흰 하늘과 섞여들어가는 흰 평원을 어지럽히는 건 그 구멍, 얼음위의 깨진 별뿐이었다. 바람도, 생명도, 소리도 없었다.
한 쌍의 손이 물에서 나와 각진 구멍의 가장자리를 더듬었다. 탐색하는 손가락이 아주 작은 협곡의 경사면을 닮은, 구멍의 두꺼운 안쪽 벽을 기어올라 표면까지 나오는 데는 꽤 시간이 걸렸다. 가장자리 너머에 이른 손은 갈고리처럼 눈을 움키고 당겼다. 머리가 나왔다. 헤엄치던 사람이 눈을 떴다. 그는 지평선조차 보이지 않는 광활하고 단조로운 풍경을 바라보았다. 길고 흰 머리카락과 턱수염이 지푸라기 빛깔이 들어간 끈으로 묶여 있었다. 그에게는 고통스러워하는 기색이 전혀 없었다. 설령 숨이 찼더라도 날숨에서 나오는 김은 아무 색깔 없는 배경 속에서 보이지 않았다. 그는 팔꿈치와 가슴을 얕은 눈밭에 올려놓고 몸을 돌렸다. - P9
그는 구멍에서 몸을 끌어낸 뒤 얼음을 깰 때 썼던 손도끼를 집어들었다. 벌거벗은 채로 잠시 멈춰 서서 눈을 가늘게 뜨고, 환하지만 태양은 없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 모습이 늙고 강인한 그리스도처럼 보였다. 그는 손등으로 이마를 훔친 뒤 허리를 숙여 소총을 집어들었다. 그때에야 텅 빈 광활함에 가려졌던 그의 거대한 신체 비율이분명히 드러났다. 손에 들린 소총은 장난감 카빈총처럼 보였다. 남자가 총열을 쥐고 있었음에도 개머리판이 땅에 닿지 않았다. 소총을 가늠자로 삼으면, 남자가 어깨에 걸치고 있는 손도끼는사실 완전한 크기의 도끼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남자는 인간성을유지하는 선에서 가능한 최대의 몸집을 가지고 있었다. - P10
"불가에 머물러라." 남자가 조용히 말했다. 남자가 그들에게 말을 건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남자들은휘청거리다가 제자리에 멈춰 섰다. 그 요구에 따르는 것과 복종하지 않는 것, 똑같이 두려운 두 선택지를 가늠해보는 듯했다. "그런 이야기 대부분은 거짓말이다." 남자가 다시 말했다. "모든게 거짓인 건 아니다. 대부분이 그렇다는 거다. 내 이름은." 그는 그렇게 말하며 나무통 위에 앉았다. 팔꿈치를 무릎에 대고 이마는 손바닥에 댄 채 깊이 숨을 들이쉬더니 허리를 세워 앉았다. 지쳤지만 위엄 있는 모습이었다. 채취 작업자와 선원들은 각자의자리에서 고개를 숙인 채 그대로 남아 있었다. 소년이 죽 늘어서있던 통 중에서 작은 것 하나를 굴리며 앞으로 나왔다. 그러고는용감하게도 남자 곁에 그 통을 놓고 앉았다. 키 큰 남자는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인 것 같았다. 그러나 그 동작은 워낙 순식간에 지나갔고, 별 뜻 없이 고개를 갸웃한 것일 수도 있는, 감지하기 어려운 움직임이었다. - P17
"호칸이다." 남자가 불속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첫번째 모음은U로 발음되었는데 즉시 o로 변했다가 다시 a로 변했다. 다만 소리가 연달아 변한다기보다는 왜곡되거나 휘어져 단 하나의 소리에 세 가지 소리가 동시에 들어가도록 발음해야 했다. "호칸 쇠데르스트룀. 성을 써야 했던 적은 한 번도 없다. 한 번도 써본 적 없다. 아무도 내 이름을 발음하지 못한다. 여기에 도착했을 때 나는영어를 할 줄 몰랐다. 사람들이 내 이름을 물었다. 나는 호칸이라고 대답했다." 그가 가슴에 손바닥을 대고 말했다. - P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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