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을 숨겨놓은 지점에 다다르기 전에 난 뒤처졌고, 들판 출입구에서 다시 따라잡았다. 안으로 들어가니 끔찍한 싸움이벌어지고 있었다. 겨우 시간에 맞춰 도착한 것이다. 그림블의 개만 남은 상황이었다. 우리가 다가갈 때 함성이 터져 나왔다. 그가 그림블의 개를묶는 데 성공한 것이다. 곧바로 함성이 또 터졌다. 그리고 개에게 목을 물린 그의 모습(오, 내 사랑!)이 내 눈에 들어왔다. - P231
내가 그림블의 어깨를 움켜쥐며 말했다. "개를 떼어내!" 그림블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일 초만 더 그러고 있으면 내가 너무나 사랑하는 사람은 목숨이 끊어질 것이었다. 난 앞으로 뛰어나갔다. 지금껏 어떤 생명도 일부러 해한 적이 없는 나였지만, 그리고 그 커다란 짐승이 그 사람의 목에 이빨을 박은 채 뒷발로 일어섰지만, 난 달려가 그 심장 깊숙이 칼을 찔러 넣었다. - P232
말로 설명하는 시간보다 더 빠르게 불이 타올랐다. 생명의 불꽃을 유지하기 위해 케스터의 입속으로 브랜디를 약간 흘려 넣은 뒤 캠릿 씨가 물린 상처를 불로 지졌고, 고통으로 비명을 지르며 케스터가 깨어났다. 까무러친 상태라 마음의 대비가 되어 있지 않았던 것이다. - P232
"자, 자. "내가 말했다. 고통스러운 비명이 내 심장을 관통했다. "자, 다 되었어요! 이제 누구도 당신을 건드리지 않을 거예요" 캠릿 씨가 그의 상처에 붕대를 감았고, 난 찬물로 그의 얼굴을 닦아준 뒤 브랜디를 좀 더 주었다. "상처가 깊진 않아요." 캠릿 씨가 말했다. "하지만 조금만 늦었으면 큰일 날 뻔했어요." "늦었을 리가 없어요." 내가 말했다. "오늘 내가 이 사람의수호천사니까요." - P233
"네가 그 사람 목숨을 살렸어. 정말이야, 프루. 그런 일은 살면서 본 적이 없어! 우리가 들판 출입문을 막 들어섰는데, 저멀리 네가 보이는 거야. ‘말도 안 돼!‘ 내가 말했지. 그 말과함께 막 뛰었어. 잰시스도 뛰고, 근데 우리가 닿기 전에 네가그 개를 끝장내버렸어 상 받을 만해, 프루!" - P233
"얘야, 그 사람이 널 만난다면, 그리고 내가 생각한 그런 사•람이라면, 분명 널 좋아할 거야." 어머니가 딱 잘라 말했다. 이불을 덮어드리는데 어머니가 내 손을 붙잡았다. "프루. 만약 그 사람이 다리나 팔이 하나뿐이거나 천연두로 얼굴이 다 얽었다면 그게 싫겠니?" "싫겠냐고요, 어머니?" 난 생각할 필요도 없이 바로 대답했다. ‘당연히 싫지 않죠. 오히려 더 사랑할 거예요!" "그럴 줄 알았다, 얘야." 어머니가 아주 흡족하게 말했다. "그 사람을 사랑하는 줄 알았어. 참 기쁘구나. 그에게서 숨지마, 프루, 코스틀리 컬러 놀이를 했을 때처럼 용기를 내서 모든 걸 다 걸어." - P243
"뭐야? 도망가는 거예요? 왜 그래요. 프루 사른?" 그가 물었다. 난 고개를 푹 숙였고, 차라리 잠자리가 되었으면 했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필사적으로 몸을 빼려 했지만 소용없었다. 그는 그냥 웃었다. "목숨을 구해줘서 고맙다고 말하러 온 사람을 대하는 방식치곤 아주 독특한데요, 프루 사른! 호수로 뛰어들 것처럼 도망치려 하다니." 여름을 만들어내는 목소리로 그가 말했다. 그의 손을 통해 전해진 두근거림이 나를 뚫고 지나가 난 서있기도 힘들었다. - P288
아래층으로 달려 내려가 집 밖으로 나가자마자 내 눈에 들어온 광경이란. 세상의 종말도 그보다는 나을 것 같았다. 그때는 가을걷이할 필요도, 힘겹게 돈을 모을 필요도 없이 다마련되었을 테니까. 그때는 누구에게나 상황이 똑같겠지만, 이것은 우리만의 일이었고 마차 바퀴가 밀 이삭을 짓밟듯 우리를 짓밟는 것이었으니까. - P338
어마어마한 굉음은 불타오르는 곡물에서 나는 소리였다.거둬들인 곡물이, 수년의 노동으로 거둬들인 전부가, 기디언의 영혼 자체이자 우리의 미래가 활활 타고 있었다. 만물의 종말을 초래할 거대한 혜성이나 별똥별이 하늘을 가르는 것도 아니고, 덜덜 떠는 세상 위로 암흑 같은 밤하늘에서 대천사가 요란하게 나팔을 불어대는 것도 아니었다. 고작 곡물이었다. 다만 우리가 가진 전부였을 뿐! 다만 그것을 가짐으로써 기디언이 밤낮으로 노예처럼 일하고 가족을 노예처럼 부리는 일을 그만두고 보통 사람들처럼 일할 수 있을 그것, 그래서 그를 사랑 넘치는 상냥한 남자로 만들어줄 그것. - P330
수확이 오로지 탐욕이라면 씨뿌리기는 오로지 베푸는 일이다. 아주 세심하게 모아서 쭉정이를까불러 내버리고 소중하게 모셔두었던 것을 들고 너른 들을누빈다. 가진 것이라고는 그것뿐이지만 개의치 않고, 쟁여둘생각이라곤 없이 양손에 가득 담아 모두 뿌려버린다. 앞으로나아가며 이리저리 뿌리는데, 손이 크면 더 기분이 좋다. 이지역의 방식을 잘 모르는 사람은 아마 미쳤다고 생각할 것이다. - P332
조용하게나마 오가던 어머니가 안 계시니 사른은 더욱 조용했다. 내가 어머니에게 의지했더라도 그럴 수 없게 어머니가 그리웠다. 이런저런 이유로 우리에게 의지했던 사람이 가장 그렇게 마련이니까. 그래서 어머니들은 치맛자락에 매달리는 자식들이 있을 때보다 오히려 없을 때 누가 방해라도하는 듯 일이 더 손에 잡히지 않는 것이다. 그땐 일할 마음이없으니까. 어머니가 손을 들어 올리는 모습이며, 저녁에 기진맥진해서 돌아온 나를 따뜻하게 맞아주시던 모습을 떠올리며 난 해가 길어지는 4월 내내 문득문득 주저앉아 울었다. 이따금 찾는 티비를 빼면, 이제는 기디언과 나 둘뿐이었다. 어디에나 슬픔이 가득했지만 일은 예전처럼 이어졌다. - P36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