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는 종이책보다 더 나은 것을 발명하지 못했다
/내 손으로 책을 만들수 있다는 발상... 재밌겠다.
정말로 아무 것도 읽을 것이 없다면..?
내가 쓰고 책을 만들면 된다. 그것을 읽으면 된다.
간단하네!

제가 책이 굉장하다고 생각하게 된 계기는 1995년한신 대지진 때였습니다. 아파트가 기울 정도의 재난 상황이었으니 가구는 전부 다 넘어지고 당연히 책장도 넘어졌습니다. 철로 만든 책장은 엿가락처럼 휘어져서 전부 버렸습니다. 그런데 책은 무사했습니다. 표지가 파손된 책은 있었지만, 제본이 흩어지거나 찢어져서 읽지 못하게 된 책은 수천 권의 장서 중 한 권도 없었습니다. 게다가 대체로 꽂아 둔 대로 바닥에 떨어졌으니 책을 금방찾을 수 있었습니다. 책장을 새로 사서 책을 원래 자리에꽂는 작업도 간단했죠. 대학 연구실의 책장은 붙박이장이라서 책만 바닥에 여기저기 흩어져 있더군요. 이것도 몇 시간만에 원래대로 돌려 놓을 수 있었습니다. - P113

우리 집은 다행히 곧 전기가 들어와서 불빛을 사용할 수 있었지만 설령 전기가 들어오지 않아도 종이책은낮이라면 자연광만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전자책이라면 전기가 없으면 끝입니다. 그래서 전기가 들어올 때까지 읽을 수 없습니다. 만약 장기간 정전 상태가계속된다면 인프라가 부활할 때까지 수 주간, 수개월 책없이 생활해야 합니다. 저처럼 활자가 없으면 살아 있는느낌이 들지 않는 사람에게 아주 괴로운 일입니다. - P114

그때 종이책은 정말로 ‘위기에 강하구나‘ 하고 
절실하게 생각했습니다. 홍수가 와서 책이 다 젖어도 말리면읽을 수 있습니다. 물론 화재로 타 버리면 끝이긴 합니다만 그것 이외의 자연재해에는 강합니다. - P114

게다가 전자책은 손으로 만들 수 없지만 종이책은스스로 만들 수도 있습니다. 시중에서 팔리는 책의 수준에는 미치지 못하더라도요. 하얀 종이에 연필이든 펜이든 문자를 써서 그것을 철하면 ‘책과 같은 것‘을 만들 수있습니다. 정말로 아무것도 읽을 것이 없다면 저는 아마도 책을 쓸 겁니다. 그리고 그것을 읽을 겁니다. 다른 사람이 읽어 주는 일도 가능합니다. 원한다면 손수 만들 수있다는 것도 종이책의 최대 강점이죠.
- P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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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도서관에 관하여




도서관에는 사람이 없는 편이 좋다
공공도서관 사서들의 연차 총회에서 도서관의 역할에관한 제언을 듣고 싶다고 요청해 주셔서 강연을 했습니다. 그때 규슈의 어느 시립도서관 이야기를 했습니다. - P19

그 도서관은 민간업자에게 업무를 위탁한 곳이라,
업자는 제일 먼저 도서관이 소장하고 있던 귀중한 향토사 자료를 폐기하고 본인 소유 회사의 불량 재고였던 쓰레기 같은 고서를 구입하는 용서할 수 없는 일을 했습니다. 그렇게 도서관의 학술적인 분위기를 해쳤음에도 도서관에 카페를 들이는 등 세상의 유행을 따르다 보니 고객 만족도가 높아져 도서관을 찾는 사람이 두 배가 되었습니다. - P19

민간 위탁을 추진한 시장은 "봐라, 내 말대로 됐지?" 하고 의기양양했고요. 도서관의 사회적 유용성을방문자 수나 대출 도서 권수 등의 수치로 판단하는 것은아무리 봐도 수요와 공급의 관계만을 중시하는 시장 원리주의자의 발상으로 보입니다. - P20

그때 문득 "도서관에는 사람이 없는 편이 좋다"라는 말이 무심결에 입 밖으로 튀어나왔습니다(정말로 문득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말하고 나서 "정말로 그렇네. 왜 도서관은 사람이 별로 없어야 도서관다울까?" 하는 생각에 잠겨서 강연 내내 그 이야기를 했습니다. - P20

제가 그동안 방문한 도서관이나 도서실 가운데 지금까지 좋은 추억으로 남아 있는 곳은 모두 사람이 거의없는 곳입니다. 제가 가기 전에는 누구의 손길도 닿지 않은 듯한 고문서를 노트에 필기하며 읽던, 어스레하고 고요한 파리 국립도서관 열람실, 오래된 문서를 장시간 심취해서 읽었던, 석양이 들이비친 로잔 올림픽 박물관 도서실. 문헌을 찾느라 몇 시간이나 보냈던 도쿄도립대학도서관의 싸늘한 폐가 서고. 저에게 ‘정겨운 도서관‘은모두 사람이 거의 없는 공간이었습니다. 아마도 사람 없고 조용한 공간이 아니면 ‘책‘이 저를 향해 신호를 보내는 불가사의한 일이 일어나기 힘들기 때문일 테죠. 정말로 그렇습니다. - P21

책이 저를 향해 신호를 보내는 경우가 있습니다. 고요한 도서관에서 서가 사이를 돌아다닐 때 그런 일이 일어나지요. 그럴 때면 제가 이 세상을 전혀 모른다는 사실에 압도당하고 맙니다. 끝없이 이어지는 서가의 거의 모든 책을 저는 읽은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 세계에 존재하는 책의 99.999999퍼센트를 저는 아직 읽은 적이 없습니다. 그 사실 앞에서 망연자실해집니다. - P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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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값비싼 독> 제3권 ~제4권

칼을 숨겨놓은 지점에 다다르기 전에 난 뒤처졌고, 들판 출입구에서 다시 따라잡았다. 안으로 들어가니 끔찍한 싸움이벌어지고 있었다. 겨우 시간에 맞춰 도착한 것이다. 그림블의 개만 남은 상황이었다.
우리가 다가갈 때 함성이 터져 나왔다. 그가 그림블의 개를묶는 데 성공한 것이다. 곧바로 함성이 또 터졌다. 그리고 개에게 목을 물린 그의 모습(오, 내 사랑!)이 내 눈에 들어왔다. - P231

내가 그림블의 어깨를 움켜쥐며 말했다.
"개를 떼어내!"
그림블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일 초만 더 그러고 있으면 내가 너무나 사랑하는 사람은 목숨이 끊어질 것이었다.
난 앞으로 뛰어나갔다. 지금껏 어떤 생명도 일부러 해한 적이 없는 나였지만, 그리고 그 커다란 짐승이 그 사람의 목에 이빨을 박은 채 뒷발로 일어섰지만, 난 달려가 그 심장 깊숙이 칼을 찔러 넣었다. - P232

말로 설명하는 시간보다 더 빠르게 불이 타올랐다. 생명의 불꽃을 유지하기 위해 케스터의 입속으로 브랜디를 약간 흘려 넣은 뒤 캠릿 씨가 물린 상처를 불로 지졌고, 고통으로 비명을 지르며 케스터가 깨어났다. 까무러친 상태라 마음의 대비가 되어 있지 않았던 것이다. - P232

"자, 자. "내가 말했다. 고통스러운 비명이 내 심장을 관통했다. "자, 다 되었어요! 이제 누구도 당신을 건드리지 않을 거예요"
캠릿 씨가 그의 상처에 붕대를 감았고, 난 찬물로 그의 얼굴을 닦아준 뒤 브랜디를 좀 더 주었다.
"상처가 깊진 않아요." 캠릿 씨가 말했다. "하지만 조금만 늦었으면 큰일 날 뻔했어요."
"늦었을 리가 없어요." 내가 말했다. "오늘 내가 이 사람의수호천사니까요." - P233

"네가 그 사람 목숨을 살렸어. 정말이야, 프루. 
그런 일은 살면서 본 적이 없어! 우리가 들판 출입문을 막 들어섰는데, 저멀리 네가 보이는 거야. ‘말도 안 돼!‘ 내가 말했지. 그 말과함께 막 뛰었어. 잰시스도 뛰고, 근데 우리가 닿기 전에 네가그 개를 끝장내버렸어 상 받을 만해, 프루!" - P233

"얘야, 그 사람이 널 만난다면, 그리고 내가 생각한 그런 사•람이라면, 분명 널 좋아할 거야." 어머니가 딱 잘라 말했다.
이불을 덮어드리는데 어머니가 내 손을 붙잡았다.
"프루. 만약 그 사람이 다리나 팔이 하나뿐이거나 천연두로 얼굴이 다 얽었다면 그게 싫겠니?"
"싫겠냐고요, 어머니?" 난 생각할 필요도 없이 바로 대답했다. ‘당연히 싫지 않죠. 오히려 더 사랑할 거예요!"
"그럴 줄 알았다, 얘야." 어머니가 아주 흡족하게 말했다.
"그 사람을 사랑하는 줄 알았어. 참 기쁘구나. 그에게서 숨지마, 프루, 코스틀리 컬러 놀이를 했을 때처럼 용기를 내서 모든 걸 다 걸어." - P243

"뭐야? 도망가는 거예요? 왜 그래요. 프루 사른?" 그가 물었다.
난 고개를 푹 숙였고, 차라리 잠자리가 되었으면 했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필사적으로 몸을 빼려 했지만 소용없었다. 그는 그냥 웃었다.
"목숨을 구해줘서 고맙다고 말하러 온 사람을 대하는 방식치곤 아주 독특한데요, 프루 사른! 호수로 뛰어들 것처럼 도망치려 하다니." 여름을 만들어내는 목소리로 그가 말했다.
그의 손을 통해 전해진 두근거림이 나를 뚫고 지나가 난 서있기도 힘들었다. - P288

아래층으로 달려 내려가 집 밖으로 나가자마자 내 눈에 들어온 광경이란. 세상의 종말도 그보다는 나을 것 같았다. 그때는 가을걷이할 필요도, 힘겹게 돈을 모을 필요도 없이 다마련되었을 테니까. 그때는 누구에게나 상황이 똑같겠지만,
이것은 우리만의 일이었고 마차 바퀴가 밀 이삭을 짓밟듯 우리를 짓밟는 것이었으니까. - P338

어마어마한 굉음은 불타오르는 곡물에서 나는 소리였다.거둬들인 곡물이, 수년의 노동으로 거둬들인 전부가, 기디언의 영혼 자체이자 우리의 미래가 활활 타고 있었다. 만물의 종말을 초래할 거대한 혜성이나 별똥별이 하늘을 가르는 것도 아니고, 덜덜 떠는 세상 위로 암흑 같은 밤하늘에서 대천사가 요란하게 나팔을 불어대는 것도 아니었다. 고작 곡물이었다. 다만 우리가 가진 전부였을 뿐! 다만 그것을 가짐으로써 기디언이 밤낮으로 노예처럼 일하고 가족을 노예처럼 부리는 일을 그만두고 보통 사람들처럼 일할 수 있을 그것, 그래서 그를 사랑 넘치는 상냥한 남자로 만들어줄 그것.  - P330

수확이 오로지 탐욕이라면 씨뿌리기는 오로지 베푸는 일이다. 아주 세심하게 모아서 쭉정이를까불러 내버리고 소중하게 모셔두었던 것을 들고 너른 들을누빈다. 가진 것이라고는 그것뿐이지만 개의치 않고, 쟁여둘생각이라곤 없이 양손에 가득 담아 모두 뿌려버린다. 앞으로나아가며 이리저리 뿌리는데, 손이 크면 더 기분이 좋다. 이지역의 방식을 잘 모르는 사람은 아마 미쳤다고 생각할 것이다. - P332

조용하게나마 오가던 어머니가 안 계시니 사른은 더욱 조용했다. 내가 어머니에게 의지했더라도 그럴 수 없게 어머니가 그리웠다. 이런저런 이유로 우리에게 의지했던 사람이 가장 그렇게 마련이니까. 그래서 어머니들은 치맛자락에 매달리는 자식들이 있을 때보다 오히려 없을 때 누가 방해라도하는 듯 일이 더 손에 잡히지 않는 것이다. 그땐 일할 마음이없으니까. 어머니가 손을 들어 올리는 모습이며, 저녁에 기진맥진해서 돌아온 나를 따뜻하게 맞아주시던 모습을 떠올리며 난 해가 길어지는 4월 내내 문득문득 주저앉아 울었다. 이따금 찾는 티비를 빼면, 이제는 기디언과 나 둘뿐이었다. 어디에나 슬픔이 가득했지만 일은 예전처럼 이어졌다.  - P3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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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값비싼 독> 제 2권




우리가 다가가자 노인들이 각자 잔을 손에 든 채로 움직임을 멈추고, 노래를 부르다가 입을 벌린 채로 나를 뚫어지게•쳐다보았다. 최신 인형극에서 쇼맨이 인형에서 손을 떼면 인형들이 한순간에 동작을 멈추듯이. 혈관이 드러난 불그레한 늙은 얼굴에, 차가운 햇빛을 받으며 여관을 등지고 앉은 그 얼굴에 겁먹은 표정이 어렸다. - P108

우리가 그들이 앉은 의자 앞을걸어가는 동안, 새끼 올빼미들이 고개를 돌리며 어깨 너머로빤히 쳐다보듯 고개들이 하나같이 천천히 돌아가며 스무 개정도의 시선이 술잔 위로 비스듬히 따라왔다.
감옥 문처럼 못이 박힌 문으로 들어가 어둑한 통로를 거쳐 실내로 들어서니 좀 더 지체 높은 사람들이 앉은 그곳에서도시선들이 내 얼굴에 꽂혔다. 그래도 바깥에서처럼 대놓고 보지는 않았다. 농부들과 그 아내들, 이른 아침 사륜마차를 타고 가다가 잠시 쉬면서 요기를 하는 사람 두세 명, 그리고 실버턴의 목사로 크리스마스를 맞아 집으로 가는 길에 말발굽이 빠져서 잠시 쉬고 있는 영주의 아들, 그들이 말없이 조심스럽게, 하지만 호기심에 찬 시선으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그들 모두, 실내의 지체 높은 사람들이나 실외의 노인들이나 모두 내 언청이 입을 쳐다보고 있다는 사실을 난 불현듯 깨달았다. 각자의 지위와 학식에 따라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터였다. - P109

‘희한하고 색다른 존재가 아닌가!‘
‘저 여인은 분명 기형으로 태어난 인물이군!‘
‘밤새 산토끼가 된 처자구먼.
‘마녀일세. 언청이가 된 추한 마녀.
그전에 럴링퍼드에 두세 번 간 적이 있었고 그때도 아마 다•들 이렇게 빤히 바라봤겠지만, 그땐 어렸을 때라 의식하지 못했다. - P109

술집 안에 있던 사람들이 서로 눈빛을 교환했고, 난 그 자리에서 죽어버리고 싶었다. 무척 추운 날씨에 옷도 얇고 벽난로에서 멀찍이 떨어져 있었지만 진땀이 솟으며 숨이 막혔다.
정말이지 난 마을 사람들을 사랑했고 그들도 나를 사랑해주기를 바랐고, 가축 몰이꾼이든 영주든, 주인이든 그 부인이든모두에게 애정이 있었으니까. 그들은 내 소풍의 일부이자 럴링퍼드와 세상의 일부고, 아이의 손안에 잡힌 작은 새가 한편으로 두려우면서도 그 안에서 편안함을 느끼듯 내 마음이 그들의 손안에 있었으니까. 난 먼 곳으로 가서 새로운 사람들과새로운 길, 아이들이 뛰노는 새로운 마을을 만났으면 했다. - P109

아, 정말이지 그런 곳에 가고 싶었다. 다만 그런 바람의 핵심은 그들이 내가 지나가는것을 보면 상냥한 표정을 보이고, 아이들은 미소 지으며 내게 꽃을 따서 던지고, 내가 여관이나 술집에 들어가면 ‘밤이 깊었으니 불 가까이로 와‘ 하고 말을 건네야 한다는 것이었다.
아, 그러면 얼마나 좋을까! - P110

그래서 실제 세상이 나를 대하는 방식이 내게 훨씬 더한 충격을 주었다. 워낙 외딴곳에서 살아서 그전에는 나의 비통한 처지를 제대로 실감하지 못했다. 그런데 성경 구절처럼 쇠사슬에 매이듯 고통에 단단히 묶인 내 처지를 이제는 깨달았다.
아, 난 문 건너편에 갇혔고, 커다란 못이 박힌 여관 문은 그문에 비하면 한갓 종잇장이었다! - P111

앞서 말했듯이 내가 분노한 기디언을 본 적은 몇 번 안 되는데, 그때가 그중 하나였다. 얼굴빛이 어두워지고 눈은 그속에서 호수 물이 출렁이는 듯 차가워졌다. 시리도록 차가웠다. 그런 눈빛으로 내려다보자 상대는 움찔했다. 그가 아주 느릿느릿 말했다. - P114

"이 애는 내 여동생입니다. 내가 마녀들과 함께 다이어폴산에서 춤출 마음이 있다면 그럴 겁니다. 그리고 위층 무도회에서영주 양반들과 춤출 마음이 있다면 그렇게 할 거고요. 하•지만 당신에게 춤을 추자고 청하지는 않을 겁니다. 영주님에게 표를 던지게 될지 그것도 잘 모르겠네요. 집안 여자들 관리도 제대로 못 해서 여식이 거장을 치고 돌아다니게 놔두는분께서 과연 땅을 제대로 관리할 수 있을는지? 회초리가 좀더 필요했을 것 같습니다만."
"도라벨라!" 여동생이 그런 분쟁에 휘말려 무척 언짢아진그녀의 오빠가 소리쳤다. - P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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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어머니, 어머니!" 난 애원했다. "어차피 우리가 고칠 수도 없는 일인데 한탄은 그만하세요. 어머니가 우시는 건 못 견디겠어요. 어머니! 봐요! 전 아무렇지도 않아요. 자, 자, 어린양!"(어머니는 참 작고 허망해 보여서 난 어머니를 그렇게 부르곤 했다). "자, 그런 건 마음에 두지 말아요. 내가 하는 말 잘 들어요!난 차라리 언청이인 것이 더 좋아요!"  - P67

그 말을 내뱉은 뒤 난 집에서 뛰어나가 엉엉 울면서 쪽문을 지나 숲길까지 달려갔다.
내가 얼마나 큰 소리로 울었는지 여기저기에서 윙윙거리는날갯짓 소리가 들렸고, 숲속 위쪽 빈터에서 토끼 한 마리가내 울음소리를 듣고 길 중간에 꼿꼿이 앉았다. 축복을 내리는 목사님처럼 앞발 하나를 올린 모습이 마치 기독교인 같았다.
그의 사촌인 산토끼가 내게 준 것은 저주였을 뿐인데. - P67

왜 내게 그런 저주를 내렸는지 궁금했다. 산토끼가 원해서자유의지로 그런 것일까, 아니면 악마가 그렇게 몰아댔을까?
내게 남편과 골풀 요람을 주기 싫어서 신이 그렇게 하라고내버려둔 것일까? 실없는 산토끼가 망쳐놓은 것을 바로잡는데 필요한 돈을 벌기 위해 앞으로 오랫동안 주중이든 주말이든 매일 일해야 한다는 것이 내게는 참 기이한 일로 여겨졌다. - P67

언청이 수술이 돈이 많이 든다는 것은 알았다. 생각하면쓴웃음이 나왔다. 매서운 습지에서 날아오른 들꿩이 시든 헤더와 얼어붙은 하늘 사이를 가르며 요란하게 웃는 거무죽죽한 가을 저녁이 떠올랐다. 냉혹한 늙은 남자들이 쓰러지는 적을 보면서 그렇게 웃겠지. 떳떳한 자식을 둔, 빳빳한 꽃무늬 실크를 잔뜩 두른 지체 높은 부인들이 어여쁜 창녀가 태형을 당하는 것을 구경하러 가서 입을 부채로 가린 채
그렇게 웃겠지. ... - P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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