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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 속으로 - 한국 문학사에서 지워진 이름. 평생을 방랑자로 산 작가 김사량의 작품집
김사량 지음, 김석희 옮김 / 녹색광선 / 2021년 8월
평점 :
김사량 작가의 단편집 <빛 속으로>
한때는 남과 북에서 모두 잊혀진 작가였던 김사량 작가의 <빛 속으로>를 읽었다. 4개의 단편이 실려 있는데 마지막의 「노마만리 」는 김사량이 타이항산 지구의 항일근거지로 떠나는 과정을 담은 탈출기로서, 이 책에서는 망명기 도입부만 실려 있다. 그럼에도 흥미진진하여 그 전편이 궁금했다.
단편인 「빛 속으로」는 작가가 일본에서 일본어로 써서 발표였으며 아쿠타가와상 후보에도 올랐다.
이 작품의 배경은 동경이며 화자인 '나'는 동경 제대에 다니는 조선인 학생으로 빈민촌의 S협회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다. 이름은 '남(南)'이지만 아이들은 모두 일본어인 '미나미'라고 부른다. 이렇게 불리지만 굳이 바꾸어 부르게 만들지 못한다. 이는 식민지 조선인으로서의 아이덴티티를 둘러싼 내면의 갈등을 드러내는 요소로 작용한다. 자신이 감추고자 하는 식민지 조선인으로서의 정체를 스스로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의 입을 통하여 폭로 되는 형태로 나타나기 때문에 그 안에 감춰진 수치심을 극대화하여 보여준다.
「천마」, 「풀이 깊다」의 두 단편도 일본어로 발표하는데 일본의 정책을 정면으로 비판하는 작품이다.
「천마」는 일제에 기생하여 경성에서 제일 가는 작가인 체 하는 '현룡'이라는 인물이 등장한다. 일본 관리의 위세를 등에 업고 위세를 떨치지만 제대로 된 글을 보여주지 못하고 결국 폐기되어 버림받을 위기에 처한다. 허세로 가득찬 기인 행세를 하고 여류 작가를 유혹하기 위해 감언이설을 일삼는 우스꽝스러운 현룡의 꼬락서니야 말로 일제에 빌붙어 이익을 취한 앞잡이들의 모습이 아닐런지...
「풀이 깊다」는 가장 기억에 남는 작품이다,
주인공인 박인식은 농촌 계몽 운동의 일환으로 방학을 맞아 농촌 활동을 하러 가는 길에 첩첩산중 오지 마을의 군수인 작은 아버지에게 들렀다가 옛 은사였던 코풀이 선생님을 만나는 것으로 이야기는 시작된다. 작은 아버지가 산민(山民)을 모아 놓고 행하는 이름도 생소한 '색의 장려(색의 장려운동. 조선 총독부가 흰옷이 생산력을 떨어뜨린다고 생각해 백의 착용을 금지했던 정책 - 옮긴이)'에 대해 연설하기 위해 연단에 서고 통역을 하기 위해 등장하는 인물이 바로 옛 은사였던 '코풀이 선생님'이다. 코풀이 선생님은 인식의 중학교 은사였는데, 인식과 친구들의 시위로 인하여 학교에서 쫓겨난 것을 인식의 작은아버지가 교화 주사로서 조선어 통역으로 일을 할 수 있도록 도움?을 준 것이다. 일본어로 연설을 하는 작은 아버지 옆에서 쭈뼛쭈뼛 통역을 하며 더러운 행카치에 빨개진 코를 누르거나 닦는 모습은 인식에게 견디기 힘든 안쓰러움과 혐오를 남긴다. 아울러 "내일 아침 일용할 양식도 없는 사람들을 불러모아" 상부의 명령을 수행하는 작은아버지의 모습도 참을 수 없지만 "척 봐도 여기에 흰옷을 두른 이는 하나도 없"고, "몇 년간 세탁을 하지 않았는지 그들의 낡아 빠진 복장은 마치 죄수복 같은 흙빛"인데 '색의 장려' 정책이라니 너무도 바보스러운 상황에 인식은 오히려 강한 반발심을 느낀다. 특히, '색의 장려운동'의 폭력성이라고 말할 장면은 연설이 끝난 뒤 돌아가는 산민들의 옷에 먹칠을 하는 장면에서 극명해진다.
그리고 갑자기 흐흐흐 웃더니 인식의 소매을 끌어당기며 창문 쪽을 가리켰다.
"저기를 봐, 저기를 보라구.
창 너머 손끝이 가리키는 곳을 보니, 아까 회당에 모였던 남자와 여자들이 놀랍게도 등짝에 검은 먹으로 O나 △나 X표시를 한 채 한 사람 두 사람 머뭇거리며 지나간다. 아무리 작은 아버지라도 조금은 뒤가 켕기는지 괜스레 한층 더 흐흐거리며 웃어댔다.
"대체 무슨 짓을 하신 겁니까? 저 사람들한테... ."
인식은 핏기가 싹 가신 창백한 얼굴로 일어나, 분노에 차 몸을 부들부들 떨며 격렬하게 소리쳤다. 그리고 굳은 표정으로 작은 아버지의 얼굴을 노려보았다. (154 ~ 155쪽)
차는 낡고 작았지만 예상했던 대로 사람이 적어서 쉽게 탈 수 있었다. 그는 가솔린 연기와 냄새 속에서 웃옷을 벗고 손수건으로 목덜미의 땀을 닦으며 무심코 창밖으로 시선을 두었다. 그런데 그 다음 순간 그의 눈은 얼어붙은 듯 고정되었다. 거기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시장 입구 포플러나무 아래, 군청 직원 두세 명과 함께 먹 그릇과 붓을 든 채 서 있는 비실비실 키가 큰 코풀이 선생을 발견했던 것이다. 그 뒤에는 숙부와 내무 주임이 부채질을 해 가며 벙글벙글 유쾌한 듯 지휘를 하고 있었다. 젊은 장정들이 아무것도 모른 채 시장으로 들어가는 사내들과 아낙네들을 붙잡아 오면, 코풀이 선생은 그 꼬지지한 옷에 먹물로 표시를 했다. 다들 깔깔거리며 웃어댔다. 하지만 코풀이 선생은 얼굴에 맺힌 땀과 콧물을 열심히 닦을 뿐이었고, 등에 먹을 묻힌 사람들 역시 땀을 손으로 훔치면서 사라져갈 뿐이었다. 한 아낙이 손을 내저으며 비명을 질렀다. 그러자 군수를 위시한 남자들은 점점 더 재미있다는 듯 소리 내어 웃었다.
인식은 조용히 눈을 감은 채 부들부들 떨리는 마음을 가라앉히려 했지,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가슴의 분노를 억누를 길 없었다. 차가 움직이기 시작했을 때 그는 결국 아이처럼 양손에 얼굴을 묻은 채로 한동안 움직이지 못했다. (171 ~ 172쪽)
먹물을 뿌리거나 낙서를 하는 행위는 결코 허구의 사실이거나 과장된 표현이 아니었으며 심지어 상복을 입은 여인에게 먹물을 뿌리거나 여자들의 치마를 들치고 속바지에 먹물을 뿌리는 일조차 있었다고 하니 더욱 충격적이다. 이를 행하는 조선인들의 행동을 대체 어찌 해석해야할지 도무지 말이 안나온다...!
그러나 더욱 충격적인 이야기는 인식이 농촌 계몽 운동을 떠난 산촌 마을에서 발견한 사당에서 지금 우리가 '백백교'라고 알고 있는 사이비 종교 집단을 만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백백교는 실제로 1920~40년대 사이에 유행했던 종교로서 백색 옷을 입어야만 구원에 이른다고 믿게 만들고 그러면서 온갖 악행을 일삼으며 사람들을 가차 없이 죽이는 등의 희생자를 만들어낸 집단이다.
"두말할 것도 없이, 색의 장려 정책에 반발하여 흰옷을 입는 것이 민족적 구원의 상징이라도 되는 양 선전했던 백백교의 교리는 색의 장려 정책 이상의 폭력이었다."(옭긴이의 말 중에서)
인식이 그 집단의 희생자가 되지 않은 것은 다행이라 할 수 있지만 코풀이 선생은 그렇지 못한 듯하여 그 인물의 됨됨이와 무관하게 비극적이 아닐 수 없다. 코풀이 선생은 인식과 만난 해 가을, 산으로 '색의 장려'차 출장을 나갔다가 돌아오지 않았다고 하니 말이다. 그 후 세월이 흘러 경성에서 떨어진 촌구석에 조그만 의원 간판을 내걸고 청년 의사로 일하고 있던 인식은, 경성에서 배달된 잡지에서 지금까지 그 유례를 찾을 수 없을 정도로 잔인무도한 백백교의 공판기록을 읽으며 오싹한 한기를 느낀다. 마교의 간부들이 가여운 백성이나 산민들을 속이고, 피땀 흘려 모은 재산과 양식을 빠앗았을 뿐만 아니라 그 처와 딸들까지 겁탈하고 자신들을 따르지 않는 사람들을 314명이나 살해했다는 내용이었는데, 그 마교의 살인 현장 중 하나로 거론된 곳이 그가 일찍이 방문했던 폐사 부근 산골짜기라는 것을 발견하고 벼락을 맞은 것처럼 놀라고 말았던 것이다.
그러다 갑자기 코풀이 선생이 생각나서 놀란 듯 다시 한번 공판기록을 끌어당겨 읽었다.
의심하기 시작하면 끝이 없는 법이다. 어쩌면 남자들에게 죽임을 당한 것은 아닌지, 문득 생각했다. 그렇게 억측을 하다 보니 영락없이 또 그럴 것만 같았다. 인식은 다시 잡지를 덮고 깊은 한숨을 쉬었다. 흰옷의 종교인 만큼 '색의 장려' 정책과 대립하지 않았을까? 가여운 코풀이 선생은 그 깊은 산 속 폐사로 출장을 나가 어떻게든 해서 화전민들을 모았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혼자 흥분하여 그 이상한 일본어로 떠들며 그걸 또 자랑스럽게 스스로 통역하다가 나중에 그 두사람에게 들켜 죽임을 당한 것은 아닐까?
인식은 이런저런 생각으로 끝없는 슬픔에 젖었다. (186 ~187쪽)
한쪽에서는 색깔을 장려하고 다른 한쪽에서는 그와 반대로 백색을 장려하는 극명하게 대비되는 정책과 사이비 종교 사이에서 색의 권력에 희생 당하는 식민지 조선의 구조가 코풀이 선생과 같은 희생자를 만들고 백백교라는 사이비 집단이 위세를 떨치도록 만든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보게 한다. 그런 의미에서 식민지 종주국의 언어로 그들의 정책을 비판했던 김사량의 작품이 잊히지 않고 널리 읽히기를 바라마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