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우슈비츠의 자매 - 나치에 맞서 삶을 구한 두 자매의 실화
록산 판이페런 지음, 배경린 옮김 / arte(아르테) / 2024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나치가 점령한 네덜란드에서 목숨을 걸고 유대인들의 도피와 생존을 돕고자 애썼던 린테와 야니 두 자매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 에세이며 기록문학이다. 특히, 절망 속에서 그리고 하루하루 피를 말리는 듯한 긴장감 속에서 유대인들의 도피를 돕기 위해 신분증을 위조하고 전달하고 다시 배급권을 받기 위해 동분서주 하고 안전한 피난처를 찾아 백방으로 수소문하고 헤매고 다니는 야니의 활약상을 읽어 나가다보면 너무 가슴이 조마조마해서 역시 아무리 뛰어난 소설일지라도 이 실화를 이길 수 없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짦은 프롤로그를 빼고 책은 총 3개의 장으로 구성이 되어 있는데 'I. 전쟁'과 'II. 하이네스트'에서는 독일이 네덜란드를 점령하고 유대인 말살 정책을 펴 나가는 동안 유대인들의 도피와 생존을 위하여 안전한 도피처를 제공하고 위조 신분증을 구하기 위해 각계각층의 조력자들과 협력하는 일, 그 과정에서 동지들이 잡혀 들어가고 배신을 하는 사람이 생기고 피난처가 다시 위험에 처하는 등의 우여곡절을 겪는데, 그 위기의 순간들에 대응하는 야니와 린테 자매의 용감무쌍한 일화들이 마치 소설인듯 펼쳐진다. 특히 동생인 '야니'는 수 많은 어려움과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에서도 한 번도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았던 불굴의 투사이다. 'III. 생존'에서 결국 도피처였던 '하이네스트'가 발각이 되고 언니 린테, 야니, 부모님, 남동생 야피, 그리고 '하이네스트'에 피신해있던 유대인들이 모두 잡혀 아우슈비츠로 이송된다. 



그 동안 아유슈비츠를 비롯한 유대인 수용소의 실상이야 여러 책이나 영상을 보면서 익히 알고 있다고 생각했고 익히 들어왔고 보아왔던 사실들이 이 책에서도 변함없이 일어나지만 소설이 아닌 실화로서 소상히 알게 된 것은 처음이어서 책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 한 사람, 한 사람 모두 너무 실감나게 다가왔고 말로 다 할 수 없는, 인간으로서 인간이 아닌 상황에 직면한 그 사람들의 실상을 마주하고 있자니 뭐라 말로 다 표현하지 못할 슬픔이 밀려와서 ... 정말 눈물이 쉴 새 없이 흘렀다. 린테와 야니, 그리고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안네 프랑크 자매는 아유슈비츠에서도 살아남았고 1944년 10월 30일, 아우슈비츠 ㅡ 비르케나우의 최후의 선별 작업을 거쳐 독일의 베르겐 ㅡ 벨젠 수용소로 이송된다. 그곳은 다른 폴란드 내의 수용소와 달리 절멸 수용소가 아니었음에도 패망이 얼마 남지 않은 독일의 무관심과 잔혹 무도한, 비인간적인 관리로 인하여 수많은 유대인들이 죽어나갔다. 린테와 야니 자매도 전염병에 걸려 죽음 직전의 상황까지 갔었고 살아남았지만, 마르고트(안네 프랑크의 언니)가 죽자 안네도 살 희망을 잃고 곧 죽음에 이르고 만다. 



1945년 4월 15일, 영국군이 베르겐ㅡ벨젠을 해방시켰을 때 6만 여명의 수감자가 자유를 찾았는데 수용소 부지 곳곳에 쌓인 시체만 해도 1만 3,000 여 구에 달했고, 6만 명 중의 4분의 1이 해방 이후 몇 주 동안 세상을 떠났다. 린테와 야니 자매는 구출 당시 몸무게가 불과 25 킬로그램 정도에 불과해서 살아있는 것이 기적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베르겐ㅡ벨젠의 열악한 상황을 단적으로 증명한다고 생각한다. 자매가 귀환 중에 만난 친절한 치과의사 선생님의 도움으로 암스테르담까지 무사히 귀환 하였고 린테, 야니 자매의 가족이 상봉하는 장면에서는 그냥 나도 모르게 눈물이 줄줄 줄줄 계속 흘렀다. 이건 실화니까 난 마음껏 울어도 되잖아 그렇게 합리화하면서 계속 눈물을 흘렸다. 마지막에 '하이네스트, 그 이후'를 읽으면서도 계속 눈물을 흘렸다. 왜냐하면 야니, 린테 자메와 같이 유대인들을 살리기 위해 활동하다가 죽거나 살해당한 협력자들과 활동가들의 이름, 활약상, 생몰연도 등이 나열되어 있었는데 같이 활동했던, 나에게도 이제 익숙한 이름들을 보고야 말았기 때문이다. 산 사람, 살아 돌아온 사람이 너무 적었기 때문이다. 



린테와 야니 자매의 가정은 가난했지만 부모님 두 분이 서로 사랑하셨고 또 화목해서 가족이 모여 식사를 하는 자리에서는 서로 하고 싶은 말들, 나누고 싶은 이야깃거리가 한 가득이었다. 각자의 꿈과 계획에 관해 상의를 하기도 하고 사업이나 가족, 돈에 대해 스스럼없이 대화를 하는 분위기였다. 야니는 전쟁 전에도 파시스트가 판을 치는 마당에 어떻게 가만히 앉아 있겠느냐며, 세상이 불구덩이에 빠졌는데 어떻게 그런 끔찍한 인간을 지도자로 뽑은 독일인들과 아무렇지도 않게 일을 할 수 있느냐며 아빠를 나무라기도 했던 딸이었다. 아삐와 딸이 이런 언성을 높이는 대화를 하는 일이 잦아서 가족들은 그럴 때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곤 했다. 그러다가 갑자기 린테가 자기는 대스타가 될 거라고 하면서 노래를 부르면 가족들은 다시 웃음을 터뜨리고 식탁 주위에 차올랐던 긴장감이 사라질 즈음 창 밖 거리에서 아이스크림 장수가 <그 무젤만을 아시나요?> 노래에 맞춰 종을 울리며 지나간다. 장난스런 표정으로 엄마의 눈치를 살피던 남동생과 자매는 못이기는 척 허락하시는 엄마의 미소에 꼬마들처럼 문밖으로 우르르 달려나갔다. 이런 따뜻한 기억을 간직한 두 자매는 아우슈비츠ㅡ비르케나우 수용소에서도 함께 힘을 돋우며 서로가 서로를 격려했다. 



발가 벗겨진 채... 혹은 비를 쫄딱 맞으며... "몇 시간이고 점호가 이어졌다. 중간에 숫자를 틀리면 처음부터 다시 시작했다. 수백 명이 거대한 체스판 위의 폰처럼 늘어섰다. 도중에 누군가 풀썩 쓰러지면서 대열에 구멍이 생기기도 했다. 야니는 제 앞에 선 여자의 등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카포나 나치 여성 교도관들에게 저항하고 싶은 마음을 눌렀다. 빗줄기도, 허기도, 벌벌 떨리는 몸을 타고 흐르는 고통도 애써 무시했다. 사람들은 그야말로 양파가 손질되듯, 본질만 남을 때가지 한 꺼풀 한 꺼풀 발가벗겨졌다. 시작은 직장이었다. 뒤이어 학교에서, 집에서, 고향에서 쫓겨났다. 이웃을 잃고 친구를 잃었다. 가족을 빼앗기고 자유를 빼앗겼다. 종래에는 옷도, 머리칼도, 그림자까지도 모두 빼앗기고 말았다. 하지만 중요한 건 본질이었다. 내가 지켜야 할 것, 나의 본질, 나 자신. 그것만은 뺏기지 말자." (353쪽) 스스로의 모습을 확인할 수 없었지만 자신에게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를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이 있는데 바로 유령처럼 수용소를 배회하는 산송장을 보는 것, 바로 '무젤만'이라 불리는 존재들을 말한다. 무젤만이란 그런 존재들을 말한다. "나치가 본격적으로 손을 쓰기도 전에 스스로를 놓아 버린 자들", "혼수상태나 다름없는 무젤만의 몰골", 파시스트들에게는 그것이 화장장의 굴뚝에서 끊임없이 피어오르는 연기보다 더 큰 승리의 기쁨을 안겨주는 존재들이고 '선별 과정'에서 가장 먼저 선별 됐다. '무젤만'은 마음 속에서 자신을 이미 가스실에 가두는 사람들이다. "하지만 야니는 스스로를 포기하고 싶을 때마다 다른 이들은 가지지 못한 것을 생각했다. 바로 의지할 사람이었다. 자매는 자아를 잃지 않도록 서로를 도왔다. 서로의 존재는 자신이 누구인지를 끊임없이 일깨워 줬다. 나는, 우리는, 암스테르담에서 온 자매라는 사실을." (354쪽)



"무젤만(Muselmann)은 원래는 '이슬람교도'를 뜻하는 단어이지만 나치수용소에서 '산송장' 혹은 '더 이상 인간이라 보기 힘든, 좀비 같은 상태의 사람'을 칭하는 은어로 사용됐다(옮긴이 주)." 무젤만이라는 용어는 프리모 레비의 <이것이 인간인가>에서도 설명을 찾을 수 있다. 구입 해 놓고 앞 쪽만 겨우 읽고 말았지만 궁금해서 그의 책에서 '무젤만'에 대한 설명을 찾아 읽어 보았다. 

"... ...가스실로 가는 무슬림들은 모두 똑같은 사연을 갖고 있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아무런 사연도 갖고 있지 않다. 그들은 무능력 때문에, 혹은 불운해서, 아니면 어떤 평범한 사고에 의해 수용소로 들어와 적응을 하기도 전에 학살당했다. 그들은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 독일어를 배우기도 전에, 규율과 금지가 지옥처럼 뒤얽힌 혼돈 속에서 뭔가를 구별해내기도 전에 그들의 육체는 가루가 되었다. 선발에서, 혹은 극도의 피로로 인한 죽음에서 그들을 구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그들의 삶은 짧지만 그들의 번호는 영원하다. 그들이 바로 '무젤매너'Muselmammer(무슬림), 익사자, 수용소의 척추다. 그들은 끊임없이 교체되면서도 늘 똑같은, 침묵 속에 행진하고 힘들게 노동하는 익명의 군중,비인간들이다. 신성한 불꽃은 이미 그들의 내부에서 꺼져버렸고 안이 텅 비어서 진실로 고통스러워할 수도 없다. 그들을 살아 있다고 부르기가 망설여진다. 죽음을 이해하기에는 너무 지쳐 있기 때문에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그들 앞에서, 그들의 죽음을 죽음이라고 부르기조차 망설여진다."(136쪽)



프리모 레비의 <이것이 인간인가>는 프리모 레비 자신이 직접 경험한 사실만을 기술한 기록문학이다. 반면 <아우슈비츠의 자매>는 록산 판이페런 작가가 린테, 야니 자매가 유대인들의 은거지로 오랜 시간 사용했던 "하이네스트"에 살기 위해 이사를 하였고  오래된 저택을 복구하면서 바닥의 카펫을 뜯어냈을 때 거의 모든 방바닥에 지하실 문이 설치돼 있는 것을 발견했다. 낡은 나무 바닥 아래로 거대한 은신처를 발견하게 되었는데. 그곳에는 타고 남은 양초, 악보, 오래된 저항단체 신문이 가득했고 그것이 하이네스트 역사 복구의 시작점이 된 것이다. 이후 6년이라는 시간 동안 조사를 계속하였고 인근의 사람들, 이전 소유주, 지역 토박이들을 인터뷰 하면서 이 저택이 제 2차 세계대전 당시 네덜란드의 중요한 한 시기, 집단 수용소로 향하는 기차가 매번 발 디딜 틈 없이 굴러 가던 그 시절, 하이네스트는 유대인 자매가 운영하는 거대한 유대인 은신처이자 저항활동의 중심지였음을 알게 된다. 프리모 레비의 <이것이 인간인가>와 <아우슈비츠의 자매>는 그래서 아우슈비츠의 생존기록이라는 공통점을 갖고 있음에도 서로 다른 결을 가진 기록문학일 수 밖에 없다. 함께 활동하고 목숨을 거는 위험을 감수하였고 수용소 생활도 함께 하면서 두 자매는 서로를 의지하였다. 가족은 언제나 함께 하는 것이라는 아버지의 말씀을 끝까지 지키려고 최선을 다했다. 두 자매는 서로에게 승리를 안겨주는 존재로서, 결국은 서로의 생명을 구하는 존재가 되었다. 

프리모 레비의 책도 얼른 읽어봐야겠다. 



마지막으로 프리모 레비의 책에서 '작가의 말' 다음 페이지에 실린 시詩를 남겨 놓는다. 린테와 야니를 생각하면서... 


따스한 집에서

안락한 삶을 누리는 당신,

집으로 돌아오면

따뜻한 음식과 다정한 얼굴을 만나는 당신,

        생각해보라 이것이 인간인지.

        진흙탕 속에서 고되게 노동하며

        평화를 알지 못하고

        빵 반쪽을 위해 싸우고

        예, 아니오라는 말 한마디 때문에 죽어가는 이가.

        생각해보라 이것이 여자인지.

        머리카락 한 올 없이, 이름도 없이,     

        기억할 힘도 없이

        두 눈은 텅 비고 한겨울 개구리처럼

        자궁이 차디찬 이가.

        이런 일이 있었음을 생각하라.

당신에게 이 말들을 전하니

가슴에 새겨두라.

집에 있을 때나, 길을 걸을 때나

잠자리에 들 때나, 깨어날 때나.

당신의 아이들에게 거듭 들려주라.

        그러지 않으면 당신 집이 무너져 내리고

        온갖 병이 당신을 괴롭히며

        당신의 아이들이 당신을 외면하리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정원의 쓸모 - 흙 묻은 손이 마음을 어루만지다
수 스튜어트 스미스 지음, 고정아 옮김 / 윌북 / 2021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정신과 의사로서의 임상 경험, 그리고 정원, 텃밭을 가꾸는 정원사로서의 경험이 어우러진 글. 사람들의 다친 마음을 치유하는 실제 사례들이 폭 넓게 제시되어 퍽 읽기 좋았다. 무엇보다 손바닥 정원과 텃밭을 가꾸는 나와 공감대 형성이 넘넘 잘된다는 점에서 읽는 동안 뿌듯하고 행복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아름답고 광포한 이 세상에서 - 러시아대표단편문학선 세계단편문학선집 2
니콜라이 고골 외 지음, 최병근 옮김 / 써네스트 / 2013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단편집의 제목도, 안드레이 플라토노프의 동명의 단편도 가슴 벅찬 감동을 선사해주었다. 그동안 알지 못했던 러시아 단편 문학 거장들의 작품들을 만난 것은 행운이었다. 푸시킨, 고골, 체호프, 부닌, 알렉산드르 쿠프린, 레오니드 안드레예프, 미하일 숄로호프 등 모두 기억하고 싶은 작가들이다.

댓글(6) 먼댓글(0) 좋아요(2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잠자냥 2024-05-27 17:5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책 참 좋죠! 숨어있는 명작이 많이 담긴 보물 깉은 책입니다!

은하수 2024-05-27 17:58   좋아요 0 | URL
정말요!!!
진짜 작품마다 다 개성이 다르고 어쩜 하나같이 좋은지.. 버릴 작품이 하나도 없어요. 이런 단편집 또 만날수 있을까 싶어요~~!!!^^

페넬로페 2024-05-27 21:2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러시아는 왜 이리 위대한 작가가 많은 걸까요?
이 책도 읽고 싶어지네요^^

은하수 2024-05-27 23:18   좋아요 1 | URL
그러니까... 우리와 비슷하게 머리?가 참 중요한거 아닐까 생각하게 되죠^^
이 책 읽으며 ... 그 미운맘이 좀 희석이 되네요. 좋은 작품입니다.
읽으시면 후회 안하실거에요!

singri 2024-05-27 23: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러시아는 참 .
미운데 미워할 수 없는 입니다.ㅎ

은하수 2024-05-27 23:20   좋아요 1 | URL
ㅎㅎ
역시 같은... 맘이시네요.
저도 이 책 선택할 때 그런 맘이었는데...뛰어난 작품, 작가가 넘 많아서 진심 미워하게 되질 않아요^^
 
[eBook] 플래너리 오코너 현대문학 세계문학 단편선 12
플래너리 오코너 지음, 고정아 옮김 / 현대문학 / 2015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오늘 낮에(그게 벌써 며칠 전이다. 임시저장 한 상태로 진행을 못하고 계속 대기...) 플래너리 오코너의 단편집을 다 읽고 미뤄두었던 집안을 청소하고 썬룸에서 다 마른 빨래를 개어 차곡차곡 주인별로 쌓아 놓고 날이 좀 선선해졌길래 마당에 나가서 잡초를 좀 뽑았다. 잡초를 뽑을 생각은 아니었고 정말 정말 오래 읽고 있었던 현대문학의 <플래너리 오코너> 단편집을 끝내고 나니 기분이 너무 상쾌하고 뿌듯해지기도 했고, 뭔가 나를 힘들게 하던 숙제 하나를 마친 듯 개운해져서 집안일 대충 정리해놓고 마당에 어슬렁어슬렁 나가본 거였다. 마침 커피도 한 잔 내린 데다가 썬룸에서 내다보니 마당에 보라색 붓꽃이 제대로 난리가 났다. 그래서 커피 들고 어슬렁어슬렁 나가 붓꽃 앞에 쪼그리고 앉아 쳐다보다 그 옆에 무리지어 피어있는, 막 꽃을 피우고 있는 플록스도 보고 이름은 별로지만 유럽이 원산지라는, 꽃분홍색으로 무리지어 피는 끈끈이대나물도 이쁘다 이쁘다 하며 바라보다 쪼그려 앉은 김에 잡초를 뽑게 되었다. 이 잡초 뽑기라는 것이 쭈그려 앉기라는 불편한 자세에도 불구하고 한 번 시작하면 1 시간 지나는 건 후딱이다. 하다보면 묘하게 투지를 불사르게 만드는 특장점이 있는 일이라 내 오늘은 기어코 너희들을 다 뽑아버리고 말리라는 하등 쓸모없는 노력을 경주하게 된다는 것이다. 물론 잡초는 이길 수가 없다!!! 잡초와의 싸움은 언제나 백전백패... 만고의 진리다~~~^^ 그나마 지금이니까 이런 생각을 하지 비가 잦은 6월이 오면 날도 뜨거운데다 아무리 준비를 철저히, 빈틈없이 싸매고 임해도 등짝이 너무나 뜨겁고 얼굴엔 땀이 비 오듯 쏟아진다. 그야말로 미친 짓이 된다. 비 한 번 오고 돌아서면 감당 못할 정도로 퍼져서 나중엔 그냥 잔디 깎는 기계로 같이 밀어버리는 수밖에 달리 방법이 없다. 이 맥락없이 아무때고 시작하게 되는 잡초뽑기 루틴은 당분간 지속이 될 것이다. 별다른 '충동적인 발상'으로 다른 일을 만들지 않는다면 말이다. 오늘 이리 나의 일상을 장황하게 묘사하는 건 물론 <플래너리 오코너>의, 건조하고 내내 긴장감을 유발하며 섬뜩함이 오히려 빛을 발하는 단편집을 읽었기 때문이다. 평온한 일상의 달콤함이라니... 얼마나 좋은지 ... 그러나 이 단편집 속에 일상을 찢어버리는 섬뜩함이 가득하다.  





현대문학에서 출간하고 있는 세계문학단편선을 많이 읽지는 않았는데 참 좋다는 생각을 한다. 작가의 이름이 곧 책의 제목이 된다는 점도 신선하다. 물론 별로인 작가도 있지만 그럼에도 이 시리즈를 많이 읽고 싶다는 욕구는 늘상 가지고 있다. <대프니 듀 모리에>의 단편집을 읽고 좋아서 다시 이 책을 선택을 하게 된 것인지 아님 이 책을 먼저 다운 받아 놓고 읽다 질려서 <대프니 듀 모리에>의 책을 구입한 건지 기억이 나지 않지만 이 책을 구매한 게 자그마치 2015년 4월이었다고 구매 내역에 있으니 구입한 지 9년이 지난 시점에서 다시 읽게 된 것이다. 그 동안 내내 방치해 놓았다가 요 근래 현대 문학 세계문학 단편선이 자꾸 여기저기서 눈에 들어 오길래 갑자기 발동이 걸려 읽어보자 싶었는데 기억도 나지 않지만 그때의 알 수 없는 끌림에 이 책을 선택한 나를 아주 칭찬하고 싶어진다. 플래너리 오코너는 25 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루푸스(홍반성 낭창)가 발병하고 오랜 투병 기간을 거쳐 39 세에 생을 마감했다. 장편 소설 2권과 단편 소설 32 편, 그리고 여러 권의 평론집과 에세이를 남겼다(네이버 지식백과 참조).  플래너리 오코너의 단편 작품들은 특히 높은 평가를 받아서 사후 출간된 그녀의 단편집은 2009년에 전미 도서상을 수상하였을 뿐만 아니라, 이 상의 60주년(2010년)을 앞두고 그동안의 소설 부문 수상작 중에서 최고의 작품이 무엇인지에 대해 인터넷 설문 조사를 실시했을 때 단편소설집으로서는 이례적으로 '최고 중의 최고'의 자리에 올랐다. 31 편의 단편을 읽고 나면 그녀의 단편 작품들이 편하게 읽을 수 있는 작품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시대를 막론하고 읽히고 있다는 것에 금세 수긍하게 된다. 이 작품들을 쓸 당시 작가의 나이를 생각하면 더 놀랍지 않을 수 없다. 





31 편의 단편들 중 몇 몇 작품(제라늄, 심판의 날...등은 뉴욕이다)을 제외하고 작품의 배경은 미국 남부 지방이다. 이 남부는 노예제는 폐지되었지만 아직 흑백의 분리가 남아있고 북부에 비해 낙후한 지역이다. 산업의 기반은 농장을 경영하는, 당연히 백인이다. 그리고 흑인들은 여전히 노예와 같은 처지이며 가난한 이방인들과 젊은이들이 안정적인 일자리를 찾지 못하고 궁핍한 생활에 처해있는 현실을 포착해 내어 보여준다(작물, 추방자, 파커의 등 등등 ). 종교적으로도 독실해서 주로 프로테스탄트 신앙이 삶 전반을 지배하고 있는 곳이며 기반을 잡지 못한 젊은이들은 종교적으로 빠져들고 곳곳에서 설교자들이 등장하여 사람들을 모으는 모습이다(감자 깎는 칼, 강, 죽은 사람보다 불쌍한 사람은 없다 등). 이렇게 혼란스러운 남부 지역으로서의 작품의 배경은 작가 자신이 남부 출신이고 외가와 친가 모두 독실한 카톨릭 신앙을 가졌다는 점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백인과 흑인은 여전히 남부의 농장에서 지주와 노예로 나뉘어 있음을 보여주고 있으며 도시 지역에서는 흑인들의 지위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혼란스러워 한다(제라늄, 계시, 오르는 것은 모두 한데 모인다, 심판의 날 등). 또한 작가가 북부에서의 생활을 하던 5 년여의 시기는 대학 생활, 여러 작가들과의 교류를 하며 작가로서의 첫발을 내딛던 시기였는데 고작 25 살이라는 나이에 루푸스의 발병으로 고향으로 돌아와 어머니와 함께 농장에서 지내며 작품 활동을 이어나간다. 젊은 여성으로서 발전한 북부에서의 생활의 경험은 작품에서 결코 긍정적으로 반영되지는 않는다. 젊은 사람들은 교육을 받으러 북부로 떠나지만 그렇다고 해서 성공적인 삶을 보여주는 것은 아니다(깊은 오한, 계시, 파트리지 축제). 남부 지방이 북부보다 낙후되어 있고 전반적으로 궁핍한 삶의 모습들을 보여주고 있지만 남부와 북부의 상황이 대비된다기 보다는 미국이라는 사회의 혼란상이 통합되어 나타나는 양상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작가가 추구하는 저런 문제 의식이나 주제들은 오늘날의 상황과는 다소 간의 차이와 거리가 분명 존재 한다고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작품에 드러나는 배경적 지식이나 주제의식보다는 다른 어떤 요소를 더 눈여겨보게 되고 끌리는 건 나에게 있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자연적으로 그런 생각을 하게 되니 말이다. 그런 생각이란 바로 인물들이 자주 보여주는 어떤 말, 행동, 판단, 호기심, 선입견 같은 것들. 바로 한 순간의 충동적인 행동, 섣부른 판단, 혹은 과도한 호기심과 선입견 등등이 어떤 불행한 결과를 몰고 올지도 모른다는 것을 알았다면 과연 어땠을지, 그럼에도 그 순간의 선택과 충동적인 결정을 후회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을지 궁금해지는 것이다. 다시 돌아간대도 같은 결정을 할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을 보면 말이다. 여기의 인물들은 아마도 분명 다시 그런 결정을 하지 않을 거라고, 그러한 생각을 하지 않을 거라고 말할 것이다. 그건 너무 자명해서 이론의 여지가 없지만 그래서 자꾸 눈에 들어오고 거슬리고 그래서 긴장하게 되고 불행하거나 예기치 못한 결말에 이르러서는 그 가차없음에 가슴이 섬뜩해짐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플래너리 오코너의 완벽함을 여기에서 다시 실감하게 된다! 




 

'좋은 사람은 드물다', '당신이 지키는 것은 어쩌면 당신의 생명', '가정의 안락', '오르는 것은 한데 모인다' 등의 작품은 그 결말이 한편 섬뜩하고 무서워서 정말 인간의 본성에 대해 진지하게 다시 생각해 보게 된다. '좋은 사람은 드물다'의 초반은 캘리포니아로 여행을 떠나는 여느 가족과 별반 다르지 않게 소란스럽고 어수선하다. 이 정신없는 가족은 할머니와 아들 부부, 그리고 어린 세 명의 자녀들과 고양이다. 아들이 운전하는 차에 타고 고속도로를 달리던 중  할머니는 "충동적으로", 그냥 말하면 안들어줄거 같아 "약간의 거짓말을 섞어" 자신이 젊은 시절 방문한 적이 있는 대농장을 가고 싶다고 말한다. 아이들도 보채고 난리라 마음이 약해진 아들은 차를 돌려 샛길로 빠져 어머니가 말한 대농장의 저택을 찾아가는데, 어느 순간 할머니는 그 대농장이 사실은 조지아 주가 아니라 테네시 주에 있다는 생각이 퍼뜩 떠올랐고, 놀라서 발로 여행 가방을 걷어차는 바람에 놀란 고양이가 운전하는 아들의 목으로 튀어오르고 차는 낮은 협곡 아래로 굴러 내리는 사고를 당한다. 가족들은 차 밖으로 튕겨져 나가버리지만 다행히 큰 부상을 당한 사람은 없다. 불행 중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아님 차라리 다쳐서 일어나기 힘든 상황이었으면 나았다고 해야 할지... 뒤에 일어난 일을 생각하면 차라리 그 편이 나았을지도 모르겠다. 때마침 지나가던 차를 보고 세웠는데... 아뿔싸! 차에서 내리는 세 남자가 모두 총을 들고 다가온다. 이때부터 긴장감이 극에 달한다. 그런데 엎친 데 덮친 격... 운전석에서 내린 남자는 신문에 난 "탈옥한 죄수 부적응자"가 아닌가. 극도로 위험한 인물임에 틀림없는데 하필... 뭐 그 뒤는 대충 말하지 않아도 알만하다. 총을 세 자루나 들고 내렸는데 그걸로 뭘 했겠는가!

그러니 차라리 사고가 났을 때 곧장 일어날 정도가 되지 않게 좀 더 다쳐서, 좀 더 누워있었다면 흉악한 놈들을 만나지는 않았을지도 모르는거 아니겠는가 말이다. 그럼 최소한 몰살은 면했을 지도 모르겠다. 정말 세상이 왜 이리 점점 더 험악해지는지... 외출하면서 빗장도 걸지 않던 시절도 있었는데... 그런 시절이 대체 언제였던 건지... 정말로 "좋은 사람은 참 드물다"는 말에... "왜 아니겠어요!" 하고 대답해 주고 싶다. 




'당신이 지키는 것은 어쩌면 당신의 생명'에는 귀머거리 딸과 외롭고 황량한 마을에서 살고 있는 노부인이 등장한다(두 모녀의 이름도 똑같다. 루시넬 크레이터. 그러니 두 모녀는 사실 한 몸과 같다). 툇마루에 딸과 앉아 있을 때 딱 봐도 그냥 떠돌이이고 앙상한 몸에 왼팔이 절반뿐인 남자가 지나가다 노부인의 집 마당으로 들어온다. 남자는 좋은 사람일까. 아니다. 교활하고 속내를 알 수 없는 사람이다. 되지도 않을 말장난과 논리로 노부인의 관심을 끌고 필요와 욕구를 충족하려 한다. 그의 관심은 노부인의 집 헛간에 있는 녹슨 자동차에 있다. 노부인의 필요를 간파한 그는 얼렁뚱땅 들어앉아 남자 없는 집의 살림살이를 고쳐주고 지붕도 얹어주고 뭐도 고쳐주고... 하면서 눌러앉는 듯 보인다. 일단 노부인의 관심을 계속 붙들고 있어야 한다. 아직 자동차는 고치지 못했으니 말이다. 그러나 노부인의 관심은 그가 귀머거리 딸의 남편으로 그들의 집에 눌러살 수 있는 것인가에 있다. 이게 정말 가당치도 않은 일이란 걸 읽다 보면 다 알겠는데 노부인과 귀머거리 딸만 모른다. 노부인은 딸의 앞날을 생각하여 이 집에 눌러앉아 살아줄 남자가 절실하다. 그런데 선택의 여지 없이 그들에게 떨어진 사람이 이 떠돌이 청년이다. 그래서 이미 파국이 예정되어 있다. 드디어 자동차를 고쳐 초라한 외팔이 청년에서 남자로서의 권위를 회복하고 의기양양해진 떠돌이 청년은 결혼을 받아들이고 어찌저찌 돈을 받아내어 귀머거리 아내를 태우고 신혼여행이란 것을 떠난다. 청년의 속내는 알지도 못하면서 어찌 귀하디 귀한 딸을 이리 쉽게 내어준단 말인가...!

"나는 자네가 아니라면 누구에게도 딸을 주지 않았을 거야. 하지만 나는 자네 행동거지가 제대로 된 것을 보았어." 이게 신혼여행을 떠나는 청년에게 노부인이 한 말이다. 딸과는 영원히 안녕이겠지. 왜냐하면 자기 이름도 사는 곳도 말할 줄 모르는 노부인의 소중한 딸 루시넬 크레이터는 집으로부터 160 킬로미터 정도를 떨어진 소도시의 식당에 버려지기 때문이다. 그의 목적은 모빌로 가기 위한 자동차를 얻는 것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참으로 끔찍한 결말이다.




할머니의 사소한 거짓말, 순간적인 충동이 일어나는 것은 여행 중에 있었으니 크게 잘못이랄 것도 없다. 평소라면 그랬다. 또 노부인의 선택은 어디에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굳이 따져보자면 애초에 집안에 들이지 말았어야 했겠지만... 길 가는 불쌍한 젊은이에게 약간의 은혜를 베푸는 것이 뭐 그리 큰 잘못일까. 그 젊은이가 선량한 사람이었다면 아무 문제가 없었겠지만.. 그러나 소설 속 현실은 전혀 그렇지 못하다. 사소한 거짓말, 순간적인 충동의 결과가 너무도 참혹한 현실로 이어진다. 정말 그 가차없이 행해지는 악인들의 행동은 충동적이면서 계획적이고 일상적이어서 더 무섭다. 피할 방법이 없다. 그러니 그 순간 악인이 되지 못한 우리는 어찌해야 한단 말인가. 그저 평범한 일상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기를, 그저 악인을 만나지 않기를, 의도적으로 더해진 악담에 분노하지 않기를, 순간적인 분노를 잘 다스리기를, 끝까지 선행을 베풀 수 있는 힘을 주시기를, ... 이렇게 기도해야 하는 것일까. 플래너리 오코너는 이에 대해서 답을 제시하지는 않는다. 적나라하게 파헤쳐 최악을 보여줄 뿐.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줄 뿐. 그래서 더 간절히 바라게 될 뿐이다. 지금 이 순간을 소중히 여기기를. 평온한 일상에 감사하기를,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음에 실망하지 않기를, 그래서 지금 더 행복해지기를.... 더 감사하게 되는 오늘이다. 이것이 작가가 나에게 주는 메세지이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3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마루☆ 2024-05-22 10: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엄청난 에너지로 서평 오려주셔서 감사히 읽었습니다. 너무 공감가는 ‘잡초와의 싸움‘, 산 지 9년만에 꺼내 읽은 책의 39살에 죽은 작가 이야기, 섣부른 판단과 충동, 호기심으로 불행한 결말에 이르는 인물들에 대한 단상 그리고 이어지는 작품 설명 모두 즐겁게 읽었습니다. ~^^

은하수 2024-05-22 14:07   좋아요 1 | URL
즐겁게 읽으셨다니 저도 기쁩니다~~^^
이런 단편집 리뷰가 사실 제일 어렵더라구요. 하하..
오늘 하루도 무사함에 감사하는 맘입니다.
마루☆님께서도 평온한 하루이셨길 바랍니다^^
 
이아생트의 정원 문지 스펙트럼
앙리 보스코 지음, 정영란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24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수많은 상징과 은유, 그리고 몽상과 마법의 정원을 깨고 사랑의 기적을 완성한 이아생트와 콩스탕탱의 마지막이 뇌리에 각인될 작품. 결국 이아생트의 정원은 지금 우리에게 충만한, 봄을 맞이한 온 세상, ˝온 누리의 정원 혹은 이 대지임을 증거˝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랴. 두 젊은이도 피어나길...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