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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절하게 참 철없이 - 2009 제11회 백석문학상 수상작 ㅣ 창비시선 283
안도현 지음 / 창비 / 2008년 1월
평점 :
스마트폰을 가진 가족들이 하나씩 늘어가고 있다. 지난여름 맨 처음 남동생을 시작으로 여동생과 그 남편에 이어 이제는 딸아이와 아들까지 모두 스마트폰 일색이다. 남편과 나만 그 세계로부터 고립되어 있는 셈이다. 그런데 이런 상황이 내게는 전자제품 공해에 다름 아니다. 동영상을 찍어와 보라면 봐야하고 새로운 어플리케이션을 다운받으면 그 설명을 들어줘야하고 불면증에 좋다는 어플에서 나는 이상한 소리를 들으며 누워있기도 했다. 최근 딸아이는 엄마가 좋아하는 스머프가 나온다고 내게 양배추 키우는 게임을 시킨다. 내가 스머프를 좋아하는 건 거기 가가멜이 있기 때문이다. 스머프를 잡기위해 갖은 수를 다 쓰지만 똑똑한 스머프들 때문에 항상 골탕만 먹는 가가멜 말이다. 나는 가가멜을 보기 위해 시도 때도 없이 양배추를 키우고 있다. 스머프들이 부지런한 것인지 속성양배추를 재배하는 것인지 알 수 없으나 시 한 편 읽는 사이에 양배추는 이미 다 자라서 녹아내렸다. 그동안 내가 읽은 시는 표제작 <공양> 한 편 뿐인데 말이다.
공양
싸리꽃을 애무하는 산(山)벌의 날갯짓소리 일곱 근
몰래 숨어 퍼뜨리는 칡꽃 향기 육십 평
꽃잎 열기 이틀 전 백도라지 줄기의 슬픈 미동(微動) 두치 반
외딴집 양철지붕을 두드리는 소낙비의 오랏줄 칠만구천 발
한 차례 숨죽였다가 다시 우는 매미울음 서른 되
소리, 향기, 슬픈 미동, 소낙비, 매미울음 등을 그 속성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무게, 넓이, 길이, 양으로 환산하고 있다. 그것도 미터법 사용의 의무화로 사용 금지된 재래식 계량 단위로. 이질적인 것들이 이렇게 자연스럽게 연결되고 의미가 확장되는 것에 놀라워하다가, 시인의 천연덕스러운 솜씨에 감탄하다가 대체 누구를 위한 ‘공양’일까? 생각을 키워본다. 나는 기계문명에 몸과 영혼을 팔아버린 독자들을 위한 시인의 자연공양으로 읽기로 한다.
독자에게 이런 공양을 올린 시인에게 소원이 있다. 귀한 공양을 받았으니 무엇인들 아까울까. 그러나 <가을의 소원>이라는 제목을 가진 시인의 소원은 내가 들어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진짜와 가짜를 구별할 수 없는 ‘자연의 매트릭스’ 시대에 시인의 소원은 차라리 사치다.
가을의 소원
적막의 포로가 되는 것
궁금한 게 없이 게을러지는 것
아무 이유 없이 걷는 것
햇볕이 슬어놓은 나락 냄새 맡는 것
마른풀처럼 더 이상 뻗지 않는 것
가끔 소낙비 흠씬 맞는 것
혼자 우는 것
울다가 잠자리처럼 임종하는 것
초록을 그리워하지 않는 것
봄도 아닌 여름도 아닌 겨울도 아닌 가을의 소원이라는 것에 곰곰 생각이 맴돈다. 빛 고운 단풍과 달고 향기로운 열매들로 넉넉한 계절이다. 내가 자동차 소리, 전화벨 소리, 전자제품 모터 돌아가는 소리 등등 모든 소리의 포로가 되어 밥 먹는 시간, 잠자는 시간을 줄이고 수시로 시각을 확인하며 바쁘게 달렸던 건 대체 무엇을 위해서였던가? 내가 가을 논두렁에서 맡는 벼 익는 냄새가 세상 어떤 향수보다도 향기롭고 배부르다는 걸 안들 무슨 소용이 있으랴.
시인은 ‘혼자 우는 것’이 소원이라고 한다. 하지만 나는 이제 더 이상 혼자 훌쩍이고 싶지 않다. 나는 이 세상에 태어난 유일한 목적이 방긋방긋 웃는 것이라도 되는 냥 남들 앞에서는 웃고 돌아서서는 뜨거운 것을 삼키며 살아왔다. 열네 살 때부터 시작된 내 소원은 목젖이 보일만큼 자지러지게 웃어보는 것이었다. 생의 가을이 된 지금도 그 소원은 여전하다. 그 배경이 햇빛 찬란한 가을날이면 더욱 좋겠다. 시인의 아름다운 소원과 아름다운 시를 읽으며 나는 아프다. 왜 아름다운 것은 아픈 걸까? 왜 아픔은 아름답지 못할까?
스며드는 것
꽃게가 간장 속에
반쯤 몸을 담그고 엎드려있다
등판에 간장이 울컥울컥 쏟아질 때
꽃게는 뱃속의 알을 껴안으려고
꿈틀거리다가 더 낮게
더 바닥 쪽으로 웅크렸으리라
버둥거렸으리라 버둥거리다가
어찌할 수 없어서
살 속으로 스며드는 것을
한때의 어스름을
꽃게는 천천히 받아들였으리라
껍질이 먹먹해지지 전에
가만히 알들에게 말했으리라
저녁이야
불 끄고 잘 시간이야
몸이 아프면 가장 먼저 입맛이 달아난다. 먹어야 병이 도망간다고 하는데 밥알이 모래알처럼 깔끄럽다. 언젠가 몸살을 되게 앓고 있을 때, 완도가 고향인 시 쓰는 친구가 푸르스름한 전복죽과 간장게장을 먹였다. 끼적거리고 있는 내게 게의 등껍질을 벗겨 거기다 밥을 비벼 주었다. 짭쪼롬한 그 밥 몇 술을 뜨고 입맛이 돌아왔었다. 그때 내 입맛을 돌려준 것이 알을 가득 품고 있었던 어미의 마음이었을까. 간장이 서서히 몸을 적셔올 때 짜고 매운 맛은 모두 자기 몸으로 받으며 어둠만을 알에게 전해주면서 하는 말 ‘저녁이야/불 끄고 잘 시간이야’ 이런 어미의 마음이 내 위장으로 스며들었던 걸까? 입맛은 되찾았지만 다시 게장을 먹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이 시집의 2부에 언어로 차려놓은 음식상은 맛깔스럽다. ‘펌프 주둥이로 빠져나오는/통통한 물줄기를 잘라서/양동이에 띄워놓은 것 같’은 오이로 만든 물외냉국, ‘여인의 속곳 헹군 강물을 동이로 퍼’낸 것 같다는 안동식혜, ‘맑은 국물도 아니고 건더기도 아닌 푸른 것, 다만 푸르기만 한 것/바다의 자궁이 오글오글 새끼들을 낳을 때 터뜨린 양수’같은 매생이국. 나는 한 번도 먹어본 적 없는 음식을 시집을 펼칠 때마다 먹는다. 내 생애 없는 호사다. 안방까지 배달되는 전 지구적 먹거리는 잠시 밀어놓는다.
그러다가 문득 눈보라를 헤치며 오는 백석을 본다. 아마도 시인은 백석이 차려 준 북방의 음식에 대한 답례로 이 음식을 차렸는지도 모른다는 데 생각이 미친다. 군불로 따끈해진 아랫목에 두 시인이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음식을 서로 권하는 장면을 상상해본다. 창호지 문살에 비치는 두 그림자가 정겹고 아름답다. 나는 이 아름다운 정경 앞에서 다시 아프다. 모든 그리운 것은 멀리 있나니 내 소원이 멀고 백석은 더 멀다. 왜 모든 아름다운 것은 아픈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