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기 퍼가기 시대 - 미국의 미혼모, 신생아 입양, 강요된 선택 서구 미혼모 잔혹사 1
캐런 윌슨-부터바우 지음, 권희정 옮김 / 안토니아스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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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기 퍼가기 시대'라는 이 생경하고도 이상한 용어는 미국, 캐나다, 영국, 호주, 뉴질랜드, 아일랜드 등의 세계 유수의 국가에서 자행된, 비공개 영아 입양이 대규모로 시행되던 시기를 말한다. 대체로 제 2차 세계 대전이 끝난 이후부터 1973 년까지의 기간이며 이 책을 저술한 미국의 작가 캐런 윌슨-부터바우도 어린 나이에 아기를 낳았고 아기를 빼앗긴 어머니이다. 책의 표지에 인쇄된 사진을 참조하시라. 아기를 안고 사진을 찍는 어머니라면 결코 저런 표정일 수가 없다. 아기를 낳고 잠시 안아본 게 다인데 바로 아기를 빼앗기고 원하지 않는 입양을 강요 당했다. 미국에서 150만 명 이상의 미혼모가 강제 입양으로 아기를 빼앗긴 것으로 추정된다. 


이 시대는 미국에서 낙태가 합법화된 그 유명한 '로 대 웨이드' 판결이 난 해를 즈음하여 공식적으로 끝난 것으로 여겨진다. "역사상 이토록 많은 미혼모가 갓 낳은 아이를 입양 보낸 전례는 없다(38쪽)"라고 말할 정도로 많은 미혼의 엄마들이 단지 결혼을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아기를 빼앗겼다. 대부분의 엄마들의 나이는 만 16 ~ 18세였다. 그들은 피임약을 구할 길이 없어 배란기에 맺은 성관계가 임신으로 이어졌고 임신 사실을 알아도 밝힐 수가 없었다. 심지어 어떤 엄마는 남자와 성 관계를 어떻게 하는지도 몰랐고 도움을 요청할 수도 없었다. 아기를 낳을 때조차 어떠한 안내도 받지 못했다. 통증을 경감시켜주는 어떠한 처방도 받지 못했다. 미혼의 여성의 성행위는 금기였기에(그런데 왜 미혼의 남성에게는 금기가 아닌 것이죠?) 임신을 한 여성들은 "문제 있는 여자애들"이란 시각으로 보았다. 정말 할 말이 너무 많지만 친절하게도 캐런 윌슨-부터바우 이 작가는 처음 시작하는 1장부터 마지막 26장의 내용을 스스로 요약을 해 놓았다. 읽다 보면 전혀 생소한 내용은 아닐 것이다. 우리가 접한 영미 문학에서, 영화에서, 그리고 특히 기억에 남는 작품은 작년 하반기, 아일랜드의 작가 클레어 키건의 <푸른 들판을 걷다>를 읽다 알게 된 '막달레나 세탁소'라는 음침하고 끔찍했던 그곳도 바로 미혼모 수용시설이지 않았던가. 아무튼 거두절미하고 이 시기 미혼 임신을 한 여성은 대체로 다음과 같은 과정을 거쳤다.





  '문제의 여자애'는 아이 아빠에게 임신 사실을 말하지만, 그는 곧 타지에 있는 대학에 가기 위해 마을을 떠나거나 다른 여자와 결혼한다. 아니면, 임신한 여자친구와의 결혼을 회피하기 위해 군에 입대하고 베트남으로 떠난다. 아이 아빠로부터 거절 당한 후 미혼의 임산부는 부모님께 도움을 요청한다. 이 반갑지 않은 소식에 충격을 받은 부모는 가까스로 정신을 차린 후 "전문가"에게 도움을 구한다. 그러면 의사나 목회자들과 같은 사람들은 딸을 미혼모 시설에 보내고 아기를 낳으면 입양 보내라고 조언한다.


<감금>

   2차 세계대전 이전 모자 위탁 가정forest home은 엄마들이 아기를 기를 수 있도록 돕던 곳이었다. 하지만 전쟁이 끝난 후 모자 위탁가정은 유급 위탁 가정wage home으로 전환되는 역사적 변화를 거쳤다. 유급 위탁 가정에 머물던 미혼 임산부는 출산 예정일이 다가오면 미혼모 시설로 옮겨졌고, 거기서 별다른 대안없이 입양을 선택했다. 이러한 변화는 미혼모 시설을 제도화하는데 앞장서고 입양 산업화를 위해 시설을 활용한 입양 조사 복지사들에 의해 촉진되었다. 유급 위탁 가정과 미혼모 시설은 입양 기관과 관련 변호사들의 협력을 얻으며 어떤 도움도 받지 못하고 있던 미혼모를 포획하는 그물을 완성했다. 그물은 미혼모들을 꼼짝할 수 없이 가두었고 사람들은 그 안에 있는 아기라는 사냥감을 얻었다(Kunzel 1993: 169).


   미혼모 시설에 입소하기 위해서는 "혼외관계" 임신이어야 했는데 이때 "혼외 관계"란 무조건 "잘못된 행동"을 의미했다(Vincent 1962: 10). 어린 나이에 임신하게 되면 대부분 부모의 손에 이끌려 입양 기관에 오고, 입양 기관에 오면 복지사의 안내로 유급 위탁 가정(결혼한 부부의 가정)에 들어가게 된다. 그리고 임신 7개월이 될 때까지 숨어지내며 임금을 받고 집안일과 육아(자신의 아이는 돌보지 못하는데 육아를 한다? 어불성설이죠?)를 돕는다. 유급 위탁 가정은 미혼모 시설로 옮겨갈 때까지 머무는 단기적인 해결책이었다. 유급이라 했지만, 임금은 거의 지급되지 않았다. 열심히 일한 대가는 숙박비와 식비로 이미 빚을 질 만큼 충분히 받았고, 망신당하지 않도록 숨을 장소를 제공했으니 감사하라는 식이었다. 이 관행은 미국, 캐나다, 영국, 호주 및 뉴질랜드를 포함한 서방 국가에 널리 퍼졌다. 흔히 가사 도우미 같은 일을 했는데 이것은 당시 사회 정책이었다(Child Welfare League of America 1978: 28)


   유급 위탁 가정의 안주인은 미혼모에게 어머니 같은 멘토 역할을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저 부끄러운 짓을 한 어린 임산부가 산달이 다가와 미혼모 시설로 옮겨갈 자격이 될 때까지 숨겨 준 대가로 몇 달 동안 무료(또는 저렴한 임금을 받는) 입주 가정부를 들이는 정도로 생각하는 "정숙한", 즉 기혼 여성이었다(Pinson 1964: 21-22). 이러한 유급 위탁 가정은 미혼모 시설 및 입양 기관과 연계되어 있었다. 미혼모 시설에는 보육 시설이 없었다. 과거 복음주의 기독교에 기초해 미혼모들을 돕던 여성  종사자들과 달리 미혼모 시설은 엄마가 아이를 키울 수 있는 도움을 주지 않았다. 아이와 자립하여 살 수 있도록 돈과 음식, 옷 등을 친절하게 나누어주는 복지사들은 없었다. '아기 퍼가기 시대'에는 미혼모와 아기의 애착에는 관심이 없었다. 오로지 아기를 가지려는 자의식에 가득 찬 결혼한 부부(불임이거나 또는 다른 이유가 있는)에게 필요한 것, 그들이 원하고 요구하는 것, 그것을 충족시켜 줄 미혼모가 낳은 신생아에게만 모든 관심이 집중되었다. 특히 입양이 아동 복지의 한 분야로서 인정받고, 그 분야에서 일하는 입양 종사자들이 '미혼모 전문가'로 존중받도록 하고, 새로운 학문으로 등장한 사회 복지 분야에서 자신들의 전문성을 키워나가는 데만 관심이 있었다. 그리고 엄마와 아기를 분리하여 결국 엄마들이 입양으로 아이를 상실하게 하는 전략을 통해 자신들의 경력을 쌓아 나갔다(Kunzel 1993: 169). 


   물론 모든 미혼모들이 시설로 보내진 것은 아니다. 어떤 미혼모는 자기 집에서 격리된 생활을 했다. 가령 지하, 다락방에서 숨어 지내거나 먼 친척 집에 보내진 후 아기를 낳고 혼자 집으로 돌아왔다. 드문 경우 집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가서 혼자 지내기도 했다. 이들의 거주 형태는 달랐지만 '아기 퍼가기 시대'의 모든 백인 미혼모는 사회복지사와의 만남으로 귀결되었다. 그리고 아기를 포기하라는 세뇌를 피할 수 없었고 그 결과 입양 시스템 안으로 들어가게 되었다(Marshall & McDonald 2001:4: Carp 1998: 116).


   미혼모 시설에 입소한 후 오리엔테이션 기간이 끝나면 일주일에 2시간 외출을 나갈 수 있다. 하지만 보호자가 따라붙었으며 장부에 외출과 귀가 시간을 적어야 한다. 그 밖에 기상 시간, 식사시간, 취침 시간 등을 반드시 지켜야 했다. 매일 밤에는 취침 점검이 있다. 식단표에 있는 음식 외에는 먹을 수 없고, 사전 허락 없이 방문객은 찾아올 수 없다. 전화는 걸 수도 받을 수도 없다. 간호사 소견이 없는 한, 낮 동안 방에 들어가 있으면 안된다. 시설 '입소자'인데 청소나 허드렛일도 해야 한다. 출입문에는 자물쇠도 달려 있다. 담장 너머 저편에 있는 친구들의 얼굴을 담장 안에서 볼 뿐이다.


   담장 안에서, 감옥에 갇힌 것과 다름없는 생활을 하는 미혼모는 세상과 가족과 친구들과 그리고 가장 중요하게는 아이 아빠와 완전히 단절된 상태에 있다. 아이 아빠는 이미 그녀를 버리고 떠났겠지만. 설사 떠나지 않았다 하더라도 시설에 있는 임신한 여자친구를 만날 수 없었다. 아이 아빠와 전화 통화도, 면회도, 편지도 어떤 형태의 연락도 허용되지 않았다. 남자 친구가 연락하고 싶어 한들, 여자친구가 어디에 있는지도 몰랐고, 전화나 편지로 연락할 방법도 알아낼 길이 없었다. 어느 날 그녀는 그냥 없어져 버린 것이다. (254~258쪽) 




미혼모는 "사고를 개조"한다는 의미의 세뇌를 당하고 아기 포기와 입양을 하겠다고 결정을 강요 당했다. 아이를 입양 보내는 것이 최선의 선택이라면서 매일매일 밤이고 낮이고 똑같은 메세지가 끊임없이 반복된다.선택의 여지는 주어지지 않았다. 여기에 깊이 관여한 사람이 입양 복지사들, 입양 종사자들 - 입양 기관 종사자들, 변호사, 판사, 입법에 관련한 일을 하는 모든 사람들이 입양 종사자들이다 - 인데 이들의 임무는 미국 시민을 돕는 것이다. 미혼모가 양육 보조금을 받을 수 있도록 도와야 하고, 아기를 포기하지 않도록 도와야 하며, 양육 수당과 부모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또한 직업 훈련을 받고 고용과 주거지원을 도와야 한다. 입양 종사자들은 또 미혼모의 임신. 진통, 분만에 관여한 일에서도 도움을 제공하여야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모든 과정에서 그들은 직무를 유기하였고 최후의 선택으로 남겨져야 할 입양만을 최선의 선택으로 강요하였다. 왜 그랬을까? 입양을 담당했던 사회복지사들은 어린 미혼모들 위에 군림하면서 권능을 행사하고 돈을 챙겼다. 물론 변호사, 판사, 입양 기관도 입양 부부들에게서 막대한 돈을 챙겼다. '아기 퍼가기 시대'가 끝난 2000년 입양 산업은 연간 총 15억 달러 이상의 수익을 올렸다고 한다. 관련된 어떤 사람이든 입양 산업은 돈이 된다고 생각한다. 역시 '아기 퍼가기 시대' 엄마와 아기의 분리는 막대한 수익을 창출했고, 오늘날은 더 그러하다. 하지만 이러한 돈의 권력 관계에서 친모와 아기는 철저히 배제된다. 도대체 누구를 위한 이익이란 말인가.


미혼모들에게는 '죄', '신경증', '일탈적 행위'를 했다는 프레임을 씌워놓고 '치료'를 강요하면서 감금했다. 또 아기를 키우려는 미혼모들은 판사 앞에서 꾸중을 듣고 죄인처럼 서서 입양 서류에 서명할 때까지 정신병동에 집어 넣겠다는 둥, 소년원에 가둬 두겠다는 둥의 협박을 들어야 했다. 단지 자신의 아이를 키우겠다고 말했을 뿐인데 말이다. 뿐만 아니라 엄마는 아기를 뺏겼다는, 아기는 버려졌다는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일반인들보다 훨씬 높은 빈도로 외상 후 스트레스로 고통받는 사람들은 일상에서 정서적 무감각, 수면 장애, 우울증, 불안, 과민성, 분노 및 극심한 죄책감에 시달린다. "하루에도 몇 번 씩 감금되는 생생한 플레시백을 경험한다", "다시 내 인생이 어느 순간 갑자기 비참하게 중단될까 봐 두려워 장래에 대한 계획도 세우지 못한다", "밤은 최악이었다. 나를 파멸시킬 듯 위협적으로 몰아치는 회오리바람 한가운데 있는 거 같은 고통을 느꼈다", "몸 속에 쇠파이프가 있는 것처럼 그 안으로 통증을 밀어 넣고, 뚜껑을 덮고, 다시 나오지 못하도록 단단히 용접해 버리는 상상을 했던 기억이 난다", "....일상적인 일도, 아이를 돌보는 일도, 직장에 가는 일도 전혀 할 수 없는 절대 무능 상태에 빠졌다", "그리고... 매 순간 죽어서는 안된다는 생각을 하며 몇 주를 보냈다" .... ...


이와 같은 방식이 합법적인가? 이러한 방식이 도덕적이고 윤리적인가? 정말 미혼모들에게 선택할 권리가 있었나? 충분히 숙고해서 내린 결정이라고 말할 수 있나? 이러한 질문은 이미 오래전에 했어야 한다고 작가인 캐런 윌슨-부터바우는 말한다. 그래서 지금 이 순간도 '아기 퍼가기 시대'를 살았던 미혼 엄마들은 대답을 기다리고 있다. 이것이 지금 이들이 할 수 있는 일이다. 




   입양 당시에 ... 올바른 정보를 받은 사람도 있겠지만... 사실이 아닌 이야기를 듣거나 거짓 정보를 받은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누가 진실의 축복을 받았고 누가 거짓 정보를 받았는지에 어떤 규칙이나 원인은 없어 보입니다. 입양 실천 방향이 바뀌고, 입양 후 서비스가 확대되면서 입양 과정 중에 거짓 정보를 제공했다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기만 당한 친부모들은 정신적 외상을 입고 분노(했습니다)... 거짓말을 정당화할 방법은 없습니다. 비공개 입양은 얼마든지 비밀리에 이루어질 수 있었다는 점에서 문제의 원인을 찾을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과거의 일을 정당화하려는 시도는 안됩니다. ... 가장 건설적인 길은 정한 뒤에 마무리하는 진실이 무엇인지 밝히고, 과거의 생각은 잘못되었다는 것을 인정한 뒤에 마무리하는 것입니다. ... 입양 과정에 거짓 정보가 있었음을 아는 순간 친부모는 아이의 또 다른 부분을 도둑맞는 느낌을 갖습니다. 건설적인 길로 나아간다는 것은 바로 이들을 지지하고 공감하는 것을 의미합니다(Dorner 1997). (28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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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2025-02-13 17:5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기장사’는 참 오래도록 어떤 뒷힘과 뒷손이 저지른 끔찍한 짓입니다. 우리나라도 ‘홀트’라는 곳이 쉰 해 남짓 이 짓을 했습니다. 외톨이(고아)가 아닌데 무턱대고 길에서 아이들을 붙잡아서 미국·유럽·호주로 팔아치웠는데, 독재정권이 뒤를 봐주지 않았다면 할 수 없던 짓이지요.

여러모로 보면 ‘미혼모’란 이름은 조금더 안 어울리지 싶습니다. 어느 누구도 ‘미혼부’란 이름을 안 쓰거든요. 그저 ‘아기엄마’인 사람을 사랑하는 길을 배운 바도 없고 배우려고 하지 않던 ‘철없는 아기아빠이되 아기아빠 자리에서 달아낸 사내’들은 ‘부끄러움’이 무엇인지 배운 적이 없을 테지요.

멍든 어제를 사랑으로 달래면서, 오늘을 살아가는 순이와 돌이 모두, 아기를 참사랑으로 맞이하는 새길을 차근차근 배우고 가르치는 자리를 부드러이 열 수 있기를 빌 뿐입니다.

은하수 2025-02-13 18:31   좋아요 0 | URL
아.. 정말 잘 짚어주셨어요.
사실 우리 홀트복지회 이야기도 넘 하고싶었는데
그럼 글이 너무 길어지더라구요!
그것에 대해서도 할말이 너무 많죠!
학교 다니던 시절 합정동 홀트아동 복지회 앞에서 버스 타고 다녔는데 나중에 알고보니 그런 끔찍한 일을 저질렀더군요. 아동복지란 말이 무색하게요.
이런 이야기는 번역자의 서문에 또 자세히 나와 있어요.
많은 분들이 읽고 되새기는 기회가 되면 좋겠단 생각을
했습니다!
아기엄마에 대한 용어에 대해서는 미국에서도 여러차례 논의가 있었더라구요.
친모‘라는 용어를 쓰자고도 했는데 이 말도 반대하는 사람들이 있었구요.
용어를 확정하기 참 어려운 문제란 생각이 듭니다.