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자호란 2 - 역사평설 병자호란 2
한명기 지음 / 푸른역사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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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 그럼 병자호란 2권을 이야기해줄게. 2권에서도 해 줄 이야기가 많으니까 거두절미하고 바로 책 이야기를 해줄게. 1권은 인조반정부터 정묘호란을 거쳐, 인조가 겁도 없이 다시 후금과 절교한다는 내용까지 해주었잖아. 2권은 더욱 아픈 역사가 이어진단다.

패배의 역사. 그 패배의 역사도 우리의 역사이니 한번 살펴보자꾸나. 후금의 홍타이지는 몽골족마저 모두 차지하고 영역을 더욱 넓혀갔어. 사라졌던 칭기즈칸의 옥새가 발견되었는데, 이것도 홍타이지가 받았어. 그리고 명나라의 한족들 중에서도 많은 이들이 귀순을 했단다. 그만큼 홍타이지는 포용정책을 썼어. 이제 동아시아의 대세는 후금이 되어가고 있었어.

후금의 만주족, 몽고족, 명나라의 한족을만몽한이라고 불렀는데, 몽타이지는 만몽한의 신료들로부터 황제가 되라고 강권 받았단다. 처음에는 몇 번을 사양했지만, 결국 받아들였어. 나라이름도 우리가 청나라로 부르는대청이라 하고, 연호는 숭덕이라고 했어. 이제 홍타이지는 거대한 나라의 황제가 된 거야. 이제 아빠도 후금이라고 하지 않고 청나라라고 이야기할게.

이제 청나라의 신료가 된 몽골족의 사신들이 조선에 왔는데, 조선은 몽골족의 사신을 야만족 다루듯 푸대접했단다. 이 일은 청나라의 분노를 사게 만들었단다. 그뿐만이 아니야. 조선의 사신이 청나라에 갔다가 황제에게 배례를 하라는 명령에 끝까지 거절했다가 두들겨 맞는 일도 있었어. 나덕헌, 이확이라는 신하들인데, 그 기개가 대단하다고 해야 하나, 정세파악을 못한다고 해야 하나. 오히려 홍타이지가 뒤늦게 알고 때리는 것을 말려서 멈추었다고 하는구나. 아빠가 생각하기에 홍타이지는 이미 조선은 자기 것이라고 여기는 것 같았어. 지금은 그들 하고 싶은 대로 하라고 나두는 것 같았지. 나덕헌과 이확은 배례를 안 했다고 얻어맞고 다시 조선으로 돌아왔어. 그런데 그때 청나라의 국서를 들고 귀국을 했는데, 그 국서에는 청나라의 불만이 가득 남겨있었어. 그리고 조선을 공격하겠다는 최후통첩도 써 있었지. 이걸 가지고 갔다가는 왕에게 혼날 것 같아서 오는 길에 버렸는데, 그것마저도 인조는 벌을 내려 그들은 귀향살이를 했다는구나.

최후통첩을 받은 인조. 여전이 청나라의 사정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방어할 생각도 안하고. 그저 강화도로 도망갈 생각만 하고 있었단다. 정말 답답하기 그지없구나. 싸워서 이길 수 없다면 일단 백성들이라도 살리기 위해 거짓이라도 머리를 굽혀야 하지 않았을까 싶구나. 아무런 대책도 없이 백성들 버리고 혼자 도망갈 생각만 하다니

정온, 최명길 등이 화친 맺지 않고 싸울 거면 강화도가 아닌, 압록강에 군대를 총집결 해서 싸우자고 했어. 거기서 싸워야 져도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다고 했어. 그것보다 더 좋은 것은 청나라의 속내를 다시 확인하자고 했어. 하지만 인조는 그들의 뜻을 받아들이지 않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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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

정온은 청과 결전을 벌이자고 강조하면서 인조의아킬레스건을 건드렸다. 진정으로오랑캐와 싸워 나라를 지키겠다는 의지가 있다면 반정공신들이 거느리고 있던 정예병들을 원수에게 배속시키라고 요구했다. 정온은 온 나라의 정예병과 무사가 전부 반정공신들 휘하에 배속되어, 평소에는 그들의 농장을 관리하다가 유사시에는 호위를 핑계로 전장으로 가는 것을 피하고 편안함을 취하려 한다고 비난했다. 정묘호란 당시에도 멀쩡한 정예병들이 적과의 싸움은 기피한 채 강화도에 머물면서내란이 있을까 걱정스럽다는 말만 되뇌었다고 직격탄을 날렸다. 사헌부 관원들도 비슷한 주장을 폈다. 정예병이란 정예병은 모두 반정공신 휘하 군관들에게 소속되어 사병처럼 부려지고 있는 현실을 뜯어 고쳐야 한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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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636 11 25. 홍타이지는 결국 조선과 전쟁을 선언했어. 병자호란의 시작이었지. 만주족, 몽골족, 한족의 군사들을 데리고 조선으로 향했어. 청나라는 철기를 중심으로 한 군대라서 평지에서 싸우는 것이 불리하다고 생각한 조선은 산성에서 수비하는 방법을 선택했어. 그런데 청나라는 그런 산성을 굳이 공격하지 않고 빠른 시간 안에 전쟁을 끝내기 위해 대로를 통해서 서울로 향했단다. 산성을 지키던 조선군들은 이미 지나가버린 청나라의 뒤꽁무니를 쫓는 격이었어.

인조도 청나라의 침입 소식을 듣긴 했는데, 그것마저도 제대로 전달이 되지 않아 한참 후에 들었어. 그가 소식을 들었을 때는 이미 청나라 군대로 코앞까지 닥쳤을 때였지. 그 이야기는 강화도로 도망갈 타이밍을 놓쳤다는 거야. 이미 강화도로 가는 길이 차단되었어. , x됐다는 생각만이 머리가 가득 찼겠지. 강화도에서 수비하려고 그곳에 군비를 갖추었는데, 이제 어디로 가나….

결국 차선으로 결정한 것이 남한산성. 남한산성이 천험의 요새라서 방어하기는 좋지만, 중요한 것은 전혀 준비가 되지 않았다는 거야. 군량과 마초가 턱없이 부족했어. 조선은 청나라가 쳐들어오더라도 따뜻한 봄이 되면 오겠지, 하고 생각하고 있었던 거야. 그리고 강화도에만 전쟁 준비를 하고.,. , 한심하십니다.

남한산성에 오긴 했지만, 이곳에서 오래 견디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어. 김류는 인조에게 몇몇만 몰래 강화도로 가자고 했어. 비겁한 인조는 그러자고 했어. 몰래 산성에 나와서 강화도로 향하다가 빙판길에 몇 번 넘어져서 부상만 입고 다시 남한산성으로 돌아왔단다. 가지가지 하는구나. 이후에도 어떻게 하면 강화도로 내뺄까 하는 생각만 했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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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나라 군사들은 남한산성을 둘러싸고 공성전을 벌였어. 남한산성 안의 조선군은 마냥 구원군만 기다리고 군량만 축내고 있었어. 그것도 얼마 없었어그리고 신하들 간에도 의견이 분분하여 논쟁만 벌였단다. 어떻게든 도망가자는 이들.. 끝까지 싸워보자는 이들지금이라도 화친하자는 이들결정을 하지 못하고 시간만 흘러갔어. 몇몇 소소한 승리를 거두기도 했지만 대세에는 영향을 주지 못했어. 그러다가 기다리던 지원군이 지방 곳곳에서 오지만, 그들도 제대로 된 체계가 없었고 서로 소통이 되지 않아 각개로 왔다가 연이어 지고 말았어.

2.

결국 인조는 화친을 하기로 했어. , 조건을 걸었어. 남한산성에서 자신은 나가지 않겠다. 왕세자를 인질로 줄 수 없다하지만, 청나라는 지난날 조선의 잘못만 늘어놓으며, 화친을 위한 요구 조건을 점점 높여만 갔어. 청나라 입장에서는 아쉬울 것이 없었지.. 그들이 요구하는 것의 기본은 조선의 왕이 산성에서 나와서 항복의례를 하라는 것이었어. 인조는 그것만은 할 수 없다고 했지. 그런 와중에 강화도에서 소식이 날아왔어. 좋은 소식일까? 나쁜 소식일까?

..

당시 강화도에는 먼저 피신해 있던 왕의 가족과 신하들의 가족들이 있었어. 강화도의 군대는 김경징이라는 사람이 지키고 있었는데, 청의 수군을 얕보고, 수비를 제대로 하지 않았어. 그에 비해 청나라는 강화도 함락을 철저히 준비했어. 명에서 귀순한 공유덕, 경중명을 중심으로 수군을 갖추고 있었거든. 제대로 된 방어가 없던 강화도는 쉽게 함락이 되었단다. 강화도의 왕족과 신하들의 가족들은 모두 포로가 되었고, 그들을 데리고 남한산성으로 향했어.

강화도의 패배 소식은 남한산성에 도착했고, 좌절케 했어. 청나라는 다시 왕이 나와서 화친을 하라고 요구했어. 말이 화친이지 나와서 항복하라는 거지. 결국 조선은 청의 요구조건을 모두 들어주고 전쟁의 패배를 인정했어. 인조가 직접 나와서 항복의례를 했단다. 그 유명한 삼전도에서 홍타이지에게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삼궤구고두례를 했어. 그리고 나서 도성인 창경궁으로 돌아왔단다. , 얼마나 비참한 귀환이더냐

3.

명나라와 관계를 끊고 앞으로는 청나라의 연호를 써라.

소현세자와 봉림대군, 그리고 대신들의 자식들을 인질로 데려가겠다.

조선 군대는 원조를 해야 한다.

특히, 곧바로 전함 50대와 수군을 지원해라.

주기적으로 대신들을 파견하여 예물을 바쳐라.

외교 의례는 명나라와 같은 수준으로 해라.

많은 수의 포로를 데리고 가겠다.

그런데 그 포로들이 도망 오면 다시 청나라로 보내라.

등등… 청나라의 요구조건은 엄청 많았고, 그 요구조건들 하나하나가 조선의 가슴을 베는 것 같았어. 그리고 청나라는 화친을 방해했던 신하들을 청으로 보내라고 했고, 자진한 홍익한, 윤집, 오달제는 청나라게 끌려가서 그곳에서 죽고 말았단다. 청은 조선 수군을 동원해서 오랜 목엣가시와 같은 가도를 정벌했단다.

이제 인조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청나라의 비위를 맞추며 왕권을 유지하는 것이었어. 예물과 군량미를 꾸준히 바치면서그로 인해 조선 백성들은 굶어 죽는지 마는지 신경도 안 쓰고소현세자. 일반적으로 인조와 소현세자는 사이가 좋이 않다고 알려져 있지만, 원래는 사이가 좋았다고 하는구나. 아무래도 아버지와 아들 사이인데 그랬겠지. 소현세자가 청나라로 끌려갈 때, 청의 황세자 도르곤에게 잘 봐달라고 간절히 부탁도 했었어. 첫 번째 귀국할 때만 해도 소현세자를 극진히 대했어.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청나라는 조선이 전쟁 패배에 대한 요구조건을 안 들어주자, 인조를 폐위하겠다고 경고를 하게 되었어. 여러 차례자신을 폐위시키면 누구를 왕에 세울 것인가? 자신의 아들 소현세자를 왕위에 세울 것으로 인조는 생각했어. 이런 생각을 하다 보니 점점 소현세자를 미워하게 되었어. 소현세자는 장인어른의 장례식 때문에 두 번째 귀국을 하게 되었는데, 이때부터 인조는 냉대하였고, 세자빈에게 아버지의 장례식에도 못 가게 하는 등 꼰대를 부리기 시 작했어. 나중에 소현세자가 완전이 귀국을 한 다음, 소현세자는 귀국하자마자 병에 걸렸고, 병에 걸린 지 삼일 만에 죽고 말았단다. 검시 결과는 소현세자가 독살당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었지만, 아무도 누구 짓인지 밝히려 하지 않았단다. 그저 불쌍한 죽음 하나 추가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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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자호란 이후 피로인은 커다란 사회문제였어. 피로인은 청군에 잡힌 민간인 포로를 이야기하는데 그 수가 약 50만이나 된대. 그들의 대우는 처참했고, 도망이라도 가면 다시 끌려가야 했어. 그리고 다시는 도망가지 못하게 뒤꿈치를 자르는 형벌을 주었다고 하는구나. 부잣집 피로인들은 돈을 주고 데리고 오기도 했대. 그것을 속환이라고 해.

허박이라는 하는 신하는 나라차원에서 속환할 것을 요청했으나 이뤄지지 않았어. 속환하여 나라로 돌아온 이들에 대한 대우도 좋지는 않았어. 끌려간 것도 자신들 뜻이 아니었는데, 그들, 특히 여자인 경우는 속환녀라는 딱지를 붙이고 버림을 받았어. 한번뿐인 인생인데 그들은 시대를 잘못 만났고, 왕을 잘못 만난 것뿐이었는데 말이야.

일본도 조선이 청나라에게 패배한 소식을 전해 듣고, 온갖 간섭이 늘어나고 요구사항도 많아졌어. 힘없는 조선이 할 수 있는 게 뭐 있겠니. 동네북이 되어버렸어.

병자호란 이후, 조선의 많은 신하들은 조금만 버티자는 생각을 했대. 몽골족의 사례를 생각하면서, 오랑캐 국가는 길어야 100년 밖에 못 간다면서 말이야. 하지만 청나라는 포용정책을 통해 오랫동안 지속했단다.  아빠가 오래 전에 청나라 전성기 역사를 다룬 <강희대제>, <옹정황제>, <건륭황제>라는 역사 소설을 읽은 적이 있어그 소설을 통해 청나라가 그저 야만족이 세운 나라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단다. 그들 나름대로 통치철학이 있었고, 유능한 지도자가 있다면 오래 번창할 수 있다고 생각했었어.

여기까지가 병자호란에 관한 이야기란다. 패배의 역사라고 읽는 내내 가슴 아팠단다. 무능한 왕의 표본을 볼 수 있었어. 나라를 이끌어가는 사람이 얼마나 중요한지 새삼 깨달았단다. 그리고 주변 강국에 대해 어떻게 대처하는 것도 무척 중요하다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닫게 해주는 것 같구나.

중국과 미국 사이에 끼여 있는 오늘날의 우리나라균형 잡힌 외교가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한 시기인 듯 싶구나. 거기에 북한이라는 존재까지어쩌면 인조시대 때보다 더 어려운 문제를 안고 있는 것 같아. 그런데 요즘 문재인 대통령이 미국, 북한, 중국을 다루시는 것을 보면 뛰어난 협상가이자 중재자라는 생각이 들어. 일 년 전 타임지에서 문재인 대통령을 표지모델로 삼으면서 뽑았던 Negotiator라는 제목이 얼마나 딱 들어맞는지 모르겠구나. 그의 이런 노력들이 가까운 미래에 좀더 좋은 열매로 맺어지질 바랄 뿐이란다. 오늘은 그럼 이만


(60)
정온은 청과 결전을 벌이자고 강조하면서 인조의 ‘아킬레스건’을 건드렸다. 진정으로 ‘오랑캐’와 싸워 나라를 지키겠다는 의지가 있다면 반정공신들이 거느리고 있던 정예병들을 원수에게 배속시키라고 요구했다. 정온은 온 나라의 정예병과 무사가 전부 반정공신들 휘하에 배속되어, 평소에는 그들의 농장을 관리하다가 유사시에는 호위를 핑계로 전장으로 가는 것을 피하고 편안함을 취하려 한다고 비난했다. 정묘호란 당시에도 멀쩡한 정예병들이 적과의 싸움은 기피한 채 강화도에 머물면서 ‘내란이 있을까 걱정스럽다’는 말만 되뇌었다고 직격탄을 날렸다. 사헌부 관원들도 비슷한 주장을 폈다. 정예병이란 정예병은 모두 반정공신 휘하 군관들에게 소속되어 사병처럼 부려지고 있는 현실을 뜯어 고쳐야 한다고 주장했다.

(179)
대국 명조차 자신에게 벌벌 떨고, 막강한 차하르 몽골까지도 항복했는데 소국 조선은 끝까지 자신을 인정하려 들지 않았다. 그것은 홍타이지의 자존심을 몹시 상하게 하는 것이었다. 조선의 뻣뻣한 태도는 공유덕을 비롯한 한족 출신 귀순자들에게도 나쁜 영향을 끼칠 수 있었다. ‘명의 번국인 조선도 끝까지 고개 숙이기를 거부하여 명에 대한 의리를 배반하지 않았는데, 명의 신료들이 먼저 오랑캐에게 무릎을 꿇었다’는 비아냥이 나올 수 있었다. 그럴 경우, 한족 출신 귀순자들이 동요할 가능성이 있었다. ‘남조에 본보기를 보이려 한다’는 대목에서도 그러나듯이 홍타이지는 인조를 불러내 자신 앞에 무릎을 꿇려야 할 ‘절박함’을 갖고 있었다.

(181)
인조는 반정이라는 비정상적인 정변을 통해 추대된 임금이었다. 인조를 옹립했던 시하들은 분명 광해군보다는 훨씬 나은 임금이 될 것이라는 기대를 품고 그를 선택했다. 하지만 인조가 산성에서 나가 홍타이지에게 무릎을 꿇을 경우, 그를 추대한 신하들은 인조의 처참한 몰골 앞에서 어떤 생각을 할까? 쫓겨난 광해군에게 문제가 많았던 것은 분명하지만, 그는 그래도 ‘오랑캐’에게 무릎을 꿇어야 하는 지경까지는 이르지 않았다. ‘명분을 목숨보다 중하게 여기는 신하들이 나를 과연 임금으로 계속 떠받들어 줄 것인가?’ 인조로서는 생각하기조차 끔찍한 ‘시나리오’였다. 인조가 홍타이지에게 출성만은 면하게 해달라고 간청했던 데에는 이 같은 ‘절박함’이 자리 잡고 있었다.

(281)
인조는 ‘반정’을 통해 추대된 임금이라 훈신들의 입김에 밀려 왕권이 위축될 수밖에 없는 한계를 애초부터 안고 있었다. 실제로 1629년 7월, 인조는 "조정 신하들에게 압제를 받고 있다"며 자조했을 정도였다. 그러다가 병자호란 이후 확 달라졌다. 왕좌를 유지하기 위해 친청파로 변신했다. 하지만 ‘변신’ 이후에도 청이 입조론과 왕위교체론을 흘리며 압박해오자 권력을 지키기 위해 폭주 기관차처럼 내달렸다. 소현세자의 급사, 왕세자의 교체, 원손 지위의 박탈, 강빈의 사사 등이 그 과정에서 일어났다. 그것은 인조와 소현세자를 이간시켜 ‘충성 경쟁’을 부추겼던 청의 획책이 빚어낸 비극이었다. 나아가 병자호란이, 역설적이지만, 인조가 ‘추대된 임금’이라는 정치적 굴레를 벗어던질 수 있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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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18-04-07 11:4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역사는 희극과 비극으로 반복된다고 하였는데
우리나라에서는 항상 희극보다는 비극 쪽이
우세하다다는 느낌이 드네요.

무능한 군주 / 정치지도자를 선출한 이들이 받아야
하는 형극의 세월이었던 걸까요.

bookholic 2018-04-07 21:13   좋아요 1 | URL
앞으로는 다시는 무능한 리더를 국민들의 손으로 뽑는 비극은 일어나질 않기를 기원합니다.
즐거운 주말 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