 가요’의 동어반복에 그치지 않고 새로운 음악적 감각을 새로운
관점에서 부여하는 음반을 만들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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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논객으로써 각종 토론 프로그램에
나와서 자신이 뜻하는 바를 주장했고 그것을 음악으로 표현하기도 했어. 동성동본의 결혼이 지금은 합법화되었지만, 그것이 불법이던 시절에도 그것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 강력히 주장하였고, <힘겨워하는
연인들을 위하여>라는 노래로도 만들었단다. 그렇게 신해철은
노래하는 지식인으로 우리 사회의 중요한 일원이었어. 청소년들에게는 삶의 방향을 이야기해주는 멘토 역할도
해주고…
아무리 몇 번씩 생각을 해보아도 그의
부재는 우리 사회의 큰 손해구나. 촛불시위를 한창이었을 때 그가 살아 있었다면 함께 했을 것이고, 정권이 바뀌어 새로운 대한민국이 되어가는 모습을 함께 보았으면 좋았을 텐데…
그의 죽음은 너무나 안타깝고 슬프구나. 부디, 저
하늘 위에서 노무현 대통령님과 함께 만나 바뀐 대한민국을 보고 흐뭇하게 웃었으면 좋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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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편지를 쓰면서도 신해철의 노래를
들으면서 쓰고 있어. 가사를 가만히 들어보니, 가사 하나하나에도
깊은 뜻들이 담긴 것들이 많구나..
아….
신.해.철.
(18) 신해철에 관해서는 예술가로서의 삶만큼이나 주목해야 할 또 하나의 지점이 한국 사회 전반에 걸쳐 논리와 행동으로 참여한 논객, 혹은 행동주의자로서의 면모다. 정치, 사회적 이슈에 대한 개입은 저 멀리 식민지 시대 이후로 근대 한국에서 대중예술인이 결코 해서는 안 되는, 절대적인 금기였다. 이들은 탈정치화의 영역에서 대중을 웃기고 울려 위안하는 대가로 인기와 부를 누리는 예외적 시민권자였다.
(85) 신해철에게 밴드는 평생에 걸친 화두이자 천형(天刑)에 가까운 숙명이다. 그는 어린 시절의 음악 친구들과 함께 밴드로 데뷔했으나 한 장의 앨범을 끝으로 솔로로 후퇴했다가, 많은 우려와 저지에도 불구하고 ‘인기 가수’의 길을 반납한 채 다시 밴드 맨의 삶에 도전해 성공을 거두었다. 그것은 지지와 비난의 극단적인 소요를 불러오는 도화선이기도 했다.
(120) 신해철은 사람을 위해 법이 있는 것이 아니라 법을 위해 사람이 있는 부조리를 직설적으로 갈파하는 대신 그동안 수없이 불러온 사랑 노래의 문법을 계승해 표현함으로써 이 곡의 수용 범위를 확장시킨다. 그러나 신해철은 당사자가 당하는 고통의 선연함을 놓치지 않았으며, 바로 이 선연함의 무늬가 <힘겨워하는 연인들을 위하여>를 매너리즘에 빠진 천편일률적 여타 발라드와 구별시킨다.
(123) 넥스트는 아직 대중적인 기반을 획득하지 못한 한국의 젊은 록 밴드들에게 하나의 이상이자 목표였고, 나아가 극복의 대상이었다. 적어도 넥스트가 이들에게 밴드도 성공할 수 있다는 희망을 준 것은 분명하다. 사실 1970년대의 신중현과 엽전들, 산울림, 1980년대의 들국화를 제외하면 이 땅에서 록 밴드는 저주받은 존재나 다름없지 않은가?
(178) 계간지 <상상>에 실린 인터뷰에서 신해철은 ‘연예인’이라는 용어에 대한 불쾌감을 이렇게 밝혔다. "어차피 너희 연예인들은 인기가 없으며 죽는 것 아니냐. 저는 연예인이라는 말 자체를 소름 끼치도록 싫어해요. 인기를 먹고살던 시대도 있었겠죠. 그리고 그런 사람도 있겠지만. 그러면 상업적으로 음악을 판매할 수 있었던 시기 이전에는 예술이 없었는가 생각을 해보면, 그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거든요. 원시인이 알타미라 동굴 벽화를 팔려고 그렸다고 생각할 수는 없는 거죠. 그러니까 인기 이전에 음악을 하자는 거죠."
(180-1) 서태지와 비교할 때 신해철의 애티튜드는 더 확연히 구별된다. 서태지가 철저한 은둔주의 노선으로 일관했다면(바로 이 때문에 이지아 스캔들의 역풍을 심하게 맞았지만), 신해철은 야동을 히히덕거리며 보는 것을 숨기지 않는 그러나 똑똑하고 명석한 머리로 공부도 잘하는 왕수다쟁이 이웃집 형 혹은 오빠 같은 애티튜드를 견지했다. 그에겐 ‘마왕’이라는, 이제는 트레이드 마크가 되어버린 별칭처럼 ‘교주’스러운 카리스마도 있었지만, 동시에 겸손함과 솔직함도 지녔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장황하면서도 논리정연하고 과격한 것 같지만 근거가 선명한 논지를 비속어를 동반하고 쉽고 재미있는 구어체로 풀어내는 수사학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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