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젯밤에 생각한대로... 아침에 꿀 두 숟가락 병에서 따라 먹고 책을 읽어 나간다.

아주 오래 전에 구입해두었던 밤꿀인데 아카시아꿀보단 덜 달고 색은 황금색이 아니라 밤색쪽으로 더 진하다. 밤꿀 특유의 풍미가 있다. 그래서 호불호가 갈린다. 아이들은 별로라는데 난 그래서 좋다.



오늘은 "7. 꿀의 진미를 맛보다" 읽고 있는데 꿀을 곁들인 맛있는 요리법이 잔뜩 등장한다.

하지만 요리의 맛을 글로 읽고 있으니 그 맛을 알 수 있을 리 없다. 더군다나 우리나라 음식도 아니라서...

'오펜바흐ㅡ쉬르ㅡ르 마인의 작은 빵, 페페르누스', '아테나이오스에 따른 스타이티타스ㅡ유행에 절대 뒤지지 않는 얇은 크레프, 치즈와 꿀을 입힌 일종의 브릭', '익명의 안달루시아인에 따른 꿀 무아카드(13세기)ㅡ이것은 알려진 누가의 최초 요리법 가운데 하나다', 그리고 '바젤의 레케를리ㅡ부드럽고 풍미를 자랑하는 빵 데피스는 전통적으로 대림절 기간에 준비한다'와 같은 음식, 빵, 과자류와 생소한 식재료들... 내가 제일 자신 없고 관심없는 제과제빵이라 더 어렵게만 느껴진다. 이런 요리법을 읽고 아하~~! 하면서 이렇게 만들면 되겠군 하고 금방 자신만의 레시피로 적용할 수 있는 사람들 정말 있을까? 지난번 알랭 드 보통의 <사유식탁> 읽을 때도 느낀 거지만(거기에도 내가 결코 알지 못할 이탈리아 각종 요리들이 수없이 나왔다ㅠ.ㅠ) 못할 거라는 거 알고 사실 별 관심 없는데도 책을 읽다 보니 부럽긴 하더라는...ㅠ.ㅠ 



못하면 어때서.

눈으로는 책을 읽으면서 난 우리 집 냉장고와 냉동고에 있는 식재료와 음식들을 생각하며 꿀과 어울릴 음식이 뭐가 있을까 쉬지 않고 머리를 굴린다^^

냉동고에서 베이글 한 개 꺼내 놓고 역시 작년 바질 수확해서 만들어 얼려 두었던 바질 페스토와 크림치즈도 꺼내놓았는데...

이게 꿀과 어울리는 조합인가??? 아님 양배추, 사과 채 썰고 거기에 레몬 하나 짜넣고 올리브유 두르고 꿀을 넣으면 되려나???

지난 주 '텐트 밖은 유럽 - 남프랑스'편에 보니까 캠핑 고수 라미란 여사님이 이렇게 만들던데 나도 함 해 먹어 보자꾸나.

오늘 점심은 '바질 페스토와 크림 치즈 바른 베이글'에 '올리브유, 레몬에 꿀을 곁들인 양배추 사과 샐러드' 먹음 되겠다. 

스윗오렌지와 브라운슈가 가미된 '스타벅스 블랙퍼스트 플렌드 홀빈'으로 커피 내려서... 

한마디로 샐러드, 베이글, 커피 되시겠다!



아침부터 택배가 몰아친다. 캬~~~ 얼른 나가서 택배를 뜯어야 한다!

왜냐하면 모두 다 식물들이기 때문에~~~. 플록스, 금낭화, 사피니아, 백당나무, 인동덩굴... 등등

오늘은 해가 들락날락하고 있어서 식물 심기 좋은 날이다. 

바야흐로 나에게 봄은 식물 심기 좋은 계절이다.



아참.. 우리 집 마당에도 벌들이 윙윙 날아다니는 것 같더니...

오늘 아침 발견! 앵두나무에 파랗고 조그만 앵두가 주렁주렁 달렸다~~~~^^

꿀벌은 우리 집 작은 마당에서도 아주 소중한 존재다.







아리스토세네스에 따르면, 피타고라스 학파들은 빠을 꿀과 함께 먹었고, 점심으로 이 음식을 항상 먹은 자들은 병도 없었다고 덧붙인다. 리코스는 또 크리노스ㅡ사르데냐와 이웃해 있다ㅡ의 주민들은 아주 장수했는데, 왜냐하면 늘 꿀을 먹었기 때문이다. 이곳에는 꿀이 흘러넘칠 만큼 풍부했다.(180쪽)

꿀이 그 자체로 최상을 보여준 건 요리, 특히 제과류에서였다. 마르티알리스는 "알뜰한 벌이 이렇게 열심히 일하는 것은 오로지 맛있는 과자를 위해서다"라고 썼다. 설탕은 서구에서 중세 이전에는 알려지지 않았다. 고대 사회에서는 꿀을 첨가하는 것이 요리를 달게 만드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곡물 빵의 선조 격이라 할 꿀 과자는 제과의 가장 초기 단계였고, 거기에서부터 오늘날의 제과가 탄생한 것이다.
(18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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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 전통 의학의 한 요소
기독교 국가인 에티오피아에서는 오늘날 신학 수업을 받은 학자들에 의해 의학이 수행된다.
사회적으로 큰 상업적ㆍ상징적인 가치를 갖는 꿀은 치료제로서도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데, 그 준비와 제조 기술은 비밀에 부쳐진다.

꿀의 효능이 이리 많으니 거의 만병통치약 수준이다.
집에 잔뜩 있는 꿀... 내일 아침부터 먹어봐야겠다.






꿀을 약용으로 쓰는 것은 오랜 전통이었다. 17세기 말 곤다르에서 발견된 한의학 논문에는 이미 이런 게 기록되어 있었다.

모든 약 중 최고는(가장 많이 사용되는 것은) 꿀이다. 그 성질은 뜨겁고 건조하다. 의사는 이렇게 말한다. "꿀을 선홍초와 함께 먹으면 죽음을 제외한 모든 병에 다 좋다. 게다가, 한 달에 사흘 이것을 핥아먹거나 매일 아침 세 숟가락씩 먹으면, 갑작스러운 죽음을 피할 수 있다. (게다가) 담즙에 좋아 갑작스러운 화나 짜증을 사라지게 한다. 몸 내부의 해로운 습기를 제거하고, 상처를 가라앉혀주기도 한다. 상처로 생긴 살의 염증 부분을 없애주고 거기서 좋은 새 살이 나오게도 한다. 위도 부드럽게 해준다. 모든 냉병을 사라지게 한다. 이것을 끓인 다음 거품을 걷어내면,다시 뜨겁고 습해진다. 이것을 물에 섞어 먹으면 열이 가라앉는다. 
(인간의) 자연 속성에도 알맞다. 하체 복부의 과다한 피를 사라지게 하고, 담즙 기능과 관련되는 긴장과 조바심도 사라지게한다." - P164

인류에게 꿀은 기원의 음식이다. 초기 황금기에 인간은 야생꿀을 먹으며 살았다. 여기서 황금기란, 인류가 사냥도 농업도 할 필요 없이 영양과 즙이 풍부한 과일을 따기 위해 손만 뻗으면 되었다는 지상의 파라다이스 시절이다. "(...) 벌거벗은 들판은 물결치는 이삭 아래 금빛으로 서서히 물들고, 야생 가시덤불에는 진홍빛 포도송이들이 매달려 있고, 단단한 떡갈나무에서는 꿀이슬이 방울방울  떨어졌다." - P228

동물성과 식물성 간의 이 모호함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감지된다. 그래서 꿀을 사육하는 양봉은 특별히 농업에 포함된다. 야생 벌통과 인간이 만든 벌통을 구분하기 위해 ‘양봉‘ 또는 ‘사육domestication‘이라는 말을 쓸 뿐이다. 그런데 이게 정말 사육인가?
벌의 사육은 암소나 개, 양의 사육과는 다르다. 그래서 ‘사육‘ 대신 ‘재배 culture‘라는 말을 쓰고, 식물을 재배하듯 벌을 재배한다. 또는 양봉을 한다고 말한다.  - P228

목축업에서 동물은 ‘길들여진다‘. 다시 말해, 야생 
상태의 동물과는 다르다. 인간은 그 번식을 통제했고 다른 종을 만들어냈다. 울타리 안에 있지만, 다른 동물이다.
일부 잡종 교배가 일어나긴 하지만, 양봉에서 이 동물은 야생 상태 그대로 있다. 인간은 개나 말, 소의 품종에게 하듯 벌을 완전히 지배하지는 않았다. 이른바 ‘재배‘는 벌들에게 최적의 생존 조건을 보장해주었다. 인간 거주지 근처에 있고, 
"따가면서"(잘라가면서) 수확하는 방식은 식물 재배와 똑같다. 그래서 벌은 그 고유의 속성을 간직한다. - P229

만일 벌이 원하면, 인간들에게서 멀리 떨어져 살 수도 있다. 하지만 젖소는 그렇게 할 수 없다. 더욱이 벌은매해 완전히 다 빼앗기지 않는다. 오히려 벌들이 새 벌통을 만들기 위해 분봉을 하므로, 대손해를 보는 것은 양봉가들이다.
벌은 양봉가가 만들어준 문명 공간에서 살지만 
약간의 야생의 삶을 사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벌이 매혹의 대상이 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벌은 재배와 자연이라는 두 세계의 중간에 위치한다.
‘양봉‘이라는 명명 속에 동물과 식물 사이의 모호함이 있지만, 도리어 이런 점이 동물과 식물 사이의 차이가 눈에 띄지 않았던 신화적 황금시대로 돌아가고 싶게 만드는 것이다. - P230

꿀 수확은 종교의식, 기도, 헌주, 터부 등의 틀 아래 도처에 있었다. 이 수확의 결과물은 소중한 것, 즉 먹이고, 보살피고, 보존하는 제품으로 다뤄졌다. 꿀의 가치는 단순히 단맛의 가치를 초원한다. 비록 기원은 이 단맛에서 시작되었지만-부고니아를 치르는 고대 신앙에서는 정화에서 유래되었지만 퇴화 및 쇠퇴를극복하는 차원으로 승화된다. 단순히 꿀이 쇠퇴하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라, 음식을 보존하고, 육신을 지킨다는 의미에서 말이다.
달갑지 않은 발효를 미리 조심하게 하는가 하면, 살아 있는 생명체의 건강과 그 에너지를 보존한다. 꿀물을 만들기 위해 발효를하면서 영양이 풍부한 음료를 만들고, 아울러 잠재적 치료 효과와 더 나아가 어떤 불멸성까지 제공하고자 한 것이다. 꿀은 하늘에서 내려온 신화적 음식이며, 인간의 선을 위한 음식으로 생각되었다. 이것이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꿀이 지켜온 명성이다. - P237

9.아름다운 신화를 기억하며
자연과 문화에 부여된 가치를 뒤집어보려는 발상은 좋다. 그렇지만 그 밑바닥에 있는 우리 생각은 그다지 변하지 않았다. 꿀은 우리 조상들을 놀라게 한 것만큼이나 우리를 놀라게 한다. 그것은 시대와 문명을 초월해 모든 인간에게서 발견되는 상수이다. - P249

꿀은 ‘기능성 식품‘으로서 오늘날 대문자 N으로 쓰는 자연Nature의 한 상징으로 여겨지고 있다. 꿀은 과거에 신들이 인간들에게 베푼 혜택의 신호였듯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인간들에게 이로운 것을 준다. 그런 만큼, 우리는 이제 위험에 처해 있는 자연을 보호해야 한다. 천연의 음식인 꿀, 그것을 만드는 벌이 우리가몰두해야 할 주제인 것이다. 

마침내, 우리의 이 감미로운 곤충은 환경보호의 
표준이 되었다. - P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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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곡 2024-04-22 17: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선물받은 꿀을 통 안 먹다가 호밀빵에 곁들여봤는데 괜찮습니다 ㅎㅎ

은하수 2024-04-22 20:11   좋아요 1 | URL
호밀빵이 담백고소하니 꿀과도 잘 어울리겠어요. 저도 빵 먹을 때 곁들여 보겠습니다^^
 

흰 하늘과 섞여들어가는 흰 평원을 어지럽히는 건 그 구멍, 얼음위의 깨진 별뿐이었다. 바람도, 생명도, 소리도 없었다.


한 쌍의 손이 물에서 나와 각진 구멍의 가장자리를 더듬었다. 탐색하는 손가락이 아주 작은 협곡의 경사면을 닮은, 구멍의 두꺼운 안쪽 벽을 기어올라 표면까지 나오는 데는 꽤 시간이 걸렸다. 가장자리 너머에 이른 손은 갈고리처럼 눈을 움키고 당겼다.
머리가 나왔다. 헤엄치던 사람이 눈을 떴다. 그는 지평선조차 보이지 않는 광활하고 단조로운 풍경을 바라보았다. 길고 흰 머리카락과 턱수염이 지푸라기 빛깔이 들어간 끈으로 묶여 있었다.
그에게는 고통스러워하는 기색이 전혀 없었다. 설령 숨이 찼더라도 날숨에서 나오는 김은 아무 색깔 없는 배경 속에서 보이지 않았다. 그는 팔꿈치와 가슴을 얕은 눈밭에 올려놓고 몸을 돌렸다. - P9

그는 구멍에서 몸을 끌어낸 뒤 얼음을 깰 때 썼던 손도끼를 집어들었다. 벌거벗은 채로 잠시 멈춰 서서 눈을 가늘게 뜨고, 환하지만 태양은 없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 모습이 늙고 강인한 그리스도처럼 보였다.
그는 손등으로 이마를 훔친 뒤 허리를 숙여 소총을 집어들었다. 그때에야 텅 빈 광활함에 가려졌던 그의 거대한 신체 비율이분명히 드러났다. 손에 들린 소총은 장난감 카빈총처럼 보였다.
남자가 총열을 쥐고 있었음에도 개머리판이 땅에 닿지 않았다.
소총을 가늠자로 삼으면, 남자가 어깨에 걸치고 있는 손도끼는사실 완전한 크기의 도끼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남자는 인간성을유지하는 선에서 가능한 최대의 몸집을 가지고 있었다.
- P10

"불가에 머물러라." 남자가 조용히 말했다.
남자가 그들에게 말을 건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남자들은휘청거리다가 제자리에 멈춰 섰다. 그 요구에 따르는 것과 복종하지 않는 것, 똑같이 두려운 두 선택지를 가늠해보는 듯했다.
"그런 이야기 대부분은 거짓말이다." 남자가 다시 말했다. "모든게 거짓인 건 아니다. 대부분이 그렇다는 거다. 내 이름은." 그는 그렇게 말하며 나무통 위에 앉았다. 팔꿈치를 무릎에 대고 이마는 손바닥에 댄 채 깊이 숨을 들이쉬더니 허리를 세워 앉았다.
지쳤지만 위엄 있는 모습이었다. 채취 작업자와 선원들은 각자의자리에서 고개를 숙인 채 그대로 남아 있었다. 소년이 죽 늘어서있던 통 중에서 작은 것 하나를 굴리며 앞으로 나왔다. 그러고는용감하게도 남자 곁에 그 통을 놓고 앉았다. 키 큰 남자는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인 것 같았다. 그러나 그 동작은 워낙 순식간에 지나갔고, 별 뜻 없이 고개를 갸웃한 것일 수도 있는, 감지하기 어려운 움직임이었다. - P17

"호칸이다." 남자가 불속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첫번째 모음은U로 발음되었는데 즉시 o로 변했다가 다시 a로 변했다. 다만 소리가 연달아 변한다기보다는 왜곡되거나 휘어져 단 하나의 소리에 세 가지 소리가 동시에 들어가도록 발음해야 했다. "호칸 쇠데르스트룀. 성을 써야 했던 적은 한 번도 없다. 한 번도 써본 적 없다. 아무도 내 이름을 발음하지 못한다. 여기에 도착했을 때 나는영어를 할 줄 몰랐다. 사람들이 내 이름을 물었다. 나는 호칸이라고 대답했다." 그가 가슴에 손바닥을 대고 말했다. - P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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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주의를 돌릴 만한 대상은 거의 없었고, 모든 것을 
흡수하는 여행의 단조로움은 매일의 깊이를 전부 빨아냈다. 바뀌지 않는 풍경에 내딛는 모든 발걸음은 직전의 발걸음과 닮아 있었다. 모든행동은 아무 
생각 없이 벌이는 반복이었다. 모든 남녀가 머리로는 잊었으나 여전히 기능적인 메커니즘에 따라 움직였다.  - P165

그리고 일행과 도저히 다다를 수 없는 지평선 사이에는 먼지가 있었다.
언제나 먼지가 있었다. 그 먼지가 사람들의 눈에 불을 붙이고 콧구멍을 틀어막고 입을 말렸다. 손수건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어도 목구멍이 부식되고 폐가 쪼그라드는 느낌이었다. 빨갛고도 불확실한 태양 자체가 움직이지 않는 구름 뒤에서 질식해갔다. 
하루에 몇 번씩, 날씨가 잔잔할 때도 먼지 때문에 수레에서 황소를 보는 것조차 불가능했다. 그런 경우에는 움직이지 않는 느낌, 아무 변화가 없는 느낌이 완벽해지며 공간과 시간 모두가 파괴되는 것만 같았다.주위에서 바람이 소용돌이치며 모든 흙을 
알갱이로 바꿔놓고 일행이 눈을 감은 채 나아갈 수밖에 없도록 만들 때는더욱 그랬다.  - P165

비는 축복이었다. 비로 인해 가끔 발생하는 곤란한진창을 감수할 가치가 있었다. 비가 내리면 먼지가 가라앉고 더러운 냄새가 씻겨나갔으며(젖은 옷, 짐승, 식량이 햇볕에서 김을 뿜기 시작하면 복수하듯 돌아오긴 했으나), 그들에게 잠깐이나마 작은 동물이 우글거리지 않는 마실 물을 주었다. - P165

15
벌. 벌은 말의 귀 주변을 맴돌고 호칸의 목뒤에서 윙윙거리더니 한동안 그들을 따라오며 안장주머니와 당나귀의 짐을 조심스레 살펴보았다. 호칸이 처음으로 한 생각은 이제야 봄이 왔다는 것이었다. 
그러고는 즉시, 몇 년 동안 벌을 한 마리도 보지 못했다는 깨달았다. 
사실 호칸이 스웨덴을 떠나온 이후로 마주친 첫번째 벌이었다. 지금까지 미국의 황야는 극도로 다른 여러 환경에서 사치스러울 정도로 다양한 생물 종이 번성하는 와중에도 뭘 한 마리를 내지 못했다. 호칸은 다양한 기후에서 모든 계절을 경험했다. 그리고 이 초원은 그가 아주 오랫동안 말을 타고 지나온 초원과 똑같았다. 적어도 행렬에서 이민자들과 처음 만난 이후로는 말이다. 그렇다면 지금 와서 왜 갑자기 벌이 나온단 말인가? 
농장, 호칸이 떠올릴 수 있는 유일한 설명이었다. - P211

호칸은 지금도 다른 사람들에 대한 걱정이 있었지만, 살인 이후로 그토록 오랜 시간이 지났으니 자신이 잊혔기를 바랐다. 때로 기분이 아주 좋을 때면 자신이 그 현장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있어 누구도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모를 거라는 믿음이 생겼다.
그 소식이 이 지역까지, 행렬로부터 이렇게 멀리 떨어진 곳까지 이르렀을 리는 없었다. 게다가 그토록 낮은 가능성이 실현되더라도-호칸이 저지른 부끄러운 짓에 대한 소식이 계절과 평원을지나 전달되었더라도-호칸은 자신이 더 강해졌으며, 진실을 알고 있는 누구와도 직면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생각했다. 
이런 주장에 설득되지 않을 때면, 호칸은 자신이 미치거나 길을 잃은 채행렬과 사막 사이의 거대한 초원에 갇혀 있으며, 리누스를 다시보고 싶다면 조만간 동쪽으로 방향을 틀어야 할 것이고, 가는 길에 다른 사람을 한 명도 만나지 못한다 한들 뉴욕이라는 큰 도시에서는 수많은 사람들을 마주해야 할 게 분명하다고 자신을 타일렀다. - P212

하지만 지금 이 순간은, 그 벌이-또 그 벌에 뒤이어 나타난 수많은 다른 벌들이-문명의 존재를 알리는 것이라 해도 눈에 보이는 농장이나 마을은 없었고 호칸은 아무 방해도 받지 않고 앞으로 나아갔다. - P212

게다가 위협적인 의미를 띠고 있었음에도 벌들은 그에게 큰 기쁨을 주었다. 첫번째 표본을 발견하고 며칠 뒤,호칸은 쓰러진 통나무 위를 날아다니는 
벌떼가 공기 중에 빽빽한것을 보았다. 벌들은 나무둥치에 난 구멍 위로 줄지어 날아다녔는데, 알고 보니 그곳에 벌집이 있었다. 호칸은 엄청나게 조심했지만 몇 번 쏘이는 건 피하지 못한 채 야생 벌꿀에 손을 뻗었다.
벌집 한 조각을 입으로 가져가는 동안 아래팔은 둥그스름한 노란색 물집으로 화끈거렸다. 호칸은 그 맛을 벌꿀맛이라고 거의 느끼지 못했다. 문제는 맛보다 촉감, 냄새, 생김새였다. 
밀랍으로 이루어진 매끈한 페이스트가 즉시 호칸의 코로 들어갔고, 호칸은 천송이의 꽃을 보았다.
ᆢ ᆢ
... 봄이 자리잡은 지금, 동료 피조물들을 만날 준비가
되었다는 생각을 하게 된 건 바로 이런 가능성 때문
이었다. - P213

17
"피곤하다." 호칸이 조용히 신음하며 말했다. 눈물 너머로 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에이서가 그를 더욱 꽉 끌어안았다.
"피곤하다."
호칸은 흐느끼며 에이서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너무 피곤하다."
에이서는 다른 팔을 호칸의 가슴에 둘렀다.
"너무 피곤하다."
그것이 호칸의 첫 포옹이었다. - P250

그들은 계속해서 서쪽으로, 대체로 침묵하며 이동했다. 하지만 때로는 각자의 말에 탄 채 서로를 보며 아주 잠깐 미소 짓곤 했다. 
아무도 호칸에게 그런 식으로, 아무 이유 없이 미소를 지어준적은 없었다. 기분이 좋았다. 얼마 후 호칸은 마주 미소 짓는 법을 배웠다. 매일 저녁, 야영하면서 불을 피우고 저녁을 만들 때면 호칸은 누군가의 눈에 보인다는 것, 누군가의 뇌에 들어간다는것, 누군가의 의식 안에 살아간다는 것을 거의 기적이라고 느꼈다. 게다가 에이서의 존재는 평원에도 영향을 주었다. 평원은 더이상 그토록 오랜 시간 동안 호칸의 외로운 시선에 존재 여부가 맡겨져 있던 위압적인 광활함이 아니었다. - P250

땅을 잘 아는 사람, 추적자로서의 눈을 가진 사람과 함께 여행하면서 평원에 대한 호칸의 인식은 바뀌었다. 호칸이 한때 위협과 만연한 적들의 흔적을 보았던 곳에서 에이서는 아무것도 보지•않았다. 고기를 훈연하는 데 이상적으로 쓰일 향기로운 나무의일종이나 귀한 뿌리채소, 에이서가 임시로 구덩이 오븐을 만들때 쓰려고 언제나 집어드는 동석 비슷한 돌멩이를 보면 모를까.
역으로, 호칸은 에이서가 텅 빈 것처럼 보이는 장소 한가운데에서 멈출 때마다 놀랐다. 호칸이 보기에 그곳은 아무것도 없다는점에서 사방의 여느 땅과 비슷했다. 에이서는 말에서 내려 주위를 둘러보고 새로운 방향을 가리켰으며, 희미하긴 하지만 자신이보기에는 기수의 존재를 설득력 있게 나타내는 흔적으로부터 두사람을 빠르게 빼냈다. 이처럼 갑작스러운 멈춤과 방향 전환으로 그들은 어쩔 수 없이 복잡하게 구불구불 나아가는 패턴을 그려야했지만, 에이서는 나침반이 없는데도 틀림없이 서쪽으로 방향을잡았다.  - P254

이처럼 갑작스러운 멈춤과 방향 전환으로그들은 어쩔 수 없이 복잡하게 구불구불 나아가는 패턴을 그려야했지만, 에이서는 나침반이 없는데도 틀림없이 서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평원을 해독하는 능력과 완벽한 방향감각보다 더욱 인상적이었던 것은 수많은 여행을 통해 얻은 땅에 대한 에이서의 지식 덕분에 그가 여행의 모든 단계를 예상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 - P254

지금까지 호칸은 과거로부터 멀리 여행해왔으나 미래로 향하지는 않았다. 그는 지속적인 현재에 남아서, 풍경과 사람들을 떠나되 결코 예견할 수 있는 특정한 목적지로 향하지는 못했다. 
그의 유일하고 진정한 목적지인 뉴욕은 어느 머나먼 달의 도시처럼 추상적이고 환상적일 뿐 머릿속 눈으로 내다볼 수 있는 뚜렷한 장소가 아니었다. 지금까지 그는 그저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이동했을 뿐이었다. 제임스 브레넌은 흙에서 찾은 금의 흔적을 따라가며 지방을 헤맸다. 존 로리머는 호칸처럼 이 지역에는 처음 온것이었다. 자비스 피킷의 길안내는 믿을 만하지 않은 것으로 드러났다. 
앞으로 닥쳐올 세상을 반복적으로 예견할 수 있었던 사람은 에이서뿐이었다. 내일은 강에 도착할 거야. 사흘쯤 지나면 좋은 장작을 구할 수 있어. 저쪽으로 말을 달리면 해가 지기 전에 마을에 도착할 거야. 지구가 공처럼 둥글다는 것과 세상을 한 바퀴 돌 수 있다는 것을 배웠을 때 세상의 생김새는 상상도 못했던 방식으로 변했다. 
사실, 이 점을 생각할 때마다 호칸은 자신의 정신이 이 새로운 생각을 어떻게든 받아들이느라 휘어지는 듯한 기분이었다. 미래를 예견하는 에이서의 능력에도 비슷한 효과가 있었다. 현실은 더이상 지평선에서 끝나지 않았다.
- P256

호칸은 같은 지붕 아래에서 누군가와 함께 잠을 잔 것은 그때가 처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등뒤에서 깨어 있는 에이서가 비슷한 생각을 침착하게 하고 있다는 걸 알았다.
"왜 이렇게 하나?" 호칸이 물었다.
"뭘?"
호칸은 에이서의 부드러운 숨결을 느꼈다. 그 숨결이 처음에는호칸의 목에, 그다음에는 코에 닿았다. 따뜻하고 축축한 흙냄새가 났다.
"이거."
"뭐?" 에이서가 숨죽여 웃었다.
"이거. 나를 도와준다. 보안관에게서. 그런 다음 나와 함께 도망친다. 모든 것을 떠난다. 그리고 이젠 여기에 있다. 왜?"
"너 때문에."
"하지만 왜?"
"널 보고 알았으니까." - P260

수없이 많은 서리와 해빙을 지나, 그는 국가보다도
넓은 원을 그리며 걸었다. 





그런 다음 멈추었다. - P284

단조로운 삶에서는 한 해와 한순간이 같았다. 계절은 지나갔다가 돌아왔고, 호칸의 일은 한 번도 바뀌지 않았다. 도랑이 넘쳤다. 타일이 빠졌다. 상하기 전에 고기를 육포로 만들어야 했다.
버려진 도랑은 메워야 했다. 마실 물이 필요했다. 참호가 무너져 황폐해졌다. 바닥에 깔아놓은 돌이 헐거워졌다. 옛 통로를 연장해야 했다. 더 많은 아교풀을 끓여야 했다. 지붕을 덜 새게 만들었다. 덫을 놓아야 했다. 새로운 도구를 만들어야 했다. 코트를 수선해야 했다. 가죽 굴뚝이 너무 썩어 있었다. 
장작을 모아야 했다. 이런 일 중 하나가 마무리되기 전에 다음 일이 호칸의 주의를 끌었으므로, 그는 언제나 잡일 중 하나에 몰두해 있었다. 그리고 시간의 흐름과 함께, 이런 잡일들은 호칸의 눈에는 보이지 않으나 알아서 반복되는 일종의 순환주기 혹은 패턴을 이루었다. 호칸은 이런 일들이 일정한 간격을 두고 벌어진다고 확신했다.  - P290

이처럼 반복되는 임무가 모든 하루를 그전의 하루와 비슷하게 밀들었고, 각 하루의 안에서는 해긴 뜰
때부터 해가 질 때까지 시간을 구분할 표지가 거의 없었다. 호칸은 심지어 규칙적인 시간에 식사하지도 않았다. 사실, 그의 식단은 생명 유지에 필요한 절대적 최소량으로 줄었다. 에이서가 죽은 이후로 그는 음식을 싫어하게 되었다. 

*에이서의 죽음이후 호칸이 캐니언의 동굴에서 떠나지 않고 은둔생활을 계속했기 때문에
290-291쪽에서 보이는 호칸의 일상을 보여주는 문장들이 296-297쪽에 걸쳐 거의 같은 문장으로 반복이 된다. - P291

선장은 스웨덴어로 말했는데 호칸이 모르는 단어를 많이 사용했다. 리누스를 잃은 이후로 오직 머릿속으로만 스웨덴어를 들었기에 호칸은 유일하게 스웨덴어를 사용하는 사람으로서, 자신의 생각에따라 그 언어를 만들어왔다-호칸은 그런 단어들을 선장의 목소리와 조화시키고, 그런 단어가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에게도 뭔가 의미가 있을 수 있다는 걸 믿기가 거의 불가능했다. 
더욱 놀라운 점은 호칸 자신이 모국어를 말한다고 해서 더 자신감 있거나안전하다고 느끼지 못했다는 것이다. 지금 그는, 자신의 수줍음과 우유부단함, 침묵에 대한 선호가 언어와는 아무 관계가 없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는 스웨덴어를 쓸 때도 똑같았다. 이조용하고 머뭇거리는 존재는 그냥 호칸의 원래 모습. 또는 호칸의 변화된 모습이었다. - P340

나중에, 본채에서 선장은 호칸에게 지구본으로 알래스카를 보여주었다. 그리고 자신의 회사가 해변을 따라 세운 다양한 거점과 사업소를 짚어주며 각각의 이점을 이야기했다. - P344

그런 뒤 선장은 지나가는 말로 알래스카와 러시아가 무척 가까우며 두 땅이 좁은 해협으로만 나뉘어 있다는 점을 지적했다. 그는 손가락으로 핀란드를 거쳐 스웨덴으로 곧장 이어지는, 거대한 땅을 가로지르는 선을 그렸다.
"선생에게 딱 맞는 장소요." 알텐바움 선장이 손가락을 다시 알래스카로 가져오며 말했다.
전에는 한 번도 지구본을 본 적 없는 호칸은 걸어서 지구본 주위를 돌며 자신의 긴 여행길을 따라가보았다. 그렇게 그는 모든땅이 어떻게 원이 되는지를 보았다. - P344

"지금은 걸어서 바다를 건널 수 있을지 모른다. 지금이 아니면 내년 겨울이어야겠지. 그런 다음 곧장 서쪽으로 간다. 스웨덴으로"
소년은 어리둥절해져 고독하고 광활한 공간으로 
시선을 돌렸다. 수평적 광대함에 방향감각을 잃은 듯했다. 그 광활함은 하늘아래 또다른 하늘처럼 무한하고도 헐벗은 것처럼 보였다. 돌아보니 호칸은 이미 눈이 래커처럼 칠해진 난간에 두 다리를 걸치고있었다. 소년은 뭔가 말하고 싶어서 그에게 다가갔다. 호칸은 잠시 멈추거나 뒤를 돌아보지 않고 내려가기 시작했다. - P352

잠시 후 소년은 갑판 너머로 몸을 숙이고, 
그 거대한 남자가 짐꾸러미를 집어들고서 눈앞의 얼어붙은, 확장된 공간을 빤히 바라보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바람은 아직 그에게 닿지 않았으나 호칸은 머리에 사자 후드를 걸쳤다. 땅에서부터 불어올라온 깃털같은 눈 뒤에서 하늘이 보랏빛으로 변했다. 호칸은 자기 발을, 그다음에는 다시 위를 보더니 백색 안으로, 가라앉는 태양을 향해 길을 나섰다. - P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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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태/보편교양

이제는 해프닝이 된 민원 전화를 돌아봤다. 그때 아버님이랑 대화를 잘해서 다행이라고, 어떻게 말씀드렸던 건지를 물었다.
"컨설턴트 선생님이 아버지께 전화드렸어요. 마르크스 전혀 문제없고 고전읽기 수업도 괜찮다고. 아버지도 좀 물어보고 전화를하시지." - P18

은재가 가방에서 네모난 상자를 꺼내어 곽에게 건넸다. 소수의 수집가들을 위해 공들여 만든 양장본처럼 섬세하면서도 단단한 상자였다.
가름끈을 연상시키는 리본 장식 아래에 백화점에서
몇 번 지나쳤던 고급 파티스리의 이름이 각인돼 있었다. 은재는 별건 아니지만 성의로 받아달라고, 또 찾아뵙겠다며 허리를 숙여 인사하고 떠났다. 
곽은 빈 교실에서 상자를 열었다. 작고 예쁜, 틀림없이 달콤할 것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동봉된 카드에는 고교 생활중 선생님의 고전읽기 수업이 가장 즐거웠다고 깨끗한 필체로 쓰여 있었다.
- P138

창밖에서 "하나, 둘"이라거나 "한번 더"처럼 한 무리의 학생들이 단체 사진을 찍는 소리가 들렸다. 곽은 상자 속에 있던 피낭시에, 혹은 다쿠아즈나 비스코티일 수도 있는, 유럽 어느 언어로된 이름이 분명한 디저트를 하나 입에 넣었다. 역시 달콤했다. 경박한 단맛이 아니라 깊이가 있고 구조가 있는, 하지만 묘사해보려고 하면 이미 여운만 남기고 사라져서 어쩐지 조금 외로워지는달콤함. 사람을 전혀 파괴하지 않고도 패배시킬 수 있는 달콤함. - P139

곽은 한 발 물러나 조금 전 정리한 책장을 봤다. 벽면을 가득채운 동서고금의 명저들. 유서 깊은 출판사가 기획하고 석학들이 감수한 지식교양 총서와 세계문학전집. 하나하나는 알맞게 배치했지만 전체적으로는 조화롭지 않아 보이기도 했다. 그 불만족을 해석할 언어를 구성할 수 없었다. 넘친 자리가 있었고 빈 자리가 있었다. 고전의 의미를 제한적으로만 설정하고 동시대 지식사회의 논의를 반영하지 못한 게 문제일 듯도 했다.  - P139

*작가의 말 중에서
.... 그때도 지금도 언젠가도, 여기도 저기도 어디에도 존재하는 무엇을 향한 갈증은 근원적인 것일까. 나는 자주 그갈증을 신자가 아니라 소비자로서 채우려고 시도한다. 
가톨릭교회가 천 년 넘게 세계 최대의 이념 공동체로 존속했다면 오늘날자본주의는 이념을 초월한 자연이다. 
그러나 이 넓은 세계의 어느 낯선 구석에서 지친 몸을 맡기고 보편성을 감각하고 싶을 때, 내게 허락된 공간이 스타벅스일 뿐이라면 초라하다. 
힐튼이나 메리어트라고 해도 마찬가지이다. 보편은 그 이상의 무엇이라는 예감 또는 기대가 있다. 그 무엇이 꼭 시스티나성당의 벽화나 아야소피아의 첨탑은 아닐 수도 있다. 어쩌면 식탁 위의 촛불, 골목에내놓은 의자, 숨을 불어넣어 연주하는 악기・・・・・・ - P142

보편적이라는 말을 ‘평범하고 뻔하다‘는 맥락에서 쓰기도 한다. 2008년에 발표된 브로콜리너마저의 정규 1집 표제곡 <보편적인 노래>는, 한때는 내밀하고 특별하다 믿었지만 이제는 속절없이 퇴색된 기억에 대한 송가다. 플라스틱 장미 귀걸이, 견과류를 뺀 샐러드, 안양역 앞 닭볶음탕집이나 유리 상자 속 북극곰 같은 세목들도 시간과 거리를 두고 보면 비슷비슷한 심상으로 마모된다. 나에게는 하나뿐인 하루, 하나뿐인 삶이 저이나 그이도 겪었던 반복적인 패턴의 재현일 뿐이라 생각하면 쓸쓸하다. 
사람은 종종 보편성에서 도망쳐 개별성을 인지해야 하는 동물인 듯하다. - P142

김지연/반려빚

정현은 다 때려치우고 싶다거나 죽고 싶다가도 그래도 저건 다갚고 죽어야지......라는 생각을 했다. 죽으면 어차피 다 끝인데 그걸 왜 굳이 다 갚으려는 건지 스스로가 이해 안 되기도 했지만 그래도 정현은 빚진 것 없이 깨끗하게 죽고 싶었다. 자신의 부채를 언제나 부모에게 떠넘기고 싶지도 않았다. 만약 그런 일이 벌어진다 해도 상속 포기를 하면 그만이겠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가족들이 자신의 속사정을 낱낱이 알게 되는 것이 싫었다. 늘 저거 어디 가서 사람 구실은 하고 살려나, 걱정하는 가족들에게 변변한 사람으로 보이고 싶어서 그동안 갖은 노력을 다 했는데 빚이 일억 육천이나 있다는 사실을 들켜서는 안 됐다. 다른 가족들보다 장수를 하든가 빚을 다 갚든가 둘 중 하나는 해야만 했다. 하지만 한국에서 태어난 죄로 과로하며 살고 있으니 장수는 이미 물건너간 것 같고 살아 있는 동안 빚을 다 갚는 수밖에 없었다. - P206

빚이야말로 정현이 잘 돌보고 보살펴 임종에 이르는 순간까지 지켜봐야 할 그 무엇이었다. 빚 역시 앞으로 수년간은 정현의 옆자리를 떠나지 않을 것이고, 정현이 죽었나 살았나 그 누구보다도 두 눈 부릅뜨고 계속 지켜볼 것이다. 빚이야말로 정현의 반려였다. - P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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