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벽한 케이크의 맛> 중에서...


여기 카페래, 올라가보자.
그가 무슨 말을 꺼내기도 전에 그녀가 2층을 가리키며말한다. 간판도 없고, 조명도 없고, 카페라고 할 만한 표식이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
저기가 카페라고?
응, 카페래. 아까 나오는 사람들한테 물어봤지. 들어가보자.
두 사람은 2층으로 간다. 여느 사무실처럼 보이는 철문을 열자 완전히 다른 세상이 펼쳐진다. 고소한 빵 냄새와 그윽한 커피 향이 감도는 실내는 따뜻하고, 어디선가 나지막하게 음악 소리가 흘러나온다. 두 사람은 창가에 자리를 잡는다. 창 너머 골목은 적막하지도 오싹하지도 않다. 이렇게 내려다보는 골목은 고요하고 평화롭기만 하다. - P154

여기까지 와보길 잘했다, 그지?
그녀가 커피 두 잔과 치즈케이크 한 조각을 가져온다.
따라오는 사람은 생각도 안 하고 그냥 막 
가던데? 한마디 말도 없이?
너 추울까 봐 그랬지. 얼른 여기 찾으려고.
여기 카페 있는 거 몰랐잖아, 너.
결국 알게 됐잖아. 코 풀래?
그녀가 다시금 콧물을 훌쩍이는 그에게 티슈 두 장을 건네준다. 그는 티슈로 소리 나지 않게 코를 훔치며 생각한다. 이 카페를 찾은 건 그냥 무작정 계속 걸었기 때문일까, 기필코 뭐라도 찾겠다는 그녀의 의지 덕분일까, 아니면 둘 다일까. - P155

먹어봐. 치즈케이크 이거 딱 하나 남은 거래. 여기서 직접 만든다는데, 맛있을 거 같아. 그지?
그녀가 웃으며 포크를 건네준다.
다른 케이크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크기가 작지만 먹음직스러워 보인다. 짙은 갈색빛 표면에 윤기가 돈다. 그는포크를 세워 케이크 끄트머리 부분을 신중하게 잘라낸다.
어쨌든 하지 않기를 잘했다고 생각하면서. 수없이 많은 순간, 진심이니 고백이니 하는 거창한 단어에 휩쓸리지 않기를 잘했다고 생각하면서. 어떤 충동이
지나가고 또 지나갈 때까지 기다려보길 잘했다고 생각하면서. 그래서 마침내 숨은 그림 찾듯 이렇게
조용하고 근사한 카페에서 단 하나 남은 케이크를
맛볼 수 있게 되었다고 생각하면서. - P158

그럼 나 먼저 먹는다.
그가 포크로 잘라낸 케이크를 입에 넣는다.
하지 않아서 좋았던 것, 하지 않았으므로 그가 지킬 수있었던 것, 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가 잃지 않았던 모든 것. 케이크의 맛은 그 모든 것을 한꺼번에 응축시켜놓은 것처럼 아주 진하고 깊다. - P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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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장 미군정의 총독부, 인공, 임시정부 정책과
권력의 불하
1. 미군정의 첫 조치: 총독부 관리어 유임,
선교사ㆍ가족의 입국, 한국인 정보의 유입
~~ 2. 미군정의 인공부정ㆍ 임정 활용과
남한 정치의 재편


어제까지 2장 마무리하고 오늘부터 미군정의 활동이 본격적으로 나온다.
오늘의 목표: 298쪽
--->306쪽. 미션 클리어





미군정의 첫 조치 :총독부 관리의 유임, 
선교사·가족의 입국,한국인 정보의 유입

1) 조선총독부 관리의 유임과 해임
서울에 들어온 하지에게 부여된 기본적인 임무는 일본군의 공식 항복 접수, 연합군 포로의 석방, 평화와 질서의 유지 등이었다. 하지의 첫 번째 조치는 맥아더 사령부로부터 지시받은 대로 조선총독부의 기성 질서를 유지하는 것이었다. 하지는 9월 11일 남한에서 시행할 정책을 발표하며 일제 총독부 기구를 그대로 활용하겠다며 총독부 관리의 유임을 발표했다.‘ 
이 조치는 한국인들의 강력한 반발에 부딪혔다. 가장 큰 이유는 1945년 8월 15일 이후 조선총독부의 통치는 사실상 중단되었으며, 건준의 지휘하에 해방의 공간에서 해방의 자유를 누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 P259

하지와 고위 장교들은 총독부 관리들을 해임하면 이를 대체할 한국인 인력이 없고, 한국인은 
대부분 하위직을 맡았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행정을 유지하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주한 미군이 조선총독부를 그대로 유지한다는 것은 용납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 P259

윌리엄스의 증언은 1945년 10월5일에 조직된 고문회의가 어떤 배경과 어떤 비율로 시작되었는지를 알려주는 유일한 자료다.
첫째, 대략 15명 내외의 고문 가운데 정당 대표는 불과 2명에 불과한 반면, 법률가 2명, 은행가 2명, 사업가 2명, 농민 일부, 의사 1명, 종교계 5명의 비율로 배정한 것은 정당을 일종의 직능단체 대표 정도로 설정했던 하지의 인식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그에게 가장 중요한 원칙은 한국내 정당을 부정하는 것이었고, 이것이 가장 중요한 정치적 함의를 지녔다. 정당과 정치적 의견은 최소한으로 반영한 반면 그와 동수로 법률가, 은행가, 사업가 등을 배치함으로써 일제하에서 사회적으로 성공하고 보수적인 지위에 있었던, 바꿔 말하면 친일파의 입지를 압도적이고 구조적으로 보장한 것이었다. - P273

4)관대한 친일과 엄격한 반공, 민주주의와 공산주의의 대결

진주 직후 곧바로 이런 이항대립적이며 대결적인 정치 구도에 관한인식을 미군정 수뇌부에 불어넣은 것은 국민대회준비회, 즉 한민당 세력이었다. 
그렇게 해서 민주주의·보수주의대 공산주의 · 급진주의의 대결구도이자, 미국식 민주주의와 그에 반대되는 소련식 공산주의라는 선악의 대립 구도를 만들고자 했다. 
※《해방 후 한국의 정치적 과제는 남북통일·독립국가의 건설이었으며, 일본 제국주의가 남긴 정치·경제·사회·문화적 잔재를 일소하는 것이었다.》 

정치적으로 일제 잔재의 청산은 친일파와 민족반역자에 대한 인적 제거를 의미했으며, 대립의 계선은 항일 대 친일, 민족 대 반민족, 독립운동 대 친일협력 사이에 놓여 있었다. 즉 해방 후 정치적 과제와 지형에서 미국과 소련의 대결 구도는 아직 존재하지 않았으며, 국제적 냉전은 
1947년에야 시작되었으나, 미군은 진주 직후부터
강력한 반소·반공의식에 사로잡혀 있었다.  - P277

명백한 과거 사실, 즉 친일과 항일은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았으며,증거자료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또는 고소와 역고소가 만연하다는 이유로 뒷전으로 물러났다. 
반면 근거 없는 추정과 무고로 이뤄진 주장, 즉 여운형이 친일파이자 공산주의자이며, 소련의 지령을 받은 공산주의자들이남한에 침투해서 혼란을 일으키려 한다는 점은 중시되었다.
미군정이 우호적으로 생각하는 보수주의자 · 민주주의자인 한민당 중심의 친일 문제는 쉽게 넘기기 어려웠다. 친일문제는 한국인들에게는 중요한 문제였으나, 미군정 내에서는 한번 검토를 고려해볼 만한 이슈에 불과했다. 하지는 10월 중순의 보고서 
(1945년 10월 19일)에서 친일파에 대한 한국인들의 분노와 증오를 무시할 수 없었기 때문에 "죄악을 저지른 친일 부역 한국인들을 특정" 하려고 노력했으나, "많은 고발과 역고발"이 한국인들로부터 들어왔고, 대부분은 증거가 없거나 추적하고 조치하기어려운 경우가 많다고 하소연했다.  - P283

1)최초의 정책 결정: 여운형, 인민공화국 부정
다른 한편으로 하지의 권한은 남한을 점령해서 군정을 실시하는 것이지 자생적 권력을 인정하는 것이 아니었다. 하지의 입장에서 얘기하자면, 자생적 권력을 인정하는 것은 그의 책임과 권한을 넘어서는 일이었다. 물론 하지가 한민당과 결탁해서 임시정부 세력과 이승만·김구의 조기 귀국과 정치적 활용을 선택한 사실을 떠올린다면 인민공화국을 인정하지 않은 것이 반드시 그의 권한을 넘어서는 것이라고 보기는 어려웠다.
하지의 임무는 일본군 항복 이후 현지의 평화와 질서를 유지하는 것이었는데, 문제는 일본 본토와는 다른 식민지 한국의 상황이었다. - P302

하지가 인정할 수 있는 기성의 주권 정부, 기성의 권력은 조선총독부와 그 행정력이었을 뿐 인민공화국 같은 자생적 토착권력이 아니었다. 조선총독부의 일본인 고관들을 잠정적으로 유지하거나 고문으로 활용할 수 없게 되자, 미군정은 직접 통치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인민공화국 같은 현지 토착권력의 활용은 미국 본국이나 주둔군 사령관 하지의 선택지에 들어 있지 않았다. 또한 하지와 그의 군대는 수년 동안 전쟁을 치르면서 적과 아군이라는 이분법적 세계에 익숙했기 때문에 미군 병사들은 인민공화국을 즉시 적이나 라이벌로 생각했다. 이 때문에 인민공화국의 지도자였던 여운형은 한 달 넘게 하지를 만날 수 없었다. 진주 직후부터 다양한 방식으로 부정되었던 인민공화국은 1945년 12월 12일 미군정에 의해 공식적으로 불법 단체가 되었다.
- P303

이 때문에 미군정은 진주 이후 자신들이 유일한 정부, 군사정부, 사실상의 정부·자치정부라는 삼중 정부 기능을 자임했다. 

이러한 미군정의 주장은 2차 세계대전 이후 연합국은 식민지나 영토 팽창을 추구하지않는다는 대서양 현장의 기본원칙에 위배되는 것이었으며, 주둔군이 현지인들의 ‘주권‘ 정부의 기능을 빼앗을 수 없다는 점에서 국제법 위반이었다.  
미군정 3년간 한국은 주권이 없는, 주인이 없는 땅
(no-man‘s land)으로 취급되었으며, 한국의 주권은 귀속처가 없는 상태에서 미군정에 의해 잠정적으로 대행되었다.  - P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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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알려지지 않은 정책 결정자 윌리엄스의 역할
1)˝아무도 알려지지 않은 자˝들의 결정: 미 군정의 실권자 윌리엄스
오늘 목표: 255쪽
---> 미션 클리어


우연한 기회에 한국 주둔 미군과 동행한후, 하지의 개인 고문으로 3개월간 일하면서 윌리엄스가 한국 현대사에결정적 영향을 끼치게 되는 상황과 구조는 미군 진주 이후 한국 현대사가 당면한 총체적 모순과 위기를 설명하는 열쇠다. 윌리엄스 본인과 친구들은 기억하지도 못하는 한국에서의 3개월이 한국 현대사의 주요 경로를 결정하는 첫 디딤돌이 되었으며, 한국인은 자신들의 운명을 누가 결정했는지도 모른 채 발버둥치는 ‘표본실의 청개구리‘와 같은 신세였다. - P229

나아가 윌리엄스는 막대한 전쟁후원금을 내서 친일파로 알려진 사업가도 사실은 자기 수입을 감추고, 일본에 제공해야 할 수입 2분의 1에 해당하는 수백만 원을 내지 않음으로써 일본의 전쟁 노력을 사보타주했다며, 누가 이런 사람의 얘기를 책으로 써야 한다고 했다. 아마도 "마약왕"으로 알려진 전용순 등 유명한 친일파의 이야기를 전한 것으로 생각된다.
 윌리엄스의 친일 문제에 대한 수용적 태도와 심지어 긍정적인 평가를 바탕으로 한 정보와 판단은 하지와 베닝호프의 친일 문제 인식에도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이들은 친일 문제를 중시하지 않았으며, 친일파로 알려진 보수주의자, 교육자, 사업가 등이 사실은 항일 애국자였다는 전도된 인식을 가졌다. 친일은 한국 내부의 문제일 뿐 미군정의 문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 P238

넷째, 윌리엄스의 인식 중 놀라운 것은 북한의 소련 점령군에 대한혐오와 하지의 행정적·정치적 무능에 대한 칭찬이었다. 윌리엄스는 다음과 같이 발언했다.

우리는 우리가 함께 상대하고 있는 것이 무자비한 전체주의 정부라는 사실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우리의 점령 정책에 있어서, 우리는 - P238

책임을 지고 있는 고위급 장군들이 모든 해답을 가지고 있으며, 정부를 운영할 수 있다는 생각을 너무 자주 하고 있다. 
다행히 우리는 정부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장군들이 있으며 이들은 자기들이 정부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 ___한국인은 정부는 반드시 이래야 한다는 선입견을 갖지 않은 장군들이 여기에 배치된것에 대해 감사해야 한다. 만약 장군들이 하고 싶은 바대로 할 수 있는 자유를 가졌더라면, 한국 인민들 사이에서 어떤 불충도 존재하지않았을 것이다. 
우리는 한국인들에게 (1946년) 3월까지 정부를 갖게될 것이라고 약속했지만, 미국 정부의 간섭 때문에 한국인들은 그때까지 정부를 갖지는 못할 것이다.  - P239

윌리엄스의 발언은 놀라움을 넘어 경악을 불러일으킨다. 일개 군의관이었던 윌리엄스 소령이 한국의 정부 수립, 장군들의 행정부 운영 능력등을 멋대로 판단하고 있었던 것이다. 진주 직후 미군정 수뇌부의 행정적 무능과 정책적 판단 능력 부재가 어느 정도였는지를 직관적으로 보여주는 발언이었다. 하지 등 주한미군 고위 장교들이 모두 행정 업무에 무가능했으며, 사실상 멍청이였다는 평가는 틀린 것이 아니었다.  한국에 정부를 수립하는 시기와 방법은 주한미군과 미군정이 마음대로 결정할 사만이 아니라 워싱턴이 연합국과 전시 외교를 통해 합의한 방침에 따라야할 사안이었다. 또한 하지가 
1946년 3월까지 정부 수립을 약속했다는 점도 진주 초기 미군정 내에서 벌어진 믿기 힘든 우극(愚劇)의 실체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하지는 그런 약속을 할 위치도 아니었고, 그런 권한도 없는 상태였으며, 미군 지휘체계상 고위급 정책을 실행하는 말단의 집행자였을 뿐인데도 최고위급 정책 결정자로 행세하고 있었던 것이다. - P240

나아가 미 국무부와 합동참모본부, SWNCC 등이 제시한 점령의 기본 원칙 중하나가 특정 정치 세력을 육성·지원하거나 동원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는데, 하지는 진주 초기부터 이를 완전히 무시했다.
그렇다면 미군정은 어떻게 행정 업무와 
정부 업무를 처리했는가? 그것은 바로 한국인 고문과 전문가를 활용하는 방법이었다. 은행가를 불러서 정부의 금융체제에 대한 조언을 듣고, 농부를 불러 농업에 대한 조언을 구하는 방식으로 일을 처리했다는 것이다. 
바꿔 얘기하면 윌리엄스는 미군정의 행정과 통치는 정책의 방향성을 갖고 일관성 있게 운영된 것이 아니라 베닝호프가 보고서에서 주장한 바대로 "매일 매일의 기초 위에서 임시방편으로 자타칭 한국인 전문가들을 불러서 그들의 의견을 듣고 정책 결정을 했다는 것이다. 하지와 윌리엄스가 마음대로 한국 정부수립에 관한 정책을 결정하고 실행했어야 하는데, 본국의 방해와 신문기자들의 보도로 무산되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군정은 한국인 고문 및 자문에 기초해서 인선을 하고, 정부의 기능을 수행해왔으므로, 최종적인 책임은 한국인에게 있다는 취지였다. 
미군정 진주 직후 한국 사회에서 벌어진 수많은 엽관운동과 자리를 차지하기 위한 치열한 경쟁의 실상이 이러했다. - P240

윌리엄스와 베닝호프는 미국 사회에서 전혀 기억되지 않는 평범하고 "아무도 아닌자들"이었으며, 그의 삶에서 미군정 경험은 기억되지 않을 정도의 단기간에 그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억되지 않는 "아무도 아닌 자들"이 미군정 진주 직후 자유재량적 결정권을
행사했으며, 이것이 한국 현대사의 경로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 P253

커밍스의 지적처럼 미국인 지도자들은 한국 점령에 있어서 악의를갖고 있지 않았으며, 음모가들도 아니었고, 착취를 목적으로 하지도 않았다. 악인이나 위선자가 아니었으며, 진지하게 자신들이 추구하는 바를 확신했다. 문제는 이들의 인식이 미국적인 것에 토대를 두고 있었고, 식민지에서 막 해방된 한국에는 아무것도 제공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 P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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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요한 보스코는 말했어. "믿음을 가져라, 그러면 기적이 무엇인지 보게 될 것이다." 실제로 아메리카 성당은 열려 있었어. 나는 들어갔고, 첫 번째 제대인 십자가에서 내려진 그리스도의 제단에 무릎을 꿇고서 전능하신 분에게 내게 죽음의 여신을 보내지 않으셨으니 알렉시스를 되돌려 달라고 기도했어.
모든 것을 아시고, 모든 걸 보시고, 모든 걸 하실 수 있는 그분에게 제대에서 검은 옷을 입고 성당을 내려다보면서 수수하고 값싼 금도금 금속 조각의 후광을 받은 고통의 성모는 나를 바라보고 있었어. 성당에는 아무도 없었어. 남는 지폐를 아궁이에 태우는 청부 살인자의 삶보다 더 텅 비어 있었어.
- P135

여기에는 죄 없는 사람이 없어. 모두가 죄 많은 사람이야. 무지와 가난, 이런 걸 이해하려고 해야 하지만...……… 그런데 이해할 수 있는 게 하나도 없어. 모든 게 나름대로 설명할 수 있고, 합리화할 수 있다면, 그렇게 우리는 범죄에 영합하게 되는거야.

그럼 인권은? 인권은 무슨 인권, 그런 건 생각해볼 가치도 없어! 그건 영합이며 방탕이고 방종이야. 
자, 그럼 잘 생각해 보자고, 만일 여기 아래에 죄지은 사람들이 없다면, 그게 뭐지? 그건 범죄가 스스로 이루어진다는 게 아닐까? 범죄가 스스로 저질러지지 않고, 여기 아래에는 죄지은 사람이 없다면, 죄 있는 장본인은 저 위에 계신 분이야. 이런 범죄자들에게 자유 의지를 주신 무책임한 분이셔. - P150

그런데 누가 그분을벌주지? 당신이 벌주나? 이봐, 파르세로, 나한테 쓸데없는 거짓말 하지 마. 난 이제 그런 건 이해하고 싶지 않으니까. 내가 지금까지 경험했고 보았던 것으로 판단하건대, 당신이 멋지게 말하는 것처럼 ‘결국에는 내 마음에 상처를 입히며 끝나게 돼. 나한테 인권 따위는 입에 올리지도 마! 즉결 재판과 벽 앞에 세워 총살하기, 그리고 그 벽에서 쓰레기장으로 던지면 돼.
"국가는 탄압하고 총을 쏘기 위해 있는 거야. 나머지는 국민선동, 그게 민주주의야. 더는 말할 자유, 생각할 자유, 일할 자유, 이쪽에서 저쪽으로 가면서 버스를 만원으로 가득 채우는 자유는 없어. 그건 모두 개소리야! - P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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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여러 해 전부터 핀치콘티니가에 대해-미콜과 알베르토, 에르만노 교수와 올가 부인에 대해 쓰고 싶었다. 그뿐만 아니라 이차대전이 발발하기 직전 페라라의 에르콜레프리모데스테 대로에 있던 그 집에 살았거나 나처럼 그 집에 드나들었던 다른 많은 사람들에 대해서도. 하지만 일 년 전인 1957년 4월 어느 일요일에서야 어떤 자극과 충동을 받아 실제로 글을쓰게 되었다. - P7

제1부
1
핀치콘티니가의 묘는 크고 단단하고 정말이지 위풍당당했다. 어렴풋하나마 일면 고대 신전 같기도 하고 동양 사원 같기도 한 모양새로,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우리 오페라 극장에서 유행하던 <아이다>와 <나부코>의 무대장치에서 본 듯한 모습이었다. 인근 시립 공동묘지를 비롯해 다른 공동묘지에서라면 그렇게 과시적인 묘라 해도 놀라울 게 없을뿐더러, 다른 많은 무덤에 뒤섞여 거의 눈에 띄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 유대인 묘지에서 그런 묘는 유일했다. 그래서 입구에서 상당히 멀리 떨어진 곳에, 반세기가 넘게 더이상 아무도 묻히지 않아 버려져 있던 저기 안쪽 땅에 있기는 해도, 다른 묘와 확연히 달랐고 금방 눈에 들어왔다. - P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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